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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 (22). 이방인의 오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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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 (22). 이방인의 오순절

사도행전 10:23-11:18, 요엘 2:28-32, 로마서 12: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4-02-25

말씀내용
우리는 지난 주일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베드로의 생각을 바꾸어 주셨는지를 보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의 기존 관점, 전제, 가정, 가치가 변하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이전에 가졌던 전제와 가정과 가치에 충성하며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복음적 회심은 세계관의 회심을 포함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 변화가 현실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사도행전은 베드로의 생각의 회심이 이후의 교회와 선교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선하게 미쳤는지도 보여줍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따라가면서 이점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1. 이방인 고넬료와 만나다 (10:23-33, 45; 11:12; 마 28:20)
베드로는 이튿날 고넬료가 있는 가이사랴로 출발하는데, 하룻길로는 버거운 여정이었기에 중간에 하루를 유숙하고 이튿날 가이사랴에 도착하게 됩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고넬료가 보낸 세 사람 외에, 욥바에 함께 있던 형제들을 데리고 갔다는 사실을 주목합니다. 10:23에 “욥바에서 온 어떤 형제들도 함께 가니라”고 했는데, 이들은 45절에서 ‘할례 받은 신자들’로 나오고 나중에 예루살렘에서 이 사건의 증인의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11:12). 베드로의 지혜가 엿보입니다.
고넬료의 시점에서 보면, 그가 환상을 받은 지 나흘 만에 베드로를 영접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베드로의 방문을 고대하고 있었는지, 그가 베드로를 단지 귀한 손님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로 영접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10:25). 절을 했다는 표현은 존경을 표하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종교적) 숭배 행위를 뜻하기도 하는 말입니다. 주둔군의 중대장이 식민지 사람에게 절을 하는 것도 낯선 장면이지만, 베드로가 초면인 로마 군대의 지휘관에게“일어서라”고 명령하는 것도 드문 장면입니다(10:26). 이것은 고넬료의 겸손을 보여주는 동시에,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자신이 가로챌 수 없다는 베드로의 심히 불편한 감정도 보여줍니다.
그렇게 고넬료를 만난 베드로는 집 안으로 들어가 많은 이방인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10:27). 그들은 고넬료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로(10:24), 고넬료의 말대로, 주님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듣고자 하나님 앞에 모인 사람들이었습니다(10:33). 베드로와 고넬료는 먼저 어떻게 이런 일어날 수 없는 일—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의 집에 들어와 교제하는—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경위를 나누게 됩니다. 베드로의 말입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10:28-29).” 베드로의 말은 그가 3일 전에 본 환상을 바르게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베드로는 음식의 정함과 부정함에 대한 그 환상이 사실 어떤 사람도 속되거나 깨끗하지 않다고 판단하지 말라는 의미였음을 이해했습니다. 사실, 모세 율법은 유대인이 이방인과 식사하는 것 자체를 명시적으로 금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함께 식사를 하게 되면, 음식과 관련하여 타협을 하게 될 수 있기에, 이방인과의 접촉은 도덕적, 의식적으로 부정할 수 있다는 조심스런 경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기준이 당시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엄격하게 적용이 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베드로가 자신에게 주어진 환상을 통해 음식에 관한 율법의 규정이 폐지되었고 이로 인해 이방인과 접촉하는 것으로 인해 부정하게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고넬료의 초청에 응했고 고넬료의 집까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제 고넬료가 베드로의 질문에 답합니다. “내가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 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바닷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느니라 하시기로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10:30–33).” 그의 대답은 이미 우리가 본 내용인데,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일임을 반복해서 확증해줍니다. 이것이 본문의 의도입니다. 다만 고넬료의 대답에서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왜 고넬료가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모았는지를 설명하는 10:33b입니다. 그들은 ‘주께서 당신(베드로)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기를 원했습니다.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마 28:20). 그래서 그들은 ‘다 하나님 앞에’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라는 말은 하나님의 존전 앞에, 그 얼굴 앞에서 산다는 의식을 갖고 살고자 했던 칼빈이 좋아했던 라틴어 Coram Deo의 태도입니다. 칼빈의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인 사람(설교자)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기에 임재하셔서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는 생각을 우리 마음에 깊이 각인하고 있어야 한다.” 슬프게도 오늘날 우리는 이렇게 복음을 듣고자 열렬히 바라는 청중을 쉽게 만나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다 하나님 앞에’ 있습니까?


2. 그리스도를 전하다 (10:34-43)
이제 10:34-43절은 베드로의 설교인데, 이 설교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의 마지막 설교입니다. 34-35절은 서론이고, 36-41절이 본론, 그리고 42-43절에서 결론적 도전입니다.
