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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강해 (11) - 은혜의 황금사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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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강해 (11) - 은혜의 황금사슬

고린도후서 8:16~9:1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7-04-15

말씀내용
바울 사도는 계속해서 헌금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짓기 위해서 실제적인 언급과 함께 ‘돈’에 대한혹은 ‘헌금’, ‘주는 것(베푸는 것)’에 대한 중요한 신앙적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 사도는 이 일을 위해 세 사람을 고린도교회에 파견하면서 자기가 왜 그들을 보내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고 또 고린도교회에게 그들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1. 디도와 형제들을 보내는 동기(8:16~24)
A. 디도와 두 형제(16~19, 22~23)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의 모금을 마치기 위하여 파견한 사람은 디도를 포함하여 세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은 오늘날에도 교회의 일군에 대한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공해줍니다.

첫번째 인물은 디도입니다. 디도는 이미 바울 사도의 중간편지를 전달하는 너무나도 어려운 일을 감당했을 뿐 아니라, 그 때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디도를 영접하고 순종한 바 있었기에(고후 7:15) 이미 고린도 교회와의 사이에 정서적으로도 특별한 관계가 형성되어있었습니다. 디도의 마음 속에도 이제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가지고 있는 간절한 마음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 간절한 마음은 관계에서 오는 태도입니다. 일에 대한 것이기 이전에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한 불붙는 사랑이 디도의 마음 속에 생긴 것입니다. 교회는 늘 일 이전에 사람이 우선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일을 위해서 사람을 이용하시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교회 생활에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 이런 점에서 디도는 가장 적임자였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그에게 이 일을 권하자 디도의 마음에는 더욱 불붙는 마음이 일어나 시켜서가 아니라 자원함으로 이 일을 맡겠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에게 있어 이보다 귀한 자질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디도를 가리켜 말하기를, ‘나의 동무,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라고 합니다(8:23). 동무란 말은 ‘partner’란 말입니다. 바울 사도와 함께 멍에를 진 자입니다. 이런 동역자가 있을 때 어찌 일이 힘들게 느껴지겠습니까? 디도는 실로 바울 사도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두번째 인물과 세번째 인물은 익명으로 소개됩니다. 두번째 인물은 8:18에 소개되는데, 그는 ‘복음으로서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입니다. 아마도 이런 말로 보아서 그는 이미 복음전도자로서 유명한 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많은 추측을 하였는데, 누가가 아니면 바나바나 실라와 같은 인물들이 아니겠는가 생각을 합니다마는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그는 모든 교회의 칭찬을 받을 뿐 아니라 여러 교회의 택함을 입은 자였습니다(8:19). ‘택함을 입었다’는 표현은 선출되었다는 말인데, 아마도 이 모금을 위하여 그는 여러 교회의 대표로서 선출된 자였을 것입니다. 그는 신뢰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히 그가 선출된 목적을 여기서 분명히 합니다. 그것은 주의 영광을 드러내고 바울 사도와 교회들의 바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8:19). 이 모금의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절대로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그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열정이 아니었다면 바울 사도는 진작에 이 (부탁하기) 어려운 일을 그것도 바울 사도로 하여금 쓸데없는 오해와 비난을 불러일으키게 만든 일을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 ‘돈’과 관련된 일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이것이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영예와 관련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인물은 두번째 사람처럼 교회에서 선출된 사람인지, 바울 사도의 일행 중에서 사도가 직접 파견한 인물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전자에 속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바울 사도가 두번째 인물과 함께 이 인물을 소개하면서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언급하기 때문입니다(8:23). 여기 ‘사자’란 말은 사도를 의미하는 단어인데, 여기서는 고유적 사도란 의미가 아니라 ‘보냄을 받은 자’란 문자 그대로의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이미 사람들을 향한 열심 면에서 검증된 바 있는 인물입니다(8:22). 더우기 그는 고린도교회에 대한 신뢰가 커서 이 임무를 맡는데 아주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그리스도께 영예가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8:23). 그들의 삶과 사역을 통하여 그렇게 해온 사람들이라고 소개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칭찬이 없을만큼 사도는 이 세 사람을 보내며 그들을 고린도교회에서 천거합니다.

