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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 (19). 소멸되지 않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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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 (19). 소멸되지 않는 교회

사도행전 9:19b-31, 갈라디아서 1:16-19, 고린도후서 11:32-3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4-02-04

말씀내용
교회를 멸하려던 사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그를 만나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우리 영혼을 찾아와 만나주시는 회심의 사건은 우리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습니다.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님께서는 이 사건과 함께, 이 사건을 통하여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셨고 교회를 복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울의 회심 사건과 함께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큰 그림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인생을 통해, 우리 주변에서 이와 같은 일들을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역사의 참된 주관자, 그 통치자가 누구이신지,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의 물줄기를 임의로 바꾸시는 전능자이신지를 보게 됩니다.


1. 회심이 가져오는 변화, 그 열매들
회심은 회개와 믿음을 결합한 개념이고, 신자의 일생에서 처음 회개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건이고 일생에 한 번 일어나는 사건이고 일생 일대 최대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회심한 신자는 매일 회개하는 삶으로 나아가지만, 매일 회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에 가장 기본적인 개념들을 정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9장에서 보는 것은 사울의 회심 사건입니다. 사울의 회심은 많은 신자들의 회심의 전형 또는 표준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길을 가다가 해보다 밝은 빛을 보고 하늘의 음성을 듣고 회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회심 체험의 정도도 각기 다릅니다. 회심의 진위 여부는 체험의 방식이나 정도가 아니라, 회심이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그 열매, 그 결과로 확인됩니다.


A. 눈이 열리다 (행 9:1-2, 17-18; 고후 5:8; 히 11:1; 고후 4:6; 행 26:18)
먼저, 19절 하반절은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라고 말합니다. 이 제자들은 위협과 살기의 숨을 내뿜던 사울이 다메섹에 온 이유였습니다(행 9:1). 사울은 이들 남녀를 불문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가려고 다메섹에 오게 된 것입니다(행 9;2). 하지만 다메섹에 도착한 사울은 예루살렘을 출발하던 사울이 아니었습니다. 아나니아가 직가에 있는 유다의 집에 있는 사울을 찾아와 그를 형제라고 부르며 안수했을 때 사울은 그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보게 되었다는 것은 중생의 숨길 수 없는 특징을 보여줍니다. 중생을 통해 살아난 성도는 이전에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보기 시작합니다. 영안이 열린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도 말합니다. 믿음은 종종 보는 것에 비유됩니다(고후 5:8; 히 11:1). 사울은 이전에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눈이 밝아지자, 모든 것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은 나중에 고린도후서에서 중생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린도후서 4:6).” 이 세상의 신인 마귀가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볼 수 없던 것,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보게 되는 것이 중생입니다. 사울이 유대교에서 믿던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내셨다는 사실을 보고 알게 된 것입니다. 사울은 자기가 적대하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신 분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참된 회심은 새로운 것을 보게 할 뿐 아니라, 이전에 보던 모든 것을 다르게 보게 합니다. 이전의 삶의 목표는 무의미해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생의 목표가 생깁니다. 아니, 그리스도가 삶의 이유와 목적이 됩니다. 이것은 중생의 가장 기본적인 결과이고 열매입니다. 나중에 사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의 회심을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사도행전 26:18).” 참된 회심은 눈을 떠서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B. 교회가 되다 (행 9:19b; 갈 1:17)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이 일이 일어난 것을 확인했고 사울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확실한 회심에 근거하여 베풀어지는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표입니다. 이제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울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울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접붙여 졌음을 의미합니다. 교회에 속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존재는 이론상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사울의 회심의 두번째 열매는 그가 교회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 그가 교회(의 일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울이 그렇게 혐오하고 말살하려 했던 자들이 그의 친구, 형제와 가족이 되었습니다. 회심한 사울은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했습니다.
사실 다메섹은 유대나 사마리아 지역 보다는, 예수님께서 근거지로 삼으시고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셨던 갈릴리에 더 가까운 지역이었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더 많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울이 세례를 받자,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있게 되었다는 말은 공연히 쓴 말이 아닙니다. 회심은 죄인을 교회 속으로 들어가 교회가 되게 합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형제라고 불렀고 교회는 사울을 받아 주었습니다.
