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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 (24). 박해 속에서 성장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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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 (24). 박해 속에서 성장하는 교회

사도행전 12:1-24, 다니엘 3:16-18, 마가복음 10:21-2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4-03-17

말씀내용
누가는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바나바와 사울의 편에 부조를 보낸 일을 기록하면서(11:30) 자연스럽게 무대를 안디옥 교회에서 예루살렘 교회로 옮겨갑니다. 그리고 12:25에서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오는 일을 기록함으로써, 13장부터 다시 무대는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전환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활동 무대의 전환만이 아니라, 유대 선교에서 이방 선교로의 전환이고, 베드로의 활동에서 사울의 활동으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중에 15장에서 우리가 잠깐 살펴보기는 하겠지만, 예루살렘 교회의 이야기는 오늘 살펴볼 12장에서 사실상 마무리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의 강조점은 헤롯에 의한 사도 야고보의 순교와 사도 베드로의 감금이라는 모진 박해에 의해서도 결코 좌절되지 않는 복음의 승리적 진행, 즉 박해 속에서 성장하는 교회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헤롯 아그립바 1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통해 교회의 대적들은 패망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본문은 예루살렘과(1-19절) 가이사랴에서(20-23절) 일어난 두 개의 에피소드를 담고 있는데, 두 에피소드 모두가 유다를 다스리던 왕 헤롯 아그립바 1세(BC 9-AD 44)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살피기 전에, 먼저 이 사람 헤롯 아그립바 1세에 대하여 조금 설명드리겠습니다. 이 사람은 헤롯 대왕(Herod the Great)의 손자인데, 헤롯 대왕이 자기 아버지인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를 처형했을 때 3-4살이었습니다. 그는 어머니에 의해 로마로 보내져서 거기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는 가운데 황제의 가족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그중 칼리굴라 황제가 있었고, 칼리굴라는 아그립바 1세에게 주후 37년 빌립과 루사니아가(눅 3:1) 다스리던 영토와 삼촌 안디바가 다스리던 갈릴리와 베레아를 추가하여 다스리게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자기 할아버지인 헤롯 대왕이 다스린 영토에 버금가는 영토를 다스리게 되었고 특별히 유대인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 노력하여 상당한 인기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1. 박해 속에 있는 예루살렘 교회
본문은 ‘그때에’라고 시작하는데, 이것은 바로 앞에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에 부조를 보낸 그 즈음을 가리킬 것입니다. 하지만 정확히 일치하는 시점이라기 보다는, ‘그 즈음에’ 정도로 읽으면 될 것입니다. 안디옥에서 예루살렘으로 무대를 전환하면서 ‘한편 예루살렘에서는’으로 읽을 수도 있겠습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예루살렘에서 교회가 성장해감에 따라 불만이 커져가던 유대인들의 호의를 얻기 위하여 교회를 박해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3절에서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라고 썼듯이, 아그립바 1세는 예수님의 길따름이들을 배교자나 우상숭배자로 여기는 유대인 지도자들과 한 통속이 되어 박해를 한 것입니다. 이때는 아마 주후 41년 경이었고,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에 부조를 보낸 것은 주후 44년 경으로 추정됩니다.
A. 야고보의 순교 (1-2; 막 10:21-22)
아그립바 1세는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고 하는데, 그 표적은 지도자들인 사도들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그는 사도 야고보(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나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아닌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이고 요한의 형제)를 잡아 처형하였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 핵심 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야고보는 초대교회의 두번째 순교자, 그리고 사도들 가운데 첫번째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아그립바가 야고보를 칼로 죽이게 한 것은 그가 사형에 대한 권한을 로마 정부로부터 위임받았음을 시사합니다. 아그립바 1세는 야고보를 칼로 죽였는데, 이것은 아마 참수형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유대교에서 랍비들의 구전 율법이라고 할 수 있는 미쉬나 법에 의하면, 참수형은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이이고 살인자나 미래의 세계에 참여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배교자들에 대한 형벌이었으니 아그립바 1세의 박해가 얼마나 혹독한 것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때는 주후 31년 스데반이 순교한 지 약 1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였습니다.
