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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39). 눈물을 씻어 주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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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39). 눈물을 씻어 주시는 하나님

요한계시록 7:15-17, 시편 84: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07-05

말씀내용
1. “저 하늘에는 눈물이 없네.”(17; 시 84:6; 56:8; 계 21:4)
옛날에 교회에서 부르던 노래 중에 “저 하늘에는 눈물이 없네 거기는 슬픔도 없네”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저는 신나게 이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월을 더 살아보니 그 의미가 더 많이 와 닿는 것 같습니다. 눈물을 더 많이 흘려보았기 때문이겠지요. 눈물 없이는 광야 같은 인생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시편 84편에서는 인생을 ‘눈물 골짜기’라고 말하고(시 84:6), 56편에서는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라고 기도합니다(시 56:8).
오늘 본문은 계속해서 천상의 승리한 교회를 묘사하는 내용인데, 17절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고 말씀합니다. 또 21:4에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신 뒤에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만든 일들이 다 사라지고 없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상상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본문은 이것 외에도 천상에서 우리가 영화롭게 되었을 때 누리게 될 영광의 면면을 묘사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일차적으로 1세기 말에 믿음과 가진 증거 때문에 박해와 고난을 받아야 했던 신자들을 위로하려는 목적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물론 이 말씀이 이차적으로는 천로역정의 눈물 골짜기를 지나는 모든 시대 모든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고, 오늘 우리에게도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향하여 적대적인 세상에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로하려고 주시는 이 말씀에서 우리는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미리 여러분에게 경계하여 말씀드리거니와, 이 말씀을 통하여 위로를 얻을 수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왜 이 말씀을 통하여 위로를 얻을 수 없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위로를 얻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큰 환난에서 나왔고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성도들의 능히 셀 수 없는 무리를 보고 있습니다(14). 그들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9). 요한은 또 그들이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10)”라고 찬송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 찬송에 천사들이 7중 찬송으로 화답했지요.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12).”
이제 요한은 셀 수 없는 성도의 무리가 천상에서 누리는 영광을 묘사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2. 하나님의 임재(15; 사 6:3,5; 요 1:14; 겔 37:27; 슥 2:10)
먼저 15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요한계시록 7:15).”
성도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말입니다. 이곳은 스랍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하고 창화하며 지키는 그 자리이고(사 6:3), 이사야 선지자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소리쳤던 곳입니다(사 6:5).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성도들의 모습은 하나님의 임재와 어린 양의 진노를 두려워 피하던 자들과(6:15-17) 얼마나 대조적인 운명을 보여줍니까?
15절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것은, 그들이 큰 환난을 견뎌냈고 어린 양의 피에 그들의 옷을 씻어 희게 한 결과로 주어진 은혜임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써 아담의 타락의 결과를 완전히 뒤집으셨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입니다. 또한 이것은 이기는 자들에게 주시는 상(償)이기도 합니다. 성도들은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 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닐었고 하나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던 것보다 더 친밀하게 하나님 앞에 있게 될 것입니다.
15절 하반절에서는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은 정말 오래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장막을 치고 거기에 임재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성막이라고 부릅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후 삼위 가운데 2위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셨을 때, 그 일을 요한복음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14).”
여기서 ‘거하시매’라는 단어는 본문 15절에 ‘장막을 치시리니’와 같은 단어(σκηνόω)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은 죄인들 가운데 장막을 치고 거하러 오신 일입니다. 그런데 이제 본문에서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임재가 그들과 함께 할 것을 보장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성도들을 영원히 모든 위험에서 지켜줄 것이고, 모든 것을 보장해줄 것입니다. 이 영원한 하나님의 임재는 구약 예언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내 처소가 그들 가운데에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에스겔 37:27).”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임이라 (스가랴 2:10).”


