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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 (16). 멈출 수 없는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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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 (16). 멈출 수 없는 복음

사도행전 8:4-25, 로마서 10:17, 마태복음 16: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4-01-14

말씀내용
작년에 사도행전 강해를 쉬었다가 오늘 1년 만에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설교에서, 스데반의 설교가 어떻게 유대인들을 격동 시켰고, 결국 스데반을 집단 린치인 사형(私刑)의 형태로 죽이게 되었는지를 보았습니다. 칼빈의 말대로, 복음이 그 일을 초래했습니다. 그의 말입니다. “평소에는 점잖아 보였던 위선자들을 광기로 몰아가는 것이 복음의 본질이다.” 결국 이 폭력적 살인사건으로 예루살렘 교회에는 큰 박해가 시작됩니다. 여기서 사울이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그는 이 박해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사도행전은 여기서부터 큰 변화를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향한 박해는 복음의 확장을 불러 일으킵니다. 이것은 이후 2천년의 역사를 통해서 후대의 교회가 경험할 일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세기 교부 터툴리안이 말한 대로입니다. “우리를 죽여라. 우리를 고문해라. 우리를 정죄해라. 우리를 갈아서 먼지가 되게 해라. 너희의 불의는 우리가 결백하다는 증거다…우리가 너희에게 자주 짓밟힐수록 우리의 수는 더 많아진다. 그리스도인의 피는 씨앗이다.”


1. 편견을 넘는 복음—유대인의 땅끝, 사마리아에 전해진 복음(행 11:19; 1:8; 눅 9:54; 행 8:26)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로 흩어진 성도들은 대개 스데반이 속해 있던 헬라파 유대인들이었을 것입니다.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남았다는 사실은, 이 박해가 주로 헬라파 유대인—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것이었다는 합리적 추정을 가능하게 합니다. 칼빈의 표현대로, 어쨌든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 성벽 안에 갇혀 있던 그리스도의 몸은 더 멀리 그리고 더 넓게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첫번째 이야기가 오늘 본문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복음이 사마리아에 전파되었다는 사실이고 그 주역이 스데반과 같은 헬라파 유대인 지도자로서 일곱 일꾼에 선출되었던 빌립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일대의 저명한 역사학자였던 케네스 라투렛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 확장의 주역은 신앙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들이 아니라 순전히 세속적인 방식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자연스럽게 만나는 사람들에게 신앙을 전한 남성과 여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들이 4절에서 말하는 ‘그 흩어진 사람들’입니다(행 11:19 참조).
이미 우리는 사마리아가 유대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많이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사마리아는 지리적으로는 갈릴리 지역의 남쪽, 그리고 유대 지역의 북쪽, 그러니까 중간에 위치한 지역이었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왜 사마리아가 유대인들에게 혐오의 대상이 되었는지 그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왕국은 솔로몬의 아들 로호보암 때, 열 지파가 떨어져 나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형성함으로써 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로 구성된 남왕국 유다로 분열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성은 오므리 왕조 때부터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이자 중심지역이 되면서, 그 지역이 사마리아로 불리게 됩니다. 주전 722년 북왕국이 앗수르에게 멸망 당한 후, 앗수르의 혼혈정책에 따라 이방 민족들이 이스라엘 영토에 들어와 기존의 이스라엘 민족과 섞인 후손이 소위 사마리아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포로기 이후 예루살렘 성전 재건 사업에 참여를 거부당하고 나서, 그리심 산에 경쟁적 성전을 세우게 되는데(주전 432), 이때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 사이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게 됩니다. 이 성전은 주전 128년, 유대의 마지막 독립 왕조였던 하스모니안 왕조(주전 142-63)의 요한 힐카누스 1세(주전 134-104)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이방인, 혼합주의자 또는 이단자들이나 개와 같이 부정하게 여겼고 그들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유대 랍비들은 “누구든지 사마리아인의 떡을 먹는 자는 돼지 고기를 먹는 자와 같다”고 가르쳤고 당시 유대인의 기도문에는 “주님, 부활하실 때 사마리아인들을 기억하지 마소서”라는 구절이 있을 정도 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런 구약 전통에서의 정결함과 부정함의 기준을 깨뜨리시고 복음이 유대를 지나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파될 것을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행 1:8). 주님께서 사마리아를 특별히 언급하신 것은 중요하고, 또한 사도행전은 사마리아에 복음이 들어가게 되는 이야기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는 유대인의 땅끝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마리아 사람들도 유대인들에게 이런 감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전에 예수님과 함께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 들어갔을 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 9:54)”라고 쉽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눅 9:52-55). 