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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 (21). 생각의 회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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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 (21). 생각의 회심

사도행전 10:1-23, 로마서 12:2, 요나 1: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4-02-18

말씀내용
믿음은 우리의 생각을 어떻게 변화시킵니까? 여기서 ‘생각’은, 우리의 전제, 가정, 가치관, 그리고 이런 것들에 대한 충성심 모두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세계관이라고도 합니다. 문화인류학자 찰스 크래프트는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들이 기독교로 회심하였을 때 깊은 차원에서 그들의 세계관적 가정, 가치, 그리고 충성의 대상에 대한 변화가 초래된다.”(『기독교 문화인류학』CLC, p.50) 회심은 세계관의 변화를 초래한다는 말입니다. 회심했다는 것은 단지 죽어서 지옥에 갈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거나 율법에 매여 죄책감의 노예로 살다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받아 자유함을 얻었다는 의미로만 제한되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들은 구원이 우리에게 주는 본질적이고 엄청난 선물입니다. 그러나 회심은 그 이상입니다. 문화에는 피상적인 행동의 차원과 세계관의 차원,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가령, 술, 담배를 즐기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술, 담배를 가까이 하지 않게 되는 것은 피상적 행동의 차원입니다. 이것이 보편적이 되면 기독교인은 술, 담배를 하지 않는다는 문화가 형성됩니다. 그러나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과 사물, 현실과 실재를 바라보는 관점, 해석하는 틀,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충성하게 되는 세계관 차원의 변화입니다. 우리 벧샬롬 교회가 판단과 정죄가 아닌, 은혜의 공기를 호흡하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하는 것은, 바로 세계관의 변화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의식적으로 “이렇게 하면 안 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는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회심은 사람이 실재를 인식하고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모든 면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관점과 생각이 깊은 뿌리에서부터 바뀌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과 관점의 변화를 세계관의 회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2).” 마음을 새롭게 하라는 것은 생각, 지성을 새롭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가슴(heart)이 아니라 생각(mind)입니다. NLT(New Living Translation)는 이 구절을 이렇게 풀어서 번역했습니다. “이 세상의 행동과 관습을 따라 하지 말고, 생각의 방식을 바꾸어 하나님이 여러분을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키시도록 하세요. 그러면 여러분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Don’t copy the behavior and customs of this world, but let God transform you into a new person by changing the way you think. Then you will learn to know God’s will for you, which is good and pleasing and perfect).” 지속적으로 생각을 새롭게 하는 변화를 받고 또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이런 생각의 변화, 세계관의 회심을 과연 경험했는지, 하고 있는지 자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베드로의 생각을 뿌리부터 바꾸어 가시는지를 보여줍니다. 물론 표면적으로 10장부터 11:18까지의 본문은 고넬료와 그 가정의 회심이 그 중심 이야기를 형성하지만, 존 스토트가 말하듯이, “이 장의 주요한 주제는 고넬료의 회심이라기 보다 베드로의 회심(conversion)입니다.” 그는 회심이라고 부를 만큼 생각의 변화를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이 변화는 베드로 한 사람의 생각의 변화, 세계관의 회심을 넘어, 기독교 역사와 세계 역사를 바꾼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 환상 1—고넬료(롬 12:2; 행 10:1-8; 욘 1:3)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세계관을 바꾸시기 위해 두 개의 환상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는 이방인 고넬료에게(1-8), 그리고 또 하나는 베드로 자신에게 주신 환상입니다(9-16).