3. 하나님을 섬김(15; 레 8:30; 계 22:5; 21:22)
이뿐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이제 모두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 표현은 성도들이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할 것을 말합니다. 구약 성전에서 섬기는 제사장의 의복에는 거룩함을 상징하는 제물의 피가 뿌려져야 했던 것처럼(레 8:30) 하늘의 성도들은 그보다 더 귀하신 어린 양의 피에 씻어 희게 한 옷을 입고 있습니다.
비록 하늘의 성도들이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피의 제사를 드려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린 양께서 당신의 피를 흘리심으로써 영단번의 제사로 모든 제사를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점에서 성도들의 제사장 직무는 경배와 찬양의 영적 예배를 드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 즉 인간의 창조 목적이 완전히 실현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만을 온전하게 즐거워하는 일이 늘 지장을 받았지만, 이제 모든 죄를 떨쳐버리고 영화롭게 된 성도들은 온전한 마음으로 장애물 없이 하나님만을 즐거워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본문은 그것을 ‘밤낮’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중단 없이 계속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으로 말입니다. 사실 그곳에서는 “다시는 밤이 없겠고”라고 하였으니(계 22:5) ‘밤낮’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 또 하늘의 성도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라고 하였으므로(계 21:22), 여기서 언급한 성전은 물리적 성전이 아니라 하늘 자체에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늘에서 성도들이 누릴 영광입니다.


4. 주림, 목마름, 상함이 없는…(16; 사 49:10; 마 5:6; 요 6:35)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16절은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신(15)” 결과를 좀 더 묘사합니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요한계시록 7:16).”
하나님의 임재는 그들을 모든 위험에서 보호하고 안전하게 그들을 지키시며 모든 것에서 부족함이 없도록 보장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주림도 목마름도 없고 해나 뜨거운 기운에 상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이 구절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게 될 것을 예언하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에서 가져온 표현입니다.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이사야 49:10).”
중동의 뜨거운 광야를 지나 고국으로 돌아올 때 만날 수 있는 위험은 먹고 마시는 일 그리고 뜨거운 햇빛과 더위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이 모든 것에서 그들을 지켜주실 것이라고 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이 말씀에서 영원히 성취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영혼의 가장 깊은 갈망을 궁극적으로 채워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주님은 산산수훈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태복음 5:6)”라고 말씀하셨고 한 번은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6:35)”고 약속하셨습니다. 본문은 그 약속의 궁극적 성취입니다.


5.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는 어린 양-목자(17a; 계 12:5; 19:15; 시 2:9; 23:1; 요 17:3)
물론, 이런 일은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고”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또 하나의 설명을 필요로 합니다. 17절입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요한계시록 7:17).”
17절은 ‘이는’이라고 시작하는데, ‘왜냐하면’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이 주리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고 해나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않는 것은, (왜냐하면)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성부 하나님께서 장막을 치고 임재하시는 것은,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어 그들을 인도하신다는 것을 보장합니다. 어린 양이 목자가 되십니다. ‘목자가 된다’는 말은 ‘양을 친다’는 뜻 외에 ‘다스린다’는 뜻을 가집니다. 우리의 목자가 되시는 어린 양은 일찍이 죽임을 당하셨으나 이제는 철장을 가지고 만국을 다스리시는 통치자가 되십니다. 만국을 다스리시는 주님에 대한 묘사들이 여기 있습니다.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요한계시록 12:5).”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요한계시록 19:15).”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시편 2:9).”
이 분이 우리의 목자가 되시니, 무슨 불안과 염려가 있겠습니까?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하는 고백이 흘러나올 것입니다(시 23:1).
우리의 목자가 되신 어린 양은 우리를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더 이상 목마름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냥 샘이 아닙니다. 생명수 샘입니다. 이것은 하늘의 성도들이 누릴 하나님과 어린 양과의 영원한 교제를 상징합니다. 주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한복음 17:3)”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을 영원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다함이 없이 솟아오르는 생명수 샘에서 말입니다.


