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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 (26).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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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 (26).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요한복음 5:39-40, 갈라디아서 3: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4-04-14

말씀내용
본문은 바울 일행이 구브로 사역을 마치고 바보를 떠나 멀리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옮겨 복음을 전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가장 많은 부분(16-41)은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전한 바울의 설교이고 나머지 42-52절은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에 대한 기록입니다.


1. 바보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13-15; 행 15:37-38; 22:3)
우리는 먼저 13절에서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만나는데, 바울이 사역의 대표가 되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이제 사울이라는 히브리 이름이 아니라 바울이라는 로마 이름으로 그는 알려질 것이고, 더 이상 ‘바나바와 사울’이 아니라 ‘바울과 바나바’로 기록되기 시작합니다. 바울 일행은 주목할 만한 열매를 거둔 구브로 섬의 바보를 떠나게 되는데 우리는 바울 일행이 얼마나 오래 바보에 머물러 사역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배로 약 280km를 이동하여 앗달리아 항구에서 하선하여 내륙으로 약 19km를 걸어 버가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버가는 당시 매우 발달된 로마의 도시로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고 아고라라 불리는 시민광장과 목욕탕, 1만 2천명을 수용하는 스타디움, 1만 4천명을 수용하는 극장 등이 있었고 도시 전체의 길에는 화려한 대리석이 깔려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버가는 바울 일행의 목적지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14절은 그들이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이르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누가는 마가 요한이 그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는 말도 덧붙입니다. 마가 요한은 왜 중도에 돌아갔을까요? 학자들은 그가 안디옥이 아닌 예루살렘으로 갔다는 언급으로 보아 향수병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하고,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는 길이 너무 험하고 위험해서 진작에 포기했다도 하며, 또는 바울이 삼촌인 바나바의 리더십을 빼앗은 것에 분개하였기 때문이라고도 설명합니다. 분명한 것은 나중에 이 마가의 일로 두 사람이 갈라서게 될 때, 바울은 마가의 이탈을 심각한 사안으로 간주한 반면, 바나바는 그렇게 여기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행 15:37-38).
어쨌든 바울과 바나바는 버가를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향했습니다. 이곳 안디옥은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한 수리아 안디옥과 구별하기 위하여 비시디아 안디옥이라고 불립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수하 장군 중 하나로 셀류쿠스 왕조를 세운 셀류코스 1세(Selecus Nicator, B.C. 312-280년)는 자기 아버지 안티오쿠스를 기념하기 위해 헬라 제국 내에 16개의 ‘안디옥’을 건설했는데, 이중 성경에 언급된 곳이 수리아와 비시디아에 있는 안디옥입니다.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려면, 직선 거리로 160km이고 타우루스(Taurus) 산맥을 넘어야 하는데 이 세바스테 도로(Via Sebaste)는 강도가 많기로 유명했습니다. 지금은 여기에 트레킹 코스가 있다고 하는데 도보로 일주일이 걸린다고 합니다. 우리는 바울과 바나바가 왜 이 험한 지역을 선교지로 택했을지 질문이 생깁니다. 바보에서 회심한 로마 총독 서기오 바울이 자기 가족이 살고 있고 자기 소유의 대저택도 있었으므로 그곳을 추천했다고 말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총독은 편의를 봐주도록 안디옥의 관리들에게 보내는 추천서도 써주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물론 본문에서 이런 증거를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안식일에 회당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유다가 멸망한 뒤, 뿔뿔이 흩어진 백성은 성전 중심의 신앙에서 율법 중심의 신앙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율법 중심의 공동체의 중앙에는 회당이 있었습니다. 어디든 디아스포라 유대인 남자 가장 10명이 있으면 회당이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회당은 유대인 공동체의 종교, 교육, 재정, 행정, 정치 문제를 감독하는 공동체의 실질적 중심이 되었습니다. 회당에는 혈통적 유대인 뿐 아니라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회당은 유대교에 관심과 호의를 가진 이방인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바울이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이 있는 곳이라면 먼저 회당을 찾아가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게 될텐데, 이것은 바울의 선교전략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의 안식일 회당 예배는 우리의 예배와 흡사했는데, 이중 성경을 읽는 순서는 매우 중요했고 지도자는 그것을 해설해주었는데 이것은 일종의 설교였습니다. 이 날도 그들은 율법과 선지자의 글 즉 구약성경을 읽었고 회당장들은 바울 일행에게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고 허락합니다(15). 아마 바울은 자신이 당대 최고의 율법학자 가말리엘에게서 배운 사람임을 밝혔을지도 모릅니다(행 22:3). 회당장은 회당을 지을 때 상당한 재정적 기여를 한 사람들 중에서 선출되었는데, 이것은 명예직이자 영구직이었고 세습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회당에 따라서는 여러 명의 회당장이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제 바울의 설교가 시작됩니다.


