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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68). 어린 양의 혼인 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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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68). 어린 양의 혼인 잔치

요한계시록 19:6-10, 이사야 61:10, 호세아 2:19-2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04-18

말씀내용
우리는 지난 주일, 하늘에서 할렐루야 코러스가 울려 퍼지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온 세상을 미혹하여 음행하게 하고 우상을 숭배하게 한 음녀,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을 보며, 하늘에 허다한 성도들과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가 그 심판이 참되고 의로우며, 그 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께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있다고 찬송을 하였습니다. 이 찬송은 심판에 이어질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축하하는 찬송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본문 19:6-10에서 어린양의 혼인잔치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


1. 더 큰 소리의 찬송 (6-8; 1:15; 14:2-3; 마 5:12)
5절에서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는 보좌의 음성 덕택에, 이제 허다한 무리의 찬송은 더 크게 울려 퍼집니다. 그것이 6-8절입니다. 6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6a).” 하늘의 승리한 교회에 더하여, 5절의 주님의 명령대로 지상의 모든 교회가 함께 부르는 찬송이기에 더 큰 소리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다’고 했습니다. 1:15에서는 주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와 같다고 했고, 14:2-3에서는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가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은’ 소리였고, 하늘의 승리한 성도들의 소리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지중해 연안의 사람들이 큰 소리를 표현할 때, 해안을 강타하는 파도의 포효소리에 비유하여 많은 물소리라고 표현했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큰 소리는 하나님의 통치가 큰 성 바벨론에 대한 심판을 통하여 온 땅에 임했다는 것을 선포하는 소리입니다.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6b).”
그 큰 음성은 7-8절에서 계속됩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요한계시록 19:7–8).”
한 마디로 기대하고 기다리던 결혼식의 날이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모든 일을 이루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고 말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라’는 두 동사가 함께 등장한 곳은 이 구절 말고 단 한 구절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태복음 5:12).”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욕먹고 핍박 받는 사람들에게 주어질 상이 있기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그 하늘의 상이 바로 어린양의 혼인잔치, 본문의 결혼식입니다.


2.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 (7-8; 사 54:5; 61:10; 겔 17; 호 2:19-20; 고후 11;2; 엡 5:22-33)
7-8절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의 신랑과 신부의 정체를 밝힙니다. 신랑은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시고, 신부는 성도들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의 관계를 부부로 묘사하는 것은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이미 구약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사례들이 있습니다. 가령 이사야 선지자의 두 군데 말씀을 보지요. “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라 그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실 것이라…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이사야 54:5; 61:10).”
에스겔 선지자도 17장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의 관계에 부부의 유비를 사용했습니다. 아가서는 어떻습니까? 사랑하는 연인, 사랑하는 부부의 관계로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를 아름답게 묘사한 성경이 아가서입니다. 호세아서는 선지자 자신이 음란한 여인과 결혼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음란한 이스라엘을 사랑하사 그들과 결혼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신 관계를 실감 있게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세아 2:19–20).”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부부관계의 유비는 신약성경에서도 당연히 발견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를 향해 말씀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린도후서 11:2).” 고린도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영광스럽게 혼인식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들을 정결하게 보존하는 것이 신부의 아버지된 자신의 도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에베소서에서도,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비유하여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한 권면을 합니다(엡 5:22-33).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부부관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서 말한다고 합니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에베소서 5:32).”


