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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 (23).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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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 (23).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초상

사도행전 11:19-30, 갈라디아서 5:22, 요한복음 3:3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4-03-03

말씀내용
앞선 본문에서(10:1-11:18) 우리는 이방인 고넬료와 그의 친척과 친구들의 회심을 보았습니다. 고넬료의 회심 사건과 함께, 오늘 본문은 앞으로 13장 이후에서 보게 될 이방 선교의 기초를 놓는 역할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역사상 최초의 다민족 국제 교회인 안디옥 교회의 설립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 최초의 다민족 국제 교회의 탄생 (행 11:19-21; 8:4)
먼저 누가는 안디옥 교회의 설립의 배경을 말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스데반의 순교로부터 이어진 박해의 열매 중 하나였습니다. 19절입니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사도행전 11:19).” 19절은 아직도 사도행전의 문맥은 8:4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사도행전 8:4).” 빌립은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했고 가사에서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아소도와 여러 성을 지나 가이사랴까지 계속 복음을 전했습니다(행 9:40). 회심한 사울은 다메섹과 아라비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행 9:20-21). 사도인 베드로는 룻다와 욥바 등 역시 해안 지대를 따라 복음을 전하던 중, 이방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9:32-11:18).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한 사람들은 사도도 아니고 일곱 일꾼도 아닌 평범한 성도들 그저 ‘흩어진 자들’이었습니다(행 11:19). 이들은 거의 헬라파(헬라어를 사용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북쪽으로 더 멀리 베니게, 구브로 그리고 안디옥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했는데, 이들이 이렇게 멀리 갈 수 있었던 것은 문화적, 언어적 장벽을 크게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했습니다.’ 비록 사마리아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고 이방인 고넬료의 집안도 교회에 더해졌지만, 이 언급은 여전히 일반적인 신자들—그들 자신이 유대인인—의 생각이 유대인에게 한정되어 있었던 분위기를 보여줍니다. 베니게(페니키아)는 현재의 레바논 북쪽 지역으로 해안으로 약 160km 에 이르고 동서로는 24km 너비의 면적입니다. 베니게의 주요 도시로는 두로와 시돈, 사렙다와 돌레마이 등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베니게 해안에서 배를 타고 구브로 섬으로 갔을 것입니다. 구브로(사이프러스/키프로스)는 지중해의 섬으로, 수리아 해안에서 160km 떨어져 있었고, 무엇보다 바나바의 고향이기도 했으며 큰 유대인 공동체가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또 흩어진 어떤 사람들은 오론테스 강의 상류 지점인 안디옥까지 올라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지도를 보면, 복음이 얼마나 북쪽으로 뻗어 나가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안디옥이라는 도시를 좀 더 살펴보지요. 현재, 이 도시는 튀르키예의 남동부 끝에 위치한 안타키아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482km 지점이니, 경부고속도로로 서울-부산의 거리보다 약 50km 정도가 더 멉니다. 1세기의 안디옥은 로마 제국에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당시 인구는 50만명이라는 기록이 있지만 실제로는 25만 명 정도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유대인 인구는 2만 명을 상회했을 것으로 봅니다. 대도시 안디옥은 각종 인종과 문화의 용광로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안디옥은 다프네(Daphne)라는 여신을 숭배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는 도덕적, 성적 타락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많은 수의 유대인들로 인해 유대인 개종자들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처음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일꾼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니골라가 바로 안디옥 출신이었고(행 6:5),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도 안디옥 출신이라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흩어진 신자들을 통해 베니게를 지나 구브로 섬과 안디옥에 이르기까지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만 한정된 전도였습니다. 그런데 20절은 새로운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사도행전 11:20).” 특별히 구브로 출신과 구레네 출신들 몇 사람이 안디옥에서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북아프리카의 해안 도시인 구레네는 현재의 리비아 지역으로, 당시 로마의 속주 카레나이카(리비아)의 수도였고, 의학교육과 고전을 연구하는 지적 중심지 역할을 하던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유대인 공동체도 성장하고 있던 도시였기에, 우리는 구레네 출신인 시몬(눅 23:26)과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온 유대인 중에는 구레네 출신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행 2:10). 이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의 신자들은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기서 ‘헬라인’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19절의 유대인과 대조하여 표현한 것을 볼 때 인종적 헬라인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결과를 21절이 보여줍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사도행전 11:21).” 수많은 사람이 믿고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구브로 섬과 구레네(북아프리카) 출신의 이 이름 없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공식적인 지시도, 사람의 가르침도, 따라야 할 선례도 없이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불타는 사랑만으로 자신들의 행동이 얼마나 혁명적인 것인지를 깨닫지 못한 채 안디옥의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는 역사상 최초의 다민족 국제 교회의 탄생이었습니다. 누가는 그 이유가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말하자면, 복음 전파의 열매는 그 사람들 자신이 가진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주의 손의 능력에 달린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안디옥 교회의 설립 배경입니다.


