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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중심 삶 - (7). 은혜가 이끄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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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중심 삶 - (7). 은혜가 이끄는 삶

고린도후서 4:5, 골로새서 1:28-29, 고린도후서 5:1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12-03

말씀내용
1. 삶을 움직이는 동력/욕구 (고후 5:15; 롬 14:7-8; 요일 3:16-18)
여러분의 삶을 움직이는 욕구 또는 동력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에이브라함 매슬로(Abraham Maslow)는 인간을 움직이는 욕구를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까지 다섯 단계로 설명했습니다. 가장 낮은 단계로 의식주와 같은 생리적 욕구 수준이 있습니다. “먹고 살자고 하는거야!”라는 태도일 것입니다. 다음 단계로는 신체적, 감정적 안전에 대한 욕구가 있고, 그 다음에는 관계나 인정, 소속감에 대한 욕구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면 명예나 권력, 성취에 대한 자존의 욕구가 있고 맨 위에는 자아실현의 욕구가 있다고 그는 설명합니다. 그의 이론이 맞다면, 여러분은 이 단계 중의 하나에 속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말한 모든 단계의 욕구들은 다 자아의 욕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신자의 경우도 여기에 해당될까요? 과연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목적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5:15).” 매슬로가 간파했듯이, 모든 인간은 자아 중심의 욕구를 가지고 살아가며 여기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인간을 자기 중심성의 본성에서 해방시켜 주님을 위해 살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로마서 14:7-8)”라고 고백하게 합니다. 이것은 복음이 죄인 안에서 만들어내는 급진적 변화입니다. 그리고 주를 위해 산다는 것은 사도 요한에 의하면 이렇게 확장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한1서 3:16-18).” 주를 위해 산다는 것은 곧 우리가 형제들을 위해 재물을 쓰고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부담이 느껴지십니까? 어떻습니까?


2. 신자의 삶에 대한 오해와 복음에 대한 오해
여기서 신자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는 중요합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방식으로 신자가 자신의 삶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주를 위해 살며 형제와 이웃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배워서 압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삶이 잘 안 살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의지를 발동하여 그렇게 하려고 하고 때로는 그런 행동이 익숙해 지기도 합니다. 또는 정반대로 “나는 그렇게 살 수 없어.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어?”라고 하며 매슬로가 말한 자아의 욕구를 따라 자기 중심적 삶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율법주의와 방임 사이에서 방황합니다. 율법주의로 가면 교회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고, 방임으로 가면 교회의 주변부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선택은 모두 신자의 삶을 오해한 결과입니다. 신자의 삶은 의지적 노력으로 살아지는 게 아닙니다.
신자의 삶에 대한 두번째 오해는 복음에 대한 오해에 기인하는데, 복음을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것으로 축소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나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어 주신 일이고, 내가 변화 받고 성장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삶으로 성장하겠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은 내가 예수님 믿고 구원 받은 이야기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복음은 그저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것으로만 이해될 뿐입니다. 복음으로 죄를 발견하여 회개하고, 내 마음의 우상을 제거하고, 복음을 적용하여 근심을 덜고 평안을 얻는 것입니다. 말씀을 더 공부하여 성장하고, 기도를 잘 배워 기도를 더 잘 하는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하고 애를 씁니다. 성경 지식도 쌓이고 경건에 대한 이해도 깊어집니다. 교회에서 직분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정작 그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품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에게 복음은 거기까지 입니다. 너무나 많은 신자가 이렇게 복음을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런 오해 속에서 신자는 복음의 능력을 온전히 경험할 수 없습니다. 결국 신자의 삶을 관계적인 면에서 이해하는 데서 실패하는 것입니다.