누군가 저를 소개할 때 이렇게 소개할 수 있다면 이보다 영광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김형익으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나의 동역자요, ……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고 말입니다. 비록 세 사람의 이름 중에 우리가 정확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디도 뿐이지만, 이들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기뻐하시는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 안에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사람들이 되어가야 하겠습니다.

B. 바울이 받았던 오해와 바울이 조심하려는 태도(8:20~21)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세 사람을 보내는 이유를 밝힙니다. 우리는 이미 바울 사도가 일 년 전에 시작한 모금을 인하여 고린도교회로부터 불필요한 오해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대다수의 성도들이 회개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거짓 사도들의 영향에 있는 사람들은 바울 사도가 다시 모금을 마치라고 종용하게 된다면 다시 이런 비난을 서슴지 않을 것이고 바울 사도는 어리석게도 그들에게 비난의 빌미를 제공해줄 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언제나 그래왔었겠지만, 특별히 자신이 얼마나 이 일을 하는데 있어서 조심하고 있는지 밝혀줍니다.

8:20입니다. 사도가 조심하는 것은 이 모금의 일,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아무도 우리를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고린도교회에서만 된 모금이 아니라, 마게도냐 교회들과 기타 다른 곳에서도 거두어진 것이라고 볼 때 적지 않은 돈이었을 것입니다. 사도가 밝히는 바와 같이 ‘거액’이었을 것입니다. 사도는 나아가 주님 앞에서 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조심하려고 한다고 말합니다(8:21).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믿어주는 것이 훌륭한 것이 아니라, 조심하여 넘어지지 않도록(훼방하지 못하게) 방안을 강구하여 행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할수록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특별히 교회가 돈과 관련된 업무를 할 때 그렇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그 돈을 직접 다루지 않을 의도를 보여줍니다. 바울 사도는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이 아니라 믿을만한 사람을 세 사람이나 보냅니다. 조심하는 것입니다.

선교사로 있을 때, 늘 시간과 함께 신경을 써야했던 일이 바로 재정업무였습니다. 연간 들어오는 모든 재정을 한푼도 틀림없이(선물비로 들어오거나 현지의 수입 조차도) 맞추어서 보고서를 만들어 제출해야했습니다. 모든 영수증을 다 첨부하여 적어도 2년 이상은 가지고 있어야 했습니다. 선교사들을 믿지 않아서입니까? 아니지요. 선교사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자기를 믿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절대로 이런 점에서 자기를 믿지 마십시오. 우리가 다 죄인이라는 것은 기회만 주어진다면 우리도 얼마든지 넘어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자신을 너무 믿지 마십시오.

바울 사도는 돈을 자신이 직접 다루지 않았습니다. 조심한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복음의 사역이 지장을 받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모든 일을 함에 있어서, 특별히 돈을 다룰 때 조심해야 할 것을 말씀해줍니다.

C. 고린도 성도들의 회개의 진정성은 연보를 마치는데 달려있다(8:24; 8:8; 9:13).
바울 사도가 이 ‘은혜의 일’(8:19)을 마치려고 하는 것은 단순히 ‘돈을 모으는 것’ 자체의 목적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목회적 차원에서 고린도교회에게 바울 사도가 계속 도전하는 것은 이 연보를 하는 것, 마치는 것은 바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회개가 진정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8:24을 보십시오. 그들은 여러 교회 앞에서 그들의 사랑을 보여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앞서 8절에서도 말한 바 있습니다.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9:13에서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이 연보?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함을 섬기기 위한 모금?는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참으로 받은?헛되이 받지 않은?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하나의 방법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를 개척한 목자의 마음으로 그들이 그렇게 그들의 믿음과 사랑의 증거를 드러내주기를 간절히 바랬던 것입니다.

2. 미리 준비해서 헌금을 마쳐야 할 이유(9:1~5)
바울 사도가 서신의 이 부분에서 유독 강조하는 것은 내가 방문할 때 헌금을 급하게 또는 마지 못해서 하는 일이 없도록 미리 다 준비해서 마치라는 것입니다. 그저 편하게 가자고 하지 않습니다. 또 그저 액수만 채우면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헌금의 본질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A. 바울의 자랑(9:2~4)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에서 마게도냐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8장 초두에서 이미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 사도의 말씀을 보면 사실은 마게도냐교회가 그렇게 헌금을 하게 된 것도 고린도교회가 1년 전부터 이 일을 준비했다고 바울 사도가 자랑했던 것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먼저 이런 바울 사도의 자랑이 헛되지 않게 되었으면 한다는 개인적인 바램을 적고 있습니다.