2. 바울의 설교 (16-41)
바울의 설교는 7장에 기록된 스데반의 설교와는 차이가 있는데, 스데반이 경고의 관점에서 설교했다면 바울은 약속의 관점에서 설교합니다. 그러나 두 설교 모두 구약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를 회고하면서, 그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이 설교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첫째는 17-25절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예수 그리스도까지를 말하고, 이어 26-37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말합니다. 그리고 38-41절은 결론과 도전입니다.
바울은 친근하게 ‘형제들아’라고 부르면서 시작합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후손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입니다(26).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로, 유대인의 관습을 따르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믿는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라고 한 대상에는 당연히 혈통적 유대인 뿐 아니라 유대인의 관습을 따르면서 하나님을 믿는 이방인 개종자들을 포함하는 말일 것입니다.
A. 이스라엘 역사는 예수님을 가리킨다 (17-25; 시 89:20; 삼상 13:14; 사 44:28)
바울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고함으로 설교를 시작하는데, 여기서 일곱 기간을 언급합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족장들(조상들)을 택하셨던 기간, 둘째로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시절(17), 셋째는 광야 시절(18), 넷째는 가나안 정복 시절(19), 다섯째 사사시대(20), 여섯째 사울의 통치 기간(21), 마지막으로 다윗의 통치 시기입니다(22). 19절은 ‘약 사백오십 년’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아마도 애굽에서 400년, 광야에서 40년 그리고 사사 시대 이전에 가나안 정복 기간 10년을 합한 기간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긴 이스라엘 역사를 회고함으로써 그의 설교를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위해, 바울은 아브라함에서 시작한 이스라엘 역사를 다윗에서 멈춥니다. 22절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하셨고, ‘내 뜻을 다 이루리라’고 하신 인물이라고 했는데, 이 구절은 구약의 세 구절을 합성한 인용입니다. ‘다윗을 만나니’라는 말씀은 시편 89:20에서 왔고,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은 사무엘상 13:14에서, 그리고 ‘내 뜻을 다 이루리라’는 이사야 44:28에서 왔습니다. 특별히 이사야 44:28은 고레스 왕을 일컬어 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구약성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결국 내 마음에 맞는 사람, 내 뜻을 다 이룰 사람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23절이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23).”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두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의로운 왕으로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확증하기 위해, 바울은 세례 요한과 그의 증거를 소환합니다. “그가 오시기에 앞서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리라 하였으니(24-25).” 400년 만에 나타난 선지자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한 말씀을 소개하면서 설교의 서론이 끝납니다.
B.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26-37; 요 5:39-40; 신 21:23; 시 2:7; 16:10)
바울은 이제 이스라엘 역사의 성취요 절정이신 예수님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청중의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형제들아 아브라함의 후손과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26).” 하나님은 이 이스라엘 사람들 곧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먼저 구원의 말씀, 복음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님이 유대인 가운데 나셨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 그 관리들은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누누이 말씀하셨던 구원의 말씀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님이 오셨을 때 예수님을 정죄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조차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27). 그들은 매 안식일 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것은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만 종교인일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말씀이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그들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한복음 5:39-40).” 그들은 회당에는 갔고 말씀도 들었지만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를 원했지만 죄목을 찾을 수 없어서 총독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님을 죽여 달라고 청했습니다(28).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도 알지 못한 채 나쁜 의미에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우연 스럽게 발생한 불행한 사건이 아니라 구약성경에 예언된 사건이라는 말입니다(신 21:2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져 무덤으로 옮겨져 장사지낸 바 되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습니다(30). 그리고 살아나신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제자들에게 40일 동안 보이셨고 그 목격자들이 지금도 버젓이 살아있습니다(31). 이것이 복음입니다.