말하자면, 유대인에게 사마리아 사람들은 쉽게 저주를 퍼부을 수 있는 대상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가서 그리스도를 전했다는 사실은 당시 유대인의 눈으로 본다면 거의 이해할 수 없는 미친 행동이었다는 점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가령, 26절에서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고 하여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나 복음을 전하게 되는데, 그가 사마리아로 간 것에는 이런 주의 사자의 지시가 있었다는 명시적 언급이 없습니다. 박해로 흩어지게 되었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을텐데 어떻게 빌립은 사마리아 성으로 간 것일까요? 그가 디아스포라 헬라파 유대인인 점을 감안한다고 할지라도 유대인의 입장에서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다만 한 가지, 우리는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사도행전 1:8).” 초대교회는 당연히 주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음에도, 흩어진 많은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박해로 온 유대로 흩어졌을 것이지만, 빌립은 사마리아로 향했습니다. 빌립이 주님의 말씀에 자신의 민족적, 종교적 선입견을 꺾고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복음 곧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생래적으로 또는 후천적으로 가진 편견과 선입견들을 이깁니다. 그리고 우리를 문화적 전제를 따라 사는 대신, 주의 말씀을 따라 행하게 합니다. 우리는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에서 이 사실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2. 차별이 없는 복음—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다 (롬 10:17)
사마리아에서 빌립의 복음 전도는 우리가 본문에서 보듯이 상당한 반응을 가져왔습니다. 빌립의 복음 전도에서 우리가 몇 가지 주목할 사항들이 있습니다. 먼저 그는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5). 사람들은 빌립의 말을 ‘들었고’ ‘표적’을 보았습니다(6). 표적은 7절에서 보듯이 더러운 귀신들이 쫓겨나고 중풍병자들과 못 걷는 사람들이 나은 것, 즉 불치병들이 치유된 것입니다(7). 사람들은 ‘한 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랐고(6)’ 그 성에는 ‘큰 기쁨’이 있게 되었습니다(8).
복음은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들어야 믿을 수 있습니다. 6절에서 사람들이 빌립의 말을 들었다고 할 때, 이 동사는 그저 듣는 것이 아니라 ‘주의해서 들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복음을 듣지 않고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롬 10:17). 그렇다고해서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이 언제나 동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정말 놀라는 것은, 같은 자리에서 오래도록 동일한 복음의 말씀을 듣고 어떤 사람은 은혜를 받고 영적 성장과 성숙을 이루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여 늘 그 자리에 머물거나 더 나빠진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노예해방가이고 정치인이었던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와 그의 친구이자 영국 총리를 지낸 윌리엄 피트(William Pitt)의 이야기가 유명합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함께 로버트 세실(Robert Cecil)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윌버포스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부요한 은혜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고 자신의 지성이 밝아지는 경험을 했지만, 피트의 반응은 “한 마디도 못 알아들었어.”가 전부였습니다. 복음을 듣고 깨닫는 것은 우리 신앙의 여정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또한 표적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표적을 보았기 때문에 구원에 이르렀다는 뜻은 아닙니다. 신약성경에서 표적은 언제나 복음과 그 사역에 대한 확증적 증거의 역할을 하는 보조적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복음에 반응을 했습니다. 그것은 ‘한 마음으로 그가(빌립이) 하는 말을 따른’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 그 결과는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는 것이었습니다(8). 복음이 가져온 기쁨은 믿음의 열매였습니다. 오랜 동안 형에게 혼합주의자요 이단자라고 무시당해 왔던 탕자들이 주께로 돌아왔고 주님은 그들에게 가장 좋은 옷과 가장 비싼 반지, 가장 좋은 샌들을 꺼내 주신 것입니다.
이제 이야기는 한 인물을 향합니다. 마술사 시몬입니다. 그는 이미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였고, 스스로를 ‘큰 자’라고 부르던 사람입니다(9).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그를 따랐고 사람들은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불렸습니다(10). 여기서 본문은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기본적인 요소를 하나 언급합니다. 마술사 시몬은 자신이 행하는 마술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면, 빌립은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들려줌으로써 그리스도를 주목하게 했습니다. 시몬이 자신을 높였다면, 빌립은 그리스도를 드러냈습니다. 이것은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기본적 요소입니다. 빌립이 전한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습니다(12). 사람들은 이 전도함을 들었고 믿었으며 많은 남녀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놀랍게도 여기에는 마술사 시몬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기까지 했습니다(13). 그러나 본문은 그가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고 언급함으로써, 시몬의 관심사가 표적과 능력에 있었음을 살짝 암시합니다.
