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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42). 첫째 화, 다섯째 나팔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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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42). 첫째 화, 다섯째 나팔 심판

요한계시록 8:13-9:1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07-26

말씀내용
우리는 지난 주일에 처음 네 나팔 심판의 내용을 살펴보았고, 오늘은 다섯째 나팔 심판의 내용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일곱 인 심판의 처음 네 인 심판이 유사한 패턴을 가졌듯이, 처음 네 나팔 심판도 비슷한 방식으로 자연 세계에 미치는 심판이라는 것을 살펴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남은 세 나팔 심판은 ‘땅에 사는 자들’에게 미치는 심판이 될 것입니다.


1. 화, 화, 화! (8:13; 합 1:8; 계 19:9,17-18)
다섯째 나팔 심판부터 마지막 일곱째 나팔 심판은 앞의 네 나팔 심판과는 사뭇 다른, 뭔가 섬뜩한 내용을 암시하는 말로 시작됩니다.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사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니 이는 세 천사들이 불어야 할 나팔 소리가 남아 있음이로다 하더라(요한계시록 8:13).”
독수리가 날아가면서 큰 소리로 “화, 화, 화가 있으니리”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 세 번의 화는 남은 세 나팔 심판을 가리키는데, 날아가는 독수리의 등장은 구약의 배경으로 볼 때 또 요한계시록에서 독수리와 같은 새가 상징하는 것을 고려할 때,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구약 성경에서 독수리는 임박한 심판을 상징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바벨론 군대의 공격을 이렇게 예언합니다. “그들의 군마는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들의 마병은 먼 곳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마병이라 마치 먹이를 움키려 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으니라(하박국 1:8).” 이외에도 여러 구절들이 이것을 보여줍니다(신 28:49; 렘 4:13; 48:40; 애 4:19; 겔 17;3).
물론 본문 8:13에서 독수리로 번역된 단어(ἀετός)는 수리로 번역이 될 수도 있는데, 그 단어가 가리키는 것이 수리이든 독수리이든, 둘 다 맹금류의 포식 본능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습니다. 독수리나 맹금류인 새가 상징하는 바는 요한계시록에서도 두드러집니다. 요한계시록의 뒷 부분에서는 두 개의 큰 잔치가 대조를 이루고 소개되는데 하나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입니다(19:9). 이마에 인침을 받은 모든 성도가 그 자리에 초청을 받고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또 하나의 다른 잔치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큰 잔치’입니다. 19:17-18입니다.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태양 안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장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것을 탄 자들의 살과 자유인들이나 종들이나 작은 자나 큰 자나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 하더라(요한계시록 19:17-18).”
소위 ‘하나님의 큰 잔치’는 새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박해한 모든 불신자들의 시체로 배불림을 받는 심판의 잔치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심판과 관련하여 ‘새’가 등장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8:13에서 날아가는 독수리가 화를 선언하는 남은 세 나팔 심판은 마지막의 ‘하나님의 큰 잔치’를 예고하는 성격을 가집니다.
‘화, 화, 화가 있으리니’라는 독수리의 선언은 이제 임할 세 나팔 심판의 가혹함과 끔찍함을 암시합니다. ‘화, 화, 화’라는 말은 헬라어로 ‘우아이, 우아이, 우아이(Οὐαὶ οὐαὶ οὐαὶ)’라고 읽는데 마치 독수리가 날아가면서 자연스레 내는 소리처럼 들리면서 불길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물론 모든 심판이 다 ‘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특별히 남은 세 나팔 심판이 그럴 것이라고 예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임하게 될 세 화의 대상도 더 이상 자연 세계가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땅에 사는 자들’ 곧 불신자들을 향한 화가 될 것입니다. 이제 남은 세 나팔 심판은 각각 세 화의 내용을 구성하는데, 오늘은 첫번째 화이면서 다섯째 나팔 심판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남은 나팔 심판의 가혹하고 끔찍한 성격은 내용의 분량에서도 드러납니다. 다섯째와 여섯째 나팔 심판(9:1-21)은 첫 네 나팔 심판의 내용의(8:7-12) 세 배가 넘습니다. 이 두 나팔 심판은 불신자들이 받을 영원한 고통을 개략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다가오는 일곱째 나팔 심판의 기초를 제공해줍니다.
물론, 다섯째와 여섯째 나팔 심판도 앞의 네 나팔 심판과 같이 교회 시대 전체에 걸쳐서 나타나는 심판의 양상이라고 기본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종말이 다가올수록 전례 없는 방식의 마귀적 고통의 양상으로 나타나게 되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2. 하늘에서 떨어진 별 (9:1; 8:10; 사 14:12; 눅 10:18; 계 12:9; 벧후 2:4; 유 6; 계 1:18; 3:7)
첫째 화, 곧 다섯째 나팔 심판은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로 시작합니다. 이 별은 문자적인 별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8:10에서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1/3을 오염시킨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서 별은 어떤 물질을 의미했을텐데, 여기서는“그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는 말씀을 볼 때, 인격적 존재인 천사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선한 천사일까요, 아니면 타락한 악한 천사일까요?
‘떨어진’이라는 말에 지나친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학자들은, 떨어진 별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여러 신적 대행자들(천사들)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Robert Mounce, 김추성). 하지만, 우리는 이 구절과 관련하여 유사한 성경의 표현들이 있다는 것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 왕을 가리켜 하늘에서 떨어진 계명성이라고 예언했습니다(사 14:1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이사야 14:12).”
주님께서도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누가복음 10:18).”고 하셨을 때, 이와 비슷한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요한계시록 12장에서도 큰 용 곧 옛 뱀, 마귀라고 하는 사탄이 땅으로 내쫓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계 12:9).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요한계시록 12:9).”
이외에도 땅에 떨어진다는 의미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타락한 천사들을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어두신다는 언급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베드로후서 2:4).”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유다서 6).”
이런 성경의 표현들을 고려할 때, 우리는 본문에 있는 ‘하늘에서 떨어진 별’이 타락한 천사나 마귀 중 하나이거나(키들, 월부드, 스웨트, 보링) 사탄의 수하(비일)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보겠지만, 20장에도 9장의 본문에서 묘사하는 것과 유사한 역할을 하는 천사가 나오는데(20:1), 이 천사는 9:1이 묘사하는 ‘하늘에서 떨어진 별’과는 다른 존재일 것으로 봅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별은 무저갱의 열쇠를 받고 무저갱을 열게 됩니다. 이 존재가 사탄의 수하라고 볼 때, 이 열쇠는 만능의 권한이 아니라,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셨고..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제한적 권세입니다(계 1:18; 3:7).


