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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강해 (16) - 소명: 하나님이 드러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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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강해 (16) - 소명: 하나님이 드러나는 삶

고린도후서 12:14 ~ 13:1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7-05-20

말씀내용
이제 고린도후서라는 긴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마지막으로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부분에는 사도는 놀랍게도 자신의 마음과 태도 전반을 통하여 성삼위 하나님의 모습을 온전하게 드러내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한 인간이었던 바울을 보면서 그의 삶 속에 부인할 수 없도록 깊이 각인되고 심겨져서 의시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성삼위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참 경건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1. 성부: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의 태도(12:14~19)
사도는 여러 곳에서 이미 자신이 고린도 사람들의 아비와 같은 입장을 가지고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아비의 마음을 드러낸 바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바울 사도는 자신이 고린도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였는가를 설명하면서 그것이 곧 아비의 마음이었다고 말해줍니다.

A. 바울 사도가 구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그들 자신(12:14; 고전 3:1)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로부터 사례를 받지 않음으로써 거짓 사도들에게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고 고린도 사람들은 그로 인하여 시험을 받아 바울 사도를 향하여 의심을 품고 심지어 일부는 그를 대적하게 까지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13절부터 말하기를 ‘내가 너희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어린아이였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미 고린도전서 3:1에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신령한 자들이 아니라 육신에 속한 자요,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고전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부모가 어린 아이에게는 도움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식들에게 전적으로 도움을 주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의 마음이었습니다. 마게도냐와 같은 교회들로부터 바울 사도는 명백하게 사례를 받았고 많은 도움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로부터는 아무런 사례도 요구하지 않았고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어렸기 때문입니다. 종종 우리는 헌금이나 돈의 문제로 시험에 드는 경우를 볼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믿음과 관련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일괄적으로 모든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요구되기 어려운 항목인 것입니다. 헌금에 대하여 말을 해야 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만큼 그리고 성경의 원리에 입각해서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종종 교회가 재정을 채우기 위해서 무리하게 요구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매우 조심스러울 뿐 아니라 성경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하나님께서 가난하셔서 돈이 필요하신데, 교인들이 하나님께 드리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접근한다면 그것은 매우 잘못된 것일 뿐 아니라 돈을 모금하는 것은 성공할런지 몰라도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 예로, 교인들에게 이런 저런 심리적 부담을 가중시킴으로써 헌금을 하게 하는 것도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들은 이야기인데, 헌금을 할 때에는 무조건 처음 드는 생각이 하나님이 주신 생각이고, 그 다음에는 사람의 생각, 그 다음이 마귀가 주는 생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매우 잘못된 것이지요. 성경 어디에서도 우리는 그런 원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첫번째 드는 생각으로 헌금을 드렸는데 나중에 집에 가서 생각해보니까 아깝더라 하면 이것은 그가 마귀의 생각을 저버리고 성령님의 생각대로 순종한 믿음의 행위가 아니라, 충동적으로 헌금을 드린 것이 되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충동이 아니라 믿음을 성경은 요구하며 믿음은 우리의 생각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의미에서 고린도 사람들이 아직 영적으로 어린 아이들이므로 그들로부터 아무런 사례도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일 바울 사도가 그들에게서 사례를 받았다면 이것은 그들의 믿음에 더 큰 문제를 가져오는 시험거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떤 아버지도 자녀의 앞에 넘어질 시험거리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의 마음이었습니다.