먼저 고넬료에게 주신 환상을 보겠습니다. 고넬료는 가이사랴에 주둔하는 이달리야 부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1). 가이사랴는 헤롯 대왕(BC 37-4)이 과시용으로 아름답게 건설한 해안의 인공도시인데, 헤롯은 이 도시를 로마의 초대 황제인 가이사 아구스도(Caesar Augustus, BC 27-AD 14 재위)의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가이사랴는 로마에서 유대로 파견된 로마 총독이 주재하는 행정 수도였기에, 로마 군대가 주둔하기도 했습니다. 고넬료는 약 600 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이달리야 부대에서 약 80명의 병사를 통솔하는 백부장이었습니다. 이런 부대의 지휘관은 천부장이었고 그 휘하에는 8-10여명의 백부장이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 병사들은 보통 17세에서 37세까지 20년 동안 군 복무를 했는데, 그 중 절반 정도만이 살아남았습니다. 1세기 후반에는 복무 기간이 25년으로 늘었고, 로마 시민권자가 아니더라도 보조 부대에 입대하여 복무를 마치면 시민권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고넬료는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2).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은 최소한 유대인의 윤리, 이상, 유일신 종교를 존중하는 이방인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 외에도 그는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유대교의 회당 예배에도 참석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22절에서 그의 하인들은, 고넬료가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누가가 누군가의 신앙심을 표현할 때 가장 의미 있게 사용하는 말은 자주 기도한다는 표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고넬료가 항상 기도했다는 말은 그가 ‘기도의 용사’라는 표현과 같은 말입니다(대럴 벅). 고넬료에 대한 누가의 소개를 정리하면,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최대한 유대인 같은 이방인이었고, 여기에 덧붙이자면,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는 이방 죄인이었지만, 못된 사람이 아니라 고상한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3절에서 그가 제 구 시쯤(오후 3시) 환상을 보게 되었다는 말은, 그가 유대인의 오후 기도 시간(성전의 저녁 상번제 시간)에 기도하던 사람이었다는 사실과, 오후 3시이므로 그가 잠이 들었거나 꿈을 꾼 것이 아님을 말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고넬료는 환상 중에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고넬료야”라고 부르는 것을 밝히 보고 주목했으며 그래서 두려워했습니다. 고넬료는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라고 묻습니다. 이 말은 그저 의례적 인사가 아닙니다. 특히 그가 ‘주여’라고 했을 때, 이것은 군대의 상명하복 문화에 익숙한 고넬료가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명을 받들겠습니다”라는 의미로 한 말로 보입니다. 천사는 먼저 고넬료를 격려합니다.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4b).” 천사의 말은 고넬료의 경건함이 그 가정이 구원을 얻을 자격이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칼빈의 설명입니다. “기도와 구제는 믿음을 얻기 위한 준비 행위가 아니다. 또한 자신이 쌓은 공로가 크면 클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은혜도 더 커지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선행들을 가치 있게 여기신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행들의 가치를 인정하시는 것은 그 선행들 속에 어떤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이 너그럽고 관대하게 보아 주시는 덕분이다.” 고넬료의 구제와 기도는 그가 참으로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사람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찾는 사람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기독교에는 공로주의가 설 수 있는 자리는 없습니다.
그리고 천사는 베드로를 불러오라고 명합니다.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5-6).” 천사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베드로가 지금 있는 도시 욥바, 그리고 헬라어 이름인 베드로에 더하여 히브리어 이름인 시몬까지, 또 베드로가 지금 거주하는 집 주인의 이름과 직업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이때로부터 약 800년 전쯤 욥바로 갔던 선지자 요나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욥바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불순종한 선지자가 니느웨의 반대편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던 항구입니다(욘 1:3).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에 깊이 빠져 있던 요나는 잔인하고 못된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가 싫었고 그것을 명하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자신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그들이 회개하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기에 그는 불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욥바에 머무는 베드로도 요나가 직면했던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천사는 분명한 지시를 전하고 떠나갔습니다. 고넬료는 즉시 집안 하인 두 사람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일어난 일을 다 알려주고 정확한 정보를 준 뒤에 그들을 욥바로 보냅니다. 고넬료의 순종은 지체 없는 순종이었습니다. 가이사랴에서 욥바까지는 약 50km 거리였고 도보로 아무리 빨라도 10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였으니 오후 4시 쯤 출발했다면 이튿날이나 도착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첫번째 환상, 고넬료가 본 환상입니다.


2. 환상 2—베드로 (행 10:9-18)