3.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것들 (9:2-3; 욜 2:10)
이제 그 존재가 무저갱을 열자, 요한은 무저갱의 구멍에서 큰 화덕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와 해와 공기를 어둡게 하고 황충 곧 메뚜기 떼 같은 존재들이 연기 중에서 함께 땅 위로 올라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9:2-3). 이 본문은 요엘 선지자의 예언에서의 인유가 적지 않습니다.
여기서 무저갱을 열었다는 말은 어떤 지하공간으로 연결되는 갱도를 열었다는 말인데, 무저갱은 사탄이 수하들과 함께 천 년 동안 갇혀있는 공간이고(계 20:1-6) 바닥 없는 깊은 심연과 같은 곳입니다.
그 문이 열리자, 화덕의 연기 처럼 올라오는 연기 구름은 해와 공기를 어둡게 합니다. 요엘 선지자는 “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요엘 2:10).”라고 예언했는데, 본문은 그 말씀을 인유합니다.
이 연기는 무엇입니까? 헨드릭슨은 말합니다. “그것은 지옥이 끊임없이 내뿜고 있는 속임과 미혹의 연기이고 죄와 슬픔의 연기이며 도덕적 암흑과 타락의 연기다.”
두번째로 무저갱에서 연기와 함께 올라오는 것은 황충 처럼 생긴 생명체의 거대한 떼였습니다. 황충은 메뚜기를 가리키는데, 이것은 단순히 메뚜기가 아니라 메뚜기 형상의 악령들이었습니다. 메뚜기의 이미지는 구약에서 두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앞의 네 나팔 심판처럼, 다섯째 나팔 심판도 출애굽 당시 애굽에게 행해진 재앙들과 연관되는데, 여덟째 재앙인 메뚜기 재앙을 연상하게 합니다(출 10:1-20). 그리고 요엘 선지자가 메뚜기 떼 재앙으로 표현한 바, 주의 날과 함께 올 멸망에 대한 예언도 본문과 깊이 연관이 됩니다(욜 1:2-2:11).
메뚜기 떼로 인한 피해를 직접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메뚜기 떼의 피해는 사실 지진이나 토네이도 또는 기타 어떤 자연 재해가 미치는 피해 보다 더 큰 피해를 가져온다고 합니다. 뉴스를 검색해보니, 거대한 메뚜기 떼는 아니었지만 전남 해남에도 5-6년 전 메뚜기 떼로 인한 피해가 있었다고 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지난 4월에 아프리카 대륙에서 시작된 메뚜기 떼가 인도와 중국, 그리고 심지어 브라질에서까지 기승을 부린다고 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TV에서 영화로 만들어진 펄벅의 [대지]에서 보았던 메뚜기 떼의 장면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그 장면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1886년 북아프리카 알제를 습격한 메뚜기 떼는 길이 6.5 킬로미터, 두께 30m 였다고 하니, 수 조 마리의 메뚜기들이었을 것이고 이 메뚜기 떼로 인한 직간접 사망이 2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황충은 단순한 메뚜기 떼가 아니라 심판을 행하는 악한 영적 존재입니다. 이들은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습니다. 전갈은 아시다시피 꼬리로 침을 쏘아 죽음에 이르게 하거나 치명적인 고통을 주는 생물입니다. 메뚜기 떼가 전갈의 쏘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메뚜기 떼는 스스로 무제한의 힘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제한적 권세를 부여 받는 존재입니다.