먼저 ‘입을 열어 말하되’라는 표현은 중요한 발언을 시작할 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설교의 서론입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10:34-35).” 이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너무 당연한 내용이지만, 베드로에게는 새롭게 확신하게 된 내용이고, 수세기 동안 이어져 오던 인종적, 종교적 편견을 부정하는 발언이며,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가히 혁명적 발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말은 고넬료가 의가 충분해서 그리스도인이 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구원을 받기 위해 이방인으로서 유대인이 될 필요가 없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유대인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이방인에게도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온전히 그리스도 중심적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와 그가 하신 일의 중요성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약속을 성취하셨다는 사실과(36) 예수님의 선포와 병 고침 사역(37-39c),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39d-41)입니다. 36절에서 화평은 구원과 동의어로, 구원이 단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적대감과 갈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화해의 상태에서 적극적인 사랑과 축복을 누리는 상태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화평의 복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도록 보내셨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와 모인 무리가 비록 이방인이지만 세례 요한 이후에 갈릴리에서 온 유대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복음이 전파된 일에 대하여 기본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전제하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부으심으로 함께 하셨기에, 예수님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이들을 고치셨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말은 나사렛 예수가 구약의 선지자들이 약속한 메시야임을 입증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성령과 능력을 부어 주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눌린 이들을 고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음을 알려주는 표징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이 모든 일에 증인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주제를 전환합니다.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10:39d-40).” 물론 베드로는 여기에 간단하게 기록된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내용을 전달했을 것입니다. 고넬료와 모인 사람들은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다 하나님 앞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 설교에서 가장 긴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증인됨에 대한 언급이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과 증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든 사람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과 음식을 먹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당신 자신임을 증언하게 하셨습니다(10:42). 베드로는 바로 그 일을 지금 고넬료와 그의 집에 모인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신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심판의 범주가 우주적임을 시사합니다. 그 심판에서 제외될 자는 없습니다. 재판장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재판장 앞에서 필요한 것은 죄 용서입니다. 죄 용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그의 이름을 힘입어 얻을 수 있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가 증언했다는 말씀은 특정한 구약의 본문들을 가리킬 수도 있겠지만, 구약 성경 전체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는 말씀은(10:43),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 없이, 인종과 국적의 장벽 없이 일어나는 일임을 강조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3. 성령님이 이방인에게 임하시다 (10:44-48; 11:15; 욜 2:28-32; 행 2:16-21)
그때였습니다. 베드로는 설교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셨습니다(44).”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이 주도하고 계시다는 것을 여기서도 다시 보여줍니다. 나중에 베드로가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이라고 한 것을 보면(11:15a) 아마 이 일은 베드로가 설교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 일은 베드로와 함께 갔던 ‘할례 받은 신자들’이 볼 수 있는 방식이었습니다. 즉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사도들이 방언을 말했던 것처럼, 방언을 말했고 하나님을 높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순절에 예루살렘에서 그들 자신에게 일어났던 경험을 재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놀랐습니다. 여기서 누가의 관심은 회개와 믿음 그리고 성령 받음의 순서에 있지 않습니다. 이 모든 일을 성령님께서 주도하고 계시다는 사실, 그리고 이 일의 극적인 성격을 보여주는데 있습니다. 아마 이들이 했던 방언은 히브리어나 아람어였을 가능성이 크고, 그래서 베드로와 함께 갔던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높인다는 것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성령님이 이 이방인 무리에게 임하셨다는 것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임하셨던 것 이상으로 새 시대, 새 질서의 도래를 상징하는 사건이자, 베드로에게 보았던 환상의 결론이었습니다. 더 이상 의식법적 정하고 부정함, 거룩하고 거룩하지 않음의 구별이 유효하지 않음을, 하나님께서 인종과 피부색과 기타 외적 조건들로 인하여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심을,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인 교회가 더 이상 유대인만이 아닌,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사람들이 될 것임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 앞에서 베드로는 말합니다.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47).” 성령님이 그들에게 임하는 현상이 없었더라면, 베드로는 그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을 했을지라도 세례 베푸는 일을 주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적용이 되었던 요엘 선지자의 예언은(욜 2:28-32; 행 2:16-21), 이제 성령님이 이방인 무리에게도 부어짐으로써 그들은 이 일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이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논리는 이것입니다. “이제 성령의 복이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주어졌다면, 이는 곧 하나님이 이방인들의 도덕적 불결함을 정결하게 씻어 주셨고, 마지막 날에 성령이 새롭게 구성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에 이방인을 포함하신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베드로는 함께 한 유대인 형제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명함에 따라, 이방인 무리를 향한 최초의 세례가 베풀어집니다. 세례를 받은 이방인 무리는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믿음과 새로운 믿음의 삶에 대해서 더 배우기를 원했을 것이고 베드로는 첫번째 이방인 교회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거기서 베드로는 최초의 이방인 세례, 최초의 이방인 교회 예배, 최초의 이방인 제자 훈련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비록 며칠 뿐이었을지라도, 그렇게 머물게 된 그곳에는 인류 최초의 다민족 교회가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의 오순절이었습니다.


