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SERMON
최근설교 및 강의

Home > 최근설교 및 강의 > 사도행전 강해 - (20). 이방인 선교의 준비

사도행전 강해 - (20). 이방인 선교의 준비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사도행전 강해 - (20). 이방인 선교의 준비

사도행전 9:32-43, 마가복음 2:11, 마가복음 5:4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4-02-11

말씀내용
1. 문맥과 정황 (9:32-12:25)
사도행전에서 본격적으로 이방인 선교가 시작되는 사건은 안디옥 교회에서 보냄을 받은 바나바와 사울의 첫번째 선교 여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은 13장에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9:32-12:25은 이방인 선교가 어떻게 준비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워드 마샬은 9:32-12:25을 ‘이방인 선교의 시작’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10장에서 첫 이방인의 회심, 즉 로마 백부장 고넬료와 그 일가의 회심을 볼 것입니다. 이 사건은 이방인 선교를 위한 하나의 전환점 구실을 하게 됩니다. 11:1-18은 고넬료의 회심 사건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문제가 되어 베드로가 설명을 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다는 사실을 교회가 공식적으로 확인하게 된 일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잠깐 안디옥 교회의 이야기가 나오고(11:19-30) 12장은 야고보의 순교와 베드로의 투옥과 탈옥 사건을 기록합니다. 이 박해는 헤롯(아그립바 1세)의 죽음으로 정리가 됩니다. 그러니까 9:32-12:25에서 주요 인물은 베드로입니다. 그리고 이방인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13장부터 28장까지의 주요 인물은 사울로 바뀝니다.
오늘 본문 9:32-43은 두 가지의 사건을 기록합니다. 두 사건은 룻다에서 8년째 중풍을 앓던 애니아라는 남자가 치유를 받고 건강하게 된 일, 그리고 욥바에 살던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일입니다. 이 두 사건은 10장에서 보게 될 고넬료의 회심 이야기의 서론 역할을 합니다. 즉 베드로가 어떻게 욥바에 오게 되었고 가이사랴의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2. 예루살렘 밖으로 인도 받는 베드로 (9:31,32; 8:1,14; 9:27; 8:40)
본문은 “그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라는 말로 시작합니다(32). 사도들은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시작되어 많은 성도들이 흩어지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습니다(8:1). 누가는 그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흩어진 성도들이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함으로써, 우리가 31절에서 본 것처럼, 온 유대와 갈릴리, 사마리아에 교회가 든든하게 서 가게 되었고 교회는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가게 되었습니다(31). 든든히 서 간다는 표현은 교회를 집에 비유한 것이고, 진행한다는 표현은 교회를 길, 여정에 비유한 것입니다. 교회는 한 곳에 정체되어 있는 집이 아니고 계속해서 움직이는 여정에 있는 이동식 주택임을 보여주는 표현들입니다.
이런 예루살렘 밖의 상황들은 사도들을 필요로 했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적 성공을 거두었을 때, 이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 사마리아 사람들이 형제가 된 사실을 확인해야 했습니다(행 8:14). 유대인들의 심리적 땅끝인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임했다는 것을 확인한 베드로와 요한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 사마리아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행 8:25). 이후, 사도들은 박해자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중 회심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 소식을 들은 지 3년 쯤 지났을 때 회심한 사울의 방문을 받게 됩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예수님의 형제)는 사울을 만나 2주 간 복음 안에서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바나바는 사울이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복음을 전할 하나님의 그릇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을 말해 주었고(행 9:27), 사도들은 이 흐름들 속에서 부활하신 주께서 하시는 일들을 조금씩 감지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박해자 사울의 회심은 예루살렘에서의 박해를 어느 정도는 가라앉게 했을 것이고, 예루살렘 바깥,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지역에 세워지는 신생 교회들을 돌보아야 할 필요는 점점 더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사실, 여기에는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해진 ‘내 교회, 네 교회’ 하는 개교회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32절에 ‘그 때에’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상황들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는 사방으로 두루 다니고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을 예루살렘 밖으로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사도들은 고집스럽게 예루살렘을 고수하지 않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루고 계시는 구원의 역사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유연하게 행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베드로는 사방으로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한편, 새롭게 형성된 교회 공동체들을 돌보았습니다. 이 신생 교회들은 예루살렘에서 흩어진 성도들로 구성되기도 했을 것이고 더러는 빌립과 그 흩어진 성도들의 전도로 회심한 사람들의 공동체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두 도시는 룻다와 욥바인데, 이 지중해 연안의 해안 도시들은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한 뒤에 가이사랴로 향할 때, 아소도와 여러 성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고 했는데(8:40) 바로 이 지역에 있는 도시들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와 사도들을 예루살렘 밖으로 인도하여 내시는데, 이것은 단지 지역적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대표적으로 베드로의 생각과 관점을 땅끝으로 인도하여 내고 계셨던 것입니다.


