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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중심 삶 - (9). 복음 중심적 갈등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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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중심 삶 - (9). 복음 중심적 갈등 해결

갈라디아서 2:11-14, 베드로전서 4:8, 에베소서 4:1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3-12-17

말씀내용
 갈등은 인간관계에서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가깝고 의미 있는 관계일수록 그들 사이에는 갈등이 개재되기 쉽습니다. 특히 부부 관계와 부모와 자녀 관계 그리고 형제 관계나 동업 관계에서 갈등이 빈번합니다. 그래서 시중에는 갈등 해결의 방법을 다루는 책들도 적지 않습니다. 선교지에서 선교사들 간에도 갈등의 문제는 작은 문제는 아닙니다. 물론 모든 갈등이 동일한 성격을 가지지는 않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갈등의 문제에 복음적 접근을 할 수 있는가는 중요합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에게는 부부 갈등, 부모 자녀의 갈등, 인간 관계의 갈등을 풀어가는 뭔가 다른, 복음적 방법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복음이 머릿속 이론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1. 안디옥 스캔들 (갈 2:11-14)
오늘 본문은 초대 교회에서 안디옥 스캔들이라고 알려진 사건입니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두 거물 베드로와 바울 사이에 일어난 갈등의 문제였습니다. 일어난 사건을 표면적으로만 보자면, 안디옥 교인들과 함께 밥 먹던 자리에서 바울 사도가 베드로 사도의 면전에서 그를 책망한 사건입니다. 이 갈등 국면을 제대로 보려면, 사건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A. 안디옥 스캔들의 배경(행 8:1,4; 11:19-26; 10:44-48; 11:1-18; 눅 15:2; 행 11:3)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박해가 일어난 후 흩어진 사람들 중에(행 8:1,4) 구브로와 구레네 사람들이 안디옥의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세워진 교회입니다(행 11:19-21). 당시 안디옥은 로마 제국에서 로마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세번째로 큰 도시였고, 인종과 문화에서 매우 국제적인 도시였기에, 안디옥 교회는 기독교 역사에서 이방인이 다수인 또는 처음부터 유대인과 이방인이 혼합된 최초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적잖이 당황한 예루살렘 사도들은 바나바를 파견하여 조사를 하게 했고, 바나바는 이들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한 뒤, 안디옥에 남아 교회를 섬기는 가운데 교회는 계속 성장해 나갔습니다(행 11:22-23). 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도 바로 이 안디옥에서였습니다(행 11:26). 바나바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10여년 전에 회심을 하고 멀지 않은 다소에 있는 사울을 생각해냈고, 그를 불러들여 함께 안디옥 교회를 섬기게 됩니다(행 11:25-26). 이렇게 안디옥 교회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새 시대의 선교의 전초 기지가 될 준비를 갖추어 가고 있었습니다.
한편, 베드로는 이와 비슷한 시기에, 고넬료라는 이방인 백부장과 그의 온 가족의 회심을 목격하게 되고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방인 형제들과 며칠을 더 지내고(행 10:44-48) 예루살렘에 보고를 하게 됩니다(행 11:1-18). 이 사건은 베드로의 신학적 회심이라고 할 만한 사건이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여전히 유대인의 정체성에 매여 있던 베드로에게 하나님은 복음은 유대인만의 것이 아니고 이방인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는 은혜임을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로써 베드로는 유대인의 정렬 규례를 따라 사람을 정결하다거나 속되다고 판단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에게는 식탁 규정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비난을 받으셨던 핵심에도 식탁 문제가 있었던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눅 15:2)”고 예수님을 비난했지요. 유대인에게는 무엇을 먹는가도 중요했지만, 누구와 먹는가도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한 뒤에 받은 비난도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행 11:3)”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초기에 이방인들이 은혜를 받고 교회에 들어오면서 발생한 문제는 식탁 규정의 문제였습니다. 유대인 신자들이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앉아서 먹을 수 있는가? 다른 건 다 양보해도 이건 무너지기 쉽지 않은 마지노선이었습니다. 이런 긴장 관계가 초대 교회에 있었다는 점을 기억하고 본문을 이해해야 합니다.
소위 할례파는 이방인으로서 구원을 받으려면 먼저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행함으로써 유대인이 되고나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고, 베드로나 바나바 또는 바울은 고넬료 사건과 안디옥 교회에서 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할례나 유대인 됨 없이 이방인을 있는 그대로 받으셨고 그들에게도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써 복음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음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신학적 문제가 있었던 것이지요. 이것이 본문을 이해하는 간단한 배경 설명입니다.

