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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86B). 신중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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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86B). 신중한 기도

시편 86:1-17, 출애굽기 15:11, 창세기 12:3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1-09-29

말씀내용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의 교훈적 기도의 모범이라고 리처드 필립스가 말했던 시편 86편의 1-7절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계속해서 8-17절을 살펴볼텐데, 시편 86편이 가지는 기도의 본질적 요소들을 다시 한 번 정리하지요. 첫째는 자기 자신을 아는 지식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가난하고 궁핍한 처지를 알고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기도하지 않을 것이고 기도의 필요를 알지도 못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은혜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자기가 의롭고 선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이 인식이 없다면 하나님께 나아갈 때 어떤 확신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내용을 지난 시간에 1-7절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기도의 둘째 요소는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주목하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8-13절에서 보게 됩니다. 마지막은 신중함의 요소로, 86편 전체에서 보게 되지만 특별히 14-17절에서 살펴볼 것입니다.


1.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 (8-13; 출 15:11; 삼상 2:2; 출 8:10; 9:14; 20:3)
앞에서 다윗은 자신의 가난하고 궁핍한 처지를 인정하면서도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며 나아갔습니다(1-2). 그래서 그는 기도 가운데 어느 정도 확신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7절이 그 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시편 86:7).” 그리고 이 확신은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인도하고(8-10) 나아가서 하나님께 충성과 순종을 드리겠다는 열망으로 데려갑니다(11). 이 찬양과 충성의 고백들과 함께 8-13절은 다윗이 아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줍니다.
8절은 우리가 부르는 찬양 가운데,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There is none like you)”라는 노래를 생각하게 합니다. 본래 이 찬양의 영어 가사는 8절의 앞 부분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와 동일합니다. “주님과 같은 분은 없습니다”라는 고백은 홍해를 건넌 뒤에 모세도 했고(출 15:11), 아들을 약속 받은 뒤에 한나도 고백했으며(삼상 2:2), 여러 하나님의 사람들이 고백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애굽에 재앙을 내리실 때 애굽 왕 바로에게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재앙을 내리심으로써 세상에 하나님과 같은 분이 없음을 바로와 그 신하와 그 백성에게 알게 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출 8:10; 9:14). 십계명에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는 계명은(출 20:3) 하나님과 비길 수 있는 존재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주신 영원히 효력 있는 계명입니다. 주님과 같은 분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기도할 것입니다. 단순히 기도를 넘어 그분을 사랑할 것입니다. 다윗의 이 고백은 마치 신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말하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 “주만이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어서 그는 “주의 행하심과 같은 일도 없나이다”라고 말합니다.


A. 하나님의 행위는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낸다(8-10; 창 12:3; 빌 2:10-11; 계 7:9-10).
우리는 8절과 함께 이어지는 두 구절(9-10)에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묘사하는 동사들을 만납니다. 8절은 ‘주의 행하심’이라고 했고 9절은 ‘주께서 지으신’이라고 했으며 10절은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오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말하는 이 표현들은 모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성품을 드러내는데 그것은 한 마디로 언약적 사랑과 은혜를 강조합니다. 특별히 8절에서 ‘주의 행하심’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자연 세계를 창조하신 일을 가리킨다고 데렉 키드너는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8절은 자연 곧 이 피조 세계를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9절에서 ‘주께서 지으신 모든 민족’이라고 할 때 이것은 모든 인류를 가리킵니다. 특히 ‘모든 민족’이라는 표현은 아브라함 언약을 상기시키고 그 언약의 성취 즉 신실한 자와 맺으신 언약이 전세계적 예배를 통해 성취될 것을 암시합니다. 다윗은 이 기도에서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신 아브라함 언약이(창 12:3) 선교적으로 성취될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에 이렇게 썼습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립보서 2:10–11).” 그리고 사도 요한은 환상 중에서 다윗과 바울 사도가 말씀한 이 일이 성취된 현장을 보았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요한계시록 7:9–10).” 이렇게 다윗에게는 이방인들이 주께로 돌아올 것이라는 선교적 비전이 있었습니다.