3. 애니아가 치유를 받다 (32-35; 막 2:11)
이제 본문의 첫번째 사건인 애니아 치유 사건을 보지요. 장소는 룻다입니다. 지중해에 접한 해안 도시, 룻다는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40 km 떨어져 있었고, 당시 유대의 열 개 행정구역 중 하나였습니다. 사방으로 두루 다니던 베드로는 룻다의 성도들에게도 내려갔고(32), 거기서 중풍으로 8년 동안 누워있는 애니아라는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애니아는 교회 성도 중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성도’라는 호칭은 누가가 즐겨 사용하는 호칭은 아닙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제자라는 호칭을 30회 이상 사용합니다. 그리고 드물게 2번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도 등장합니다(11:26; 26:28). 여기서 성도라는 호칭은 지금 신자가 얼마나 거룩한가 보다 신자는 이미 관계적인 면에서 거룩한 존재가 되었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영적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순간적이고 주권적인 행위로 거룩하게 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애니아를 보고 그에게 명령했습니다.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34).” 이 명령은 애니아를 치유하시는 주체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줍니다. 애니아는 그 명령에 순종하여 바로 일어나, 두 발로 설 수 있었습니다. 이 치유 사건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계실 때, 친구들이 지붕을 뚫고 주님 앞으로 인도한 중풍병자의 치유 사건과 매우 유사합니다(막 2:1-12). 주님은 그 사람에게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마가복음 2:11).”고 하셨습니다. 이날 베드로가 그 때의 주님을 생각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거의 비슷하게 말을 했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그림자를 뚜렷하게 봅니다.
누가는 치유 기적의 결과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35).” 그 지역의 많은 사람이 이 일을 보고(정확하게는 고침을 받은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왔다는 사실입니다. 사론은 룻다와 욥바에서 북쪽 갈멜산까지 이르는 넓은 해안 평야지대를 가리킵니다. 한 사람의 치유 사건은 수많은 사람의 회심을 가져왔습니다.


