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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 (18). 회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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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 (18). 회심

사도행전 9:1-19a, 사도행전 22:2-16, 사도행전 26:9-1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4-01-28

말씀내용
본문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한 인물인 사울의 회심에 대한 기록입니다. 누가는 앞에서,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박해로 복음이 온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을 상징하는 에디오피아 내시에게까지 전해지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9장부터 사도행전은 새로운 장으로 들어가는데, 그 시작은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는데 주도적 역할을 감당할 한 인물의 회심 사건입니다. 사울의 회심 기록은 사도행전에서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이 본문 외에, 22장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에 모인 적대적 유대인 군중을 향해서 말했고, 26장에서는 아그립바 2세와 베스도 총독 앞에서 자신의 회심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울의 회심은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 중 하나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없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약성경도 없었을 것이고, 그리스도와의 연합, 믿음에 의한 칭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설명으로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중요성 등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핵심 교리들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 다소의 사울 (행 8:1,3; 9:11; 18:25-26; 19:9,23; 21:39; 22:3-6; 24:14,22; 26:10; 빌 3:5-6; 갈 1:13-14; 민 25:7-13; 딤전 1:13-15; 고후 11:32-33)
먼저 사울 또는 바울이라고 불리는 이 인물을 조금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울은 오늘날 튀르키예의 남부 해안, 길리기아 지방의 도시, 다소 출신이었습니다(행 9:11, 22:3). 그는 날 때부터 로마 시민이었는데(행 22:28), 아마도 그의 가족(아버지나 할아버지)이 다소에 봉사한 대가로 공식 시민권을 부여 받은 흔치 않은 경우로 보입니다. 바울 자신은 다소가 작은 도시가 아니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말하는데(행 21:39), 실제로 상업과 교육에서 중요한 도시였고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에 버금가는 대학이 있었습니다. 사울은 이곳에서 헬라어와 헬라 문화를 경험했고 예루살렘에 와서는 바리새주의의 창시자인 랍비 힐렐의 손자 가말리엘의 지도 하에서 율법을 공부함으로써 바리새인이 되었습니다(행 22:3,6; 빌 3:5). 그는 다른 사람보다 열심이 남다를 정도로 유대교에 헌신적이었고(갈 1:14), 율법에 관하여는 흠이 없다고 자평할 정도였습니다(빌 3:6).
사울은 같은 베냐민 지파로 이스라엘 초대 왕이 된 사울의 이름을 딴 히브리식 이름이었고, 바울은 헬라식(또는 로마식) 이름이었습니다. 사울이 회심 후에 바울이 되었다고 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당시 대부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히브리식 이름과 로마식 이름을 가졌던 것처럼 사울과 바울은 그가 가진 두 개의 이름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는 주님을 만나 회심하기 전의 자신을 종종 회상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에 사도라 불릴 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고전 15:9). 그는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는 자였으며(갈 1:13), 또한 ‘열심으로’ 교회를 박해했노라고(빌 3:6) 고백합니다. ‘멸한다’는 단어는 ‘약탈하다, 강탈하다, 때려부수다’와 같이 그 행위가 포악하고 폭력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사울이라는 인물이 무슨 깡패가 아닌 다음에야, 이런 열심은 어디서 나온 것이며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었을까요? 당시 유대교 전통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공공연하게 위반한 죄인을 응징하는 경우 유대인 동족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것도 정당한 행위로 간주되었고, 이런 일이 장려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전통의 정당성은 비느하스에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는 바알브올을 숭배하고 그 형벌로 진영 전체에 염병이 돌 때 이스라엘 남자 시므리(그는 시므온 지파의 지도자였습니다)가 미디안 여자 고스비와 동침하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을 단번에 창으로 죽임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그치게 하고, 그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대제사장 직분을 약속 받은 인물입니다(민 25:7-13). 사울은 교회를 핍박하는 자신의 열심이 비느하스의 정신을 이어받은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인식했을 것입니다.