4. 생각이 성령님을 거스르다 (11:1-18; 갈 2:12; 행 1:5)
그런데 이토록 아름답고 흥분되는 사건은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에게까지 알려졌습니다(11:1). 그러나 모든 반응이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환상을 보기 전의 베드로 수준에 그 생각이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베드로는 자신을 비난하는 무리를 만나게 되는데, 바로 ‘할례자들’이었습니다(11:2). 여기서 ‘할례자들’은 율법에 열정적이고, 할례자와 무할례자 사이의 사회적 교류를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유대인 신자들을 가리킬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같은 의미로 할례자라는 말을 사용합니다(갈 2:12). 그들의 비난은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먹었다”는 것이었습니다(11:3). 여기서 우리는 이들이 ‘할례자’와 ‘무할례자’라는 두 개의 범주로 사람을 구분하고 있음을 봅니다. 이것은 개인을 한 범주에 넣음으로써 개인을 함몰시키는 좋은 사례입니다. 유대인이냐. 헬라인이냐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환상을 보기 전의 베드로의 생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사건의 본질은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임했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 즉 교회가 되었다는 데 있지만, 아직 생각이 변하지 않은 할례자들은 본질을 보지 못하고 그들의 전통을 범한 베드로를 비난합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전혀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설명을 시작합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자세히 사실대로 진술하되, 이 모든 일을 주도하신 분이 하나님 자신임을 증명하는 일이었습니다(11:5-17).
제일 먼저, 베드로는 자기가 욥바에서 본 환상을 비교적 자세히 설명하는데 10:10-16의 내용을 거의 반복하는 내용입니다(11:5-10). 그리고 이어서 마침 고넬료가 세 사람을 보낸 것을 말하는데(11:11-12) 이 또한 10:17-24의 내용을 요약한 진술입니다. 여기 11:12에서 주목할 것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성령이 내게 명하사’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성령님께 순종하여 고넬료의 집에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둘째로 주목할 부분은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입니다. 베드로가 처음부터 의도했던 일인지는 정확하게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그랬을 개연성은 있다고 보여집니다. 베드로 자신을 포함하여 일곱 명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윌리엄 바클레이는 당시 유대인들이 로마법과 애굽법을 익숙하게 알았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로마법에서 중요한 문서에는 일곱 봉인이 필요했고, 애굽법에서는 중요한 사실을 입증하려면 7명의 증인이 필요했다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의도하고 6명을 대동하였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베드로의 이 말에는 “내가 구구하게 변명을 늘어놓지 않겠다. 나는 여섯 명의 증인과 함께 일어난 사실만을 증거하겠다”는 의도가 있어 보입니다. 고넬료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고넬료가 환상 속에서 천사의 명을 받아 베드로를 청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13-14). 성령의 주도하심이 여기서도 나타납니다. 앞에서 고넬료가 받은 환상에서 자세한 내용이 없었지만, 천사는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고 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11:14). 그리고 베드로가 설교를 시작했을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는데 그 임하심은 오순절에 사도들과 처음 120명의 성도들에게 임한 것과 같았다고 말합니다. 성령님이 주도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는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11:16; 1:5). “아, 이 일이 우리에게만이 아니라, 이 이방인들에게 나타났구나.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들을 깨끗하다고 하시는 선언이구나!”하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막거나 저항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베드로는 이 이방인 무리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증거합니다.
베드로의 말은 설명이나 변명이 아닌 일어난 일에 대한 사실적 증언이었습니다. 이 증언을 들은 할례자들은 유구무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말했습니다(11:18).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생각의 회심이 없다면, 우리는 성령님을 거스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이 소위 이방인의 오순절이라고 불리는 고넬료 에피소드의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5. 교훈과 적용
그렇다면, 이 고넬료 에피소드를 통해 하나님께서 21세기 한국의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먼저, 본문 해석에서 주의할 점 하나를 언급하겠습니다. 이방인의 오순절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첫번째 오순절에 필적하는 두번째 오순절이 아닙니다. 이것은 첫번째 오순절의 경험에 이방인 신자들이 참여하게 되었음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점에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린도전서 12:13).” 첫번째 오순절에 교회에 부어진 성령님은 이후에 죄인들이 회심하고 교회에 들어올 때마다 새롭게 각자에게 다시 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회심한 신자들이 교회로 들어올 때, 그들은 처음에 교회에 부어 지신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고, 한 성령을 함께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이방인에게도 이 복락이 주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성령님께서는 보이는 방식으로 고넬료와 모인 이방인들에게 첫번째 오순절과 동일한 방식으로 임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매번 이런 동일한 역사가 일어나야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참된 회심이 아니라고 판단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건은 그런 뜻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A. 교회 안에는 인종적, 문화적, 사회적 차별이 없다(10:28,34).