우리는 야고보의 어머니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청탁을 했던 일을 기억합니다(막 10:21). 그때 주님은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셨고 야고보와 요한은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했었습니다(막 10:22). 야고보가 사도 중 최초의 순교자가 된 일을 보면서 야고보의 이 고백이 떠오릅니다.
B. 베드로의 투옥 (3-5)
야고보의 처형을 유대인들이 기뻐하는 것을 확인한 아그립바 1세는 베드로도 처형하려고 그를 체포하여 투옥합니다. 하지만 유대인의 3대 명절 가운데 하나인 무교절 기간인지라, 무교절이 끝나면 심문하고 처형할 계획을 세웁니다. 통상적으로 유월절 기간에 처형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불편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마 26:5; 막 14:2 참조). 3절에서는 무교절, 4절에서는 유월절이라고 썼는데, 무교절은 유월절 저녁에 시작하여 7일간 이어지는 절기였기에 하나의 절기로 여겨졌고 따라서 유월절 혹은 무교절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감옥에 갇힌 베드로는 4인조로 된 4개조 군인들에게 맡겨져 그 경호가 실로 삼엄했습니다. 6절에서도 알 수 있듯이, 베드로는 두 군인 사이에서 쇠고랑에 묶여 잠을 잤고 다른 두 명의 군인이 감금된 방을 지켰습니다. 네 명의 군인들은 세 시간 마다(밤을 4경으로 나누어)다른 네 명의 군인들과 교대를 했을 것입니다.
C. 베드로의 구출 (6-11, 15-16,18,23; 10:9-16; 5:18-20)
야고보의 순교로 이미 큰 상실을 경험한 예루살렘 교회는 이어지는 베드로의 투옥으로 얼마나 큰 위기감을 느꼈을까요? 교회는 베드로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5). 그들은 베드로가 풀려나는 기적을 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베드로가 풀려난 뒤에 그들의 반응이 그것을 보여줍니다(15-16). 그들은 베드로가 야고보 처럼 처형을 당하지 않고, 좀 더 가벼운 형벌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했거나, 또는 베드로가 혹독한 심문과 처형을 이겨내도록 믿음과 힘을 주시기를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날 밤은 무교절이 끝나고 심문을 받기 전날 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배여 누어 자고 있었다고 누가는 기록하는데, 이런 절체절명의 시간에 베드로가 쇠사슬에 매여 잠을 자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F.F.브루스는 “베드로는 거리낌 없는 선한 양심과 하나님에 대한 고요한 확신으로 인한 잠을 자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가 누리는 평안을 보여줍니다.
그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사이에서 쇠고랑에 매여 평안하게 자고 있던 그 캄캄한 감옥 안에 홀연히 광채가 빛나면서 주의 사자가 나타납니다. 천사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그를 깨우지요. 옆구리를 쳤다는 것은 아주 세게 치는 경우도 포함되는데, 여기서는 주의 천사가 베드로를 깨우려고 그의 옆구리를 쳤지만, 23절에서는 죽이기 위해서 주의 천사(사자)가 헤롯 아그립바 1세를 쳐서 죽게 합니다. 천사는 “급히 일어나라”고 말하는데 베드로의 두 손을 결박한 쇠사슬이 스르르 벗어집니다. 그리고 천사는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고 한 뒤,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고 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동안, 베드로의 곁에서 그를 지키던 군인들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채 깊이 잠들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앞장 서서 나가는 천사를 따라가는 베드로는 여전히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을 못합니다. 그렇게 첫째, 둘째 관문을 지나 거리로 통하는 철문에 이르렀을 때 철문이 저절로 열립니다. 베드로가 나와 거리를 하나 지나자 천사는 떠나갑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철저하게 수동적입니다. 그는 꿈인지 생시인지 조차 구분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이전에 욥바에서 보았던 환상과 비교할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행 10:9-16). 물론 이전에도 베드로는 옥에서 구출되는 경험을 한 적이 있기는 하였으나(행 5:18-20), 이렇게 철저하게 감금이 되었던 경우도 아니었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감옥에서 나와 거리 하나를 지났을 때 비로소 정신이 들었고 지금 벌어진 일이 현실임을 깨닫습니다.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고 말하는 직접화법은 베드로의 깨달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11).
