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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 (17). 우연처럼 찾아온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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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 (17). 우연처럼 찾아온 축복

사도행전 8:26-40, 이사야 53:7-8, 이사야 56:3-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4-01-21

말씀내용
인생에는 우연처럼 일어나는 일들이 있습니다. 논리적인 설명을 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을 경험하게 될 때, 그리스도인은 그 우연 뒤에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이고 기막힌 섭리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초자연성을 믿지 않는 현대인들은 그저 우연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우연처럼 찾아온 축복을 봅니다.


1. 한 사람의 구원 이야기 (왕하 1:3,15; 마 1:20,24; 사 53:7-8; 고후 12:2; 살전 4:17)
이 에피소드는 한 사람의 구원 이야기입니다. 빌립은 사마리아에서의 성공적 복음사역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가사로 가는 광야길로 내려가라고 지시합니다. 가사는 지금 이스라엘의 집중적 공격을 받고 있는 가자 지역인데, 구약시대에는 블레셋의 다섯 성읍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주의 사자 즉 천사의 지시를 받는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에게는 익숙한 일이었고(왕하 1:3,15), 마리아의 남편 요셉도 경험한 일입니다(마 1:20,24; 2:13,19). 주의 사자의 명령은 종종 그 이유나 결과를 밝히지 않는데, 이는 우리의 순종을 시험하시기 위함이라고 칼빈은 말합니다. 여기서도 왜 빌립이 가사를 향해 광야길을 가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밝히지 않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출발해야 했다면 예루살렘까지 70km가 넘고, 예루살렘에서 가사까지도 80km가 넘는 먼 길이었습니다. 게다가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대상들이 지나는 광야길을 홀로 지난다는 것은 보통 위험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빌립은 묻지 않고 순종합니다. 지시하신 길로 2-3일을 내려가다가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예루살렘 순례를 마치고 돌아가는 에디오피아 내시로,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고위 관리였습니다. 이렇게 광야 길에서 약속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기적이고 우연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지만, 성령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주도적으로 진행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직접 빌립에게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29). ‘우연하게도’ 빌립이 수레에 접근했던 그 시각, 내시는 성경을 읽고 있었고, 그것도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언한 이사야서 53장을 읽는 중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소개하기에 최적의 본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크게 소리를 내서 책을 읽었기에, 빌립은 수레에 가까이 갔을 때 그 읽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그에게 묻습니다(30). “읽는 것을 깨닫느냐?(30)” 내시는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고 반문하면서, 빌립을 수레로 청합니다(31). 내시는 빌립이 뭔가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직감했던 것 같습니다.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32-33; 사 53:7-8).” 내시의 질문은 명확합니다.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34).”
빌립은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리쳐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35). 도살자에게 끌려가는 양처럼, 털 깎는 자 앞의 어린양처럼 입을 열지 않은 분,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한 채 생명을 빼앗긴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그 의미를 분명하게 말했을 것입니다. 본문은 빠르게 진행됩니다. 이렇게 복음을 들으면서 가던 중 그들은 어느 새 물이 있는 곳에 이르게 됩니다. 내시는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고 하였고 내시의 신앙의 진정성을 확인한 빌립은 거기서 내시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조금 극적으로 헤어집니다.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39).” 성령님께서(주의 영) 개입하셔서 빌립을 이끌어 가셨습니다. ‘주의 영이 이끌어갔다’는 말은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초자연적 현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입니다(고후 12:2; 살전 4:17; 계 12:5 참조). 갑자기 성령님께서 빌립을 이끌어가시자, 함께 있던 내시는 그를 다시 볼 수 없어 어리둥절했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시는 ‘기쁘게’ 가던 길을 갔습니다. 여기서 기쁘게 갔다는 표현은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참된 회심자가 누리는 확실한 성령의 열매가 기쁨임을 보여줍니다(2:46; 5:41; 8:8; 13:48,52; 16:34). 이후 빌립은 아소도(구약성경에서 아스돗, 블레셋의 다섯 성읍 중 하나)에 나타났고 여러 성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후에 가이사랴에 정착한 것 같습니다. 약 20년이 지나, 빌립은 가이사랴에서 바울 일행을 맞이하는 장면에서 다시 등장합니다(행 21:8-9).


2. 땅끝의 상징, 에디오피아 내시 (레 21:16-23; 신 23:1; 행 10:2; 13:16,26; 사 56:3-5)
에디오피아 내시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먼저 구약성경에서 구스라고 불린 에디오피아는 고대 누비아 왕국으로 현재의 이디오피아 지역 보다 북쪽인, 이집트 남부와 수단 북부 지역을 지배한 왕국입니다. 당시 에디오피아의 왕들은 신성한 태양의 아들로 숭배되었기에 세속적 통치 행위를 하지 않았고, 그 일은 대개 간다게라고 불리는 대비(왕의 어머니)가 수행을 했습니다. ‘에디오피아 여왕’은 이 대비를 가리키고 ‘간다게’는 애굽 왕을 바로라고 칭하는 것과 같은 칭호였습니다.