첫째로, 이 사건은 하나님의 가족인 교회 안에 인종적, 문화적, 사회적 차별이 있을 수 없음을 가르칩니다. 당연히 여러분은 이 말에 동의 하시겠지만, 인간의 본성을 생각할 때 이 말은 그리 쉽게 적용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는 수많은 차별이 존재합니다. 외국인 노동자라는 이유로, 많이 배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수입이 적다는 이유로,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심지어 정치적 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우리는 누군가를 자신과 다른 범주로 분류하고 차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10:28).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십니다(10:34).”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각 나라와 민족과 백성과 방언에서 차별 없이 사람들을 불러 모읍니다. 교회는 모든 족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와 주님을 받아들이는 모든 이로 구성되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이것은 우리 본성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본래 베드로와 유대인들의 눈에 이방인은 거슬리는 존재였듯이, 우리에게도 눈에 거슬리는 존재는 있습니다. 문제는 내 본성을 따라 그들을 나의 범주 밖으로 밀어낼 것인가, 아니면 그들에게 다가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려줄 것인가, 어떻게 그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일례를 들지요. 오늘날 교회 안팎으로 뜨거운 이슈 중 하나가 동성애 이슈입니다. 오늘 한 동성애자 혹은 동성애 커플이 우리 교회의 예배에 참여했다고 해봅시다. 여러분 같으면 그들을 어떻게 대하시겠습니까? 저는 동성애가 아무 문제도 아니며, 그것이 죄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제 질문은, 우리가 그(들)에게 “그 죄를 버리기 전에는 이 거룩한 자리에 들어올 생각을 하지도 말라”는 메시지를 주지는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질문을 드리지요. 믿음이 먼저입니까, 개선이 먼저입니까? 우리는 죄인에게 믿고 성도가 되라고 해야 합니까, 거룩한 믿음과 행실로 성도가 된 뒤에 교회로 나오라고 해야 합니까? 그 누구도 믿음이 들어오기 전에 먼저 자신의 삶을 개선할 능력을 가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이방인들’이 즐비합니다. 그들은 교회의 높은 문턱을 넘어 들어올 자신이 없거나, 그럴 엄두도 내지 않습니다. 우리는 낯선 이방인들이 없는 우리만의 교회를 편안하게 누리고 싶어합니다. 오늘날 젊은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영성에 더 많은 관심이 있지만, 그들은 교회가 자기들이 가야할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가야할 곳은 어디입니까? 본문은 교회는 세상에서 흉내도 낼 수 없는 차별 없는 공동체라고 가르칩니다. 고넬료 에피소드는 교회의 초기에 성령님께서 교회를 어떻게 주도적으로 세워 가셨는지를 보여줍니다. 1세기 유대인들에게 이 교훈이 배우기에 고통스러운 것이었듯이, 우리에게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자서전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는 영국에서 학생 시절 복음서를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아 인도 국민을 분열시키는 카스트 제도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주일, 간디는 교회 예배에 참석하여 목사에게 구원과 다른 교리에 대한 깨달음을 구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간디가 교회당에 들어섰을 때 안내하는 사람은 그를 막아 서서 동족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곳으로 가서 예배를 드리라고 말했습니다. 간디는 그곳을 떠나 다시는 교회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인에게도 카스트가 있다면 나는 차라리 힌두교인으로 남는 게 낫다!”고 그는 혼잣말을 했습니다. 미래의 세계 지도자는 신약성경을 읽고 기독교를 진지하게 고려하기까지 했지만, 결국 그의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나는 신약성경도 좋아하고 기독교도 좋아하지만 당신네 기독교인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B. 생각의 회심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삶에 절대로 중요하다(롬 12:2).
이것은 우리를 두번째 교훈으로 인도합니다. 생각의 회심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삶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2).” 생각/마음의 변화는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변화시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보다 포용적이고 개방적이며 사랑스럽고 예의를 갖추어 모든 사람들을 대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복음은 여러분에게 적대적이거나, 여러분을 무시하거나, 여러분과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그렇게 우리가 사람들을 대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마하트마 간디가 그랬듯이 기독교와 복음을 오해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신학적 개혁주의는 성경에 대한 가장 바른 설명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개혁주의자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개혁주의자가 되는 순간, 저는 개혁주의자가 아닌 그리스도인들을 판단하거나 사랑할 수 없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할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매우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사 우리와 한 가족이 되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개혁주의 교리를 사랑하는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알미니안 형제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형제로서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