B. 사건의 본질
당시 바나바와 바울은 안디옥 교회를 섬기고 있었고 베드로(게바는 아람어, 베드로는 헬라어 이름)가 안디옥을 방문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느 때와 같이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고넬료 사건 이후부터 베드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먹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상태였고 안디옥 교회에서 그렇게 함께 식사를 하곤 했습니다. 그때 마침 야고보에게서 왔다는(실제로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그 자리에 도착했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 동생으로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 역할을 하고 있었고 어떤 점에서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을 대표하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여기서 터지게 되는데, 이 방문자들을 본 베드로가 슬그머니 밥 먹던 그 자리를 떠난 겁니다. 이유는 12절에서 쓴 대로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행동을 본 다른 유대인들도 베드로를 따라 행동했고 바바바까지 유혹을 받아 외식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한 일은 외식이었습니다. 외식을 의미하는 영어 hypocricy는 본래 헬라어에서 배우가 얼굴에 가면을 쓰고 하는 연기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자기가 아닌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지요. 베드로는 자기의 신념과 확신을 따라 행동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두려워했던 것이,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지위를 잃을 것이었는지, 할례파들의 비난이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어쨌든 베드로는 그들의 압력 앞에서 외식을 행함으로써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 만들었습니다.
바울이 볼 때, 이것은 단지 한 개인의 일탈이나 외식이 아니었습니다. 표면상으로는 이방인과 유대인 신자들의 식탁 교제 문제였지만, 이것은 차별 없이 주어지는 복음의 은혜를 부인하고 신자들을 유대인 일등 시민과 이방인 이등 시민으로 분리함으로써 교회의 하나됨을 무너뜨리는 행위였습니다. 그것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14). 자, 여기까지의 상황을 따라오셨다면, 이제 우리가 바울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했을까를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복음적인 접근일지도 생각해 봅시다.


2. 선택 가능한 경우의 수들

A. 회피 (벧후 4:8)
첫번째로, 바울도 유대인이었으므로 베드로와 바나바 그리고 다른 유대인들이 하듯이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앉아 식사하던 그 자리에서 슬그머니 물러나는 선택, 즉 회피를 선택할 수도 있었습니다. 약간의 미안함을 표현하는 겸연쩍은 웃음과 함께 말입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행한 것은 화평을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니었을까요? 함께 먹던 안디옥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만 참아주면, 야고보에게서 왔다는 할례파와 아무 문제 없이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을까요?
여러분은 나 같으면 그렇게 했겠다 싶습니까? 많은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공격적인 성향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의 기질과 성향에는 이런 태도가 가장 일반적일 것입니다. 또 많은 교인들이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길, 소란스럽지 않게 조용히 끝낼 수 있는게 무조건 은혜로운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습니까? 대개 이 선택을 하게 되면, 양심을 따라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중에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변호하기 위한, 또는 주도적 인물을 공격하기 위한 뒷말을 하게 되기 쉽습니다. 이점이 바로 첫번째 선택이 가지는 가장 반복음적인 문제입니다. 뒤에서 자신의 행동과는 다른 말을 하게 되고, 다른 사람에 대하여 비난과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인데, 이 방식이야 말로,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사탄이 일할 수 있는 놀이터를 깔아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이 의도와 상관없이 거짓의 영역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상황을 직면하는 대신 회피하는 선택을 할 때, 이렇게 되기 쉽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방어적 기질을 가지고 있거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기를 회피하는 성향이라면, 갈등과 관련하여 이 부분을 깊이 생각해야만 합니다. 뒤에서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아닌지? 본문을 통해서 그리고 성경 전체의 가르침도 회피라는 선택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칼빈의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바울의 입을 통해 정죄하신 것을 옹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것은 인간적인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순수성과 관련된 문제이다.”(칼빈주석).