사마리아 성에 복음이 전파되고 사마리아 백성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은 예루살렘에 머물던 사도들과 유대인-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을 주는 뉴스였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로 보내기로 한 것이 그들의 놀라움을 보여줍니다(14).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에 와서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았음”을 확인하고(16)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고(15)” 그들에게 안수하자 그들은 성령을 받게 됩니다(17). 한때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하는 불을 구했던 요한은 이제 기도하여 그들이 성령의 불을 받게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잠깐 멈추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는 받았으나 아직 성령을 받지 않았다는 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과 세례 그리고 성령 받음은 분리될 수 있는 일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믿음, 세례 그리고 성령 받음이 시간적 간격을 가질 수 있고 분리될 수 있는 일이라면, 본문은 그것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믿음이 참된 것이라고 인정을 했기 때문에 그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신학적 논란을 야기하는 ‘사마리아의 오순절’로 불리는 이 사건은, 매우 특수한 상황에서 일어난 특수한 경험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식의 두 단계 체험은 이후 신자들이 경험하는 일반적 경험이 될 수 없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할 때 첫 오순절 때와 같이 시청각적으로 임한 사건이었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시몬이 이 권능을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는 베드로와 요한이 직접 가서 기도함으로써 성령을 받는 일이 후속적으로 일어난 것일까요? 사마리아 선교는 기독교 선교에서 최초로 일어난 충격적인 복음적 진보의 사건이었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의 구성원이 아닌 사람들에게 처음 복음이 전파된 경우였습니다. 특히 이들이 성령을 받는 사건은 개인이 아닌 집단적 경험이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제 하나님의 백성의 새로운 공동체 속으로 완전히 편입되었다는 역사적 사건은 부인할 수 없는 외적, 현상적 증거로 확증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럴 벅은 말합니다. “이 일은 예루살렘 교회가 자신들의 고향 밖, 은혜의 수혜자로 여기지 않을 땅에서 생기는 일을 받아들이는 것을 돕기 위해 계획된 것이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한 것은 그들의 회심을 보여주는 사건이 아니라 땅 끝까지 새 언약을 증거하는 일의 새로운 단계를 나타내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위험한 신앙—시몬(Simon)과 시모니(simony) (마 16:4)
본문은 여기서 사마리아 사람들의 구원 이야기를 끝내지 않고 한 가지 경고를 덧붙입니다. 그것은 시몬의 이야기입니다.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며 빌립을 전심으로 따르던 시몬은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하자 성령이 임하는 광경을 보자 더욱 놀라게 됩니다. 그리고 당장 사도들에게 돈을 드리면서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라고 성령을 받게 하는 능력을 자기에게 주기를 구합니다(19). 시몬은 돈으로 영적 능력을 사려고 한 겁니다. 시몬의 요구는 성직매매를 뜻하는 시모니(simony)라는 단어를 만들어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시몬의 행위를 ‘이 땅에서만 가치 있는 것으로 값을 치러 영적인 것 또는 영적인 것에 관계된 것을 사거나 팔려는 의도적인 계획’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라고 호되게 책망했습니다(20). 필립스역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돈 모두 지옥행이오!” 하워드 마샬은 “이 말은 욕설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헬라어가 정확히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평합니다. 베드로는 돈으로 성령의 능력을 사려고 한 시몬을 저주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사도행전 8:21–23).”고 덧붙였습니다. 물론 시몬이 겸손하고 진실되게 용서를 구한다면 소망이 있겠지만, 그의 죄가 얼마나 엄중한 것인지를 보여준 말씀입니다. 시몬은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않게 하소서”라고 간청합니다(24).