2. 바나바의 등장 (행 11:22-24; 4:35-37; 9:26-27; 갈 5:22)
이 소식은 언제나처럼 예루살렘에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이 타이밍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칼빈은 “만일 베드로가 고넬료와 관련된 자신의 일을 해명하기 전에, 이 사람들의 소문이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졌더라면, 하나님께서 성령의 은혜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형제들'의 사역을 인치셨다고 해도, 그들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았을 것이다”라고 예리하게 말함으로써, 성령님께서 얼마나 놀랍게 이 모든 일들을 주도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안디옥의 헬라인들이 주님께 더해졌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파송합니다. 이것은 탁월한 결정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최초의 다민족 국제 교회를 섬길 수 있는 최고의 적임자였기 때문입니다. 그 자신이 구브로에서 성장하면서 헬라 세계를 경험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을 뿐 아니라 구약의 전통을 붙잡고 있는 레위인이었다는 점 뿐 아니라, 그가 가진 경건함과 관대함의 신앙과 성품 때문입니다. 에크하르트 슈나벨은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주석가가 생각하듯이, 바나바는 경험 많은 선교사, 지도자, 신학교사, 교회조직을 정리하는 사람으로 파송되었다.”
이것은 바나바의 세번째 등장입니다. 그는 처음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재산을 헌납하여 성도들을 섬긴 인물로 소개되었고 사도들이 그의 특성을 따라 권위자 즉 위로의 아들을 의미하는 바나바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고 했습니다(행 4:35-37). 바나바는 그만큼 예루살렘에서 사도들 뿐 아니라 성도들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의 두번째 등장은 회심한 사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그를 신뢰할 수 없어서 사도들이 그를 기피하고 있을 때, 용감하게 나서서 사울을 사도들에게 소개한 인물도 바나바였습니다(행 9:26-27). 세번째 등장은 그야말로 그가 가진 이름의 의미를 너무나 잘 보여줍니다.
안디옥에 도착한 바나바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했습니다(행 11:23a). 바나바는 안디옥의 회심자들이 참된 회심을 했는지,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검사하려는 태도를 가지고 꼬투리를 잡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새롭게 그리스도인이 된 안디옥 사람들을 볼 때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여겼을지라도 그들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그 열매들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진심으로 기뻤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고 권하였습니다(행 11:23b).” 바나바가 했던 것은 그의 별명의 의미대로,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진리가 없는 위로가 아니었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의 새로운 회심자들에게 말한 두 가지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굳건한 마음은 의지를 가지고 흔들리지 않고 걸어가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주와 함께 머무는 것은 처음에 고백한 신앙 그대로 주님께 지속적인 충성을 다하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누가는 바나바의 신앙과 성품을 설명하면서, 이것이 어떤 결실을 가져왔는지를 보여줍니다. 먼저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행 11:24a). 사도행전 전체에서 누가는 바나바 외에 누구에게도 ‘착하다’는 표현을 쓴 적이 없습니다. 착하다는 것은 공동체에 유익을 끼치는 성품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반영합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그의 착함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바나바의 착함은 단순히 성품과 기질의 문제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이고(갈 5:22) 신앙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는 경건한 어른의 롤모델입니다.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고 누가는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합니다(행 11:24b). 그는 단순히 안디옥에서 일어난 일을 검사하러 온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과 성품으로 하나님의 일을 흥왕케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교회에 더해졌다는 표현대신, 주께 더하여 졌다고 한 것을 주목해 보십시오. 단순히 교회가 수적으로 많아졌다는 것이 아니라, 회심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회심을 통해 안디옥 교회는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3. 사울의 등장 (행 11:24-25; 9:15,27; 고후 11:23-27; 빌 3:8; 고후 12:1-4; 요 3:30)
