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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 (25). 이방 선교의 거보를 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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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 (25). 이방 선교의 거보를 떼다

사도행전 12:25-13:12, 이사야 49:6, 출애굽기 22:1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4-04-07

말씀내용
우리는 13장부터 사도행전의 새로운 큰 단락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1-12장이 예루살렘교회와 사도 베드로의 사역이 중심이었다면, 13-28장은 안디옥교회와 사도 바울의 사역이 주를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복음 전파의 주 대상도 주로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으로 바뀝니다. 이 변화의 핵심에 최초의 이방인 교회 또는 국제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안디옥 교회가 있습니다. 이제 13장부터는 소위 바울의 세 차례에 걸친 전도여행이 21장까지 기록되어 있고, 이후 끝까지는 예루살렘에서 구금되어 로마에까지 이르는 바울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어떻게 안디옥 교회에서 이방 선교가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바울 사도의 첫번째 전도여행의 시작점인 구브로 선교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안디옥 교회 (행 12:25-13:3; 골 4:10; 행 15:36-41; 11:26)
바나바와 사울은 안디옥 교회의 부조를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는 일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12:25은 그때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왔다고 말합니다. 마가는 로마식 이름이고 요한은 히브리식 이름입니다. 이 마가 요한은 마가복음을 쓴 인물이고, 바나바의 조카이기도 했습니다(골 4:10). 나중에 보겠지만 마가 요한은 바나바와 사울의 1차 전도여행에 수행원으로 동행하게 되지만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옴으로써, 나중에 2차 전도여행을 시작할 때 바나바와 사울의 다툼의 빌미를 제공한 인물입니다(행 15:36-41).
13:1은 당시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 다섯 사람을 소개합니다. 그 지도자들은 ‘선지자들과 교사들’이라고 불렸는데 굳이 이 두 직분의 기능을 구별하여 설명하자면, 선지자는 성령님께서 허락하시는 새로운 통찰력과 인도를 받는 기능이라면, 교사는 말씀으로 전수되어 내려오는 가르침과 해석을 충실하게 지켜 나감으로써 균형을 잡아주는 기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정경으로 완성된 뒤에는 선지자의 기능이 그쳤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선지자와 교사라고 했을 때 누가 선지자이고 누구는 교사다 하는 식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초기 교회에서 이 직분들은 종종 호환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바울, 바나바는 사도, 선지자, 교사로 불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지도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누가는 지도자 다섯 명을 소개하는데 그들의 다양성을 말해주려는 듯 보입니다. 바나바는 이미 많이 소개된 인물입니다. 구브로 출신의 유대인으로 레위인으로 안디옥 교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였을 것입니다. 두번째는 니게르로 하는 시므온인데 니게르는 흑인을 의미했으므로 그는 북아프리카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세번째 인물은 구레네 출신의 루기오입니다. 구레네도 북아프리카의 도시였기에, 루기오도 흑인이었을 것입니다. 이 세 사람이 모두 헬라어를 사용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네번째 인물은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입니다. 헤롯은 헤롯 대왕의 아들로 갈릴리의 분봉왕이었던 안디바를 가리키는데 세례 요한을 참수한 사람입니다. 젖동생이란 용어는 ‘함께 자랐다’ 또는 ‘한 유모가 길렀다’는 뜻인데, 헤롯과 왕궁에서 함께 자랐다면 마나엔은 회심 이전에는 헤롯의 왕궁에서 고위직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번째 지도자가 사울입니다. 사울은 큰 도시인 다소 출신의 로마 시민으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고 가말리엘에게서 배운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다섯 지도자들의 면모는 안디옥 교회가 얼마나 문화적, 인종적 다양성을 가진 교회였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보수적 성향에 비한다면, 보다 개방적인 공동체였을 것입니다.
실제로, 안디옥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점 외에는 그 구성원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사회적, 문화적 공통점이 없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나 조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디옥 사람들은 이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11:26).