B. 영혼을 위하여 재물과 자신을 허비하는 기쁨(12:15; 렘 32:40~41)
15절에서 이어지는 바울 사도의 진술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고후 12:15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
바울 사도가 언제나 유념했던 것은 거짓 사도들이 했던 것과 같이 고린도 사람들의 돈주머니가 아니라 그들의 영혼이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그토록 고생하고 환난을 당하면서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토록 대우를 받지 못하면서도 편지를 쓰고 또 방문하면서 그들을 향한 수고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을 영혼 때문입니다. 사도는 그들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나 자신을 허비한다고 말합니다. 왜요?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랑입니까?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허비하는 것입니다. 여기 허비한다는 단어는 말 그대로 좀 사치스럽게 낭비한다는 부정적인 의미를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바닥이 나도록 다 써버렸다는 말입니다. 소진하도록 자신을 다 쏟아부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와 디모데후서에서 자신의 삶을 ‘관제(혹은 전제)와 같이 부어진 삶’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빌 2: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딤후 4:6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전제는 포도주를 하나님의 제단에 붓는 제사의식이었습니다. 포도주는 피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피는 물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남김없이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삶과 죽음을 그와 같이 남김없이 피까지 다 흘려 순교의 제물이 될 것을 내다보고 한 말입니다. 죽음 만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가 다 쏟아부어준 삶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재물을 허비하고 자기 자신을 허비하는 것이 크게 기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주목해보십시오. 이것은 인간의 마음이 아닙니다. 타락하여 죄성을 지니게 된 인간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제가 성경공부를 통해서 그리고 이미 이전에 설교를 통해서 나눈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렘 32:40~41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영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정녕히 나의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반역하는 인간들, 그 은혜에 응답할 줄 모르는 인간들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들에게 선을 베풀어주기 위해 그들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언제까지요? 그들이 나를 경외함을 그들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겠다고 할 때까지 말입니다. 그들 마음 속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은 마음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주체할 수 없을만큼 일어나도록 말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라고 미친 사람처럼 소리지르지 않을 수 없도록 말입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견딜 수가 없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에게 선을 베풀어주는 것은 참으로 나의 기쁨이다. 나는 선을 베풀어주는 것이 너무나 기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나도 선하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바울 사도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사람의 모습을 우리는 봅니다. 와~! 이런 마음이 나의 삶 속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느끼시지 않으십니까? 그럴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풍성하고 줄 것이 많고(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은혜로와 질 수 있을까요? 그렇게 늙어갈수만 있다면 그보다 영광스러운 삶, 그보다 잘 늙을 수가 없는 것이겠지요.

바울 사도는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의 자녀들을 향한 간절한 마음은 이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너희는 나를 덜 사랑하겠는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적인 비애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녀들을 너무도 사랑해서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오히려 그들을 압박했고 그들을 착취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바울 사도를 배척했고 그들을 착취하는 자들에게는 순종했습니다. 아이러니지요. 인간의 죄성이 이런 것입니다. 잘 대해주면 은혜를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오히려 더 쉽게 생각하고 이용하려 든다는 것입니다. 부모님들도 이런 말씀들을 하십니다. 아이들이 커도 꼬박꼬박 용돈을 가져오라고 하고 그렇게 하면 아이들이 부모에게 잘 하는데, 그냥 무조건 잘 해주면 부모를 절대로 돌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는 ‘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것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렇게 했을까요? 고린도 교인들이 이렇게 된 것은 아버지인 바울 사도의 교육이 잘 못 되었기 때문일까요? 아니요. 오히려 바울 사도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이해했다고 하더라고 그래도 자신의 입장을 끝까지 지켜나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선하심을 베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언제까지요. 알게 될 때까지 말입니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아무런 금전도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미 거짓 사도들조차 부인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말하기를, 이것도 사실은 자기의 이미지를 위해서 고도로 계산된 행동일 것이라고 비난하였던 것입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그래서 내가 보냈던 자 디도나 또는 그와 함께 간 형제가 나와 달리 혹 나를 대신하여 너희로부터 취한 것이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들은 다 바울 사도와 동일한 보조를 취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의 주장이 설 자리가 없도록 함으로써 이제 바울 사도는 돈과 관련된 문제에 대한 변론을 마치고 있습니다.