D. 베드로의 구출, 그 이후 (12-19; 눅 21:18; 갈 2:11-15; 고전 9:5)
이제 12-19절은 베드로가 구출된 이후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실을 자각한 베드로가 향한 곳은 성도들이 모인 자리였습니다. 마가라 하는 요한에 대해서는 다음에 살펴볼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일단의 성도들은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대문이 있는 큰 집을 소유한(13) 부유한 여인이었던 마리아는 자신의 집을 공동체를 위해 개방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과부였거나 만일 남편이 있다면 마리아의 이런 행동을 용인해주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 집의 대문을 두드리자 그 집의 여종(여자 아이) 로데가 나왔다가 베드로의 음성인줄 알고 기뻐서 문을 열어주지도 않은 채 안으로 달려들어가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다”고 외칩니다. 사람들은 로데에게 “네가 미쳤다”고 반응하지만, 로데는 “참말이라”고 항변합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그러면 그의 천사라”고 말합니다. 수호천사의 개념은 당신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반영합니다. 그들은 수호천사가 자기가 보호하는 사람과 같은 모습을 가졌다고 믿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성경은 수호천사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칼빈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도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 18:10)고 말씀하셨다. 이것으로부터 사람들은 각 사람에게는 수호천사가 지정되어 있다고 추론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런 추론은 근거가 너무 희박하다. 왜냐하면, 성경의 증언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큰 무리에게 한 천사를 보내시기도 하시고(출 14:19), 때로는 단 한 사람에게 어마어마한 무리의 천사들을 보내시기도 하시기 때문이다(왕하 6:17). 성경은 각 개인을 지켜 주고 돌보아 주는 고유한 수호천사가 있다고 말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자들"을 명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믿는 자들을 지키게 하시고 (시 91:11),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게" 하신다고 말한다. 따라서 한 사람에게 수호신이 둘씩 붙어 있다는 믿음이 도처에 팽배해 있지만, 그것은 완전히 날조된 미신이다.” 우리는 수호천사가 아니라, 우리의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으리라고 하신 주님의 약속을 믿고 주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눅 21:18).
결국 계속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열고 베드로를 만난 성도들은 크게 놀랍니다. 베드로가 그랬듯이, 이들도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반응은 그들이 베드로의 석방과 구출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음을 암시합니다. 그들이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을 안심시킨 후에 주께서 자기를 옥에서 이끌어내신 일을 말합니다. 여기서 주어가 천사가 아니라 주님이심을 주목하십시오. 그리고 베드로는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고 하고는 예루살렘을 떠나 다른 곳을 가게 됩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를 가리킵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였습니다(행 15:13-21; 21:18). 누가는 베드로가 향한 ‘다른 곳’을 특정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안디옥에 잠시 머물기도 했고(갈 2:11-15) 주로 순회사역을 감당했을 것입니다(고전 9:5). 이렇게 해서,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베드로의 사역에서 이방인 선교를 감당하는 사울의 사역으로 장면이 전환됩니다.
한편, 날이 밝자, 베드로가 사라진 것을 알고 소동이 일어납니다. 이미 베드로는 유월절 순례자들 사이에 숨어 예루살렘을 빠져나간 뒤였을테니, 베드로를 찾아내지 못한 헤롯 아그립바 1세는 고대 로마의 법대로 죄수를 놓친 파수꾼들을 처형하고는,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가게 됩니다. 그는 아마도 헤롯 대왕이 세웠고 이전의 로마 총독 마룰루스가 주거지로 사용했던 화려한 궁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이렇게 첫번째 에피소드는 마치게 됩니다.