사울은 다메섹에 있던 제자들과 함께 ‘며칠’을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자신이 갈라디아서에서 쓴대로 아라비아에 가서 상당한 시간을 보내고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에 사울은 회심 후 처음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됩니다.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갈라디아서 1:17).” 사울은 이제 가는 곳마다 ‘그 도를 따르는 사람들’ 즉 길따름이들을 친구와 가족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든지 말입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지 않는 회심은 없습니다. 이것은 소위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간다’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C. 증인이 되다 (행 9:20-25; 13:33; 갈 1:16-19; 고후 11:32-33)
참된 회심의 세번째 열매가 있습니다.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20절에서 사울은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즉시 나가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했습니다. 자기가 이단의 괴수라고 여겼던 예수님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사울은 회심 후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게 아닙니다. 증인이 되는 것은 교육을 많이 받아야 하는 게 아닙니다. 증인은 본 대로, 목격한 대로 진술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이 사건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사건이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이 증인의 필요충분 조건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울이 회심한 직후에 즉시 나가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합당한 설명입니다.
그는 본래 다메섹 회당들을 돌면서 그곳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길따름이들을 색출하려고 했습니다(2). 그러던 그가 회당들을 찾아가서 하고 있는 일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20절에 ‘전파하니’라는 말은 헬라어로 미완료 과거시제인데, 이것은 상당 기간 사울이 계속해서 이 일을 했음을 암시합니다. 사울이 여기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할 때 시편 2:7을 인용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한 것을(행 13:33) 제외하면, 오직 여기서만 누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사울의 전도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사울은 갈라디아서를 쓰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갈 1:16).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왕권이라는 차원에서 구약성경이 예언한 다윗의 자손으로서 메시아적 통치자이심을 보여주고,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깊은 친밀함을 누리시는 관계를 강조합니다.
다메섹의 회당들에서 사울의 증언을 듣는 사람들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소문으로 듣던 사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21절에서 “듣는 사람이 다 놀랐다”고 할 때, 이 표현은 무아경을 의미할 만큼 강한 어감을 가지는 단어입니다. 그들은 묻습니다.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이런 반응 속에서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했습니다’(21).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이 당혹했다는 것은 사울이 얼마나 논박할 수 없을 정도로 예수님을 잘 증거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초대 교회의 위대한 변증가로서의 사울의 명성은 이미 여기서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잠깐 멈추고 23절의 ‘여러 날’ 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 시기를 시간 순으로 써 놓았고(갈 1:16-19) 고린도후서에서도 이 시기와 관련한 언급이 있기 때문입니다(고후 11:32-33). 먼저 갈라디아서의 본문을 보겠습니다.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갈라디아서 1:16–19).” 이 고백에 의하면, 사울은 회심한 직후, 바로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메섹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회심한 지 3년 만에 예루살렘에 가서 15일 간 머물면서 게바(베드로)와 야고보(예수님의 동생)만을 만났습니다. 사울은 자기가 이 때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은 사도들로부터 복음을 배우기 위함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사울은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은 사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23절의 ‘여러 날’은 대략 이 3년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 중 사울이 다메섹에서 보낸 시간은 비교적 짧았고(19b, ‘며칠’), 대부분의 시간은 아라비아(당시 나바테아 왕국)에서 보냈을 것입니다. 사실, 아라비아와 다메섹은 거의 인접하여 있었고, 나바테아의 아레다 왕의 통치와 영향력 아래 있었습니다.