C. “내가 지금까지 한 것은 변명이 아니라 너희들을 세워주기 위함이다”(12:19; 13:10).
바울 사도는 여기서(19절) 이제 독자들인 고린도 교인들의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합니다. “여러분들은 내가 지금까지 한 것이 변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지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인할 수 없습니다. 현대의 독자들인 우리 자신도 지금까지 거의 처음부터 여기 마지막 부분에 오기까지 바울 사도가 이 서신서를 통해서 하고 있는 것은 바울 사도의 자기 변명이다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사실 내가 나의 사도됨을 증명하기 위해서 변호를 하는 것은 나를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명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없다는 자세가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다시 한 번 이 모든 것은 바로 너희 영혼을 위해서 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도됨을 부인하는 고린도 사람들, 그리고 거짓 사도를 참 사도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이들은 결국 바울의 메시지를 거부하였고 이것은 바울을 사도로 세우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거부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집요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사도권 변호는 사실상 고린도 교인들의 영혼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을 세우고자 함이었습니다. 여기 ‘세운다’는 표현은 건축을 할 때 집을 짓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보통 성경에서 덕을 세운다고 번역을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건축자와 같이 그들의 영혼을 잘 세워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한 가지를 더 설명하자면, ‘변명’이란 단어입니다. 이것은 법정 용어입니다. 변호사가 혹 피고가 자신을 판사 앞에서 혹은 배심원 앞에서 변론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조금도 그리고 한 번도 고린도 사람들이 자신의 재판관이 되거나 배심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재판관은 오직 하늘에 계신 분 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그 앞에서는 모든 숨겨진 것들이 벌거벗은 것과 같이 다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을 재판관이나 배심원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끊임없이 변호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고 거기에 우리의 인생의 힘을 많이 낭비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우리 죄인들의 삶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과 같이 오해를 많이 만들면서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다. 우리의 재판관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아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오해하시지 않으십니다. 이것을 알았기에 시편 기자는 자신의 모든 원통한 것을 가지고 사람 앞에 나가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을 재판관이나 배심원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그들을 자녀와 같이 여겼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토록 끈질기게 자신의 사도됨을 증거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포기할 수 없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2. 성자: 심판의 시간이 온다(12:20~13:4)
바울 사도는 편지를 마치면서 자신이 ‘이제 세번째 갈 것’이란 말을 12:14에서 그리고 13:1에서 하고 있습니다. 이번의 방문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두번째 방문과 같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끝까지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는 자들에게 심판이 있듯이 바울의 세번째 방문은 심판의 방문이 될 것임을 누누히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지막에 심판을 위하여 우리에게 오실 것을 상기시켜 줄 뿐 아니라 자신의 이 방문을 거기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A. “내가 바라는 것은 심판이 아니다”(12:20~21).
그러나 바울 사도의 어버지와 같은 마음에는 심판을 위해서 그가 세번째 방문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심판이 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그가 세번째 방문을 하기 전에 모든 회개치 않은 자들이 다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에 바울 사도는 이 고린도후서를 쓴 것이고 또 이전의 편지인 중간 편지도 썼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재림 심판 전에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바울 사도의 마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고후 12:20~21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나의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의 원치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중상함과 수군수군하는 것과 거만함과 어지러운 것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함을 인하여 근심할까 두려워하노라
바울 사도가 세번째 방문을 하게 될 때 보기를 원하는 고린도 사람들의 모습은 회개하고 기쁨으로 해후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할까봐 두렵다고 합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바울 사도에게서 보기를 원하는 모습도 심판자로서 와서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교회로부터 내보내는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이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다루고 있던 그 문제만이 아니라 고린도교회가 이제까지 지니고 있던 모든 회개하지 않은 죄의 문제들을 다 다루려고 하고 있습니다. 다툼,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중상함, 수군수군하는 것, 거만함, 어지러운 것 들이라고 표현된 것들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실까 두려워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아마도 바울 사도가 이런 회개하지 않은 죄들을 다루게 될 때 일어나게 될 어려움들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이 다루려고 하는 다른 목록들도 제시합니다.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않은 것들에 대하여 입니다.

여러분, 죄가 문제가 아닙니다. 죄를 회개치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회개가 지속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찌 여러분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동행하여 주시기를 기대할 수 있으며 또 구할 수 있겠습니까? 회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지속적으로 매 순간 이루어져야 하는 경건의 습관입니다. 여러분을 돌아보십시오. 회개가 여러분의 삶에 늘 있습니까? 없다면 여러분이 죄를 전혀 짓지 않기 때문입니까? 죄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죄를 인식하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죄를 인식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그가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의 자연적 본성으로는 절대로 죄를 죄로 인식할 수 없으며 따라서 회개가 있을 수 없습니다. 회개는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제 세번째 방문을 할 것입니다. 방문의 주제는 심판입니다. 그는 여기서 그리스도를 대신합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것은 모두가 회개하고 기쁨으로 해후하는 것입니다.