B. 개인적으로 뒤에서 조용히 해결
베드로와 유대인들이 보인 반응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두번째 태도는 조용히 사람을 시켜 베드로(혹은 바나바까지)를 밖으로 불러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을 옳지 않다고 지적해주는 것입니다. 후에 사도 베드로가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후 4:8)”고 했을 때, 이 일을 생각했던 것일까요? 그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성향이나 기질이 공격적이지는 않지만 뭔가는 해야 한다고 느낄 때, 이 선택—개인적으로 뒤에서 조용히 해결하는 선택을 취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의 이 본문을 읽는 독자들을 당혹하게 하는 것은 바울 사도가 ‘모든 자 앞에서’ 베드로를 책망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조용히 불러내서 개인적으로 권면하는 대신,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 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 답게 살게 하려느냐?”고 ‘대면하여 책망했습니다.’ 이 안디옥 스캔들은 두고두고 바울 사도의 성질, 기질에 대한 말들을 낳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과연 바울 사도의 성질, 기질만으로 설명되면 충분한 것일까요? 왜 성령님께서는 이 사건을 성경에 기록하게 하셨을까요?
일반적으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가 이 두 번째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 일도 아닌 것은 아니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만, 너무 크게 문제를 삼지 말고 조용히 개인적 차원에서 최소한 알아야만 할 사람들만 알고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지도자들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더 나은 방법처럼 보입니다. “오늘은 실수를 했지만, 앞으로는 잘 합시다”하는 쪽으로 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왜 바울은 이렇게 행하지 않고 공중 앞에서 대면하여 책망한 것일까요?
이런 해결책이 가지는 가장 큰 문제점은, 결국 비밀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는데, 그 알게 되는 사실이 팩트라기 보다는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고 왜곡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했대”하는 식입니다. 그래서 이것도 뒷담화를 만들어냄으로써 교회를 혼란으로 인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사인이 클수록 그러합니다.

C. 공적인 대면
마지막으로, 우리가 가장 선호하지 않을 듯한 선택이 바울이 보여준 선택입니다. 그는 공적으로 베드로를 책망했습니다. 이럴 때는 정말 분위기가 싸해지지요. 누구도 이런 상황을 즐기기는 어렵습니다. 먼저 바울이 이렇게 행동한 것을 그의 공격적 기질이나 성향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본문을 오독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시기하던 바울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베드로를 공격했다는 설명도 궁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바울과 베드로 그리고 바나바는 유대인 신자들로서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복음의 내용에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온 할례파들(율법주의 유대인 신자들)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이방인 신자들과의 식탁에서 조용히 물러나는 선택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방인 신자들로 하여금, 복음을 베드로의 행동이 보여주는 것으로 오해하게 할 소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심각하게는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 사이에 복음 안에서 하나됨을 깨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습니다. 갈등을 피하려다가 말입니다.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의 담임목사와 같은 역할을 하던 사람입니다. 그 역시 베드로의 외식에 동참함으로써 베드로의 행동을 정당화시켜 줌으로써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뻔 했습니다. 베드로를 따르는 바나바, 그리고 유대인들을 보면서 바울도 순간 그런 유혹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이 선택한—피하지 않았던—것은 세번째 방식, 모두를 당혹케 하는, 즉 식사 자리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습니다. 갈등을 해결하는 바울의 방식을 좀 더 살펴보지요.