4. 다비다가 다시 살아나다 (36-42; 막 5:41)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두번째 사건은 욥바에 사는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기적으로 사도행전에 기록된 가장 놀라운 기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욥바는 수익성 높은 항구도시로 현재는 자파(Jaffa)라고 불립니다. 다비다는 욥바의 여제자였습니다. 여제자라는 단어(μαθήτρια)는 신약에서 단 한 번 여기에만 등장합니다. 황원하 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초기 기독교회에는 훌륭한 여성 신자(제자)들이 많았는데,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많은 여인과 바울의 동역자로 수고했던 루디아, 뵈뵈, 브리스길라(브리스가) 등이 있었다. 이러한 여인들의 수고로 주님의 교회가 든든히 세워졌다.”(황원하. (2019). 사도행전 -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 설립 60주년 기념 성경주석 (변종길, 편집자; p 240).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출판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가 여제자라는 단어를 다비다에게 붙였다는 것은 다비다가 얼마나 좋은 그리스도의 제자였는지를 말하려는 듯 보입니다. 다비다는 아람어 이름인데, 헬라어에 익숙한 독자들을 위해 누가는 그녀의 이름을 헬라어로 바꾸면 도르가라고 소개합니다. 다비다와 도르가는 영양(Gazelle)을 가리킵니다. 그녀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고 소개되는데, 음식이나 옷, 돈 등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는 열심이 대단했던 여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어느 정도 재산을 가진 관대한 사람으로, 교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너무나 중요하고 유익한 역할을 감당해 왔을 것입니다. 남편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그녀가 과부였음을 암시합니다. 그런 그녀가 병이 들어서 죽고 말았습니다. 37절에 ‘그 때에’는 베드로가 룻다에 있었을 때를 가리킵니다.
다비다가 죽자 사람들은 그녀를 씻어 다락에 뉘였습니다(37). 우리는 이 행위가 헬라화된 도시 욥바에 살던 헬라화된 유대교의 장례 방식이었기 때문인지(3일 동안 시신을 보관한 뒤에 장사를 지내는), 그들이 베드로를 불러 다비다를 살릴 희망을 가졌었기 때문인지 정확하게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우리는 엘리야 선지자가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주었을 때 아이의 시신을 다락에 두었던 일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왕상 17:19). 그리고 베드로가 룻다에서 8년이나 중풍병을 앓던 애니아를 고쳐준 일을 이미 들은 욥바의 성도들이 룻다에 있는 베드로에게 두 사람을 보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했다(38)는 사실은 그들이 다비다가 살아날 것을 희망하여 그녀의 시신을 다락에 둔 것은 아닌가 조심스레 추측하게 합니다. 욥바에서 룻다는 불과 17 km로, 걸어서 2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욥바에 도착한 베드로는 다락으로 올라가 모든 과부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과부들은 특별히 다비다의 사랑과 도움을 많이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녀들은 다비다가 살아 생전에 자신들에게 만들어준 속옷과 겉옷을 베드로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여기서 속옷은 소위 튜닉(tunic)이라 불리는 셔츠를 의미하고 겉옷은 그 위에 입는 옷을 가리킵니다. 그녀들은 이 옷들을 따로 가져왔다기 보다 자기들이 입고 있는 옷이 바로 다비다가 만들어 준 것이라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욥바의 교회 공동체에서 다비다의 위치, 그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다시 한 번 증거합니다.
다락에는 울고 있는 과부들 외에도 남성들도 있었던 것 같은데, 베드로는 일단 그들을 모두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살리신다”고 말하는 대신,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40). 이 행위는 이제 다비다에게 일어나게 될 일에서 베드로 자신은 그리스도께 완전히 복종하고 순종하는 종이고 도구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다비다의 시신으로 몸을 돌이켜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명령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고쳐 주신 일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막 5:21-43). 예수님은 죽은 소녀에게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달리다굼(Talitha Koum)!” 아람어로 “소녀야 일어나라”는 뜻입니다(막 5:41).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하였을 때 이 말은 아람어로 “다비다굼(Tabitha Koum)!”입니다. 베드로의 말과 예수님의 말은 단 한 음절만 다르고 거의 유사합니다. 여기서도 다시 한 번 우리는 예수님의 그림자를 뚜렷하게 봅니다.
베드로는 죽은 시신에게 명령했고 다비다는 눈을 떠서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습니다! 다비다는 베드로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다시 불러 그녀가 살아난 것을 보였습니다. 이 사건의 결과를 누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42).” 애니아의 치유 기적에서처럼, 온 욥바 사람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게 되었습니다. 다비다의 소생 기적은 욥바의 많은 사람들의 회심으로 결실하였습니다.