2. 박해자의 급작스런 죽음 (20-23)
두번째 에피소드의 무대는 가이사랴입니다. 두번째 에피소드가 중요한 것은, 교회를 박해하던 자의 죽음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이 죽음에서 교회를 멸망시키려는 이 땅의 권력 보다 하나님이 더 강한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두로와 시돈은 베니게(페니키아)에 속한 해안 독립 도시들로서 양식은 아그립바 1세에게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양식과 관련한 어떤 일로 아그립바 1세를 분노하게 하자, 아그립바 1세는 갈릴리에서 남부 수리아로 보내는 곡물 운송을 금지시킵니다. 그러자 두로와 시돈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그립바 1세가 있는 가이사랴로 사절단을 파견하게 됩니다. 이들은 왕의 신임을 얻는 블라스도를 설득해 왕을 접견하고 관계를 복원하고 화해를 청했습니다. 그리고는 날을 택하여 그들의 합의 사항들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기로 했던 것 같습니다. 가이사랴에서는 헤롯 대왕이 아구스도를 기리기 위해 창설한, 4년에 한 번 열리는 경기가 있었습니다. 아그립바는 동틀 무렵 경기장에 등장하여, 귀족들, 두로와 시돈의 사절단, 그리고 가이사랴의 시민들에게 연설을 했을 것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아그립바가 경기장에 등장했을 때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태양 광선이 은으로 싼 옷에 비치자 그 옷은 멋지고 찬란하게 반짝거렸으며 그 옷을 주시하는 사람들 마음속에 두려움과 경외감을 불러일으켰다.” 요세푸스와 누가는 그 자리에 모인 사람이 모두 그를 신이라고 환호했다고 기록합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기 때문에 주의 사자가 쳐서 결국 벌레에게 먹혀 죽고 맙니다. 벌레에게 먹혀 죽었다는 헬라어 표현은 치명적 피부병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요세푸스는 이 죽음에 대해 “처음부터 온 몸에 동시에 느껴지는 고통이 위를 강타했다”고 썼습니다. 본문은 그의 죽음은 급작스러운 것이었음을 강조합니다.


3. 교훈과 적용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명확합니다. 교회는 어떤 박해 속에서도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24절이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더 널리 퍼지고, 믿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말입니다(새번역). 아그립바 1세의 혹독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야고보의 순교에도 불구하고, 또 베드로가 예루살렘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성장했습니다. 교회의 성장을 방해하거나 중단시키려는 인간과 마귀의 모든 노력은 결국 수포로 돌아갈 수 밖에 없고,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고 공격한 자들은 결국 급격하게 패망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주님께서 주시는 교훈을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지요.
A. 준비된 사람들
교회가 박해 속에서도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준비된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미리 박해를 위해 지도자들을 준비시켜 놓으셨습니다.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야고보 사도가 처형을 당하는 것과 같은 박해의 위협 속에서 견뎌낼 수 있는 사람들은 올바른 우선순위와 참된 동기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참됨은 고난 속에 있을 때, 입증되곤 합니다. 특권과 지위, 편안함과 안락함 등이 하나님을 섬기는 동기에 섞여 있는 사람들은 결코 어떤 박해도 견뎌낼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평안한 시절일지라도 늘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의 동기와 우선순위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B. 교회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 책임지신다. (11:30)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훌륭한 사람들, 지도자들에게 달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훌륭한 지도자들의 존재는 중요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승천 이후 약 12년 동안 예루살렘 교회를 인도해 왔기에, 야고보의 처형과 처형을 전제한 베드로의 투옥은 예루살렘 교회를 적잖이 당황하게 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비록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구출되었지만, 예루살렘을 떠나야 했습니다. 아마 이때 다른 사도들도 예루살렘을 떠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력에는 큰 공백이 생겨났습니다. 교회의 지도력은 유명한 사도들로부터 야고보와, 누가가 이름을 밝히고 있지 않은 장로들에게로 옮겨졌습니다. 그래서 이 일 후에 안디옥 교회의 부조를 가지고 예루살렘 교회에 온 바나바와 사울은 장로들에게 그것을 전달했던 것입니다(11:30).