3. 복음이 하는 일
이런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복음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이 하는 일은 둘로 구분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복음이 우리 안에서 하는 일이고, 둘째는 복음이 우리를 통해서 하는 일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자신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 절망하지 않고 그 무한한 간극을 메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보게 합니다.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내가 받을 죄의 형벌과 율법의 저주, 하나님의 진노를 남김 없이 다 받으셨기에 그 근거 위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완전하게 용납해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의 불순종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은 실패하지도 끊어질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자유함 속에서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고 싶은 열망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복음은 우리 안에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참된 기쁨을 창조해냅니다. 복음의 은혜는 우리 안에서 회개와 믿음이라는 새로운 삶의 패턴을 만들어냅니다. 소위 은혜가 이끄는 새로운 삶을 창조합니다. 이것이 복음이 우리 안에서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닙니다.
복음이 우리 안에서 일할 때, 복음은 동시에 우리를 통해서도 일을 합니다. 이것이 복음이 하는 두번째 일입니다. 복음이 우리 안에게 주는 자유함과 기쁨은 우리 밖을 향하여 흘러 넘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복음이 우리 안에 허락한 기쁨과 자유함을 누릴 때, 그 은혜는 자연히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향합니다. 형제를 섬기고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이 저절로 된다는 말은 아니지만 복음의 은혜라는 동력이 우리 안에서 일하기 시작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회개와 믿음의 사이클을 반복하면서, 우리는 장애물들을 넘어 주변 사람들을 섬기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기쁨을 새롭게 경험합니다. 이것이 복음이 우리를 통해 하는 일입니다. 복음이 우리 안에서 하는 일과 우리를 통해서 하는 일은 분리되지 않고 될 수도 없습니다. 복음은 우리 안에서 먼저 일을 시작하고 우리를 통해서 밖을 향하여 일을 합니다. 이 복음은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것으로 축소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관계적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를 복원할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소외된 관계들을 회복하게 합니다. 복음이 제대로 한 사람 안에서 일하기 시작하면, 복음은 그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마련입니다.


4. 은혜가 이끄는 삶
다시 질문을 하겠습니다. 신자의 삶을 움직이는 동력은 무엇입니까? 신자로 하여금 복음 중심의 삶을 살게 하는 동력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의지입니까, 은혜입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은혜를 받은 후의 삶은 의지적 노력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신자의 삶은 오직 은혜로 살아가는 삶이고, 은혜로만 순종하는 삶입니다. 복음의 은혜는 신자의 삶을 움직이는 근본적 동력이 됩니다. 안으로는 그 은혜가 자신의 죄를 발견하게 되고 회개와 믿음으로 주님께 더 나아가게 하고 거기서 우리는 새로운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은혜의 기쁨이 우리 안에 넘치게 될 때, 그것은 자연스레 밖을 향하게 됩니다. 그 은혜가 밖으로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동기로 작동합니다. 장애물을 만나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가운데 다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렇게 복음의 은혜는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 밖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신자의 삶을 움직이는 동력은 이 은혜입니다.


A. 스스로 종이 되는 삶 (고후 4:4-6; 고전 9:19)
오늘 본문을 보지요.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린도후서 4:5).” 저는 이 본문이 불편하게 느껴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을 말할 수 있겠는데, 예수를 위하여 내가 누구의 종이 되기는 부담스럽고 싫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주었고 고린도 교회를 설립한 영적 아버지였습니다. 그런 바울에게 고린도 사람들은 “당신이 진짜 그리스도의 사도가 맞냐?”고 도전했지만,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을 향해 소위 갑으로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습니다. 특히 이 본문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주 되신 것’을 전한다고 함과 동시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한다고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여기서도 고린도 사람들에게 복음을 말하고 싶어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주 되신 것’을 전파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던 것일까요? 바울은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한다는 말을 해야만 했습니까? 이 두번째 부분이 복음에 본질적 요소라고 보았던 것일까요? 바울 사도는 너희가 복음을 들었을 때, 불신에서 믿음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말합니다. 4절은 불신의 상태이고 6절은 믿음의 상태인데, 불신과 믿음의 상태를 연결해주는 다리는 5절의 복음이고 복음이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이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심’만이 아니고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포함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본질이라는 것이지요. 바울의 말을 풀면 이런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은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의 주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복음은 우리의 주인이 되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다른 사람들의 종이 된다는 것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지금 내가 너희의 종처럼 행하는 것을 보아라. 이것은 복음 때문이고, 예수님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린도전서 9:19).” 바울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율법 아래 있는 자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처럼,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처럼,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들을 구원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B. 은혜로 행하는 삶 (골 1:28-29)
그런데 이렇게 하는 힘, 이 동력이 어디서 나옵니까? 바울 사도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로새서 1:28–29).”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뿐 아니라, 바울 사도는 일관되게 사람들을 섬기는 일, 스스로 사람들의 종이 되는 일을 감당하는 데서 지치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이 고백에 답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분을 알고 그분의 능력을 실감하고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수고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는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해 수고했지만 그 수고는 자기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분의 역사를 따르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능력’은 다이너마이트가 파생된 ‘뒤나미스(δύναμις)’인데, 기적적 능력 같이 강력한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바로 이것이 은혜가 동력이 되어 움직이는 삶입니다.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하여 지치지 않고 수고하고 심지어 그들의 종이 되기까지 바울을 움직인 것은 바로 은혜였습니다.


