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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38). 어린 양의 피에 옷을 씻은 성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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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38). 어린 양의 피에 옷을 씻은 성도들

요한계시록 7:9-1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06-28

말씀내용
1. 144,000명과 큰 무리(4,9; 5:5-6; 창 15:5; 창 17:4-6)
우리는 여섯째 인과 일곱째 인 심판의 사이에 막간을 형성하는 요한계시록 7장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인침 받은 144,000명이 누구를 가리키는가를 생각했고,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받은 모든 백성, 성도들, 교회 전체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44,000명은 셀 수 있는 숫자였지만, 요한이 본 큰 무리는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무리였습니다. 물론 우리는 144,000명이 하나님의 교회,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을 이해했지만, 그들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이름으로 표기가 되어 있었습니다. 반면, 큰 무리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이 표현은 이들의 출신이 온 세상 모든 족속임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144,000명과 큰 무리는 차이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개연성 있는 설명은, 이 두 묘사가 동일한 하나의 그룹, 즉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 모든 성도를 지칭한다는 해석입니다. 이들은 온 세상에서 모여왔고 교회 시대 전 기간에 살았던 구원받은 백성들입니다.
144,000명과 큰 무리가 소개되는 문학적 구조를 주목하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이것은 먼저 유다 지파의 사자가 소개되고 요한이 어린 양을 보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5장에서, 요한은 하나님의 오른 손에 있는 일곱 인으로 봉한 두루마리의 인을 뗄 자가 없는 것을 보고 울었습니다. 그 때 장로 중 하나가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고 말하는 것을 요한이 듣습니다(5:5). 그 사자를 보려고 요한이 눈을 들어 보는데, 그의 눈 앞에는 사자가 아니라,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서 있는 한 어린 양이 보입니다(5:6). 사자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는 어린 양을 본 것입니다. 즉, 그 사자는 어린 양이었습니다.
그 문법적 구조와 유사한 것이 144,000명과 큰 무리입니다. 요한은 인 맞은 자의 수가 144,000명이라고 듣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보려고 눈을 들어보니 그에게 보이는 것은 144,000명이 아니라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였던 것입니다. 즉 이 둘은 같은 대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요한이 들은 144,000명은 요한이 본 큰 무리, 즉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다만, 144,000명은 지상의 전투하는 교회를 보여준다면,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천상의 승리한 교회를 보여준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이라는 표현은 구약의 족장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주셨던 언약의 말씀과 깊은 관련을 가집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에 나타난 표현들을 주의 깊게 생각해보십시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세기 15:5).” 하늘의 별을 셀 수 없듯이 무수한 자손을 주시겠다는 약속은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로서 성취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을 가진 아브람을 ‘여러 민족의 아버지’라는 의미의 아브라함으로 고쳐주시면서,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창세기 17:4).”고 약속하셨습니다. 각 나라와 민족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큰 무리는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입니다.


2. 흰 옷과 종려 가지 그리고 경배와 찬송(9-10; 6:15-17; 고전 15:10)
이 큰 무리가 어디에 서 있습니까? 그들은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서 산들과 바위에게 부르짖는 말을 기억합니다.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6:16).” 그렇게 두려워했던 하나님과 어린 양 앞에 구속함을 받은 이 큰 무리가 서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또 말했습니다.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6:17)?” 누가 능히 설 수 있습니까?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능히 그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큰 무리는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있다고 묘사됩니다. 흰 옷은 여러 차례 살펴보았듯이 승리를 상징합니다. 로마의 개선행진에서 황제가 입었고 때로는 개선 장군이 입었던 것이 흰 옷이었습니다. 이 큰 무리가 흰 옷을 입었다는 것은 이들 모두가 승자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들고 있던 종려 가지 역시 승리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예루살렘 사람들이 호산나 찬송하면서 종려 가지를 흔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 12:13). 종려 가지는 또한 초막절 축제를 암시하기도 합니다. 초막절에 백성들은 종려 가지를 가지고 나와 기념했고(레 23:40) 그들이 초막을 지을 때에는 종려 가지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느 8:15). 초막절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와 기쁨의 절기였습니다. 흰 옷을 입은 큰 무리가 종려 가지를 들고 찬송하는 것은 바로 이런 분위기를 연상하게 합니다.