B. 참 연보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9:5).
그러나 그런 개인적인 이유?즉, 바울 사도가 부끄러움을 당할지도 모르는?만은 아니었습니다. 5절에 ‘참 연보’란 말을 씁니다. 가짜 연보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는 연보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연보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준비해서 자원함으로 하는 것이다 하는 말입니다. 만일 그들이 바울 사도가 그들을 방문할 때까지 기다린다면, 바울 사도는 이 일을 위하여 엄히 명하게 될 것이고, 그들은 자원하는 마음보다는 급한 마음으로 억지로 내는 부분이 많이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것은 바울 사도가 원하는 바가 아닐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 연보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돈에 대하여 ‘지나치게’ 언급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부분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이 ‘지나치게’ 말하는 것인가 하는 것과, 과연 돈에 대하여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돈을 통해서 은혜와 믿음에 대하여 말하는가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 돈에 대하여 좀 ‘지나치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돈에 대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대해서, 그리고 은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구별이 필요한 것입니다.

게다가 바울 사도가 지금 여기서 사용하는 ‘연보’란 단어는 본래 ‘축복’(blessing)을 의미하는 말이고 이차적으로 ‘풍성하다’(bountiful)는 의미를 내포하는 단어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물질을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후하게) 주신 축복’이라고 이해할 뿐만 아니라 이 축복은 다시 우리 자신을 통하여 (후하게) 나누어져야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깔려있는 것입니다. 8장과 9장에 연보란 말이 많이 사용되지만 독특하게 여기 9:5에서만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3. 은혜의 황금 사슬(9:6~15)
이제 이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이 본문이 단순히 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뭔가 놀랍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되는 결과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돈을 의미하는 황금 사슬이 아니라 ‘은혜의 황금사슬’입니다.

A. 하나님이 주시는 넘치는 은혜(9:8) ?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고)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심(9:8) ?
9:8을 먼저 봅니다. ‘하나님이 넘치게 주시는 은혜’에 대해서 먼저 말합니다.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그리고 기독교적이라는 말하는 봉사나 사역이나 행동의 유일한 출발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먼저 드려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갚으시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를 주시되, 인색하게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색한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후하신 분이십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우리는 후하게 주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제대로 하나님을 만나면 후하게 주시는 하나님을 닮아서 후하게 베푸는 자가 됩니다. 그는 결코 인색한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발치에서 향유를 허비한 여인을 칭찬하신 분이십니다. 제자들은 인색했지만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눅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야고보는 후히 주시는 분이라고 이렇게 설명합니다.
약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어찌 이것 뿐이겠습니까? 본문에는 이와 유사한 표현이 무척 많이 나온다는 사실을 관찰하셨습니까? 6절에서 ‘많이’ 심는다고 할 때 이 표현도 후하게란 의미입니다. 8절에, ‘넘치게’, ‘넉넉하여’ 또 ‘넘치게’, 10절에 ‘풍성하게’와 ‘더하게’ 11절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12절에 ‘많은 감사’, ‘넘쳤느니라’, 13절에 ‘후한 연보’, 14절에 ‘지극한 은혜’, 15절에 ‘말할 수 없는’ 이 모든 어휘들이 다 하나님의 후하심을 반영하는 것들이란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후하게 베푸시는 분이시며 우리 모두가 다 그 수혜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후하게 베푸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왜 하나님께서 이토록 후하게 넘치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항상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럴 수 있다면 말입니다. 지금 바울 사도가 돈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까? 아니지요. 은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돈을 달라고 구해야겠습니까? 돈을 달라고 구해서 돈을 얻은 사람은 이렇게 나누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구하여 돈을 은혜로 얻은 사람은, 이것을 축복으로 여기기에 그 결과,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의 한 가정에 시야가 머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시야, 하나님의 관점은 우주적입니다. 적어도 온 세상을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먹고 살기 위함이 여러분의 인생의 목표가 되게 하지 마십시오. 이럴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후히 주시는 은혜입니다.