B. 그리스도께서 바울 사도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13:1~4)
고린도 사람들은 바울 사도가 약하다고 느꼈고 그래서 요구하기를 ‘당신이 참 사도라면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서 말씀하신다는 증거를 보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약함과 강함에 대한 세상적 기준은 바울 사도가 복음의 진리 안에서 드러내고 있는 ‘약할 때 강함’이라는 진리를 이해할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바울은 약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통해서 말씀하신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비록 자신의 마음에 원하는 것은 심판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회개치 않는다면 심판이 있을 것임을 13:1,2에서 밝힙니다. 바울 사도는 그들의 한 말들을 구약의 율법에 따라서 두 세 증인을 통하여 확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그들을 교회로부터 내보낼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도는 무슨 권위로 그렇게 ‘강하게’ 할 수 있습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권위입니다. 이것은 사도직을 가진 독특한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의 순결을 위하여 교회에게 주신 권위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 책임을 언제나 바르게 수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정결케 하기 위한 책임이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들을 더 엄격한 기준으로 다루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강한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도 약함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는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사셨다고 말합니다. 마치 그와 같이 자신도 약하지만 그 능력으로 강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강함을 입으신 것 처럼 그렇게 세번째 방문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고린도 교회를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성령: 심판을 준비하라(13:5~9)
그러므로 이제 고린도 교회의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은 바울 사도의 세번째 방문을 준비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바울 자신은 매우 근원적인 질문을 통해서 그들을 도전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매우 도전적인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A. 고린도 교회: 자신의 믿음을 시험하라(13:5~6).
자기가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인지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참 거듭난 그리스도인인지, 아니면 가짜인지를 돌아보라는 말입니다.
이와 관련된 미국의 통계가 있습니다.
1990년대 중반 미국의 성인(George Barna)
39% 스스로를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 여김
68% 때때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낌
65% 예수 그리스도께 개인적 위탁을 했다고 여김
85%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김
이 통계는 얼마나 속고 사는 자가 많은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의 설교자는 종종 이런 질문을 회중들에게 던져야만 합니다. 이것은 참 믿음에 거하는 자들의 믿음을 허물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 믿음에 있는 자들에게는 더 큰 확신에 거하게 하고 거듭나지 않았지만 거듭남의 확신을 가지고 속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은혜를 사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것은 유익한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i. 믿음으로 말미암은 순종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유일한 증거이다.
어떻게 여러분의 믿음이 참 구원하는 믿음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여기에 한 가지 시금석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순종입니다. 참 믿음은 순종을 낳습니다. 그러나 참 믿음이 낳는 순종이 아닌 것도 존재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순종의 특성은 마지못한 것이 아니라 하고 싶어 하는 순종입니다. 행위가 아니라 마음이 있느냐 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성경을 읽고 싶은 마음이 있으며, 읽혀지는 모든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계신지 확인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줄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한편으로 볼 때 매우 주관적인 판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순종의 여부를 확인함이 좋다는 말입니다.

ii. 그리스도를 모신 자는 그리스도를 모신 자를 안다.
바울 사도는 나아가서 자신이 버리운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버리운 자가 아닌 사람들은 알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너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면 너희는 내 안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계심을 알 것이다. 하지만 너희 안에 나를 거부하는 자들은 여전히 그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기 때문에 몰라 보는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우리 주님의 말씀대로 그들의 판단으로 판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에서 주도적으로 일하시는 분이 누구이십니까?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심을 알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서로 알아보게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의 심판대 앞에서 서게 될 때 부끄럽지 않게 서게 되도록 우리를 준비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자신의 세번째 방문을 준비하라고 고린도 사람들에게 촉구합니다. 성령님의 은혜의 역사에 고린도 사람들을 부탁하면서 말입니다.