어느 날, 이 공동체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다. 2절을 보지요.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2).” 안디옥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며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 ‘섬겨 금식하다’라는 말에서 섬긴다는 말은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금식은 초기 교회의 상시적 관습은 아니었고 특별히 중요한 때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기 위하여 식욕을 절제하며 기도하는 거룩한 관습이었습니다(행 14:23). 안디옥 교회는 어떤 특별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면서 금식을 병행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때 성령께서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아마도 이 성령님의 지시는 지도자 중 한 사람을 통해서 온 회중에게 전해졌을 것입니다. 성령님의 지시는 구체적이었습니다. 성령님께서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이라고 한 것은 이방 선교였습니다. 여전히 활발하게 성장하고 있던 안디옥 교회가 핵심 지도자인 바나바와 사울을 이방 선교를 위해 따로 구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지시는 명백했고, 그들은 지체없이 순종합니다. 패트릭 슈라이너는 “다양한 억양, 피부색, 문화적 관습은 성령의 음성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을 자극하는 원동력이다.”라고 말합니다.
누가는 그들의 순종이 즉각적이었다고 말합니다.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3).” 그들은 다시 금식을 하며 기도했습니다. 제가 오래 전에 읽은 한 책에서 그 저자는 그들이 다시 금식을 한 이유를 바나바와 사울을 이방 선교로 보내기 위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서였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성령님이 시키는 일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나바와 사울에게 안수하여 파송했습니다. 안수는 선교사로 임명한다는 의미 보다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제물에게 안수함으로써 안수하는 사람과 안수 받는 제물 사이에 동일시가 일어나는 것처럼, 교회가 그들 자신과 안수를 받는 두 사람을 동일시하는 행위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두 사람과 함께 그들 모두가 이방 선교의 길에 나선 것입니다. 선교는 헌신된 특정인들의 일이 아닙니다. 선교는 언제나 교회의 선교입니다.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함으로써 그들과 같이 가는 것입니다. 선교의 중요한 원리입니다. 이렇게 안디옥 교회를 통한 이방 선교의 거대한 첫 발걸음이 떼어졌습니다.


2. 구브로에서 (행 13:4-12; 사 49:6; 막 14:51-52; 행 15:39; 출 22:18; 레 20:6,27; 신 18:10-11; 요 8:44)
본문의 두번째 부분은 4-12절인데, 바나바와 사울의 이방 전도 사역의 첫 지역 구브로에서의 사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4절에서 우리는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라는 표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3절에서는 교회가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고 했는데 4절은 ‘성령의 보내심’을 말합니다. 선교는 성령과 교회의 선교임을 분명히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선교는 성령님께서 시작하셨고 교회를 통해서 하시는 일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안디옥에서 약 25km 떨어진 수리아의 항구 도시 실루기아로 가서 거기서 배를 타고 구브로(키프로스)로 향했습니다. 구브로는 실루기아에서 약 100km 떨어져 있는 지중해상의 섬으로 제주도의 약 5배 정도 되는 큰 섬입니다. 누가는 왜 그들이 구브로로 먼저 갔는지를 밝히지는 않지만, 구브로는 바나바의 고향이었고 많은 유대인이 정착한 곳이었기에 큰 어려움 없이 들어갈 수 있는 섬이었으며, 나중에 보겠지만 그들은 뱃길로 구브로에서 오늘날 튀르키예의 남부지방인 남갈라디아로 가려고 계획을 했던 것 같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먼저 구브로의 동쪽 해안도시 살라미에 도착하여 여러 유대인의 회당을 방문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앞서 예루살렘 박해로 흩어진 사람들이 구브로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읽었습니다(11:19). 그러나 복음은 유대인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전해졌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도 먼저 유대인의 회당들을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있는 곳이라면 언제나 회당을 중심으로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는데, 이것은 이사야 49:6의 성취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이사야 49:6).”