사울이 나중에 예루살렘에 모인 적대적인 유대인들에게도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사도행전 22:4-5).” 그리고 아그립바 왕(2세)에게도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였다”고 말합니다(행 26:10). 나도 전에는 너희가 지금 나를 규탄하는 것 이상으로 비느하스의 열심으로 살았다는 항변입니다. 사울의 고백의 절정은 디모데전서 1:13입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그는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합니다(딤전 1:15). 죄인의 수괴, 최고의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존 번연은 자신의 영적 자서전의 제목을 『죄인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라고 했는데, 가이 워터스(Guy G. Waters)도 오늘 본문의 제목을 이를 따라 “죄인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라고 붙였습니다.
우리는 본문 1-2절에서 사울의 인물됨을 조금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는 스데반의 죽음에 앞장섰고(행 8:1) 예루살렘 교회 박해를 주도하였지만(행 8:3)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배가 고팠습니다. 1절에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라는 말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아직도 위협과 살기의 숨을 내뿜으며’입니다. 내뿜는다는 말을 통해 누가는 먹이를 찾는 맹수를 연상하게 합니다. 죄인 괴수, 악당(villain) 중의 악당의 모습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교회를 없애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고, 박해를 피하여 다른 지역들로 퍼져 나간 길따름이들을 추격하여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잡아와서 심문하고 투옥 시키기를 원했습니다. 2절에서 ‘그 도를 따르는 사람’ 즉 길따름이는 처음에 그리스도인을 부르는 칭호 중 하나였습니다(행 19:9,23; 24:14,22). ‘그 도’는 때로는 ‘주의 도’ 또는 ‘하나님의 도’라고 불렸습니다(행 18:25-26).
우리는 사울이 길따름이들을 잡으려고 다메섹까지 가려고 했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다메섹은 예루살렘에서 북북동쪽으로 216km 떨어진 도시였고 말을 타고 가더라도 6일이 걸리는 여정이었습니다. 현재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인 다메섹은 고대 아람의 수도였고 당시에는 나바티아(Nabatea) 왕 아레다 4세(Aretas IV, 주전 9-주후 40)의 통치 아래 있었습니다(고후 11:32-33). 아레다 왕은 유대인의 환심을 사려고 유대의 대제사장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는데, 특히 종교적인 문제에서 대제사장의 권위를 크게 인정하였기 때문에, 사울은 대제사장의 공문을 사용하여 다메섹에 있던 종교 죄인들인 길따름이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할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당시 다메섹에 어떻게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다메섹 태생의 제자들이 있었을 것이고 예루살렘 박해로 쫓겨간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다메섹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회당도 여럿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대제사장에게서 영장을 받아 다메섹으로 가는 그는 위협과 살기를 내뿜는 맹수의 모습입니다. 사울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2. 예기치 않은 사건 (3-9; 22:6,9; 26:13-14; 고전 9:1; 15:8; 신 28:28-29)
이 사람이 다메섹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 일행이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3), 예루살렘을 떠난지 약 6일째 정오 쯤이었습니다(행 22:6). 사울은 길에서 예기치 않은 초자연적 현상을 경험합니다. 정오의 태양빛이 중동의 대지에 뜨겁게 내리쬐던 시간, 태양빛을 무색하게 할 만큼, 한 번도 보지 못한 밝은 빛이 하늘로부터 그를 둘러 비추었습니다(행 26:13). 사울의 반응은 땅에 엎드러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현존이 가시적으로 나타날 때 사람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반응이며, 사울이 자신보다 더 큰 자에게 압도당했다는 싸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것은 히브리 말이었습니다(행 26:14).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이름을 두 번이나 연속해서 부르는 것은 상황의 긴박성을 보여줍니다. 사울은 물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구약에 정통한 사울이 ‘주여’라고 불렀다는 것은, 지금 자기가 말하는 대상이 천사가 아니면 하나님이심을 어느 정도 인식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사울은 자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사울은 적어도 두 가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첫째, 십자가에 죽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계시다! 길따름이들이 지겹게 말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둘째, 자신은 그리스도의 길따름이들을 박해한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박해하고 있었다는 사실. 주님은 네가 나를 박해하였다고 말씀하심으로써, 당신의 제자들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까? 여기에, 나중에 사울이 깨닫고 기록한 복음의 진수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교리, 그리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그의 교회론이 바로 여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참의 논리적 과정을 거쳐서 내린 결론이 아니라, 그 순간에 거의 직감적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사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영광을 보았습니다(고전 9:1; 15:8). 