B. 바울 사도: 고린도 교회를 위한 간구(13:7~9): ‘너희의 온전하게 되는 것’(9)
바울 사도는 마지막으로 자기의 영적인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의 기도의 초점은 고린도 사람들이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고린도 사람들이 악한 일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세번째 방문을 하게 될 때에 다루겠다고 말했던 일들입니다. 오히려 그들이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바울은 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기도는 그들이 온전하게 되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13:9). 온전하게 된다는 단어는 고쳐서 완전하게 하는 것 혹은 완성한다는 뜻을 가집니다. 비록 인생에서 이런 저런 일들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안에서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선한 일이 마쳐지기를 바라는 성화의 완성을 위한 바울 사도의 간구인 것입니다. 바울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기도의 태도와 삶의 모습이 그의 서신서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그는 편지를 쓰다가도 멈추고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주야로 기도를 했습니다. 늘 기도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억하며 만났습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할지 알지 못할 때 탄식함으로 우리와 더불어 기도하시는 분이십니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바울 사도는 성령님과 보조를 맞추어 살아갑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구원을 이루어가기를 원하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것처럼, 바울 사도 역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기를 바라면서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4. 마지막 명령과 축복(13:11~13)
이제 정말 마지막에 왔습니다. 바울 사도는 11절에서 다섯 가지 간단한 명령을 합니다.
고후 13:11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케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 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1) 기뻐하라, 2)온전케 되라, 3)위로를 받아라, 4)마음을 같이 하라, 5)평안하라 입니다.
사실, 이 한 구절만 가지고도 몇 차례의 설교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전체의 흐름 속에서 이번에는 간단하게 이 구절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바울 사도에게 있어서 자기의 기쁨의 원인이 되는 고린도 사람들을 갈망하는 마음이 컸고 정말 기뻐할 수 있다면 여전히 대적하는 자들이 회개해야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하는 말입니다. 기뻐하라는 명령이 제일 먼저 오는 것은 고린도 교회가 하나됨의 기쁨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에 대한 기대와 신뢰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두번째, 온전케 되라는 명령은 바울 사도의 기도이기도 했습니다(13:9). 그들은 찢어진 그물을 깁는 것처럼 그들의 공동체의 잘못들을 바로잡고 고쳐야 했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어야 했습니다. 세번째로 위로를 받으라는 명령은 고린도 교회의 사건들이 서로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의 옳은 자들이나 잘못된 자들이나 모두 상처를 안게 되었습니다. 바울 자신도 그렇습니다. 위로가 필요합니다. 교회 안에 어려운 일이 일어날 때 그 일은 해결되어도 마음에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그것을 인정하면서 서로를 위로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네번째로 마음을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조화를 위한 조화를 이루라는 말은 아닙니다. 사도적 진리의 하나됨을 위한 조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평안할찌어다 라고 했습니다. 이 명령은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뒤로 물러서서 전체를 보면서 생각할 것을 요구하는 명령입니다. 평강 가운데서 살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 다섯 개의 명령을 놀랍게 조화롭게 연결하면서 마지막 권면을 주는 것입니다.

A. 거짓 복음에 대한 최고의 해독제와 치료약은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을 아는 넘치고도 깊은 즐거움이다.
이 다섯 가지 명령의 뒤에 약속을 주고 있습니다.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알고 있습니다. 거짓 복음에 대한 최고의 해독제와 치료약은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을 아는 넘치고도 깊은 즐거움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이것이 얼마나 넘치고도 깊은 즐거움인지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건강과 부를 약속해주는 거짓 복음 따위에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거짓 복음?건강과 부를 약속해주는?따위에 미혹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호세아 선지자는 선언했습니다(호 4:6).

하나님은 오늘도 교회에게 명하십니다. 1)기뻐하라, 2)온전케 되라, 3)위로를 받아라, 4)마음을 같이 하라, 5)평안하라 고 말입니다. 그러면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을 깊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것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 생활이란 얼마나 공허한 것이요,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런 교회로 지켜주시사, 우리로 하여금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을 아는 넘치고도 깊은 즐거움을 맛보게 하여 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모든 거짓 가르침으로부터 지켜 주시옵소서. 아멘.