시몬의 이 대답과 함께 시몬의 구원 여부는 많은 논란을 낳았습니다. 시몬의 대답은 그가 베드로의 지시와 경고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시몬이 비록 ‘믿고 세례를 받았’으며,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녔’다고 했지만 그의 결말은 그의 신앙이 참된 신앙이 아니었음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랐다’는 언급도 그의 신앙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하는 대목입니다(13). 주님께서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향하여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비난하신 의미를 깊이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마 16:4). 시몬이 구했던 것은 성령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성령을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을 구했습니다. 이것은 가장 위험한 신앙적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후 역사를 보면, 2세기의 초대 교부 이레네우스(A.D. 180)는 그를 영지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렀고 초기교회에서 그는 ‘모든 이단들의 아버지’라고도 불렸습니다. 어쩌면 시몬의 믿음의 진위를 판단하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닐지 모릅니다. 시몬의 이야기가 열린 결말로 끝나는 것은 독자인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은 통제 될 수 없으며 매매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는 엄중한 사실입니다.


4. 교훈과 적용 (행 20:32; 골 3:11)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몇 가지 교훈을 적용적 관점에서 생각해 봅시다.
첫째, 복음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사탄의 예루살렘 교회 박해 전략은 복음의 확장을 가져올 뿐이었습니다. 사탄이 일으킨 큰 물결과 풍랑은 교회를 침몰 시킬 수 없었고 교회는 풍랑으로 인해 더 빨리 가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지난 2천년의 역사에서 이것을 반복적으로 경험했습니다. 본문 마지막 절인 25절을 보십시오.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언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니라(25).” 4절에서 흩어진 사람들의 복음 전파로 시작한 본문은 25절에서 두 사도의 복음 전파로 마칩니다. 사도행전에서 주의 말씀은 거의 살아있는 인격처럼 묘사되기도 합니다(행 20:32). 그러므로 주의 말씀, 복음은 아무도 멈출 수 없습니다. 아무도 복음의 진전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동일합니다. 저는 계속 이 강단에서 복음을 전할 것이고, 우리는 계속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후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설령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말씀은 계속해서 온 세상을 향해 달려갈 것입니다. 복음은 멈추지 않습니다.
두번째로 복음은 차별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모든 인종적, 문화적, 종교적 편견을 깨뜨립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국한되었던 복음이 처음으로 그 민족을 벗어나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로 확장되었습니다. 복음은 지역적으로는 예루살렘과 온 유다를 넘어 사마리아 지역으로 확장되었고, 민족적으로는 유대인들에게 개와 같이 여겨지던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로 확장되었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로새서 3:11).” 민족적, 종교적 편견을 버리고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로 향했던 빌립의 순종은 결국 사도들의 순종으로 이어졌고(25), 이것은 차별하지 않는 복음의 본질을 초기 교회 성도들에게 가르쳐 주었을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모든 옳지 않은 편견을 무너뜨립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어떻습니까? 복음은 우리의 인종적, 민족적, 문화적 편견을 깨뜨리고 우리로 하여금 낯선 이들, 다른 이들에게로 가게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렇게 차별하지 않는 복음을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드러내고 있습니까?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땅끝에 있는 사람들에게로 다가 서고 있습니까?
세번째,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초기 교회의 전도는 쫓겨난 난민들의 전도였습니다. 그들은 박해로 인해 흩어진 사람들이었고 그들 중 하나가 빌립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기에(12),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조건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조건과 상황에 관계 없이 언제나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삶에 대한 합당한 핑계는 없습니다.
네번째, 우리는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성령을 받아야 하는 두 단계의 축복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확증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에베소 교회에서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행 19:5-6). 우리는 믿을 때, 성령님께서 믿는 우리 영혼에 이미 내주를 시작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다섯째로,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하나님이신 성령님은 통제될 수 없고 매매의 대상이 될 수도 없습니다. 돈으로 영적인 것을 살 수 없고, 무엇으로도 하나님을 조종할 수 없습니다. 시몬이 돈으로 성령을 부여하는 능력을 얻고자 했던 것은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오만불손한 태도였습니다. 내가 기도하면 병이 낫고, 이렇게 저렇게 하면 부흥을 오게 할 수 있다는 식의 태도는 시몬의 태도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위험한 태도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열매에는 관심이 없고 성령의 은사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경건하다고 생각하게 하기 위해 경건해 지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이 모순적이고 위험한 태도입니다. 일생동안 우리는 이런 시몬적 태도를 경계해야 합니다. 참된 복음은 무한히 선하신 하나님, 아름다우신 구주를 바라보게 하고, 하나님을 주목할 때 그리스도께 마음을 빼앗길 때 우리는 모든 시몬적 태도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