누가는 여기서 마가 요한이 바나바와 사울의 수행원으로 따라갔다는 말을 덧붙입니다. 학자들 중에는 이들이 마가 요한을 데리고 한 것은 그가 예수님의 수난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었기에 복음을 증거할 때 한 사람의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기대했을 것이라고 설명하는데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막 14:51-52). 누가는 이들이 살라미에서 보낸 기간과 복음 전파의 성과를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바나바가 마가(요한)를 데리고 다시 구브로로 갔다는 것은 당시에 좋은 반응이 있었고 최소한의 교회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음 암시합니다(행 15:39).
그들은 섬을 횡단하여 섬의 남동쪽 해안에 있는 구브로의 행정수도인 바보로 가게 됩니다. 바보는 전형적인 그리스-로마 도시로 많은 신전과 극장, 원형 경기장과 체육관, 목욕탕, 동전주조소 등이 있었습니다. 이 도시는 주전 15년에 새로 건설된 신도시 바보였고, 거기서 남서쪽으로 15km 지점에는 구도시 바보가 있었는데, 여기에 세워진 아프로디테 신전은 초기 로마제국에서 대단히 유명한 신전이었다고 합니다.
누가는 바보에서 바나바와 사울이 만난 첫번째 인물을 소개하는데, 그는 바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유대인 거짓 선지자이자 마술사였습니다. 엘루마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는데 이 이름도 마술사, 박수라는 뜻입니다. 율법은 이런 사람을 살려 두거나 용납하지 말라고 명하기에(출 22:18; 레 20:6,27; 신 18:10-11) 사실 유대인과 무당 혹은 마술사라는 말은 서로 어울릴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예수는 유대 공동체에서는 추방된 사람이거나 혹은 칼빈의 말대로 당시 유대교가 심히 타락하여 이런 불경스러운 미신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로마의 총독인 서기오 바울에게 영향을 미치는 교활한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정치인들이 적지 않아 보이지만, 고대 로마의 정치인들은 마술사나 점성가를 곁에 두고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 조언을 듣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총독 서기오 바울이 ‘지혜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일반적으로 지적 능력, 분별력, 판단력이 있다는 말인데,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긍정적 태도를 보인 것을 칭찬하는 표현 같습니다. 하지만 바예수는 총독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바나바와 사울을 대적하면서 어떡하든지 총독이 믿지 않도록 힘껏 방해를 합니다. 그가 어떤 마술적 능력을 행사했다고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주목을 잠시 끄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라는 표현입니다. 지금까지 사울이라고 불린 사람, 그 이름 사울은 베냐민 지파의 영웅 사울 왕의 이름을 딴 히브리식 이름이었습니다. 이방 선교의 거보를 뗀 그는 이제부터 바울이라고 불릴 것입니다. 바울은 그가 가진 로마식 이름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바나바가 아닌 바울이 사역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아니라 거의 ‘바울과 바나바’라고 기록됩니다. 사울이 아니라 바울로 변경된다는 것은 이제 유대인 중심의 예루살렘 교회에서 팔레스타인 밖의 유대인과 이방인들 즉 로마 세계로 그 무대 중심이 이동했음을 시사합니다.