3. 어린 양의 혼인 잔치 (창 29:20,30; 요 2:1-11; 17:6,24)
비록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를 부부관계에 비유한 말씀들이 많이 있다고 하더라도,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근동의 결혼 문화의 특징들을 좀 더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 특징 중 하나는 유대 문화나 고대 근동 문화에서는 결혼이 약혼(정혼)과 결혼의 두 단계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 문화에서는 약혼이 흔하지도 않거니와, 약혼은 결혼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것으로 이해되기에 파혼은 이혼처럼 큰 부담을 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직 결혼을 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나 유대인들은 약혼을 하는 시점부터 신랑과 신부는 법적 부부로 간주되었고 두 사람은 혼인식까지 남편과 아내로서 신실함의 의무를 서로에게 지켜야 했습니다. 그리고 정혼과 혼인 사이의 기간에 신랑은 신부의 아버지에게 지불이 덜 된 결혼지참금을 지불해야했습니다. 결혼지참금이 준비되지 않았다면, 신랑은 신부될 사람의 집에서 그것을 노동으로 대신하기도 했는데,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레아와 라헬을 얻기 위해 7년씩 도합 14년을 일했던 것이 그런 사례입니다(창 29:20,30).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언급해야 하는 유대인이나 고대 근동의 결혼 문화가 가지는 또 하나의 특징은, 오늘날의 결혼식처럼 그 의식이 한 자리에서 하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먼저 신랑의 행렬이 신부의 집으로 감으로써 시작됩니다. 이때 신부는 곱게 치장을 하고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합니다. 신부의 집에 도착한 신랑은 신부를 데리고 혼인 잔치를 하기 위하여 자기 아버지의 집으로 갑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혼인잔치는 대개 일주일 정도 벌어지는 게 보통이었고 그 이상도 지속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당시 결혼 문화의 특징을 배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승천부터 재림까지의 시대는 교회가 그리스도와 정혼(약혼)한 후 혼인식을 기다리는 시간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에 신부인 교회는 스스로 준비하고 단장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신부를 데리고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때 벌어지는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7일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는 천국의 기쁨을 현시합니다. 윌리엄 헨드릭슨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부는 영원 전부터 택함을 받았다. 전체 구약시대를 통해서 혼인은 예고되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혈과 육을 입고 오셔서 정혼은 이루어졌다. 그 결혼지참금은 갈보리 산 위 십자가상에서 지불되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 보시기에는 순간이 이 기간(복음시대) 후에 신랑이 오시게 되면 어린양의 혼인기약이 이르게 된다. 이 땅의 교회는 이 순간을 갈망하고 있으며 하늘의 교회도 또한 그러하다. 이후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토록 함께 하게 된다. 이것은 거룩하고 복되고 영원한 교제가 될 것이며 복음의 모든 약속들이 온전히 실현될 것이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행하신 첫번째 표적은 포도주가 떨어진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공급하신 일입니다(요 2:1-11). 이로써 주님은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암시하신 것입니다. 지상에서 예수님의 전체 사역은 당신의 결혼을 준비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기쁨이 사라진 세상에 천국 혼인의 기쁨을 회복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에는 삼위 하나님이 모두 연관되십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신부를, 신부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더글라스 켈리(Douglas Kelly)는 성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도 당신의 아들에게 놀라운 신부를 주시려고 하신 일이라고 표현할 만큼, 성부 하나님께서 아들의 혼인 잔치를 예비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Douglas F. Kelly, Revelation, Mentor Expository Commentary (Tain, Ross-shire, Scotland: Mentor, 2012), 357. Richard Philips, The Revelation (Reformed Expository Commentary),P&R에서 재인용). 이것을 아셨던 주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한복음 17:6,24).”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주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성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피와 죽음으로 당신의 신부를 사셨습니다. 성자께서는 그들을 위해 성부와 구속의 언약을 맺으셨고 이 언약에 의해 주님은 때가 되면 그들의 본성을 취하고 그들의 죄에 대하여 형벌을 받으시며 그들을 자유롭게 하여 자기 백성이 되도록 하셔야 했습니다. 영원의 회의에서 지극히 높으신 삼위 하나님 사이에 조정되고 결정된 그 언약은, 어린양께서 성부 하나님이 옛적에 그에게 주신 온 무리를 영접하여 영원한 결합을 이루는 그날에 마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겸손하시고 인내심이 있으며 신부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신 신랑은 없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정혼 반지(증표)로써 신부인 우리에게 보증의 표가 되셨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왕실의 결혼식이나 대단한 인사들의 결혼식을 세기의 결혼식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진짜 사상 최고의 결혼식이 열릴 것입니다. 바로 어린양의 혼인잔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신랑은 역사상 없었고, 이보다 더 큰 혼인 잔치를 열 수 있는 신랑의 아버지도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으며, 신부에게 주어진 성령님의 서약—보증 보다 더한 보증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4. 세마포와 옳은 행실 (7b-8; 레 20:7-8; 사 61:10; 빌 2:12; 골 3:8-9)