바울은 조상들에게 주셨던 약속을 다시 전파한다고 말합니다(32). 바울은 구약성경이 말하지 않은 새로운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기대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일으키심으로써 조상들에게 하셨던 약속을 후손인 우리에게 이루어 주셨습니다(33). 바울은 시편 2:7을 인용합니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편 2:7).” 바울은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으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했다고 말합니다(34). 또 예수님의 몸이 썩지 않고 부활한 것도 다른 시편에서 예언된 내용이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시편 16:10).” 바울은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일어난 사실일 뿐 아니라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말씀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제 설교는 결론부로 들어갑니다.
C. 결론과 도전 (38-41; 합 1:5)
38-41절은 설교의 적용적 권면입니다. 바울 서신에서 보듯, 38절에 ‘그러므로’가 결론을 시작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자 그래서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라는 말에 대한 대답이 되겠지요.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38-39).” 여기서 바울이 어디에 힘을 주고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이 사람을 힘 입어’라는 반복되는 말입니다. 죄사함은 이 사람 예수님을 힘입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통하여 옵니다. 뿐만 아니라, 의롭다 함도 예수님을 힘입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옵니다. 죄인이 구원을 받기 위해 필요한 것은 죄사함과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닙니까? 이 모든 것이 율법에 순종하여 사는 우리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힘입어 오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스스로가 죄인인 것을 인식한다면, 그에게 이보다 좋은 복음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나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고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끝으로 하박국 1:5을 인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청을 멸시하지 말라고 청중들에게 경고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여러 나라를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의 생전에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할 것이라 누가 너희에게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하박국 1:5).”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권 가운데 하시는 일을 인하여 놀라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멸시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가 꿈도 꿀 수 없고,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일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는 살아나셨고 지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주권을 가지고 온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십니다. 바울의 결론은, 유대인들이 매 안식일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예수님을 거부한 것처럼, 그 말씀을 멸시하여 그분을 거부하지 말라는 겁니다. 자, 이 설교에 대한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 모인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3. 설교에 대한 엇갈리는 반응 (42-52; 갈 3:2; 사 49:6; 살후 3:1)
대체로 그 반응은 호의적이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회당을 나갈 때, 사람들은 다음 안식일에도 와서 말씀을 해달라고 청했습니다(42). 이것은 최고의 반응입니다. 아마 이 요청은 회당장들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안식일까지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회당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들은 개종자들입니다) 소수가 아니라 다수가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며 두 사도와 더불어 말하기를 원했습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 듣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두 사도는 이들과 상당 시간을 보낸 후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고 권하고 헤어졌습니다(43).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는 권면은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게 됨으로 새로운 예수의 길따름이 공동체가 형성되었음을 시사합니다. 그들은 말씀을 들음으로써 믿음이 생겼고 성령의 거듭나는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이것을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갈라디아서 3:2).” 그들은 말씀을 듣고 믿음이 생겼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여들었습니다(44).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면, 그들은 아마 회당 건물이 아닌 회당 앞이나 광장이나 극장에서 모였을 것입니다. 바울이 구브로 총독 서기오 바울의 추천서를 가지고 왔다면 이것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복음은 적대적 반응을 동시에 불러일으킵니다. 처음부터 마뜩지 않게 바라보던 이들이 이 현상을 보았을 때 시기가 가득해져서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기 시작했습니다(45). 비방은 신성모독을 했다는 강한 표현입니다. 이들이 대적한 것은 바울이나 바나바가 아니었고, 또 바울이 전한 복음도 아니었고, 그들은 하나님 자신을 대적했다는 말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결정을 내리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46).”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다’는 데 주목했습니다. 말씀을 버림으로써 그들은 스스로가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신들의 소명을 다시 한 번 천명합니다(47; 사 49:6).