이제 우리는 베드로에게 나타난 두번째 환상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환상을 보기 시작한 시각은 이튿날 정오 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각은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때,’ 제 육 시(정오)였습니다(9). 고넬료의 사람들이 이 시각에 욥바에 도착했다는 것은 그들이 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쉬지 않고 걸었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기도하려고 지붕의 테라스로 올라갔습니다. 베드로는 시장했고 그 집의 사람들은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게 되는데, 이 말은 거의 무아경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늘이 열리고 한 그릇 같이 생긴 큰 보자기인데 네 귀퉁이가 매어 있는 채로 땅으로 내려오는 환상이었습니다. 그 안을 보니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모세의 정결법에 따르면, 정한 것과 부정한 것들이, 어쩌면 거의 모두가 부정한 것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소리를 듣습니다. “일어나 잡아 먹어라.” 베드로는 정체가 불분명한 목소리로 주어진 이 명령을, 주님께서 율법을 어기라고 자신을 시험하는 것으로 인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베드로는 이 지시를 거부하면서도 자신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두번째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15).”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셨다’는 표현은 70인역 성경에서 부정했던 사람이 정결예식을 통해 깨끗해졌다는 사실을 제사장이 선언할 때 쓰는 표현입니다. 물론 베드로는 처음과 같이 대답을 했을 것입니다. 이 일은 한 번 더 반복되었습니다. 세 번 반복되었다는 것은 이 환상 계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그후 그 그릇 같은 보자기는 다시 하늘로 올려졌습니다. 베드로는 마땅히 생각했을 것입니다. 속된 것이 어떻게 하늘의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3. 환상 해석의 열쇠—두 환상의 만남 (행 10:19-23a)
베드로는 이 환상을 해석할 수 없어 속으로 의아해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 문 밖에 도착합니다(17). 놀라운 타이밍이 아닙니까? 그들은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하느냐?”고 묻습니다(18). 시장한 것은 다 잊어버린 채, 환상의 의미를 생각하느라 지붕 테라스를 떠나지 못하던 베드로에게 그때 성령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19b-20).” 베드로는 당연히 자신이 본 환상의 계시와 지금 성령님께서 분부하시는 내용이 연결된다는 사실을 감지했을 것입니다. 특별히,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는 말씀은 ‘구별하지 말고’ 라는 의미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즉, 유대인과 이방인을 이유 없이 불공평하게 구분 짓지 말고 함께 가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그들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1층으로 내려가 그들을 보고 묻습니다. “내가 곧 너희가 찾는 사람인데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21)?” 그들의 대답입니다.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22).” 여전히 자기가 본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고 성령님께서 지시하신 말씀을 생각하고 있던 베드로는 그들이 유대인이 아닌 것과 그들이 하는 말을 들었을 때 환상의 의미를 어렴풋하게 나마 깨달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이방인인 백부장 고넬료의 초청을 받은 것이 아니라, 천사를 통해 당신의 명령을 전하신 하나님의 초청을 받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감지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점심에 식사를 하다가, 느닷없이 들이닥친 이방인들의 방문과 50km나 되는 가이사랴에서 한 백부장이 자신을 초청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유대의 졍결법에 고정되어 있던 유대인 베드로가 선뜻 응했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막 이해할 수 없는 환상을 보았고, 성령님의 지시를 구체적으로 받았으며, 또 도착한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고넬료도 천사의 지시를 받아 자신을 초청하였다고 하니, 어찌 이 초청을 거절할 수 있었겠습니까? 만일 이런 사전 준비가 없었다면, 베드로는 당연히 자기를 청한 고넬료를 자기가 교제해서는 안 될 부정한 이방 죄인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비록 자신이 본 환상의 의미를 여전히 깔끔하게 다 이해할 수는 없었을지라도, 베드로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과 관련된 교훈이 이 환상 속에 있을 것이라는 정도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실 이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께 하고자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음식에 관한 이 환상은 이방인은 먹을 수 있으나 유대인은 먹을 수 없는 음식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교제를 막는 장벽이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복음 안에서 그들의 교제를 막는 이 장벽을 허무셨음을 보여준 환상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새로운 질서를 세우십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분하는 것은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구분하는 것처럼 헛된 것임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면, 이제 그들 사이를 가로막는 음식의 구별도 무의미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아직은 이 모든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했을지라도 어렴풋이 이해했기에 그리고 성령님의 지시가 있었기에 이방인 고넬료의 초청에 응하였고, 이방인 손님들을 환대하여 유숙하게 하는 큰 일을 베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의 생각을 먼저 변화시키심으로써, 유대인들이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수 세기에 걸쳐 쌓아온 장벽이 복음 안에서 무너졌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4. 교훈과 적용 (행 15:7; 욘 4:1-11)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선명하게 보는 것은 이 모든 일을 주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고넬료에게 보내 베드로를 불러오라고 지시하셨고, 이튿날에는 정확한 타이밍에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이셨고, 직접 당신께서 보내신 사람들을 따라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을 주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고넬료와 그 일가의 회심만이 중요했다면, 천사가 바로 그 자리에서 베드로보다 더 잘 복음을 전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를 빚어 가시는 일, 베드로의 생각의 회심이 중요하고 본질적인 일임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이 일은 귀찮고 성가신 일이 아니라 축복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충성하는 신념이나 전제, 가정, 가치를 쉽게 바꾸지 않습니다. 유대인 베드로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께서 인도해가시는 교회의 여정 속에서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묵을 만큼 개방되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멈추지 않으시고 그를 통하여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믿게 하시려고(행 15:7) 베드로의 생각을 계속해서 그 뿌리부터 변화시켜가셨습니다.
