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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 (10) - 우리 안에 있는 영적 암 덩어리: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누가복음 18:9-1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5-03-15

말씀내용
1. 문맥: 무엇에 관한 가르침인가?
이 비유는 예수님의 비유 중에도 비교적 잘 알려진 단순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주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신 교훈이 무엇일까요? 얼른 보면 이 비유는 기도에 대한 교훈으로 보입니다. 바로 앞에 있는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도 기도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고, 이 비유 자체도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물론 두 비유가 기도라는 배경을 전제하고 있지만, 결국 두 비유는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원한을 풀어주시고 그 의로움을 인정해주신다는 점에서 접점을 가집니다. 이 비유의 결론에서 세리의 기도가 응답을 받았다고 하지 않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고 말씀하신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14). 단순히 기도 응답에 대한 교훈을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문맥상 이 비유 뒤에 있는 말씀들도 이 생각을 지지합니다. 15~16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 아이들처럼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자들의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17~30절에서는 부자 관리에 대한 기사가 이어집니다. 어린 아이나 부자 관리의 기사를 통해서 가르치는 교훈은 그가 무엇을 혹은 누구를 전적으로 신뢰하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구원과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어린 아이들이 자기 무력 무능함을 알고(기꺼이 인정하고) 부모만 의존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고 은혜를 바라는가 아니면 부자 관원처럼 자신이 율법을 지킬 수 있고 무엇을 행함으로써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자신을 신뢰하고 재물을 의지하는가 하는 도전입니다. 교만과 겸손이라는 주제가 전체 말씀에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두 기도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교만한 사람과 겸손한 사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과 들어가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2. 비유와 의미 이해
A. 비유의 대상(9)
비유를 살펴보지요. 9절은 주님께서 누구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입니다. 그 대상은 한 마디로 교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의 의로움을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것은 교만에 대한 아주 예리한 정의이며 이것은 결국 하나님 보다 자기를 믿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교만은 불신앙이거나 불신앙적입니다. 주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B. 기도하는 두 사람(10)
두 사람이 기도하기 위해서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앞의 비유에서 힘 있는 재판장과 무력한 과부를 대조하신 것처럼, 이 비유에서도 주님은 당시 유대사회의 양극단에 자리한 두 사람을 대조하십니다. 그것은 마치 흠 없는 대법관과 전과 10범의 살인범의 대조 같은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지금은 종교 위선자의 대명사로 들리지만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존경을 받는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반면 세리는 로마를 대신하여 동족에게 세금을 뜯어가는 매국노들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가장 존경 받는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사회적 혐오의 대상입니다. 이 두 사람이 각각 기도하기 위해서 성전으로 갑니다.
C. 기도하는 두 사람의 태도/자세(11a, 13a)
먼저 두 사람이 기도하는 자세 혹은 태도가 대조됩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고(11)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13). ‘서서 따로’ 기도했다는 말은 “사람들 눈에 띄는 곳에 자리를 잡고’ 기도했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예레미아스). 저는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대학생 때 교회에서 수양회를 가서 저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면서 기도했던 부끄러운 기억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성이고 기도의 골방까지 따라 들어가는 마귀의 역사입니다. 아무도 여기서 자유로울 사람은 없습니다. 세리는 어떻습니까? 그는 성전에서 ‘멀리 서서’ 기도합니다. 성전 밖 이방인의 뜰이었을 것입니다. 세리는 자기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아픔에 압도당한 것 같습니다.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했다’는 말이 그것을 설명해줍니다. 유대인들이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기도한 것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또 그는 가슴을 쳤습니다. 가슴은 죄의 자리로 간주되었습니다. 가슴을 치는 행위가 형식적 회개의 상징이 되어버리기는 했지만 본래의 의미는 죄가 단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임을 보여줍니다. 가슴을 침으로써 비통함과 뉘우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는 두 사람의 태도의 차이점입니다.