여기에 우리의 주목을 끄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48).” 지금까지 바울과 바나바의 B급 청중이었던 이방인들이 기뻐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배부른 유대인이 아니라 굶주린 이방인인 자신들에게도 미친다는 것은 그들에게 놀라운 복음이 아니었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은 당신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를 다 믿게 하십니다. 구원 역사를 주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고 누가는 기술합니다(49). 바울 일행이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한 결과, 그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습니다. 어떻게 퍼졌을까요? 입소문이지요. 들은 사람들이 새로운 사람들에게 전했고 이것은 연속적으로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가지는 성격입니다. 진정한 회심은 이런 것입니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어떤 일이 내 안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을 수 없고 말하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나중에 이렇게 썼습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데살로니가후서 3:1).” 데살로니가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났고 복음이 전파되는 모든 곳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적대적인 유대인들은 경건한 귀부인들과 시내의 유력자들을 선동했고 결국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는 데 성공합니다(50). 처음에는 구브로 총독 서기오 바울의 추천서를 가지고 온 바울과 바나바에게 호의적이었던 유력자들도 등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경건한 귀부인과 유력자들이 가리키는 사람들은 소위 그 사회의 특권층이고 기득권자들입니다. 그들은 어떤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두려웠고, 그 변화가 자신들에게 미칠 손익을 계산했을 것입니다. 물론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강권적이고 불가항력적 은혜는 아무리 이런 자리에서 이런 계산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일지라도, 그 기질과 성향을 깨뜨리고 역사하시지만, 그것이 아니면 그들은 근시안적 계산에만 몰두하고 그 결과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결정을 내리고 살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설교의 결론으로 하나님의 말씀, 은혜로운 초청을 멸시하지 말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결국 두 사람은 그들을 향해 발의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향합니다. 복음을 거부한 자들의 책임을 일깨워주는 상징적 행동입니다. 하지만 누가는 잊지 않고 마지막 말을 덧붙입니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52).” 이것이 언제나 복음이 하는 일입니다. 안디옥에 남겨진 새로운 예수의 길따름이들은 두 선교사의 추방으로 낙담하기 보다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 안에서 그들을 결코 떠나시지 않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4. 교훈과 적용
본문을 통해서 주께서 주시는 교훈을 생각해 봅시다. 첫째로, 영적 사역의 성공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책임을 무시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도 책임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역의 성공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신실하게 복음의 사역을 감당하지만, 겉보기에 성공적이지 않은 반면 그들만큼 신실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역의 성공을 거두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게 하십니다(48).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거부하고 버리는 일은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책임을 말씀하십니다(46). 두려운 일이 아닙니까?
이와 함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복음에 대한 반응은 언제나 두 갈래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하여 호의적인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적대적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셨을 때에도 늘 그랬고 사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교회 역사에서도 그러합니다. 모두가 반기고, 모두가 좋아하는 복음은 없습니다. 그런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 때문에 사랑을 받기도 하지만 복음 때문에 미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길따름이들의 삶에서 결코 피할 수 없는 경험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세번째로 바울의 설교는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자기 경험을 말하거나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구약 역사를 통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설교는 설교자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변화된 삶의 경험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복음의 진정성을 보여줄 수는 있어도, 그것이 복음 자체는 아닙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내 삶을 변화시켰습니다"가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 즉 그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입니다! 복음을 말하는 것이 설교자의 소명이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입니다.
끝으로 여러분에게 도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왜 유대인들은 매 안식일마다 회당에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외우기까지 했지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정죄했을까요? 그들은 안식일마다 회당에 갔고 성경말씀을 들었지만 예수님을 정죄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려 대적했습니다. 그들은 회당 안에 있는 유대인들이었는데 말입니다. 이들은 그저 종교인들이었을 뿐입니다. 지금도 똑같은 일은 일어납니다. 여러분은 매주일 열심히 교회당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매주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정작 예수님께로 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예배당 안에 종교인들이 적지 않다고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 자신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오늘 아침 단지 교회당에 나온 것입니까? 아니면 간절한 심령으로 예수님께 나왔습니까? 여러분은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들은 이 말씀에 대한 여러분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더 주님을 원하게 되었고 더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되었습니까? 여러분은 회당 모임 후에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며 더 많이 듣기를 원했던 사람들의 간절하고 주린 마음이 있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여러분에게는 이 말씀으로 인하여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십니까? 저는 여러분이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시기를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그러기를 정말 원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