여기 ‘착한 일’이란 것도 바로 하나님 자신의 성품인 ‘선하심’에 대한 언급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반영되는 일에 부요해지는 것입니다. 그 뜻은 또 ‘유용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유용함을 베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다면 우리는 어디에서도 필요없는 존재가 아니라 유용한 사람이 됩니다. 은혜, 오직 은혜입니다.

B. (모든 일에 부요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9:11) ?
그래서 어떤 일이 구체적으로 고린도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것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너그럽게 연보를 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요?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보지도 못한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위해서 입니다. 여기 사용되는 연보란 단어는 본래 ‘후하다’는 뜻을 가진 5절에서 쓰인 단어와는 다른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연보는 또 어떤 결과를 가져옵니까?

i. (예루살렘)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9:12) ? 저희가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사모하고(9:14) 저희가 하나님께 감사함(9:11,12) ? 하나님이 주시는 넘치는 은혜(9:8)
여기서는 몇 가지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데, 첫째로 매우 실제적인 결과입니다. 12절이지요.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의 부족함이 보충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4절을 보면, 그 예루살렘 성도들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알지 못하는 선교사님이나 어떤 민족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게 되거나 특별한 은혜의 관계를 맺게 된다면 그 마음의 간절함을 가지고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돈이 고린도에서 예루살렘으로 갔고, 기도가 예루살렘에서 고린도로 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감히 이렇게 도전합니다. 돈으로 심어 여러분을 위한 간절한 기도를 거둘 수만 있다면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은혜의 황금사슬은 이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감사가 넘치게 합니다. 첫째는 예루살렘 성도들이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입니다. 11절에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고, 12절에는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라고 합니다. 이뿐 아니라 바울 사도 자신도 15절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것이 결국 어디로 다시 돌아가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영광은 다시 어디로 흘러가겠습니까? 바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 자신에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8절로 돌아가,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로 다시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의 황금사슬’입니까?

ii.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함을 증명함(9:13)
고린도 성도들의 헌금은 두번째 결과를 맺게 되는데, 그들 자신의 믿음의 참됨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이 (봉사의) 직무?모금과 관련된?로 증거를 삼는다고 했습니다. 무슨 증거입니까? 고린도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이 이 순종의 행위로써 그 참됨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참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 믿음의 참됨을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합니까? 그 증거의 하나로 성경에서 제시되는 것이 바로 ‘베푸는 것’, ‘연보’라는 것입니다. 돈으로 믿음을 증명한다. 놀랍지 않습니까?

iii. 너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9:13) ? 하나님이 주시는 넘치는 은혜(9:8)
고린도 교회의 헌금이 가져오는 세번째이며 궁극적인 결과입니다. 13절 하반절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도운 것은 단지 예루살렘 교회만을 ‘후한 연보로’ 도왔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그렇게 돕는 자들이다라는 인식을 주게 되고 이것을 알게 되고 듣게 되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이 일의 궁극적 목적이라는 것을 이미 8:19에서 밝힌대로 입니다. 하나님게서 받으신 영광은 다시 그들 자신 고린도 성도들에게 넘치는 은혜로 부어지게 될 것입니다.

C.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함(9:15) ? 하나님이 주시는 넘치는 은혜(9:8)
오늘 본문의 전체 구조를 보면 하나의 형식이 있습니다. 8:16이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시작되고 있고, 마지막 구절인 9:15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마무리됩니다. 이것은 매우 의도적인 표현입니다. 이 연보 전체에 대한 본격적인 설명은 궁극적으로 바울 사도의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 시작되고 감사로 마무리됩니다. 여기서 다루는 것이 단지 돈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알게 하는 것입니다. 모금액이 채워졌기 때문이 아니라 이 ‘은혜의 황금사슬’을 생각하는 바울 사도의 마음 속에 이루 ‘말할 수 없는’(9:15) 감사가 넘치는 것입니다.
9:15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4. ‘돈’의 신학?주는 것 / 연보 / 헌금
‘돈’의 신학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이 정리되어야 우리의 신앙이 제대로 성장하게 되어있습니다. 돈 특별히 여기서 언급하는 돈은 ‘주는 것 혹은 베푸는 것’이고 ‘연보’?후함을 의미하는?이며, 이것은 나아가 오늘날의 ‘헌금’이란 개념과 연관될 수 있습니다. 아니, 본래 신약적으로 헌금의 의미가 이런 것이란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A. 감사보다 기쁨에서 나와야 참 헌금이다(9:7).
9장 7절에서 바울 사도가 언급했습니다.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하라는 말은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생각해서 마음을 먼저 정하여 헌금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충동적으로 하게 되면 많이 할지는 몰라도 시험에 들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해야한다는 것은 ‘인색하게’ 계산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6절의 말씀이 이것을 설명합니다. ‘적게 심는다’는 말은 ‘인색하게’ 심는다는 말입니다. 그 반대는 ‘풍성하게’ 심는 것입니다. 그런 자는 풍성히 거둡니다. 왜 심고 거둠의 원리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까? 궁극적으로 ‘베푸는 것’은 은혜의 황금사슬에서 보여주는대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내지도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강요받아서 내는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부흥회에서는 이런 식의 강요가 무비판적으로 행해지는 것을 봅니다. 성경에서 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많이 내는 자’를 사랑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은 ‘많이 내는 자’를 사랑할지 모릅니다. 목사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많은 지혜로운 목사님들의 충고를 들어 저는 개개인의 헌금을 보지 않습니다. 저에게도, 여러분에게도 유익한 것이 될 것입니다.

