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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사람들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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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사람들을 보라!

히브리서 11장 / 김형익 목사 / 새벽말씀묵상 / 2012-11-16

말씀내용
11장. 믿음의 사람들을 보라. (찬 357)

1. 기자는 10:36~39에서 믿음의 인내를 권면한 후에 구약 조상들의 모범을 제시한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적 동의가 아니다. 믿음은 그 말씀을 바탕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믿음은 미래를 기대하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지나가는 순간을 위해 살지 않는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1).” 이것은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않고 아직 보이지 않아도 확실하게 일어날 소망을 근거로 사는 것이다(1). 믿음은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는다(2). 조상들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것은 믿음으로 인한 것이다. 하나님은 믿음을 보신다. 믿음의 사람들이 추구한 것은 사람들의 인정이 아니었다. 또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태도다(3).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안다. 즉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나왔다. 기자는 창조 때의 이야기를 원용하고 있다.

2. 기자가 이제 열거하는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을 보자. 먼저 세 사람, 아벨, 에녹, 그리고 노아다(4~7). 아벨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무를 인정한 사람이다(4). 아벨은 형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 그것은 믿음으로 드린 제사였다. 우리가 외적으로 드리는 예배와 헌금과 봉사가 우리의 사랑과 헌신의 진정한 표현인가? 아벨의 제사는 가장 중요한 제사인 그리스도의 뿌린 피(12:24)를 상기시켜 준다. 예수님은 아벨의 제물과는 달리 자원하는 제물이 되셨다. 둘째로 에녹을 보자(5~6). 그가 평생 하나님과 동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므두셀라를 낳은 후 하나님과 동행했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한 순간이 있었다. 에녹처럼 하나님께 나아가 그와 동행하려면 그분의 존재(계신 것)와 그분의 관대하심(상주심)을 믿어야 한다. 이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세번째는 노아다. 그는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의 전형이다(7). 노아는 보지 못하는 일에 대한 경고를 받고 순종했다. 그는 믿음을 통해 온 세상이 그릇된 자리에 있음을 보여준 사람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의 믿음으로써 세상을 정죄한다.

3. 이제 기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그의 믿음을 약간 길게 언급한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희생적 믿음이었다. 그는 안전하고 부유하며 평화스럽고 즐길 수 있는 모든 환경으로부터 기꺼이 떠나고자 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비록 가는 길을 다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선한 것으로 채워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13:21). 또 아브라함이 보여준 믿음의 용기는 어떤가?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 기업을 주시겠다는 약속은 순종에 대한 상으로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75세였고 그의 용기는 믿음이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는 것임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에게서 믿음의 끈질김(인내)을 본다. 그가 가나안에 들어가 기업의 약속을 받았을 때에도 그 땅이 즉시 그의 소유가 되지 않았고 그는 평생 소유 없이 살았으며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매장지를 사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약속을 신뢰함으로 살았다. 그는 장막에 거하는 유목민의 삶을 살면서, 장막에 도사리고 있는 삶의 위험과 불확실성을 넘어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고 위로를 얻었다. 아브라함뿐 아니라 사라 역시 믿음의 한 요소인 의존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자연적 조건을 뛰어넘어 행하실 하나님의 역사를 철저하게 의존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이것이 믿음이다. 이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다.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지는 못 했지만 믿음으로 죽었다. 그들은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살았다. 이것은 그들의 목적지가 천국임을 보여주는 삶의 방식이었다. 그들은 본향을 추구하고 살았고 이 세상은 무상하고 일시적이며 소멸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믿음으로 분별하고 살았다. 믿음의 사람은 더 나은 것이 있음을 안다.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에 걸맞게 아니 그와 비할 수 없는 영광으로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해 주셨다.

4. 순례자의 삶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증거하는 삶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는가? 인간이 자신의 삶을 회계해야 한다는 것은 초대 기독교의 설교에서 두드러진 것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물질주의에 적응된 삶은 어떤가? 탐심은 불경건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 세상 속에서 우리의 생활 방식은 우리의 믿음을 증거하는가?