6. 눈물을 씻어 주시는 하나님(17b)
끝으로 요한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고 말씀합니다. 아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 우리 눈에는 눈물이 가득할 것 같습니다. 눈물 골짜기 같은 인생을 사는 동안, 눈물을 흘릴 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사랑하는 가족들을 인하여 흘린 눈물들, 인생의 실패 때문에 흘린 눈물들, 오해를 받고 배신을 당하고 관계가 상함을 인해 흘린 눈물들, 질병과 고통으로 인한 눈물들, 헤어짐과 이별 때문에 흘린 눈물들, 고독함과 외로움에 지쳐 흘린 눈물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흘리는 눈물들의 이유와 종류들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웃는 법은 잊어버릴 수 있어도 우는 법은 결코 잊어버릴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뵈올 때 이토록 눈물이 가득히 고여있는 눈으로 하나님을 뵈옵게 될텐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라고 하시니 이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인지요? 이 말씀은 하늘에서 성도들이 눈물을 흘릴 모든 이유를 제거하시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16절에서 말씀한, 주림과 목마름, 해나 뜨거운 기운에 상하는 일만이 아닙니다. 21:4에 말씀한 바, 사망도, 애통함도, 곡함도, 아픈 것도 다시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위에 언급한 바, 눈물을 흘릴 모든 이유들이 다 제거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제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인데, 그래도 하나님과 어린 양을 뵈올 때 제 눈에서 눈물은 마치 눈물샘이 터져버린 것처럼 계속해서 흐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뵈올 때 어떻게 눈물이 흐르지 않을 수 있을까요? 주님의 손과 발에 못자국을 볼 때에, 주님의 옆구리에 상한 창자국을 볼 때에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을지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구주를 뵐 때에 제가 얼마나 인생을 잘 살지 못했는지가 생각나서, 제가 얼마나 이기적으로 살았는지가 생각나서 울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이 맡겨주신 교우들을 더 많이 사랑하지 못했고, 어린 양이 목자가 되사 우리를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는 것처럼 더 신실하게 목양하지 못했으며, 더 성실하게 주의 말씀을 전하지 못했던 일들이 생각나서 울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하나님과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뵈올 때, 한동안은 하나님께서 내 눈에 눈물을 씻어 주시고 또 씻어 주셔도 계속해서 흐르는 눈물을 계속 씻어 주셔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정직하게 말해서 저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는 말씀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저 믿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인생에서 겪은 모든 수고와 슬픔과 아픔을 넘치도록 위로해 주시겠구나 생각합니다.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신다’는 말씀은 어쩌면 우리가 이 땅에서 흘린 모든 눈물에 대하여 설명해주시고 위로해주신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영광스러운 위로입니다. 엄마가 어린 자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면서, “괜찮아. 엄마가 있잖아.”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평생에 흘렸던 눈물을 다 닦아 주시면서, “괜찮아. 내가 있잖니.”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7. 오직 어린 양의 피에 옷을 씻은 자들에게만!(14)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본문에서 하늘의 성도들이 누릴 영광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들은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게 될 것이고 하나님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실 것입니다. 또 그들은 하늘 성전에서 밤낮 쉬지 않고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만족하면서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길 것입니다. 거기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었던 주림이나 목마름, 그리고 해나 뜨거운 기운에 상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우리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과 어린 양과 더불어 생명의 사귐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일이 모든 사람에게 자동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일은 오직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에게만 임하는 은혜입니다. 성경은 이점에서 인류를 둘로 선명하게 구분합니다. 어떤 이들은 영벌에, 어떤 이들은 영생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영생에 들어가는 자들,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어 주실 자들은 어린 양의 피에 옷을 씻은 자들이고,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그를 따라간 자들이며(계 14:4) 어린 양이신 구주 그리스도를 사랑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질문 앞에 다시 서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린 양의 피에 옷을 씻었습니까? 여러분은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어린 양이신 구주 그리스도를 사랑하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만일 이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지금도 구원의 문은 열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주께서 그 문에 서서 여러분을 부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 주님! 제가 주님의 피에 제 옷을 씻기를 원하고, 주님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따라가기를 원하고 구주 예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오니 저를 도와주시옵소서”라고 참된 마음으로 구할 수 있다면, 주님은 여러분은 영접하여 주실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여러분이 이미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여 따르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날을 기대하고 그날을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가십시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삶이 아무리 눈물 골짜기일지라도 하나님은 이 모든 눈물을 다 씻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흘린 눈물은 결코 낭비되지 않고, 우리를 거룩하게 빚어가는 눈물이 될 것입니다. 그날에 이 눈물은 흘린 만큼이나 우리의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날의 영광을 생각하면서 이 땅을 살아가십시오. 그날에 여러분의 소망을 두고 살아가십시오.
저 하늘에는 눈물이 없네. 거기는 슬픔도 없네.
저 하늘에는 눈물이 없네. 거기는 승리만 있네.
고통은 모두 다 사라져버리고 영광만 가득하겠네.
우리의 주님과 나 함께 있을 때 영원한 기쁨 넘치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