그렇다면 이제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요한계시록 19:7b–8).”라는 말씀을 상고해봅시다. 여기서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라는 말씀이 있는가 하면,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두 말씀 사이에는 신학적 긴장이 놓여 있습니다. 한편으로 신부는 자신(자신이 그날에 입을 옷)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 하나님께서는 신부에게 그녀가 입을 옷을 제공해 주십니다. 게다가 8절 하반절은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라고 말함으로써 신부가 준비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니라(레위기 20:7–8).”고 말씀하는 성경은, 동시에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이사야 61:10).”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주도권을 동일하게 강조합니다.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는 표현도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성도들을 주어로 해석하면 ‘성도들이 행한 옳은 행실’이 됩니다. 그러나 목적어로 해석하면,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위하여 행하신 일, 성도들을 옳다고 인정해 주신 일’을 의미합니다.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칭의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원인적인 필요조건이지만, 선한 행위는 비원인적인 필요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 다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옳은 행실인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 자체라기 보다, 옳은 행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마포 옷은 끝까지 인내한 성도들의 셀 수 없는 신실한 순종의 행위들이 일일이 수놓아져 있는 옷이기도 합니다. 하늘에 계시는 신랑의 요구에 합당한 신부의 반응은 이렇게 복음이 만들어내는 거룩하고 옳은 변화된 삶입니다. 이 신학적 긴장의 양편에 있는 어느 요소 하나도 무시되어서는 안됩니다.
성도의 삶에는 언제나 이 긴장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 율법의 행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수동적인 의를 전가 받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도는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빌 2:12). 자신이 그리스도께 속했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정결하게 하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일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썼습니다.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골로새서 3:8–9).” 이와 같이, 성도의 삶은 옛 생활 방식을 벗어버리고 새 삶의 방식을 입는 삶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정상적인 결혼은 억지로 마지못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결혼은 서로를 사랑하고 사모하는 연인이 언약으로 하나가 되는 의식입니다. 그래서 신랑과 신부는 결혼식을 기다립니다. 8절에서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라는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억지로 마지 못해, 그날을 위해 준비한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신부의 준비는 전적으로 은혜가 지배합니다. 은혜는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신부의 마음이 신랑을 향할 때, 그 마음은 전혀 강요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자유로운 은혜에 힘입어 신부인 교회는 그날의 혼인잔치를 위하여 스스로를 준비하고 거룩하고 옳은 행실로 단장하는 것입니다. 기쁘게 말입니다.


5. 신부와 청함을 받은 자들 (9; 요 10:7,11; 눅 22:30; 마 11:19; 눅 7:34)
이제 9절에서 천사가 받아 말합니다.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요한계시록 19:9).” 여기서 새롭게 등장하는 존재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결혼식의 하객들을 가리킵니다. 교회가 신부라면, 이들 하객은 누구를 가리키는 말입니까? 신부는 신약의 교회이고, 청함을 받은 자들 곧 하객은 구약 교회를 가리킨다는 해석이 있지만, 근거가 약합니다. 여기서 교회는 신부이자, 동시에 하객이 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당신을 가리켜 양의 문이라고 하시고 바로 선한 목자라고 하신 것과도 비슷합니다(요 10:7,11). 어떻게 양의 문이면서 동시에 선한 목자가 되실 수 있습니까? 이런 식의 표현은 모순이 아니고, 또한 묵시문학적 특징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청함을 받은 자들’이라는 표현에도 혼인잔치의 주인—혼주가 되시는 하나님의 주도권이 강조됩니다. 천국은 종종 잔치에 비유되곤 했습니다.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누가복음 22:30).” 천국은 잔치의 장소이고, 어린양의 혼인잔치는 영원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주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과 함께 잡수시곤 하셨습니다(마 11:19; 눅 7:34). 이 사실은 죄인인 우리가 천국에서 그 혼인 잔치의 자리에 청함을 받아 복된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천사는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확증을 해줍니다.