한편, 베드로가 예루살렘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간 것은 예루살렘 교회를 버린 것이라거나, 두려워서 도피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교회만이 교회가 아니며, 베드로의 순회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를 확장해 가시고 그들을 돌보게 하십니다. 오늘날 개교회주의는 성경적으로 승인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바라보는 바른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12년 밖에 되지 않은 예루살렘 교회가 특정 지도자들에게 의존하지 못하도록,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교회를 책임지신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모든 상황을 허락하셨습니다. 야고보가 죽고, 베드로를 비롯하여 사도들이 교회의 창설직원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한 뒤에 예루살렘을 떠났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흥왕하고 믿는 자들이 더하여 짐으로써 교회는 성장했습니다. 교회는 탁월한 지도자가 아니라, 주님이 책임지시는 공동체입니다.
C.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주권 (행 5:18-20; 16:23-29; 단 3:16-18; 히 11:34,37)
세번째로,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자유로우신 주권이 우리와 교회의 삶에 작동하고 있음을 배워야 합니다.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야고보를 칼에서 건져주지 않으셨지만, 베드로는 감옥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스데반을 데려가셨듯이, 하나님은 야고보도 데려가셨습니다. 사도행전 5장과(5:18-20) 16장에서는(16:23-29) 감옥에서 건짐을 받는 사건을 보여주지만, 언제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신자들이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기도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대로 이루어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자기가 원하는대로 조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모든 고난의 상황을 이길 힘과 용기와, 끝까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붙들고 증거하는 담대함을 하나님이 공급해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엘리엇의 말입니다. “일관적이고 의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탁월한 관리 능력에 우리의 가장 간절한 목표를 맡기고 그분이 그분의 방법과 시간 안에서 그 일을 그분의 뜻대로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 신앙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불 앞에서 그것을 보여주었습니다(단 3:16-18). 그들은 하나님께서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 자신들을 능히 건져 내실 전능자이심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라는 말로써,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자신들을 풀무불에서 건져 내시는데 사용하실지 사용하지 않으실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주권을 믿는 신앙의 태도입니다. F.F.브루스는 말합니다. “베드로는 구원받았지만 야고보는 죽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신비이며, 이런 일은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왔다. 히브리서 기자는 어떤 사람들은 믿음으로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어떤 사람들은 믿음으로 ‘칼로 죽임을 당하였다’고 말한다(히 11:34, 37).”
D. 하나님의 심판은 현존한다.
네번째 교훈은 하나님의 심판은 현존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박해자 헤롯 아그립바 1세를 갑자기 죽이셨습니다. 누가는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기 때문에 주의 사자가 그를 쳐서 죽게 했다고 분명하게 기록합니다(23). 역사에는 교회를 반대하고 박해하고 복음 전파를 방해하면서 권력을 무도하게 사용한 폭군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의 권세와 영광은 오래 지속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제국은 망했고 그들의 교만도 무너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하십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의 경우 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어떤 권력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현존합니다.
E. 말씀의 성장 없는 교회 성장은 없다.
끝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말씀의 성장 없는 교회 성장은 없다는 교훈을 배웁니다. 누가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지도하던 사도들이 죽거나 다른 곳으로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성장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믿는 자들이) 더하더라(24).” 사도들이 아닐지라도 누군가가 사도들로부터 배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것입니다. 교회는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포기하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증거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강단은 언제나 거룩하게 지켜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비록 건물이 없어도, 재산이 없어도, 우리 가운데 유력한 자들이 없어도, 교회는 그 말씀의 능력으로 성장합니다. 성령님께서 사도행전을 통해서 가르치고 보여주시는 이 교훈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우리 교회를 통해서 드러나게 해주시기를 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