5. 교훈과 적용 (고후 8:1-2; 마 25:40; 시 67:1-2)
이 말씀을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습니까? 먼저는 교회 안에서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그 은혜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면, 내가 영적으로 더 성장하겠다는 개인적 욕구로만 나타날 수 업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안에 자유함과 기쁨을 주고, 그 은혜는 주 예수님을 위하여 그리고 사랑 때문에 형제의 종 노릇을 하는 자리에 이르게 합니다. 아무 불편함이 없는데, 내가 저 형제에게 다가설 이유가 있습니까? 내가 사회적으로 더 우월하다면 더더욱 그럴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은혜는 형제를 향한 우리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킵니다. 조너단 리먼이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어려서 부모님께 이끌려 교회를 다녔지만, 멀리 대학을 진학한 후 교회를 멀리 했다. 취업을 위해 워싱턴 D.C.로 이사한 후 친구에 의해서 다시 교회를 찾게 되었다. 거기서 성령님께서 그를 이끄셨는데, 여기에는 마크 데버 목사의 설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토요일 아침에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이사야서를 공부하자고 초대한 댄이 있었다. 또 은퇴한 헬렌과 하딘 부부, 그리고 그들보다 연배가 많은 폴과 앨리스 부부도 나를 저녁 식사에 초대해주었다. 교회 사람들이 정말 친절하고 따뜻하게 나를 품어주었다. 워싱턴 D.C.에는 믿지 않는 대학 친구들이 몇 명 있었는데 나는 점점 그들보다 교회에서 만난 이 새로운 친구들과 시간을 보냈고 오히려 대학 친구들을 그 모임에 초대하려고 했다. 회중의 이런 사랑과 헌신을 통해 나는 전혀 다른 유형의 삶을 엿보게 되었다.” 댄이나 폴, 앨리스 부부는 은혜가 이끄는 삶, 예수를 위하여 스스로 종이 되는 삶이 무엇인지 잘 보여줍니다. 조다단을 초대한 이들은 새 가족들을 돕는 부서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의 은혜가 그들로 하여금 20대 청년 하나를 섬기게 한 것입니다. 복음은 이런 방식으로 복음 위에 세워갑니다.
그러나 복음의 은혜는 교회 안에 있는 우리끼리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교회 밖의 세상을 섬기는 방식으로 복음의 은혜는 나타납니다. 우리가 만나본 적도 없는 지구 반대편에 사는 어떤 민족들을 향한 해외 선교일 수 있습니다. 가깝게는 주변의 이웃들을 섬기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단지 돈이 있어서 돈으로 감당하는 일이 아닙니다. 마게도냐 교회의 사례에서 보듯이, 그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는” 본이 되었습니다(고후 8:2). 물질적 재원이 풍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가 그들을 그렇게 움직이는 동력이 된 것입니다(고후 8:1). 오늘과 다음 주일, 우리는 교회 주변의 빈곤층 노인들의 실버카와 전기장판을 지원하기 위해 연보를 드립니다. 그들과 우리가 무슨 상관입니까? 왜 우리도 살기 어려운데 이런 일을 하는 겁니까? 은혜 때문입니다. 은혜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게 교회이고 우리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지극히 작은 일이 주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그들의 종이 되는 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복음 25:40).”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시편 기자와 함께 이렇게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시편 67:1–2).”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신자의 삶은 은혜가 이끄는 삶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