그들은 큰 소리로 하나님과 어린 양께 찬송과 경배를 드리는데,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여기서 구원은 우리가 보통 의미하는 구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지만, 특별히 모든 환난을 이기고, 자신들을 박해하고 핍박하던 자들을 이기고 승리한 최종 승리를 특별히 강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흰 옷을 입고 종려 가지를 들고 있는 이 성도들은 천상의 승리한 교회, 구속 받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들은 이긴 자들입니다. 주님께서 일곱 교회에게 주시는 편지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하셨던 말씀, “이기는 자에게는…”이라는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이긴 자들이 여기 있습니다. 그들이 천상의 승리한 교회인 것입니다.
그 이김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다고 그들은 찬송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으로 싸워서 이겼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 중에는 주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가진 증거를 인하여 고통을 겪어야 했고 심지어 순교를 한 성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 하나 구원을 하나님과 어린 양과 자신들의 공동 노력의 결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찬송은 바울의 고백을 전제로 한 찬송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린도전서 15:10).” 그 승리의 모든 공로는 오직 하나님과 어린 양께만 돌려질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큰 무리의 찬송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3. 천사들의 찬송(11-12; 눅 15:10)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요한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던 모든 천사가 일제히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11).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요한계시록 7:12).”
이것은 이 큰 무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놀라운 일을 보아서 알고 있는 천사들의 가슴에서 참을 수 없이 터져 나온 찬송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것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천사들의 찬송은 7중 찬송이라고 불립니다. 7중 찬송의 처음과 나중은 ‘아멘’으로 장식됩니다. ‘아멘’은 무의미한 수식이 아닙니다. 앞과 뒤에서 찬송의 내용의 확실성을 도장 찍듯 확증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헬라어 성경에서 7중 찬송의 각 단어들 앞에는 정관사가 모두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찬송과 그 영광과 그 지혜와 그 감사와 그 존귀와 그 권능과 그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라는 말입니다. 사람이나 어떤 특별한 존재에게 이런 단어들을 사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정관사의 사용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질 수 있는 절대적인 가치로서의 찬송, 영광, 지혜, 감사, 존귀, 권능과 힘을 보여주려는 의도인 것입니다.
저는 이 본문에서 우리가 천사들이 찬송하는 심정과 의미를 좀 더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5:10).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올 때마다, 그들이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될 때마다 하늘에서는 천사들이 기쁨의 팡파르를 울린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천사들 앞에 드러난 장관은 무엇입니까? 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 이래로 구원함을 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지금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모두 모여 서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와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입니다. 그들이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라고 찬송을 합니다. 이 장엄한 광경을 보는 천사들이 느꼈을 기쁨이 어느 정도였을지 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던 수많은 천사들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보좌 앞에 일제히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터져 나오는 기쁨으로 이 7중 찬송을 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 찬송의 감격과 의미는 아직 다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4. 큰 환난에서 나와 어린 양의 피에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13-14; 단 12:1; 마 24:21; 계 1:9; 2:9-10; 요 16:33; 행 14:22)
한 장로가 요한에게 묻습니다.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13)?” 요한은 여전히 자기가 지금 보고 있는 이 환상을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14). 그러자 그 장로가 요한에게 말합니다.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14b).”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에 대한 설명이 더해집니다. 이들은 먼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큰 환난’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이 말씀은 다니엘 12:1에서의 인유일 것입니다.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다니엘 12:1).”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이 본문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한 번 주님께서 ‘큰 환난’을 언급하셨습니다.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마태복음 24:21).”
사도 요한이나 사도들은 다니엘이 예언했던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예언이 이미 성취되기 시작했다고 이해했습니다(1:9; 2:9-10; 요 16:33; 행 14:22). 큰 환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피흘리심으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큰 환난은 어떤 사람들의 말처럼, 역사의 끝에서만 특별한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 환난은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습니다.
환난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환난은 우리의 믿음을 타협하도록 압박을 가할 것이고, 교회 안에 온갖 미혹하는 가르침과 교훈들을 심어 놓을 것이며 교회 밖에서는 박해와 핍박을 더할 것입니다. 구원함을 얻는 큰 무리는 바로 이 큰 환난을 통과하면서 믿음을 타협하거나 버리지 않은, 그 환난에서 나오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큰 환난을 겪었기 때문에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결정적으로 그들이 그 자리에서 하나님과 어린 양께 경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는 사실에서 발견해야 합니다. 이것이 큰 무리가 어떤 사람들인가에 대한 장로의 두번째 설명입니다.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큰 환난 속에서 참된 성도들은 자기 피로 자신들을 사신 어린 양을 계속해서 신뢰함으로써 반응을 하였을 것입니다(5:9). 이들이 입은 흰 옷은 그리스도와 이들을 동일시하게 하는 표현입니다.