우리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라는 베드로의 반응에서 그가 가진 완고함을 읽습니다. 우리가 자신에게서도 발견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종종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인도하심 앞에서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런 완고함은 지나친 자기 확신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모든 헛된 자신감이 비워지고, 우리의 완악함이 교정되며,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뜻에 붙잡혀서 그 지배를 받아,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지시한 것 외에는 우리가 그 어떤 것도 옳은 것으로 여기지 않을 때, 그것이 참으로 지혜로운 것이다.” 동의가 되십니까? 오래 전에, 토니 캠폴로의 책 Everything You’ve Heard is Wrong (“당신이 지금까지 들은 말은 다 틀렸어요” 우리말로는 『일터에 사랑』홍성사)이라는 제목의 책을 인상깊게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이 다소 도발적이고 단정적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이런 태도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회심은 단번에 일어나지만, 이후 성도의 성화의 여정 속에서 하나님은 생각의 변화, 세계관의 회심을 이어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은 성장해갈 뿐 아니라, 주님의 생각이 자기 생각이 되고 주님의 관심이 자기의 관심이 되고, 주님의 시야로 이웃과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이런 일은 일어나도 되고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때로부터 약 800 년 전, 하나님의 부르심에 불순종하여 욥바로 왔던 선지자 요나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그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했으며,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가치도 없고 회개해서도 안 된다고 확신했습니다. 요나의 신앙은 비뚤어진 민족주의에 갇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풍랑을 보내시고, 그를 큰 물고기 뱃속에 넣으시는 과정을 통해서 니느웨로 보내십니다. 요나가 전한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 니느웨 왕부터 백성들까지 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니느웨의 부흥이라고 일컬어지는 사건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이 일이 너무나 싫어서 하나님께 화를 냅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요나 4:2).” 화를 내는 요나는 여전히 자기가 정당하다고 여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분노하는 요나 위에 박넝쿨을 예비하여 시원하게 그늘을 만들어 주십니다. 요나는 기뻐하지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은 벌레를 예비하사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고 뜨거운 동풍을 보내시자, 요나는 다시 불같이 분노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요나 4:10–11).”
결국 요나서의 이야기는 자기 확신에 가득 찬 선교사 자신이 선교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고고발합니다. 하나님은 욥바의 베드로를 그 자리에 서지 않게 하시려고 고넬료와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이셨고 상황을 인도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생각의 회심을 위해서 말입니다. 요나에게 그랬듯이,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것은 늘 자기 자신입니다. 이것은 본능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과 자신의 가족 너머를 보게 합니다. 복음은 본능을 넘어 서게 합니다. 심지어 평소에 싫어하고 멸시하던 사람을 보는 관점을 바꾸어 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서 우리 안에서 생각의 회심을 완성해 가십니다. 무신론자로서 옥스퍼드에서 분자생물물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후 신학에 흥미를 가지게 되고 결국 그리스도인 신학자가 된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자신의 회심을 기록한 『지성적 회심』에서 시인 조지 허버트를 인용하면서 기독교를 이해하는 두 가지 방식을 말합니다.
창문을 지켜보는 사람 / 그 위에 그의 눈을 둘 수 있고,
혹은 그가 원한다면 창문을 꿰뚫고 / 하늘을 볼 수 있다.
여기서 허버트는 창문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두 가지로 말합니다. 하나는 창문을 지켜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창문을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기독교 자체를 시각의 대상으로 여길 수 있고, 또는 더 넓은 시각에 이르는 관문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두 가지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둘 다 중요합니다. C.S.루이스의 말입니다. “나는 해가 떴다는 것을 믿듯이 기독교를 믿는다. 그것을 눈으로 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혹시 창문만 뚫어지게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것 조차 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그러면서도 지나친 자기 확신에 빠져 완고함 속에서 살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드디어 창문을 통해 바깥을 보기 시작합니다. 이방인을 잠재적 은혜의 상속자로 보기 시작합니다. 창문을 통해 바깥으로 펼쳐진 자연과 푸른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켄트 휴즈는 이렇게 도전합니다. “당신이 싫어하고 멸시하고 사랑하지도 않고 사랑할 수도 없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보십시오. 그들의 이름을 모두 더러운 냅킨에 적고 고개를 들어 "주님, 저는 이 사람들을 잘 말할 수도 없고, 잘 생각할 수도 없고, 뭘 바랄 수도 없습니다. 저는 사랑할 수도 없고 시도하지도 않겠습니다."라고 기도해 보십시오. 그런 식으로 마음속에 있는 모든 악한 것들을 행동으로 옮기고 말한다면, 당신은 결코 잊지 못할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런 완고함의 족쇄에서 벗어나도록 생각의 회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럴 수 없나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칼빈 처럼 이렇게 응답합시다. Cor meum tibi offero Domine, prompte et sincere!(제 심장을 당신께 드립니다. 주님! 즉시 그리고 진실한 마음으로!). 이렇게 하나님의 큰 일은 여러분 안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