그러자, 이 계시의 말씀에 감동한 요한은 천사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천사는 경배의 대상일 수 없습니다.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천사는 말합니다. 경배를 받으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이 천사의 마지막 말,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는 말씀은 그 해석이 좀 난해합니다. 앞에서도 본 적이 있는데, ‘예수의 증언’은 예수님이 주신 증언을 의미할 수 있고 또는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또 ‘영’이라는 말은 본질 혹은 핵심이라는 용례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물론 성령님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증거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예언이다”라는 의미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6. 교훈과 적용 (고전 2:9; 시 73:25-26)
언젠가 그날이 올 때,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시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어린 양의 신부로서 그 자리에 앉을 것을 기대하십니까? 그날 여러분은 또한 그 잔치에 청함을 받은 복된 은혜를 누리시겠습니까? 그러나 아직 그날은 완전히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와 정혼한 교회는 여전히 법적으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여겨지지만, 우리는 혼인잔치의 기쁨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린양의 신부로서 여러분 자신을 거룩하고 의로운 행실로 단장하고 계십니까? 또 여러분은 그날에 하나님의 청함을 받은 복된 은혜를 누리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그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날에 신랑이신 주님을 뵐 기대가 있습니까?
스티브 로슨이 그의 책 Heaven Help Us 에서 윌리엄 몬태규라는 젊은 귀족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똑똑한 윌리엄은 불행하게도 10살에 실명을 하지만, 장애를 딛고 공부를 하게 되고 대학원에서 해군 제독의 딸을 만나게 됩니다. 데이트는 사랑으로 이어지고 윌리엄은 비록 눈으로 그녀를 볼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영혼의 아름다움에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 두 사람은 약혼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을 하게 되는데, 윌리엄은 신부의 아버지의 거절할 수 없는 주장으로 영영 시력을 회복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눈 수술을 받게 됩니다. 수술 후 눈에 붕대를 감은 윌리엄은 결혼식까지 붕대를 감고 침대에 누워있어야 했습니다. 윌리엄은 결혼식장에서 신부가 입장하는 바로 그 순간에, 자신의 붕대를 풀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결혼식의 시간이 왔고 오르간이 신부의 입장을 알리자, 사람들은 이제 일어날 일을 잔뜩 기대하며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신부가 다가오자, 윌리엄의 아버지는 아들의 눈을 가리고 있던 붕대를 풀었고 그 마지막 붕대가 풀려질 때 윌리엄은 자신의 두 눈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천천히 윌리엄은 자신의 아름다운 신부의 빛나는 얼굴에 초점을 맞추었고, 감정에 복 받혀 속삭입니다. “당신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 비할 수 없이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뵈올 때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스티브 로슨은 말합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린도전서 2:9).”
이것 뿐이 아닙니다. 이 하늘 잔치에는 누구라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 돈이 없어도, 교육을 받지 못했어도, 외모가 아름답지 않아도, 친구들이 많지 않아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차별 없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그 영광의 잔치에 앉게 할 것입니다.
왜 이 영광스러운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기록하게 하셨습니까? 비록 이 땅을 사는 동안, 고난과 박해를 당할지라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이유가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닙니까? 어떤 고난이 닥칠지라도, 하늘의 상이 있음을 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와 완전한 연합을 이루고, 그의 친밀하고도 영원한 임재 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큰 상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날에 알게 될 것입니다. 평생에 하나님과 맺은 관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 보다 중요하고 가치 있는 관계는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죽음은 이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피하고만 싶은 두려운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죽음은 신랑 그리스도의 영광의 얼굴을 뵙기 위해 하나님의 보좌실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이 소망을 가진 자들은 죽음 앞에서도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시편 73:25–26).” 이런 복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