5.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들 이삭을 바치는 순종에서 절정에 이르고 빛을 발한다(17~19).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설령 아들이 죽게 되면 그를 다시 살리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을 믿는 절대적 복종의 믿음이었다. 이삭은 야곱을 축복할 때 장차 올 일에 관하여 말했다. 비록 야곱의 속임수가 여기 개입되었지만 하나님의 복은 우리가 그것을 받을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준다. 이삭은 지혜로우시고 주권적이며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행동을 지각하게 되었다. 야곱은 눈이 어두워졌을 때, 요셉이 불편하게 여김에도 불구하고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손을 어긋맞겨 축복함으로써 의도적으로 둘째인 에브라임을 크게 축복했다. 야곱은 허약했지만 믿음은 강건했다. 요셉은 임종시에 자기 시신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옮길 것을 유언했다. 칼빈은 이 유언이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을 자극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한다. 요셉은 백성들의 갈망을 일깨워 자신들의 구속을 더욱 진지하게 바라보게 하고 또 그들이 마침내 해방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소망하게 했다는 것이다.

6. 이제 기자는 모세에게 우리를 인도한다(23~29). 두려움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인간의 고질적 문제다. 그가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1세기 로마 황제의 명령 앞에서 살아야 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적절한 권면이었을 것이다. 신자는 종종 믿음으로 책임 있는 선택을 해야 한다. 모세는 사회적 명예, 육신의 만족, 물질적 풍요를 거절하였다. 이 또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소유를 빼앗기고 고통을 당하던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실성있는 메시지였을 것이다. 모세가 상주심을 바라보았다는 것은 눈을 고정시켰다는 말이다. 마치 예술가가 그림이나 조각으로 재현하려는 물체나 모델에 눈을 고정시키듯이 그는 상주시는 분과 상주심에 눈을 고정하였다. 그는 바로의 분노 대신 하나님의 자비를 묵상함으로써 인내했고 두려움을 이기고 참을 힘을 얻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순종함으로 유월절을 지켜 구원을 얻었다. 이런 말씀을 통해서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기를 히브리서 기자는 바라는 것이다.

7.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믿음의 조상들은 어떠했는가? 기자는 히브리인들의 믿음의 끈기(인내)를 강조한다. 여리고성을 6일간 매일 한 바퀴씩 돌고 7일째는 일곱 바퀴를 돈 것은 믿음의 끈기를 보여준다. 또 라합이 스파이들을 자기 집에 들인 것은 생명을 건 모험이었다. 그러나 라합은 자기가 구원받을 권리가 없음을 알았고 그래서 구원을 간청했다. 이것이 라합이 보여준 믿음이다. 이외에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는 믿음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사사 시대에 믿음을 보여준 인물들이다. 이들은 다 결점투성이의 인간들이었다. 기드온은 겁이 많았고 바락은 우유부단했으며 삼손은 경솔했고 입다는 성급했다. 다윗은 감각적이었고 사무엘은 불경건한 자녀들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믿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던 사람들은 하나도 없었지만 하나님은 연약하지만 끝까지 인내하는 그들의 믿음을 인정하셨다.

8. 믿음은 종종 공격적이다. 믿음은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힘이다. 비록 세상은 하나님의 종들을 거부하지만 결국 세상은 신자들을 이기지 못한다. 이것은 세상이 받는 형벌이다. 칼빈의 말대로 하나님의 복은 신자들과 함께 오기 때문이다. 용감한 그리스도인들은 정복하는 능력 대신 고난을 견딜 능력을 받았다. 그들은 이렇게 고통스러운 어려움을 승리의 성취로 바꾸었다. 이들의 믿음은 풍성했지만 옛 언약의 한계에 갇혀 있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들의 믿음은 ‘더 좋은 것’을 얻고자 했고, 그들이 바랐던 온전함은 새 언약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이었다. 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더 좋은 제사로 말미암아 가능해졌다. 그리고 모든 믿는 자는 모든 사람의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유일한 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히 구속을 받았다.

9. “하나님 아버지, 흠이 많고 연약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인내하고 순종하는 믿음을 참된 믿음으로 여겨주실 뿐 아니라 인내와 순종의 능력까지도 그 믿음 안에 담아주시는 은혜를 인하여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이 믿음으로 고난과 모든 상황을 넉넉히 이기고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서서 상을 받는 복된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