자, 여기서 우리는 건전한 상상력을 가지고 행간을 좀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바나바는 늘어나는 교인들을 혼자서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새로운 회심자들을 지도자로 기르려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바나바는 당연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을 것입니다. 기도하던 중, 사울이 바나바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는 다소에 있는 사울을 불러오겠다고 결심합니다. 약 8-10년 전쯤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사울은 그의 안전을 염려하는 사도들에 의해 가이사랴로 보내어졌다가 결국 그의 고향인 다소로 보내어졌었습니다. 바나바는 하나님께서 사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렇게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소개한 바도 있습니다(행 9:15,27). 또한 사울은 자신과 같이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헬라 사람들에게 문화와 언어의 장벽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준비된 사역자였습니다. 게다가 그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사울은 안디옥 교회를 섬기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습니다. 사울이 회심 후 아라비아에서 3년을 보낸 것을 합하면, 거의 회심 후 10 여년이 훨씬 지났습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당신의 종으로 충분히 훈련시키셨을 것이라고 바나바는 짐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주석가 리처드 롱게네커(Richard N. Longenecker)는 이 시기에 바울에게는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확실히 바울은 그 기간 동안 설교와 전도를 계속했을 것이고, 이 일 때문에 회당 관리들의 손에 서른 아홉 대의 채찍을 맞는 것과 같은 핍박을 몇 차례나 받았을 것입니다(고후 11:23-27 참조). 이때 바울은 모든 것을 잃어 버리는 경험(빌 3:8) 그리고 가족으로부터 버림받는 경험을 했을 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가 셋째 하늘에 올라가는 황홀한 계시 체험을 한 것도 이 시기에 일어났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고후 12:1-4). 바울은 더 이상 초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신학은 결정화되고 성숙해졌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로 충만했습니다. 비록 바나바가 이 모든 일들이 사울에게서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다 알지 못했을지라도, 그는 사울의 부르심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계획이 안디옥에서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만큼의 영적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이 안디옥 사역의 적임자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이것이 본문 24절과 25절 사이의 행간을 읽는 것입니다.
안디옥에서 다소는 210km 거리로 도보로 약 8일의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사울을 찾으러 다소로 갔습니다(행 11:25). 이렇게 바나바와 사울의 동역이 시작됩니다. 처음에는 분명히 ‘바나바와 사울’로 시작했습니다(행 11:30; 12:25; 13:1,2,7; 14:14; 15:12,25-26). 그런데 뒤로 갈수록 점점 ‘바울과 바나바’로 바뀌는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행 13:43,46,50; 15:2,22,35). 이것은 사람에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신학자는 “바나바는 나이가 더 많고, 더 존경받고, 여러 면에서 더 경험이 많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나바가 사울에게 안디옥 사역을 도와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리고 나중에 함께 전도 여행을 시작하면서, 바울은 바나바보다 더 큰 역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나바는 세례 요한처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하나님의 일이 흥왕케 되기를 위해서, 바나바는 그것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누가가 그를 착한 사람이라고 쓴 이유일 것입니다.


4.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린 사람들 (행 11:26)
사울은 바나바의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안디옥에 와서 바나바와 함께 약 1년 간 그 큰 무리를 가르치고 목양을 했습니다(행 11:26). 그들은 환상의 콤비였을 것입니다. 바나바는 섬세하고 공감 능력이 뛰어났으며 은혜로운 사람이었다면, 사울은 훌륭하게 연마된 예리한 변호사의 지성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그 두 사람을 통해 역사하셨기에 그들은 거침 없이 사역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안디옥의 신자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고 누가는 기록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메시아의 헬라어 그리스도에 라틴어 명사형 접미사 ‘-ianus’를 붙여 만든 경멸적 호칭이었습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은 신자들이 스스로를 향해서 부르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2세기나 되어서 안디옥 교회의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Antioch)가 최초로 다른 신자들을 향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F.F.브루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안디옥 사람이 다른 안디옥 사람에게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라고 물었다. 이때 “응, 이사람들은 항상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 즉 그리스도의 사람들, 그리스도인들이네"라고 대답했다.” 안디옥 사람들은 이 다민족 국제 공동체를 향해 유대인이라고 부를 수 없었고, 회당 사람들이라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달라도 너무나 달랐고 구별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안디옥 사람들이 알고 있던 기존의 어떤 범주에도 넣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칭호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5. 교훈과 적용
오늘 본문은 두 가지 점에서 우리를 교훈합니다. 바나바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고, 안디옥 교회를 통해 교회가 어떤 공동체인지를 보여줍니다.