이 내시는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고위 관리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간다게를 도와 국정을 수행하는 고위 관리들은 다 내시들이었습니다. 내시는 거세당한 사람을 의미하는데, 어떤 학자들은 고대 근동에서 내시에게 주요 국정을 맡기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나중에는 정상적인 남자라도 권세를 가지고 국정을 수행하는 고위 관리들을 내시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그를 내시라고 굳이 칭하는 것은 의도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모세 율법에 의하면, 내시 즉 거세 당한 자는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었고(레 21:16-23)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신 23;1).
그런데 이 사람이 지금 왜 예루살렘에 갔다 오는 것입니까? 그는 유대인의 절기에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흑인-이방인으로서 유대교로 개종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어떻게 유대교로 개종할 수 있었을까요?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박해가 복음 전도의 동력이 되었던 것 처럼, 구약의 역사 속에서도 유다의 멸망과 흩어짐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개종자들을 각지에서 많이 만들어내게 된 것을 보게 되는데, 그 하나의 열매가 이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당시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 할례는 받지 않고 율법을 따라 살며 여호와를 섬기고자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불렀는데(10:2; 13:16,26 참조), 아마 이 내시가 그런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 이야기에 이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은 의도적으로 보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행 1:8)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 이어 땅끝까지 복음이 증거되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입니다. 벤 위더링턴 3세에 의하면, 고대인들은 구스라고 불리는 에디오피아를 대지의 끝으로 여겼습니다. 에디오피아가 지리적 땅끝이라면, 유대교 안에서 온전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유대교의 경계에 서있는 내시에게 복음이 전해진 것은 생물학적 혹은 사회적 땅끝을 향해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이기도 했습니다.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이사야 56:3–5).” 이사야 56장은 빌립과 헤어진 내시가 성경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읽었을 내용입니다. 그는 이사야의 이 예언의 말씀을 읽으면서 얼마나 전율하고 기뻐하며 감격했을까요? 내시가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 사건은 차별하지 않는 복음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보여주는 표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자 누가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이 글을 쓸 때, 사도가 아닌 초대교회의 평범한 한 일꾼인 빌립을 통해서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3. 우연으로 포장된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 (눅 24:27)
우리가 본문에서 주목할 두번째 부분은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어떻게 복음이 전해졌고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내시의 시점에서 보겠습니다. 그는 간다게의 허락을 받고 예루살렘 순례라는 대단한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중입니다. 이제 가사를 지나면 애굽으로 들어가게 되고 애굽을 지나면 누비아 왕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값비싼 돈을 지불하고 성경 가운데 이사야서 두루마리를 구입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돌아가는 수레에서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그가 빌립에게 던진 질문을 보면 그는 정말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진지하게 진리를 추구하는, 하나님을 알고자 추구하는 종교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직 확실한 것을 붙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침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을 읽으며 이해하지 못해서 답답해 할 때, 수레 밖에서 한 사람이 묻습니다. “읽는 것을 깨닫느냐?” 내시는 묻는 이 사람은 답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직감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를 청하여 수레에 앉게 했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이 말씀이 가리키는 사람이 선지자 자신인지 다른 사람인지? 그러자 그 사람은 자신이 읽던 바로 그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주었고 복음을 들려주었습니다. 내시는 그 말씀이 믿어졌고, 복음의 모든 말씀이 받아들여졌습니다. 이제까지 자신에게 해결되지 않고 남아있던 문제의 열쇠를 얻은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듣는 동안, 그의 수레는 물이 있는 곳에 이르게 되고,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분명하게 고백한 내시는 빌립에게 세례를 달라고 청합니다. 두 사람은 수레에서 내려 함께 물에 들어가, 내시는 세례를 받고 나자, 그 고마운 사람 빌립은 홀연히 사라집니다. 내시는 자신이 이전의 자신이 아님을 알고, 전에는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기쁨이 충만해서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여기까지는 내시의 시점입니다. 여기에는 정말 우연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그날 내시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시점으로 사건을 기술합니다. 이야기는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지시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주도하셔서 시작된 것이라고 말하는 방식입니다. 주의 사자의 지시에 순종하여 먼 길을 간 빌립은 광야길에서 에디오피아 내시의 수레 행렬을 만나게 됩니다. 수레 근처까지 간 빌립은 수레에 탄 사람이 성경의 이사야서의 본문을 큰 소리를 내어 읽는 것을 듣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내가 너를 이 수레에서 성경을 읽는 이 사람에게 보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순간은 마침 내시가 이사야 53장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예언을 읽고 있던 그때였습니다. 신약 성경이 단 한 줄도 기록되지 않은 때에 전도자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는 사람에게 예수님을 제시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이사야의 이 본문보다 더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었던 구절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빌립은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여 주셨던 것처럼(눅 24:27) 그 말씀에서 시작하여 그 예언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취되었는지를 말해주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 복음의 말씀을 듣는 동안 내시의 심령 안에서 그 말씀을 통해 거듭나는 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이것을 확인한 빌립이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자, 주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빌립을 다시 다른 곳으로 취하여 가셨습니다. 내시는 기쁨으로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4. 교훈과 적용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며 어떤 교훈을 주십니까?