10절은 ‘위대하사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오니’라고 하나님의 행위를 묘사합니다. 이는 역사 속에서 일어난 모든 하나님의 일하심을 가리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베풀어주신 기적적인 구원의 역사들, 출애굽으로부터 바벨론에서의 귀환에 이르기까지 위대하신 하나님의 기이한 구원 역사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다윗이 지금 기도 가운데 하고 있는 일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생각하고 묵상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과 기도생활에서 너무나 가치 있는 거룩한 습관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하는 것은 참된 경건을 얻는 참된 방법이다.”라고 말한 종교개혁자 칼빈의 말은 우리의 경건 생활에서 깊이 새길 만한 경구(警句)입니다.


B.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져오는 기도의 심정(11-13)
사실, 1-10절은 11절의 기도를 위한 준비라고 볼 수 있습니다. 11절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시편 86:11).” 우리가 이런 간구를 주님께 드리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다윗은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 행하며 오직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갈망합니다. 그래서 주의 도를 가르쳐달라고 간구합니다. 지금 다윗이 처한 상황을 놓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런 간구를 드리는 다윗을 쉽게 이해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는 교만하고 포악한 자들이 자신을 해치고 죽이려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14). 그래서 자기를 이 곤경에서 구원해주시기를 부르짖어 간구했습니다(2-3). 이런 간구를 소극적 간구라고 한다면, 다윗은 지금 적극적 간구를 드리고 있습니다. 12절도 다윗의 이 마음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오리니(시편 86:12).”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히 주의 이름에 영광 돌리기를 원하는 다윗의 마음은 이미 곤경을 벗어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다윗은 자기가 가난하고 궁핍하다고 겸손히 고백함으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1-3). 그리고 하나님의 속성을 언급하면서(5, 8-10)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처음에는 대적들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기도를 시작했지만 이제 다윗의 마음은 자신의 죄를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뜻에 일치된 삶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갈망으로 가득합니다. 이 내용은 우리의 경건과 기도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를 보여줍니다. 너무나 많은 기도가 자신과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시작하여 기도하는 사람 자신을 벗어나지 못한 채 마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기도는 독백이 아니고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어떤 절박한 상황에서 기도를 시작했든지 간에, 기도가 깊어지는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고 다윗이 11-12절에서 보여준 바와 같은 거룩한 갈망을 표현하고 간구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는 내 눈 앞의 현실만 보다가 전능하고 선하신 하나님을 뵈옵게 하는 것입니다.
11절에서 다윗은 자기가 주의 진리에 행할 수 있도록 주의 도를 가르쳐달라고 간구합니다. 그가 주의 도를 배우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진리를 따라 행하고 살기 위해서입니다. 매일 진리를 따라 행하는 습관은 결국 그로 하여금 일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할 것입니다. 이런 경건의 습관을 율법주의로 치부하거나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경건은 결코 머리와 가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경건은 몸에 배이는 것이고, 위기의 순간에도 반사적으로 나올 수 있는 일종의 영적 습관입니다. 11절 하반절에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라는 부분을 직역하면, ‘내 마음을 주의 이름을 경외함에 연합시키소서(Unite my heart to fear your name)’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과 하나님 경외함이 하나가 되고 일치되는 것입니다. 그 뉘앙스가 개역개정역에서는 ‘일심으로’라는 말로 표현되었습니다.
12절은 사실상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을 그대로 진술합니다. 인간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전심으로 주를 찬송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즐거워함을 전제한 말이고 그렇게 영원토록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린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다윗이 이렇게 기도한다고 해서 지금 자신의 처지를 완전히 잊어버렸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13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이 크사 내 영혼을 깊은 스올에서 건지셨음이니이다(시편 86:13).”