5. 교훈과 적용
이제 우리는 이 두 기적의 사건을 통해 주님께서 주시는 교훈을 적용적 관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A. 주연은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34,40; 고전 3:7; 행 3:6,12)
첫째는 이 두 사건의 주연이 베드로가 아니라 부활하신 메시야이며 주로서 적극적으로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두 이야기는 모두 의도적으로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 예수님임을 보여줍니다.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는 베드로의 말에서(34) 그리고 다비다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베드로의 모습에서(40) 이 일을 행하시는 분이 예수님임을 보여줍니다. 애나아와 죽은 다비다를 향한 베드로의 명령을 효력 있게 하시는 분은 부활하신 주님이셨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보는 모든 사건이 다 이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사람을 주목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는 베드로일 수도 있고, 바울일 수도 있으며, 어떤 영향력 있는 목사일 수도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도 유독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그들에게 말씀한대로,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고린도전서 3:7).”이심을 우리도 유념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나면서 걷지 못하던 사람을 예루살렘 성전 미문 앞에서 고쳐주었을 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고(행 3:6), 이 일로 군중이 모여들었을 때에는 “우리 개인이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말했습니다(행 3:12). 우리는 언제나 그리고 모든 상황에서, 어떤 영웅적 인물이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고 높이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B. 기적, 회심 그리고 교회 성장 (35,42; 14:8-19; 13:48-49; 고전 15:54-55; 빌 1:23)
두번째로, 기적과 회심 그리고 교회 성장의 관계를 우리는 주목하게 됩니다. 누가는 두 차례의 기적이 모두 많은 사람의 회심을 가져왔고 교회가 성장하게 되었다고 기록합니다(35,42). 이 사실은 중요합니다. 사도행전은 복음의 확장과 교회의 성장에 대한 생생한 기록입니다.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기적 사건이 회심과 교회 성장에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가령, 루스드라에서의 사건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행 14:8-19).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나면서 걷지 못하는 사람을 고쳐 걷게 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주민들은 바나바를 제우스라고 하고, 바울은 헤르메스(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라고 치켜세우고 경배하려고 했습니다. 이때 바나바와 바울이 복음을 전하며 만류하고, 또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그들을 충동하자 두 사람을 경배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돌변하여 바울을 돌로 쳐서 거의 죽을 뻔하게 했던 것입니다. 모든 기적이 반드시 많은 사람의 회심과 교회의 성장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번째 명제를 함께 생각해야 하는데,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회심과 교회 성장이 일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가령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일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행 13:14-49). 거기서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순전한 말씀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다(행 13:48)”고 기록합니다. 이 결과,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게(행 13:49)” 되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죄인을 회심하게 하고 교회를 성장하게 하는 성령님의 역사는 말씀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치유와 기적은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것을 행하고 행하지 않으시는 여부는 주님의 주권에 속한 일입니다. 주님은 신자의 믿음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고쳐주지 않으십니다. 다비다가 죽음에서 살아난 것은 그녀가 살아 생전에 선행과 구제를 심히 힘썼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를 살리는 것이 주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역사에서 보면 어떤 때에 주님은 극적인 교회 성장을 주시기도 하시지만, 또는 십 년에 한 영혼을 주시기도 하심으로써 교회가 과연 성장하는가 묻게도 하십니다. 가령, 우리는 일본과 한국에 복음이 전해진 역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미미한 회심과 교회 성장을 경험한 반면, 한국에서는 큰 부흥의 역사와 함께 많은 이들의 회심이 일어났고 교회사에 보기 드물 정도의 교회 성장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일본에 간 선교사들이 한국에 온 선교사들 보다 능력이 모자랐거나 기도를 덜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이 그 시대에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에크하르트 슈나벨의 말입니다. “교회가 급속하게 혹은 더디게 성장하는 것은 목사, 전도자, 선교사의 믿음이나 그들이 사용하는 방법 때문이 아니다. 사람과 방법 모두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주권적인, 사람이 다 이해할 수 없는 뜻에 따른 것이다.”
다비다의 사건은 우리가 이 땅에서 죽지 않기를 갈망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다비다는 죽었다가 살아났지만, 스데반은 순교의 자리에서 건짐을 받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이미 승리하셔서 죽음이 그 쏘는 힘을 잃었다는 사실이고(고전 15:54-55) 신자들은 이 땅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빌 1:23)을 갈망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C. 준비시키시는 하나님 (43)
이제 본문의 마지막 구절을 주목합시다.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43).” 다비다의 일로 욥바의 공동체가 커지면서, 베드로가 교회를 가르치고 목양해야 할 필요는 당연히 커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욥바에 여러 날을 머물게 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렀다는 사실입니다. 무두장이는 죽은 짐승의 가죽을 벗겨 가죽 제품을 만드는 피혁업자를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죽은 동물을 만지는 이 일을 부정한 직업으로 여겨 접촉을 피했고, 무두장이는 마을 밖 최소한 50규빗(25m) 이상 떨어져 살아야 했으며, 유대인 여성은 약혼자가 이 일에 관여한 것을 알게 되면 파혼을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인 베드로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렀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조금씩 베드로의 관점을 예루살렘과 유대교로부터 온 세상, 모든 족속으로 확장될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변화시켜 가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그의 집에 머물렀다는 사실은, 욥바의 기독교 공동체가 무두장이 시몬과 같은 사람들을 그들의 형제로 받아들여 주었음을 시사합니다. 그리스도의 길따름이 공동체는 사회와 종교의 모든 구분으로부터 자유로운 공동체, 세상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공동체로 지어져 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누가는 이 간단한 언급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베드로가 이점과 관련하여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는 것과 이 사건이 초기 교회의 엄청난 전환점이 될 것을 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