3.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라 (마 5:9; 23:27; 벧후 3:15; 행 15:39; 갈 1:8; 엡 4:15)
주님은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9).”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의 방식은 화평하게 하는 자(peacemaker)의 방식이었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속은 시꺼멓게 타고 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는 평화는 아닙니다. 주님은 이런 모습을 경계하셨고, 바리새인의 외식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비난까지 하셨습니다(마 23:27). 주님은 거짓 평화가 아니라, 진짜 평화를 가져오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평화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복음의 은혜를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평화입니다. 이런 평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니면 가져올 수 없는 평화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행동한 방식은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는, 화평하게 하는 자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최고 지도자였던 두 사람, 바울과 베드로는 이 일로 인해서 갈라서지 않았습니다. 후일, 베드로는 그의 두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바울을 언급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벧후 3:15).” 안디옥 스캔들은 두 사람을 갈라놓지 않았고 여전히 복음 안에서 함께 부르심을 받은 사도들로 초대 교회를 섬겼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지게 된 일을 언급합니다(행 15:36-41). 물론 바울과 바나바가 2차 전도여행을 출발할 즈음,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갈 것인가 하는 문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게’ 됩니다(행 15:39). 그러나 어떤 저자가 이들의 행보를 ‘서로 동의하지 않기로 동의하였다(to agree to disagree)’고 설명한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표현은 사실 복음중심적 갈등에 관하여 소중한 통찰을 주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저 ‘싸워서 갈라섰다’가 아니라, 그들은 서로 일치할 수 없는 부분을 인정하고 각각 복음을 전하기로 동의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지금 안디옥 스캔들입니다. 바울은 어떤 동기로 베드로를 공적으로 책망하게 된 것일까요?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쓰면서 다른 복음은 없다는 말로 시작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지금 다른 복음을 듣게 되었고 그래서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천사라고 할지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고(갈 1;8) 이것은 베드로라고 할지라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게 참된 복음을 설명하려고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안디옥 스캔들로 알려진 이 사건이 참된 복음을 설명하고 드러내는데 필요하다고 여겼기에, 바울은 이 사건을 처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어떤 식으로든 평화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평화를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도 치루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지켜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복음의 진리였습니다. 그는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않는 베드로와 친구들을 보았고 그래서 이 나쁜 본보기를 끊어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구에게도, 심지어 공격적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건 성향과 기질의 문제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용감하게 베드로를 공적으로 책망했습니다. 언제나 공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는 복음을 오해하게 할 소지가 있는 공적으로 일어난 일이기에, 바울은 공적으로 책망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 사도가 많은 사람의 면전에서 베드로를 책망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인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아타나시우스가 거의 모든 교회가 삼위일체 이단인 아리우스주의를 포용할 때 다섯 차례나 주교직을 박탈 당하면서도 그것을 공적으로 대적함으로써 복음의 진리를 지킬 수 있었던 일, 그리고 마르틴 루터가 로마의 교황을 두려워하지 않고 생명을 걸고 복음의 진리를 위해서 그에게 도전장을 내민 것을 인하여 감사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바울이 한 일은, 그가 나중에 에베소서에서 썼듯이,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한 것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에베소서 4:15).” ’참된 것을 하여’라는 말은 ‘참된 것을 말하여’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바른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냥 덮어주는 게 사랑이라면 그것도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이 갈등을 풀어가는데 있어서 신중하고 지혜롭게 살펴야 하는 대원칙입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 뒤에서 말하는 게 아니고 앞에서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지 않는 사람은 뒷담화를 하기 쉽고, 이것은 더 큰 갈등을 초래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건방지지 않은 겸손함으로 그러나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방식입니다. 참된 신자는 믿음을 가지고 갈등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고, 이 사람이야말로 주님이 말씀하신 진정한 의미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바울의 용기가 아니었다면, 초대 교회는 안디옥 스캔들을 기점으로 이방인 교회와 유대인 교회로 분열되었거나 한 주님이 아닌 두 주님을 섬기는 성찬을 대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기회를 놓친 바울은 가는 곳마다 베드로를 판단하고 비난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복음은 우리 삶에서 피할 수 없는 갈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방법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길을 걸어가는 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