이 말씀은 언뜻 보면 과거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건져 주신 일들을 언급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 과거형 시제인 히브리어 완료형은 선지자적 과거 시제와 같은 용법으로 사용되었다고 데렉 키드너는 예리하게 지적합니다. 미래의 확실성, 장래의 일에 대한 선지자의 확신을 표현하기 위하여 미래 시제 대신 과거 시제로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지금 다윗이 처한 자리가 ‘스올’입니다. 스올은 헬라어로 ‘하데스’라고 번역되는 히브리 말인데, 죽음 혹은 죽은 자들의 영역인 무덤을 가리킵니다. 영적으로는 형벌과 고난의 장소로서 지옥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스올이라는 현실도 직시하지만 동시에 믿음의 눈으로 주의 인자하심도 보고 있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은 자기가 처한 스올이라는 상황 보다 더 크기에 하나님께서 자기 영혼을 스올에서 능히 건져 내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확신의 원천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2. 신중함(deliberation)의 요소 (14-17; 출 20:3; 마 6:9-13)
이제 우리는 86편이 가르치는 기도의 세번째 요소이자 마지막인 신중함(deliberation)의 요소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다윗의 이 기도는 절박한 상황에서 드린 기도임에도, 시종일관 신중함을 보여줍니다. 다윗은 지나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다윗은 자기 연민에 빠져 장광설을 늘어놓거나 중언부언하지 않습니다. 이 기도는 신중합니다. 데렉 키드너는 다윗은 자신의 기도를 몇 가지 우선순위들에 제한하는 놀라운 절제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우선순위는 하나님과 자신의 언약 관계, 하나님의 성품,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적 권리들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도는 보통 신중함의 요소를 거의 생각하지 경향이 있습니다.
마지막 연이라고 할 수 있는 14-17절에서 이 요소를 살펴보겠습니다. 14절에서 다윗은 드디어 자기가 처한 스올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하나님이여 교만한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의 무리가 내 영혼을 찾았사오며 자기 앞에 주를 두지 아니하였나이다(시편 86:14).” 우리는 이들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다윗이 언급하는 그들의 특징은 분명합니다. 교만하다는 말은 오만불손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며 자신들이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말입니다. 포악함은 폭력적이며 거칠고 무자비하며 힘을 믿는 특성입니다. 그들은 ‘자기 앞에 주를 두지 않는’ 자들입니다. 신자들이 자기 앞에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않는 자들이라면(출 20:3), 저들은 ‘자기 앞에 주를 두지 않는’ 우상 숭배자들입니다. 그들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15절입니다.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시편 86:15).” 다윗은 긍휼과 은혜라는 하나님의 성품을 주장합니다. 긍휼이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은혜는 마땅히 받을 자격이 없는데 베풀어주시는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는 완전하게 드러났습니다. 이것 뿐입니까? 그 자리는 하나님의 무서운 공의도 드러냈습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언제 개입하셔야 할지를 정확하게 아시고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당신의 계획과 시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인자와 진실’은 ‘성실한(진실한) 인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미 2절에서 ‘나는 경건하오니’라는 말로 자신이 이런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주장한 바 있습니다. 다윗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성품을 주장함으로써, 이제 마지막 간구를 준비합니다. 이것은 다윗의 기도의 신중함을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모든 간구의 근거를, 첫째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둘째로는 인자와 진실이라는 하나님의 변함 없으신 성품에 두고 있다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고 계십니까?