B. 교회의 소망은 새로운 프로그램이 아니라 성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마지막 구절은 우리가 너무나 익숙하게 아는 구절입니다. 세계의 거의 모든 복음주의 교회가 예배의 축도문으로 사용하는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이 바울 사도가 그토록 애정어린 관계를 유지했던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에 등장하지 않고 오히려 바울 사도를 가장 힘들게 했고 배척했던 고린도교회에서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을 장식했다는 것은 우리를 당황스럽게 할만 한 것입니다.
이토록 놀라운 축복의 말씀을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퍼부었습니다. 저주를 퍼부은 것이 아닙니다. 분노를 퍼붓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마지막에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 자기의 영적 자녀와도 같은 고린도 교회에 퍼부은 것은 축복, 놀라운 축복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를 통해서 특별히 이 축복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교회의 소망은 다양하고 유익한 프로그램들에 있지 않고 바로 성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성자의 은혜와 성부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가 그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교회가 되게 만드는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바울 사도의 삶 속에 성삼위 하나님께서 오셔서 거하시고 그의 삶에서 자신을 드러내셨던 것과 같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실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충만하게 거하시기를 구합니다. 이것이 성도요, 이것이 교회입니다. 죠이선교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성 삼위 하나님께서 자신을 한껏 드러내실 수 있는 것,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비전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어떤 분이시라는 사실을 온 세상 앞에 보여줄 수 있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5. 교훈과 적용
오늘 말씀 그리고 고린도후서 전체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두 가지만 정리하고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A. 그리스도인의 강함은 십자가의 약함 안에서 드러난다.
그리스도인의 강함은 십자가의 약함 안에서 드러납니다. 강한 사람, 센 사람, 억척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으면서 우리는 온유한 사람이 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으면 우리는 그렇게 변해갑니다. 바울 사도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 처럼 말입니다. 나의 똑똑함과 잘남과 세상에서 알아주는 것과 자랑거리들을 내려놓게 되고 우리는 약함 안에서 주님의 능력이 온전하여 지기를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내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약함을 알고 그것을 인정하는 자가 진실로 그리스도 안에서 강한 자입니다.

B.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다.
바울 사도가 끝까지 고린도교회를 축복하는 근거가 무엇일까요? 바울 사도는 고린도 사람들을 향한 소망을 끝까지 놓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아니요. 바울 사도가 믿었던 것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남아있는 일말의 소망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믿었던 것은 하나님, 고린도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 그들을 그 교만과 악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로 부르신 은혜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기대요, 신뢰였습니다.
성화는 하룻밤에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거듭난 사람이 성장이 더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기에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화의 시간표를 만들 수 없습니다. 그 시간표는 철저하게 하나님 편에 있는 것입니다. 신비에 속한 영역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바울 사도와 같이 사람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그 사람을 믿어서가 아니라 그 안에서 일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을 믿어서 사람에게 투자하면 실망하게 되고 다시는 안 한다는 식으로 우리를 몰고갑니다. 주님은 사람을 아셨기에 사람에게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아셨기에 사람에게 자신을 다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부르심입니다. 거두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약함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을 따라가는 약한 자들이어야 합니다. 강할 수 있다면 오직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강하며,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내 안에서 온전하여 지는 것이 바라는 바입니다.

마지막으로 손양원 목사님의 기도시를 하나 인용하고 마칩니다. 얼마나 손 목사님이 하나님이 자신의 삶을 통해서 드러나기를 원하며 사셨는지를 잘 보여주는 기도시입니다.

예수 중독

나는 예수의 중독자가 되어야 하겠다.
술 중독자는 술로만 살다가 술로 인해 죽게 되는 것이고,
아편 중독자는 아편으로 살다가 아편으로 인해 죽게 되나니
우리도 예수로 살다가 예수로 인해서 죽자.
우리의 전생활과 생명을 주님을 위해 살면
주같이 부활된다.
주의 종이니 주만 위해 일하는 자 되고
내 일 되게 하지 말자.

우리는 하나님이 드러나는 삶을 살도록 소명을 받은 자들임을 잊지 마십시다. 우리 교회는 성삼위 하나님이 드러나기시 위해서 세우셨다는 이 영광스러운 소명을 어느 한 순간이라도 저버리지 마십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영광스러운 소명인 것입니다.
오직 성삼위 하나님께서 홀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