바울은 무당 엘루마, 바예수를 주목하고 말했습니다.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10-11a).” 무서운 저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울의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그가 성령이 충만하여 한 말이라는 점에서, 복음의 대적을 향한 하나님의 저주였습니다. 첫째로 바예수는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였습니다. 바울은 진리의 영으로 충만했지만, 바예수는 거짓 영에 사로잡혀 악행만을 하는 자였습니다. 둘째로 바예수는 ‘마귀의 자식’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대적하는 유대인들을 가리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한복음 8:44).”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울이 한 말은 정확히 같은 뜻입니다. 바예수라는 이름은 예수의 아들이라는 뜻인데, 그는 실상 거짓의 아들, 마귀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그가 ‘모든 의의 원수’라고 말합니다. 마귀의 아들은 하나님의 가치인 의의 적대자일 수 밖에 없습니다. 끝으로 사울은 바예수가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울의 말대로, 바예수는 얼마 동안 맹인이 되어 안개와 어둠에 갇힙니다. 마술적 권능을 행하던 마술사는 이제 사람들에게 끌려 다니는 존재가 됩니다. 주문을 거는 자가 주문에 걸린 것입니다. 총독은 이 모든 일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거짓 선지자요 마술사인 바예수는 눈이 멀고, 총독 서기오 바울은 눈이 열려 보게 됩니다. 이 구브로에서의 에피소드는 총독의 회심으로 마무리됩니다. 어떤 점에서 총독 서기오 바울의 회심은 유대교의 종교적 배경을 전혀 가지지 않은 최초의 진짜배기 이방인의 회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는 총독이 기적을 보고 믿었다거나 주의 능력을 놀랍게 여겼다고 말하는 대신,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겼다’고 기록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마귀의 술사인 바예수와 성령의 사람인 사울의 능력 대결이 일어난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 그것은 진리의 대결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3. 교훈과 적용
하나님께서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복음 안에서 하나됨을 경험하는 공동체임을 안디옥 교회를 통해서 보여줍니다. 그들은 사회적, 문화적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공통점을 거의 가지지 않았지만,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따른다는 점에서 하나였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세상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이들은 누구인가? 세상은 그들의 생각과 언어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안디옥 사람들은 이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했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이것이 교회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교회란다. 이것이 너희가 존재하는 방식이어야 하고 나는 너희를 이렇게 데리고 갈거다.”
둘째로 선교는 성령과 교회의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해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그렇게 하라는 게 아니었고 안디옥 교회는 바로 순종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를 위해 구별하여 세운다는 것은 안디옥 교회의 엄청난 희생을 의미했습니다. 이것은 단지 재정적 희생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살을 깎는 희생이었습니다. 장래의 안디옥 교회의 목양과 운영을 생각할 때, 그들의 절반 이상을 희생하는 수고였습니다. 그들은 순종했습니다. 그들이 바나바와 사울을 파송할 때, 두 사람에게 안수한 것은 안디옥 교회와 두 사람이 동일시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안디옥 교회를 대신하는 선교의 사역자들이 된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와 사울과 함께 간 것이니다. 이런 방식으로 선교는 교회의 사역이 됩니다. 선교는 돈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선교는 우리 자신을 주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선교를 재고해야 할 것입니다. 선교는 성령과 교회의 사역입니다.
세째, 선교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이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살라미에서 유대인의 여러 회당을 다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5). 그리고 바보에 이르렀을 때, 총독 서기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다는 말은 두 사람이 그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7). 그리고 총독은 마술사 바예수가 사울의 저주를 받아 눈이 멀게 되는 것을 보았지만, 정작 그가 놀랍게 여긴 것은 기적 자체가 아니라 ‘주의 가르치심’이었습니다(12). 이점에서 모든 선교사는 하나님의 말씀, 복음으로 무장하고 또 무장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 봅시다. 우리는 선교를 먼 나라에 가서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목사인 레슬리 뉴비긴(1909-1998)은 1936년 인도 선교사로 가서 약 40년의 사역을 마치고 1974년 영국으로 귀국했습니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인도보다도 더 황망한 선교지인 영국이었습니다. 영국을 비롯하여 유럽을 휩쓸고 있던 계몽주의라는 거대 사조는 영국과 유럽을 인도 보다 더 복음에 대하여 저항적인 이교적 상황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그는 인도로 선교사들을 보내는 파송국가인 영국이 아니라, 새로운 선교지 영국으로 돌아왔다고 느꼈습니다.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해외선교를 위해서 헌금을 더 드리는 것이 필요할지라도 그것만이 정답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이 대한민국에, 우리의 이웃들에게 필요합니다. 우리가 지금 사는 곳이 구브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 되십시오. 복음으로 무장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삼키움을 당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도록 돕겠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이 일에 드리십시오. 이것은 절체절명의 위기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황폐하고 이교적인 선교지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야만 합니다. 선교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이 있고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