D. 기도하는 두 사람의 언어(11b~12, 13b)
이 두 사람의 기도의 언어도 대조적입니다.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11b).” 기본적으로 그의 기도가 감사라는 사실을 주목해야겠습니다. 이 자체는 나무랄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신앙 생활을 잘 할 수 있는 은혜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이익을 위해서 신앙을 타협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가 바리새인으로서 자신의 신앙의 정조를 지키고 살아간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토색 즉 도둑질, 불의나 간음을 하는 자 그리고 유대인의 혐오의 대상인 세리가 아닌 것을 감사합니다.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제가 동성애자가 아닌 것, 제가 낙태나 동성애와 같은 이슈들에 대해서 분명한 성경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 제가 보수적인 기독교인이라는 것, 제가 그런 교회에 출석한다는 것, 제가 교회들이 타락한 시대에 복음을 알고 있다는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기도와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바리새인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와 얼마나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의 기도는 계속 이어집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2).” 율법에 금식을 명한 것은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의 금식뿐입니다. 그런데 당시 바리새인들은 일 주일에 두 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정기적으로 했습니다. 그는 율법이 명한 것에 넘치게 순종한 것입니다. 율법은 수확의 십일조를 명합니다. 그런데 여기 ‘소득의 십일조’라는 표현은 수확이나 일정 수입의 십일조를 넘어 돈으로 구매한 것이나 음식에서도 십일조를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마 23:23 참조). 역시 율법이 요구하는 것 이상을 한 것입니다. 이런 것이 자발적 헌신이라고 할 때 나무랄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이 비유에서 바리새인의 삶이나 행위 자체를 비난하시지 않습니다. 물론 세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이제 세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3b).” 이 짧은 한 마디 기도의 언어 속에서 우리가 쉽게 발견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만 전적으로 기대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E. 두 길, 두 결과(14a)
이제 주님께서 비유의 결론을 말씀하십니다.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14).” 첫째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리새인 보다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하지 않고,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당락의 문제입니다. 그 당락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두 번째로 주목해보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의롭다 하심을 받고 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 비유가 기도 응답의 이야기가 아니라 구원의 이야기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행위와 삶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이 다 기도하기 위해서 한 길로 성전에 나아갔지만, 두 사람의 길은 결국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또 한 사람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은 다 기도했지만 인생의 종착지가 달랐습니다. 주님의 이 결론은 비유를 듣고 있던 사람들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야 익숙한 이야기지만, 이 결론은 그들의 상식과 판단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을 테니 말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목사가 아니라 예배당의 끝 자리에 왔다가 예배가 마치기가 무섭게 도망가듯 예배당을 떠난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말입니다.
3. 문제는 마음이다.
이 비유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태도에 대해서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그들이 어떤 행동을 하고 살았는가, 그들이 어떤 기도의 언어를 사용했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어떤 자세와 태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가를 주목해야 합니다. 먼저 언급할 한 가지는 바리새인이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했다면,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며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나아갔지만, 그의 눈에는 토색, 불의, 간음하는 사람들과 세리들이 의식되었습니다. 그는 그런 자리에서 살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자신은 율법이 요구하는 것 이상의 종교적 경건의 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윌리암 바클레이의 말대로, 그는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간증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을 자랑하는 나쁜 간증입니다. 바리새인의 비교 대상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세리는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과 비교할 대상이 없었고 하나님만을 의식합니다. 그의 기도의 언어에는 오직 하나님과 죄인인 자신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기도하는 사람의 의식, 즉 마음의 문제입니다. C.S.루이스는 “경쟁적이고 상대 비교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은 교만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교만은 비교 기준이나 비교 대상에 상관 없이 자신을 상대적으로 우월하게 느끼도록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마음에서, 의식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합니다. 이런 마음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태도, 기도하는 태도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주님께서 이 비유를 들려주시려고 한 대상들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입니다. 이 교만은 마음의 문제가 아닙니까? 그리고 그것은 가장 은밀한 행위라고 할 수 있는 기도에서도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제인 교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우리의 관심, 기도까지도 타락하게 할 수 있다는 경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복음을 잘 알고 있다는 것도 얼마든지 현대판 바리새인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너는 복음도 모른다.” “그 교회에는 복음이 없다”고 판단합니다. 얼마나 그런 자리에 빠져들어가기 쉬운지 저는 압니다. 이것뿐이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을 멸시할 수 있습니다. “나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는데 너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실로 무서운 일이고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경고를 늘 인식해야 합니다.