큰 환난과 시련은 성도들의 믿음을 흔들어 놓았을지라도, 그들은 끊임없이 속죄하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자신들의 영혼에 묻은 얼룩을 제거하였을 것입니다. 환난 속에서 자신의 무너짐과 더럽혀짐을 보면서, 그들은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속죄하는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여 그리스도께 나아갔던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성도입니다. 그들은 어떤 환난에도 결코 넘어지지 않는 강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연약하여 넘어지기를 잘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언제나 항상 그 더러운 죄를 씻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성도는 스스로의 힘을 증명하는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죄를 씻는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는 말씀의 의미일 것입니다.
5. 당신은 어린 양의 피에 옷을 씻었는가? (롬 8:37-39)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바, 셀 수도 없는 하늘의 별처럼, 또는 바닷가의 모래처럼 그 후손을 약속하셨던 것의 성취를 보여줍니다. 비록 지금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지라도, 비록 지금은 땅에서 전투하는 교회로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이런 교회들에게 주님은 천상의 승리한 교회를 보라고 하십니다. 그 영광을 보여 주십니다. 너희가 누릴 영원한 지복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걸어가는 어두운 시간을 넉넉히 이겨내라고 격려하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환난을 겪고 있는가, 믿음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어떤 압박 아래서 살아가는가가 아닙니다. 성도는 비록 매일 넘어질지라도 매일 그리스도의 보혈 앞에 나아가 자신의 더러움을 씻는 자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보혈이 내 죄악의 크기와 정도를 능가하며 나를 온전히 희게 할 수 있음을 믿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살아가면서 어린 양의 피를 묵상하는 것은 우리의 옷을 희게 할 뿐 아니라, 우리 심령에 말할 수 없는 평안을 주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스펄전의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중요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모든 환난의 때에 큰 문제는 그리스도의 피를 실제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속죄에 흠뻑 젖어 있다면, 상처로 말미암아 단단해진 그리스도의 가슴에 여러분의 상한 심령을 기대고 잠이 든다면, 여러분은 다른 어떤 방식보다도 이렇게 함으로써 더 나은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양심에 바른다면 그 피가 영혼 속에 지극히 감미로운 평안을 불어넣으므로 다른 어떤 것도 여러분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거나 흔들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영혼의 방에 조금만 뿌리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유향이나 창포의 향보다 낫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음을 유쾌하게 만들고, 고난의 방이 그리스도의 귀한 이름으로 향기가 나게 만들 것입니다. 죄사함을 받는다면 나는 안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대신 서고 그의 귀한 피가 나를 위하여 호소한다면, 나는 기꺼이 주님의 발 앞에 누워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나를 용서하셨사오니 이제 주께서 기뻐하시는 바를 행하시옵소서! 주님, 내가 용서받았사오니 주의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바로 이것이 평안을 주는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입니다.”
어떤 큰 환난에서도, 성도는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그 흘리신 보혈로 그 사랑을 확신함으로써 빼앗기지 않는 위로와 평안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하는 그 큰 사랑으로 위로 받고 평강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그 흘리신 보혈로 증명되었으니, 그 사랑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는 단순히 예수 믿고 천국 가는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구원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비록 이 땅에 전투하는 교회로 살아갈지라도, 이 환난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을 경험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내가 오늘도 얼마나 잘 싸웠나? 내가 오늘도 얼마나 강했던가?”를 자랑하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넘어지고 쓰러질 수 있습니다. 또는 오랜 세월 동안 그런 패배를 경험하고 살아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다시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그 흘리신 보혈에 나타난 것을 알고 주님께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들이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찬송을 합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아무도 자기 능력, 자기 믿음을 자랑하는 자는 거기에 없습니다.
이제 묻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어린 양의 피에 옷을 씻어 깨끗하게 된 사람입니까? 이 사활적으로 중요한 질문을 피하지 마십시오. 지금 이 질문을 피한다고 해도, 여러분은 결국 죽음의 문턱을 지나 주님 앞에서 다시 이 질문을 대면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천사들의 경배가 이어집니다. 그것은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탄성의 경배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기쁨으로 부르짖는 아멘 송입니다. 이 천사들은 아무 짝에도 소망 없고 죄악된 삶을 살아가던 자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소망 없는 자들의 모든 더러운 죄악을 말끔히 씻으시고 그들의 옷을 빛나는 흰 옷으로 만들어주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또한 알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써 그들의 모든 더러움을 씻어 주시는 어린 양을 그들은 찬송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기쁨과 이 감격에서 터져나오는 천사들의 찬송을 우리가 오늘 조금이라도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날을 바라보십시오. 오늘 여러분 앞에 놓여있는 큰 환난 속에서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담대해지십시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7–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