‘즐겨 낸다’는 표현은 헌금을 드리는 동기의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즐거움과 기쁨으로부터 헌금을 내는 것이 좋다는 말입니다. 이 기쁨은 감사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감사는 과거와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대한 감사함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신앙적 태도입니다. 하지만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서 헌금을 드리는 것이 강조된다면 베풀게 되는 것이 자칫 ‘하나님은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선하신 분’이라는 내용보다도 더 ‘감사하는 우리의 도덕적 자질’의 표현이 될 수 있어서 ‘자기의’로 빠질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헌금의 우선적 동기로 ‘기쁨’과 ‘즐거움’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B. 헌금은 믿음의 표현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과 행하고 계시는 일, 그리고 행하실 일로 인해서 우리가 여전히 만족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을 향한 지속적인 신뢰이다.
헌금은 우리의 믿음이 참된 믿음임을 증거합니다. 우리가 지금 현재 가지고 있는 돈으로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우리 신앙이고,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과 행하고 계시는 일, 그리고 행하실 일로 인해서 우리가 여전히 만족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을 향한 지속적인 신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언제나?과거와 현재와 미래에도?채우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베풂은 믿음의 표현입니다. 풍성한 나눔, 넘치는 연보는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표현으로서의 헌금은 앞에서 말한 감사의 표현으로서의 헌금과도 큰 대조를 드러냅니다. 과거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서 하는 헌금은 자칫 우리의 물질의 ‘잉여분’(surplus)을 가지고 드리기가 쉽습니다. 남는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연보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고 믿음의 연보가 되기 위해서는 미래의 삶에 대하여 하나님께 대한 신뢰로부터 드려져야 합니다. 이것은 더 많은 돈을 축복으로 얻기 위해서 좀 더 투자를 하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태도가 오늘날 만연하고 이런 것을 조장하는 교회 지도자들도 있습니다마는, 매우 비성경적 동기, 다시 말하면 돈을 사랑하는 동기로, 돈을 더 얻기 위해서 주식을 사는 것처럼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 되기에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없고 그들의 신앙과 무관한 것이며, 영적으로 유익을 가져다 주지 못하는 헌금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헌금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많아서 감사하여 드린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누리고 있으며,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고 하나님 안에서 기쁘기 때문에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행복한 것이 감사해서 드리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기 때문에 드리는 것입니다.

C. 헌금은 사랑의 표현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들에게 언제나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의 흘러넘침이다.
헌금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두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늘 채워주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나에게 후하신 하나님, 나의 필요를 늘 후하게 채우시는 하나님에 대한 기쁨이 흘러넘치게 되면 우리는 ‘의무적으로’가 아니라 ‘기쁨으로’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실제적인 무엇인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베풀라는 요청은 우리의 행복과 안전을 위해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신뢰함으로써 돈과 자신에 대한 우상숭배로부터 벗어나라는 요청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돈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에 관한 말씀인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To talk about money is to talk about God).’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 넘치는 은혜, 풍성한 은혜를 저희 모두에게 베푸심으로 우리가 후하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며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되는’ 이 은혜의 황금사슬을 참으로 경험하게 되는 놀라운 역사를 주시기를 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