A. 내 인생에 우연처럼 찾아온 축복 (요 6:65)
첫째로, 우리가 얻는 교훈은 그날 내시에게 일어난 일은 우리에게도 일어났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날 아침, 에디오피아 내시는 자기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2-3일 전에 사마리아에 있는 빌립에게 천사를 보내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광야길로 가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어쩌면 그 순간에 내시는 예루살렘에서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면서 이사야서 두루마리를 구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2-3일 전에 사마리아의 빌립에게 천사를 보내 가사 방향으로 가라고 명하신 하나님께서는, 한편 예루살렘에 있던 내시에게는 이사야서 두루마리를 손에 넣게 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 자신을 위해서 준비하고 계시는 것을 전혀 의식도 하지 못한 채 말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정확한 시간에 광야길에서 빌립이 내시를 만나게 하셨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정확하게 내시가 그 말씀을 읽고 있었을 때 말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님께서 보이지 않는 장소에서,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한 시간에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일을 계획하시고 준비하시고 일하기 시작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이것이 이 에피소드를 통해서 우리가 보는 내용입니다. 여기에는 우리를 향한 중요한 가르침, 교훈이 있습니다. 우연처럼 찾아오는 축복의 이야기는 내시에게만이 아니라, 믿는 여러분의 인생에도 동일하게 일어난 일이고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이 자리에 아직 주님과 구원의 관계 속에 있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의 삶에도 동일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연히 일어나는 것 같지만, 성령님께서 정하신 장소와 시간에, 성령님께서 준비하신 사람을 통해서 우리의 회심은 일어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비단 회심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모든 일들 속에, 우연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이미 일하고 계시고 현재도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들은 자신이 보고 아는 것 외에, 언제나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하심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상황 속에서,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는 능력도 무한하고 지식도 무한하고 다른 모든 것도 무한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우리 밖에, 우리 위에,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십니다. 우리의 구원 사건은 언제나 하나님이 주도하신 결과입니다.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요한복음 6:65).”고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에디오피아 내시의 구원 이야기는 내시가 하나님을 찾은 이야기라기 보다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서 추적하셔서 그를 당신의 품으로 끌어안으신 이야기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언제나 그렇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역사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 삶에 기대를 가지게 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는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누리는 낭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런 낭만이 있는 것입니다.
B. 우연처럼 찾아온 축복의 도구들 (벧전 1;23; 약 1:18; 롬 1:16)
둘째로, 내시에게 우연처럼 찾아온 축복은 어떻게 그에게 찾아오게 되었는지, 그 도구들이 무엇이었는지 본문은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성령님께서는 빌립을 통해서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빌립은 인간 도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빌립에게 보내시는 대신, 직접 에디오피아의 내시에게 보내셔서 직접 말씀의 의미를 가르쳐 주실 수는 없었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빌립에게 보내 이토록 복잡하게 일을 하시는 것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을 사용하실 때, 사람을 참여하게 하셔서 영광과 기쁨을 함께 누리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빌립은 주의 사자의 명령에 묻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지금 사마리아 사역이 얼마나 신나게 진행되고 있는지, 그 일에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빌립은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 수 있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사야 53장의 말씀으로부터 복음을 전하는데 주저함이나 특별한 어려움을 느꼈던 것 같지 않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성령의 도우심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이점에서 빌립은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사람, 빌립 같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 아는 사람이고 자신이 믿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정확하게 알려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어디에서든지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시를 구원하는 일에서, 어쩌면 빌립보다 더 중요한 도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복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복음 없이 참된 거듭남과 회심은 없습니다(벧전 1:23; 약 1:18). 전도자는 복음을 말하고 복음을 들려주는 사람일 뿐입니다. 빌립은 내시가 읽고 있던 이사야의 복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쳤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빌립이 내시를 구원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의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롬 1:16). 복음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저는 오늘도 복음을 전하고, 우리는 선교사들을 보내며 후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능력자들이라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복음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시에게 우연처럼 찾아온 축복이 임했던 그 장소가 지금은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고, 누비아 왕국의 고위 관리였던 그 내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많은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전쟁의 참화 속에서 비참한 삶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관리와 지금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다르지만, 그들 모두가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은 복음이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 말고 어떤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들에게도 그렇고 우리에게도 그렇습니다.
2024년 새해를 시작한지 스무 날이 자났습니다. 새해에 우리 인생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결국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영원한 기쁨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