문제는 사울이 아라비아에서 무엇을 했는가 입니다. 일반적으로, 사울이 아라비아에서 보낸 3년 가까운 시간은 다른 사도들이 예수님과 3년 여의 시간을 함께 한 것과 비슷하다고 보고, 직접 부활의 주님으로부터 사도로 훈련되는 시간이었다고 이해하거나, 구약의 선지자들이 광야에서 길러진 것과 같이 고독 속에서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였다고 이해합니다. 물론 그런 시간이 당연히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만 그것 뿐이었다면, 고린도후서의 언급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고린도후서 11:32–33).” 사울이 은둔하고 있었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이 말씀은 사울이 아레다 왕을 화나게 하는 일이 분명히 있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사울은 아라비아에 가서도 예수의 증인이 되었고, 그것이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을 격분시켜 소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아레다 왕의 표적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것을 지지합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의 증인이 된 사울은 아라비아에 가서도 회당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증거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아레다 왕과 결탁하여 사울을 죽이려고 했고 그래서 사울은 제자들에 의해 광주리에 실려 성을 벗어나야 했던 것입니다. 이 이유로, 오늘 본문은 사울을 죽이려는 주체가 유대인이라고 하는 반면(23), 고린도후서에서는 아레다 왕의 고관이 사울을 잡으려 했다고 말한 것입니다(고후 11:32). 회심은 즉시로 그 사람을 예수의 증인이 되게 합니다. 예수님을 말하고 싶고 자랑하게 하는 것은 회심의 분명한 열매입니다.


2.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울 (행 9:26-30; 4:36-37; 11:23-24; 6:9)
여기까지 참된 회심의 증거, 변화, 열매들을 세 가지로 살펴보았습니다. 26절 이하는 회심한 사울의 첫번째 예루살렘 방문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회심하고 3년이 지나, 사울은 비로소 신약 교회가 시작되었고 사도들이 있는 예루살렘, 자신이 스데반을 죽였고 예수님의 길따름이들을 잔혹하게 박해하였던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예루살렘을 떠날 때의 사울은 더 이상 없습니다. 하지만 26절은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길따름이들은 3년 전에 회심했다는 사울의 회심의 진정성을 아직 확신할 수 없었고 사울이 교회를 멸하기 위해 계략을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외에도 사울의 옛 친구들은 사울의 변절을 알고 사울을 적대시 했을 것이기에 사울은 고립되기 쉬웠을 것입니다. 이때 다시 등장하는 인물이 바나바입니다. 비록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사람에게 관심이 많았던 바나바는 사울이 회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미 사울과 교신을 했던 것 같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의 진실한 인격을 알게 되었고 그의 회심의 진정성을 확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울의 곤경을 알고 즉각 개입하여 사도들에게 사울을 소개합니다. 바나바는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사도들에게 분명하게 증언함으로써 사울을 사도들에게 추천합니다(27).
우리는 여기서 이 바나바라는 인물을 다시 한 번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나바는 4장에서 처음 등장했습니다. 그는 구브로 출신의 레위인으로 요셉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었고, 바나바는 사도들이 그의 성품과 됨됨이를 보고 지어준 별명이었습니다.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바나바는 자기의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에게 가져온 한 사람이었고(행 4:36-37),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의 신임을 받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후에 예루살렘 박해로 흩어진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게 되는데, 특별히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의 몇 사람이 국제 도시 안디옥에 가서 복음을 유대인이 아닌 헬라인들에게 전하게 되었고 믿고 돌아오는 수많은 헬라인들이 있다는 소식을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듣게 됩니다. 사도들은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파견하여 확인하게 하는데, 누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사도행전 11:23).” 바나바는 위로의 챔피온이었습니다. 누가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사도행전 11:24).” 주님께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하셨을 때 보혜사의 헬라어(παράκλητος)와 위로라는 헬라어(παράκλησις)는 같은 어근을 가진 단어들입니다. 즉, 바나바는 보혜사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나바는 안디옥에 세워진 최초의 이방인 교회의 담임목사의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수년이 지나, 바나바는 다소에 있는 사울을 불러 역사의 중앙 무대로 이끄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어쨌든 사울은 바나바의 도움으로 사도들에게 안전하게 소개되고 자유로운 교제를 가지게 됩니다. 이때 사울은 사도들 중에서 베드로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만을 만났습니다(갈 1:18-19). 