이제 더 이상의 논쟁도, 싸움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사울에게 지시하십니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으니라.” 부활하신 주님의 권위는 사울에게 즉각적이고 전적인 순종을 요구합니다. 누가는 7절에서 이런 설명을 덧붙입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사울은 다메섹의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호송하기 위해 공권력이 필요했기에, 사울과 같이 가던 사람들은 성전 경찰들이었을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소리는 들었으나 보지는 못했다고 누가는 설명합니다. 그러나 사울의 회심 사건에 대한 다른 두 번의 진술을 참고하면, 여기에는 약간의 논쟁적 요소가 있습니다. 22장에서 사울은 적대적 유대인 군중을 향해,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고 했기 때문입니다(22:9). 26장에서도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고 했고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라고 한 뒤에 “내가 소리를 들으니”라고 함으로써 22장의 진술과 비슷한 방식으로 말했습니다(26:13-14). 그러나 이 차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소리를 들었더라도 그것을 주님의 말로 알아들을 수 없었고, 빛을 보았더라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현으로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들은 하늘에서 울리는 소리(sound)는 들었더라도 목소리/음성(voice)은 듣지 못한 것입니다(요 12:28-29 참조). 눈은 떴지만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된 사울은 일행에게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한 신학자는 이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다메섹에 있는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려던 위대한 사냥꾼이 눈 멀고, 약하고, 무력한 손을 이끌고 다메섹에 들어섰다.” 그는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이 사냥꾼은 또 다른 사냥꾼에게 쫓기고 있었고 출구는 없었습니다. 가이 워터스는 사울의 눈이 잠시 멀었던 것을 사도행전 13:11에 비추어 볼 때, 주님과 교회를 핍박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신 28:28-29). 어쨌든 사울은 캄캄한 사흘 동안 무엇을 했을까요? 사울은 하나님의 곧은 길에 저항하는 이스라엘의 눈먼 상태로부터 돌아서야만 했습니다. 사울은 사흘 동안 깊은 회개의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11절에서 아나니아에게 주신 말씀에 의하면, 사울은 기도하는 중이었습니다.


3. 사람의 손길 (10-19a; 22:12; 25:12)
한편, 부활하신 주님은 다메섹에 있는 한 그리스도인을 또 찾아가십니다. 그의 이름은 아나니아입니다. 그는 다메섹에 사는 모든 유대인들이 칭찬하는 인물이었고(예루살렘 박해를 피해 달아난 사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다메섹 그리스도인들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행 22:12). 주님께서 “아나니아야”라고 부르시자 아나니아는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함으로써 부활의 주님을 알아볼 뿐 아니라,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음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고 지시하십니다. 직가(straight street)는 12m 정도 너비로 양쪽에 고린도식 기둥이 있는 다메섹의 주도로로 지금도 같은 이름으로 존재하는 길이라고 합니다. 유다는 그 중심가에 집을 소유하고 있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사울을 그 집으로 인도하셨고 이제 아나니아를 사울에게로 보내십니다. 하지만 무엇이든 순종할 태세가 되어있는 것 같았던 아나니아는 사울의 이름을 듣자 주저합니다. 사울에 대한 소문을 이미 들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15).” 주님은 사울이 이스라엘 자손에게도 복음을 전하겠지만, 특별히 이방인의 사도로 택한 그릇이고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도(행 25:12) 주의 이름을 증거할 사람임을 보여주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는 말씀입니다(16). 그토록 주님의 길따름이들을 결박하고 심문하고 죽이던 사울이 이제 예수님을 대변하는 자로서 고난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고난은 사울의 선교적 사명의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 의하면, 승리주의적 관점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선교학자 조지 피터스의 말로 기억하는데,“고난은 하나님의 선교 전략입니다.” 우리는 사울이 장차 주의 이름과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게 되는지를 볼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말씀에 순종하여 직가에 있는 유다의 집으로 가서 사울을 만납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안수하여 말합니다.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17).” 아나니아는 사울을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 동포로서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닙니다. 사울을 동료 길따름이로 인정한 것입니다. 이 역동적인 사람 사울은 여기서 전적으로 수동적이 됩니다.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고 주님이 나타나심을 받았으며, 주님이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대상이 됩니다. 안수를 받을 때 눈에서는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 사울은 일어나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먹고 강건하여 지는데, 그는 이전의 사울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봄으로써 거듭났고 회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의 회심을 이루어 가실 때, 통상적으로 사람의 손길을 통해서 그 일을 이루십니다.