이제 마지막 두 구절, 16-17절을 봅니다. “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시편 86:16–17).” 다윗의 마지막 간구입니다. 물론 15절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한 간구입니다. 그는 힘을 달라고 구합니다. 이것은 교만하고 포악한 자들이 믿는 힘을 구하는 것이 물론 아닙니다. 다윗이 구하는 힘은 인내하는 힘이고 견디고 참는 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폭력을 믿는 교만하고 포악한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또 무엇을 구했습니까? 은총의 표적을 구했습니다. 여기서 은총은 히브리말로 ‘토바(טוֹבָה)’인데 이 단어는 선함, 행복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은총의 표적을 보여달라는 것은,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는 증거를 보여주세요” 또는 “제가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세요”라는 간구입니다. 지금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의 증거를 나타내사 자신을 미워하는 원수와 대적들이 부끄럽게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도우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그들로 보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이 기도에서 여러분은 다윗의 신중함을 보십니까? 자기 자신으로 시작해서 자신으로 끝나는 기도는 결코 신중한 기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감정으로 반응하는 기도일 뿐입니다. 주님은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하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마 6:9-13),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도록 가르치셨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십시오. 당장의 필요—일용할 양식—가 있고, 풀어야 할 인간 관계의 문제—용서해야 할 관계—도 있으며, 직면하고 있는 유혹도 만만치 않습니다. 주님은 이런 현실의 필요들을 부인하지 않으시면서도,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먼저 구하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지금 그런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 뿐이 아닙니다. 은총의 표적을 보여달라는 마지막 간구에서도 다윗은 자신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을 주장하고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하여 간구하였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보여주는 신중함의 요소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마치 설교와 같이 논리 정연해야 한다거나 미리 다 준비하고 써서 기도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지라도, 기도에서 우리의 말은 정돈된 말일 필요가 있습니다. 종종 우리는 부르짖기는 하지만 중언부언하는 방식으로, 혹은 자기 연민을 벗어나지 못하는 방식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물론 두서 없이 외마디 부르짖음으로 우리의 절박한 상황을 아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대체로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이 이 기도에서 끝으로 구한 것은 자기를 수렁에서 건져 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며 위로하시는 선하신 분이라는 증거를 원수들에게 그리고 온 세상에 알리사,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드러나시길 구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기도의 신중함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신중함의 요소와 관련해서 마지막으로 하나 더 강조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이 기도에 나타난 찬양을 생각해보십시오. 다윗은 상황이 해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찬송은 상황이 호전되었기 때문에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이 모든 상황을 주관하고 다스리고 계시며 모든 일을 당신의 때에 최상의 방법으로 해결하실 것을 알기에 찬양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신중한 찬양’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우리는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렵게 하는 문제가 여전히 우리 앞에 버티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이 모든 상황을 주관하고 다스리심을 알기에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중한 찬양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의 기도가 신중함의 요소를 가진 것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생각하며 하나님께 아뢰라고 권면하겠습니다. 깊이 생각하면서 기도하십시오. 이점에서 기도를 노트에 쓰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3. 교훈과 적용
86편 강해를 준비할 때, 처음에는 두 차례에 나누어 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86편강해의 제목을 ‘주님, 제가 신자입니다’라고 정했습니다. 2절에서 ‘나는 경건하오니’라는 다윗의 고백이 이 기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6-17절의 간구도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간구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다윗이 절박한 어려움 속에서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과의 언약을 기억했기에, 그는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고, 나아가서 주의 진리를 따라 행하고 일심으로 주를 경외하기를,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히 주께 영광돌리기를 갈망하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 우리의 정체성을 그리스도 안에서 찾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처한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그것을 넘어 전능하신 하나님,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의 외롭고 슬픈 마음을 위로하실 뿐 아니라, 기쁘게 하실 것을 압니다.
우리가 모든 상황에서 다윗과 같이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배운다면,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이고, 우리의 영혼은 기쁨을 회복하게 될 것이며, 우리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의 상황 속에 여전히 있을지라도 이미 그 문제 속에서 건짐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정작 우리가 가지고 나아갔던 그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고, 그때 하나님은 그 문제를 우리 앞에서 치워 주실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그 문제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거룩하게 하는 도구로서의 효용가치를 다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복된 은혜가 우리 모두의 기도 생활에서 경험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