4. 바리새인의 편에서 성경을 읽어라.
신학자 대럴 구더(Darrel Guder)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약성경을 우리 현실에 맞게 이해하고 싶다면 바리새파에 속한 한 사람 편에서 신약성경을 읽어야 할 것이다.” 이런 비유의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 오래 교회를 다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바리새인의 입장에서 이 말씀을 듣지 않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의 기도문구를 천박하게 생각합니다. 나는 그 정도로 기도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배웠고 알기에 적어도 바리새인처럼 대놓고 이렇게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리처럼 기도합니까? 물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마음의 문제라는 사실을 다시 기억합시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의 의식, 우리의 마음 속에는 누가 그리고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은 진짜입니다. 우리가 일상적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의식에 들어오는 생각이나 대상은 많습니다. 들어왔다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은밀히 기도하는 시간, 그 자리에서 우리의 의식을 채우는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아주 지배적인 것임이 분명합니다. 이 비유에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바리새인에게는 자기의 의로움을 믿을만한 근거들이 충분했습니다. 그는 늘 하나님의 일을 했습니다. 그는 늘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는 늘 율법에 순종하되 넘치도록 했습니다. 그는 실제로 토색이나 불의나 간음이라고 여기는 행위들과는 멀리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런 모습, 행위, 삶을 기억해 주셔야 한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의이고 교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람의 마음에 있는 가장 무서운 영적 암 덩어리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 가능한 선행이나 의로움이나 업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이 일관되게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입니다. 우리의 모든 의는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주신 것이며, 우리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의, 곧 자기 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바리새인은 넘어졌고 우리들도 넘어집니다. 주님께서 가장 통렬하게 비난하셨고 지적하신 것이 바로 자기 의라는 교만입니다. 우리 모두는 여기서 결코 자유롭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자기가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본성을 가진 자들이기에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바리새인의 편에서 이 비유의 말씀을 듣고 읽으라는 말입니다.
5. 은혜: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14b; 시 51:17; 사 57:15).
주님께서 최종 교훈을 주십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4b).” 바리새인은 버려졌고 세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바리새인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자들만이 세리의 자리로 옮겨가는 은혜를 입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의 역설입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세리의 모습에서 자신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자가 정직하게 바리새인의 모습에서 자기를 발견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그의 양심을 통하여 무엇을 얻게 하실까요? 바로 상한 심령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이고, 은혜가 작용하는 방식입니다. 다윗은 자기 안에서 그것을 봤습니다. 그리고 시편 51편의 참회시를 썼습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자기를 낮추는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 절망한 자, 마음이 상한 자를 품으시는 하나님을 그는 알았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하나님을 아십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 57:15).” 이런 하나님, 성경의 하나님을 바르게 만나고 알고 경험하고 동행하는 삶에서만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자기 의와 교만이라는 암 덩어리와 싸울 수 있고 그것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가 그런 하나님을 만났기에 자기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사 6:5). 베드로는 주님에게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았기에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눅 5:8). 이것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한 번이 아니라 지속되는 경험입니다. 의롭다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욥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 깊은 고난을 통과하고 그가 하는 고백은 이것입니다.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니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0:4; 42:5~6).” 하나님께서는 이런 은혜를 우리 모두의 삶 속에 허락해주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