4. 정복된 정복자(고후 2:14)—천국의 사냥개(Hound of Heaven), 프란시스 톰슨(Francis Thompson, 1859-1907)
이것이 사울의 회심 이야기입니니다. 사울의 회심 경험은 모든 신자의 회심 경험의 표준이 될 수는 없지만, 회심의 본질은 동일합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뵙는 것입니다. 영광의 주님을 뵐 때 사람은 회심합니다. 그가 어떤 존재였고 어떤 사람이었든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누구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사나운 맹수 같은 사울이 회심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고 회심한 사람에게는 새로운 삶의 목적이 생깁니다. 주의 이름을 위해서 사는 삶입니다. 모두가 다 전도자가 되지는 않을지라도, 그들의 삶의 목적은 변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프란시스 톰슨(Francis Thompson)의 ‘천국의 사냥개(Hound of Heaven)’라는 유명한 시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 일부입니다.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밤과 낮의 비탈길 아래로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세월의 아치 저 아래로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내 마음의 미로로 그리고 눈물의 안개 속에..
그를 피해 숨었다네. 흐르는 웃음의 시냇물 속에
한 때 희망에 부풀어 오르기도 했었지만
이내 두려움의 골짜기 아래 거대한 어둠 속으로 곤두박질쳐 버렸네

쫓고 또 쫓아오는 저 힘찬 발소리를 피해
그러나 서두르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는 걸음걸이,
장엄한 긴박함으로, 한 목소리가 두드린다. 발소리 보다 더 긴박하게..
“네가 나를 배반하기에, 모든 것이 너를 배반한다.”
“가여워라, 너는 알지 못하는도다.
나 아니면, 오직 나 아니면 비천한 너를 누가 사랑해 주겠느냐?”
“내가 네게서 너의 모든 것을 가져감은 너를 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네가 그 모든 것을 내 품에서 찾게 하려 함이었다.
네가 어린아이같은 생각으로 잃어버렸다 여긴 모든 것을 나는 내 집에 쌓아 두었노라.”
“일어나라. 내 손을 꼭 잡고 가자!”
내 곁에서 멈추네, 그 발자국 소리.
“아, 어리석고, 눈멀고, 연약한 자여, 내가 바로 네가 찾는 자이니라!”
이것이 여러분의 이야기는 아닙니까? 회심은 천국의 사냥개로 비유되는 주님께서 우리를 추격하셔서 잡으시는 이야기입니다. 사울의 회심 이야기가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사울은 위협과 살기를 내뿜는 맹수와 같은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았습니까? 칼빈의 말입니다. “누가는 주님께서 들짐승과 같았던 그를 어떻게 자신의 통제 아래 두셨으며 그를 새로운 사람으로 만드셨는지를 이야기한다.” 후일 고린도후서 2:14에서 사울은 자신의 회심을 그리스도의 포로가 된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대적했고 그리스도의 길따름이들을 정복하려고 했던 자가 그리스도께 정복을 당하여 그리스도의 포로가 된 것입니다. 정복된 정복자가 된 것입니다. 회심은 이런 것입니다.
회심은 충성의 대상이 바뀌는 사건입니다. 자신과 유대교에 충성하던 사울은 그리스도께 정복된 후, 로마에서 순교하는 그 순간까지 자신을 정복하신 그리스도께 모든 충성을 드리는 행복한 피정복자로 살았습니다. 여러분은 천국의 사냥개를 만나셨습니까? 그리스도께 정복당한 포로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을 정복하신 그리스도께 모든 충성을 바치고 행복한 피정복자—포로로 살아가십시오. 아직 그 예기치 않은 일이 여러분의 삶에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사울에게 일어났던 그 일, 천국의 사냥개에게 붙잡히는 일이, 그리스도께 정복되는 일이 여러분의 삶에 일어나게 해달라고 구하십시오. 그리고 기대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