A. 교회의 초상, 안디옥 교회 (행 11:27-30; 갈 2:1-10; 행 2:44b-45; 고후 8:9)
누가는 안디옥 교회를 통해 교회의 초상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27-30절에 기록된 예루살렘 교회를 섬긴 일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안디옥에서 함께 동역하고 있을 때, 예루살렘에서 선지자들이 안디옥에 오게 됩니다. 그중 아가보가 성령으로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고 예언을 합니다. 그 예언대로 실제로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 치하에서 주후 45-47년에 이집트, 수리아, 유대, 그리스에 큰 식량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 기근은 안디옥을 포함한 고대 근동의 넓은 지역에 임했지만, 안디옥 교회는 유대의 형제들을 돕기 위해 힘대로 연보하여 부조를 보냅니다. 유대 특별히 예루살렘 형제들의 형편이 헤롯의 박해 등으로(행 12) 영육간에 더 힘들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예루살렘의 장로들에게 부조를 전달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하는데, 이것이 갈라디아서 2:1-10에 묘사된 바, 사울이 회심 후 14년 만에 두번째로 예루살렘을 방문한 일입니다.
처음에 예루살렘 교회에 은혜가 임한 증거는 자신의 소유로 서로를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함께 했습니다(행 2:44b-45). 그러나 안디옥 교회가 은혜를 받은 증거는 그리스도 안에 있지만, 일면식도 없는 형제들을 물질로 섬기는 일로 나타났습니다. 은혜의 증거는 언제나 관대함입니다. 그리고 이 관대함은 은혜의 공동체인 교회의 본질적 특성입니다. 이 관대한 베풂의 사역은 안디옥 교회가 장차 이방 선교를 위한 전초 기지가 될 것을 미리 보여주는 복선 역할을 합니다.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된 사람들만이 아니라,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될 사람들을 이방 전도와 선교를 통해 섬기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사울의 동역을 통해, 그들 바깥을 살필 뿐 아니라 그들을 향해 마음을 열고 손을 내미는 관대한 교회로 성장하게 됩니다. 누가는 이 관대함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인 교회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소개합니다. 이런 관대함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이런 관대함은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그것은 부요하신 이로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으로써 당신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에서 온 것이었습니다(고후 8:9). 즉,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품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본문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B. 그리스도인의 초상, 바나바 (행 11:24b,26; 갈 5:22; 고후 3:18)
두번째 교훈은 그리스도인의 초상으로 제시되는 바나바라는 인물에 관한 것입니다. 본문은 바나바라는 인물의 능력이 효과적 전략이나 계획이 아닌 그의 인격적 신앙적 특성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인품과 성품의 착함은 성령의 열매입니다(갈 5:22). 그리고 믿음은 그리스도인 안에서 성품을 만들어 냅니다. 바나바는 자신을 일인자로 드러나는 일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만을 바랐고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바나바는 자기보다 뛰어난 면모를 사울에게서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을 기피하는 대신, 그는 사울을 찾으러 8일 길을 걸어 다소로 갔습니다. 안디옥의 목회자, 바나바는 성품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보여주었고,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졌습니다(행 11:24b).” 그리고 그들이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기 시작했습니다(행 11:26).
본문은 단지 바나바의 성품을 말하고 이것을 닮으라는 것이 아니라, 신앙 성숙의 표지를 보여줍니다. 바나바는 경건한 어른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람이야말로 바나바 같은 사람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이 떠오릅니까? 이런 경건한 성품과 인격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합니까? 성숙한 인격은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성품을 반영합니다. 바나바는 그리스도와 그 성품을 반영하는 인물입니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우리의 바나바가 되십니다. 누가는 바나바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성품과 사역을 드러내고, 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은혜로 빚어 가실 우리 모습의 결국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자는 주와 같은 형상으로 변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릅니다(고후 3:18).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을 멈추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