28절에서 ‘출입하며’라는 말은 자유롭게 그리고 친밀하게 교제했다는 히브리식 표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누가가 빼놓지 않고 기록한 것은, 사울이 예루살렘에서도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29).” 사울은 자신의 부르심을 잊지 않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해야 하는 증언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사울은 겁먹지 않았고 담대히 말했습니다. 그가 함께 말하고 변론하던 ‘헬라파 유대인들’은 3년 전쯤 스데반과 변론했고 스데반을 능히 당해내지 못하던 바로 그 사람들(행 6:9), 사울의 옛 동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스데반을 죽였듯이, 변절자인 사울을 죽이려고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주 안의 형제들은 사울을 가이사랴로 데리고 갔다가 다시 고향인 길리기아 다소로 보내지게 됩니다. 그렇게 15일 만에 예루살렘을 떠나게 된 사울은, 역사의 중앙 무대에서 사라졌다가 바나바가 다소로 가서 안디옥 교회로 데려와 사역에 동참하게 됩니다. 약 7-8년의 세월이 지난 뒤였습니다. 데릭 토마스(Derek Thomas)는 사울이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다’고 할 때(고후 11:24), 다섯 경우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는 바로 이 시기에 다소에서 경험한 일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이 시간은, 하나님께서는 서두르지 않으시면서 다른 일, 더 많은 일을 맡기시기 위해 사울을 훈련시키는 시간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3.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는 교회 (행 9:31)
오늘 본문은 이런 말씀으로 마칩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31).” 여기서 교회는 복수가 아닌 단수로 사용되었습니다. 바로 예루살렘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박해로 말미암아 소멸될 것 같았던 예루살렘 교회는 도리어 온 유대와 갈릴리 그리고 사마리아로 퍼져 나가 든든히 서 가게 되었다고 누가는 기록합니다. 이 변화는 너무나 드라마틱합니다. 박해와 의심과 불안과 살해의 위협이 어떻게 이런 평안함 속에서의 교회의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일까요? 역사의 주관자이신 주님은 세상의 역사를 언제라도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당신의 방법으로 당신에게 유리하도록 만드시고 바꾸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어떻게 이보다 더 놀랍게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교회는 소멸되지 않습니다. 초기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시작된 박해의 역사는 이후 300년이 넘도록 로마제국 전역에 걸쳐서 다양한 방식으로 조직적으로 길고도 끔찍하게 자행되었습니다. 대작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는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그녀가 기이하게 여긴 것은 그 혹독한 박해 속에서 교회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단지 살아남은 게 아니라, 교회가 제국의 전체 문화를 변혁시키는 주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소멸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주님께서는 끔찍한 일을 가장 영광스럽게 바꾸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끔찍한 인간 사울을 위대한 복음전도자로 변화시키신 하나님은, 140여 년 전에는 대문을 걸어 잠근 극동의 조선에까지 복음이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이 짧은 역사에 모진 박해와 일제 강점기와 전쟁을 거치면서도 교회를 이 땅에 남겨 두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에도 하나님의 기막힌 역사를 봅니다. 어떤 위협이 있더라도 하나님은 인간과 마귀의 반대 보다 크신 분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상황에서 말입니다.
초대교회는 어떻게 모진 박해 속에서 소멸되지 않고 도리어 성장했을까요? 그 성장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누가의 대답은 단순합니다.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 우리 벧샬롬 교회는 세상이 바뀌더라도 어떻게 평안함 속에서 성장해 갈 수 있습니까? 한국교회는 이처럼 심각한 상황에서 어떻게 다시 일어서서 평안함 가운데 성장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경외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 앞에서 살아가기를 다시 배우고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령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세상의 위로나 값싼 위로가 아니라, 성령의 위로를 받을 때 주의 백성은 회복됩니다. 그들은 성령의 위로를 구했고 성령의 위로를 받아 누렸습니다. 여러분은 성령의 위로를 필요로 합니까? 진정 그것을 구하십니까? 그리고 성령의 위로를 구하고 누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바나바가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위로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령님이 하시는 일을 동일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의 위로를 받아 누리는 바나바 같은 사람들은 교회의 진정한 자산이 아닙니까? 교회는 소멸되지 않습니다. 모든 악조건 속에서 결국 평안하여 든든하게 성장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돈의 힘과 숫자의 힘과 같은 것들을 의지함으로써가 아닙니다. 주를 경외할 때, 그리고 우리가 성령의 위로를 받을 때, 교회는 든든하게 세워져 갑니다. 그런 은혜를 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