4. 황충들의 모양 (9:7-10)
본문 7-10절은 황충들의 모양이 묘사되는데, 그 묘사는 황충의 존재가 메뚜기를 닮은 악한 영적 존재임을 잘 보여줍니다. 먼저 ‘전쟁을 위하여 준비한 말들 같고’라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종종 침략하는 군대를 묘사했던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 머리에 금 같은 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라고 묘사합니다. 금이 아니고 ‘금 같은’이라고 했고 관이 아니고 ‘관 비슷한 것’이라고 했다는 점이 중요한데, 이것은 모방하는 마귀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이십사 장로가 쓰고 있는 금관과 비슷하지만(계 4:4) 모방일 뿐입니다. 또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다’고 했는데, 생각해 보십시오. 징그럽고 무서운 모습이 연상되지 않습니까? 이는 마귀적 존재의 지적 교활함과 잔인함을 보여주고 인간과 야수의 성질이 함께 뒤섞여 있음을 나타냅니다. 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을 가졌습니다. 이는 유혹하는 여자의 모습이라기 보다, 헝클어진 머리를 묘사한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는데 그럴 개연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에서 헝클어진 머리는 나병 환자의 불결함(레 13:45)이나 슬픔(레 10:6; 21:10) 또는 간음죄를 범한 여자(민 5:18), 또는 귀신 등과 관련이 되는데, 이런 성질들을 상징한다고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황충의 ‘이빨은 사자의 이빨’같습니다. 그는 파괴적 성질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럴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철 호심경 같은 호심경’이 있습니다. 철 갑옷을 입고 있어서 아무도 뚫을 수 없고 약점도 없는 모습입니다. 또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쟁터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 같으며’라고 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전쟁을 위하여 준비한 말들 같고’라는 표현을 설명해줄 뿐 아니라, 형벌을 가하려고 뛰쳐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또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고,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해하는 권세가 있다’고 합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다섯 달의 제한된 기간 동안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힘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메뚜기를 닮았으나 섬뜩한 괴물 같은 마귀의 형상을 보여주는 이 여러 묘사들은 요엘 선지자가 묘사한 주의 날에 있을 메뚜기 떼의 재앙에 대한 묘사와 유사합니다.


5. 황충의 임무와 그 대상(9:4-6; 빌 1:20,23,25; 롬 14:8)
이제 이 황충들이 땅으로 올라와서 하는 일을 살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황충에게 명하십니다. 물론 여기서 ‘그들에게 이르시되’라고 하는 화자(話者)는 하나님이거나 하나님을 대행하여 명하는 영적 존재일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심판의 컨트롤타워가 하늘 보좌라는 것입니다. 황충은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수목은 해하지 말라”는 명을 받습니다. 메뚜기의 주식(主食)을 금하시는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건드릴 수 없는 대상과 괴롭게 해야 하는 대상도 결정해 주십니다. 그들이 건드릴 수 없는 대상은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하나님의 인침은 하나님의 주권적 소유권 표시입니다. 즉, 메뚜기 떼에게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해할 권세가 없다는 말입니다. 메뚜기 떼는 오직 ‘하나님의 이마에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할 권세를 받습니다. 그것도 제한적입니다. 죽일 권세는 없고, 오직 괴롭게만 할 수 있으며, 기간도 다섯 달로 제한적입니다. 여기서 다섯 달은 메뚜기의 수명을 의미하거나 메뚜기 떼가 나타날 수 있는 건기(봄부터 늦은 여름까지)를 의미할텐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기간을 제한하여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괴롭힌다는 것은 전갈이 꼬리로 쏘아서 죽을 만큼의 괴로움을 준다는 것인데, 사람들은 괴로워서 죽기를 구하지만 죽음이 그들을 피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6). 그들은 많은 신자들을 그 믿음과 증거 때문에 죽음에 처하게 만들었지만, 그들은 정작 자신들이 순교자들에게 가했던 그 죽음을 죽지도 못하고 고통을 겪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이것이 다섯째 나팔 심판의 내용이고 그 가혹함 때문에 첫째 화라고 불립니다. 괴로워서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여기지만 죽을 수도 없는 상황, 이것이 생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지금도 이런 아우성들로 가득합니다.
이 대목에서 생각나는 분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입니다. 그는 죽기를 갈망했던 사람입니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빌립보서 1:23).” 그렇게 죽어서 주와 함께 있을 것을 즐거워했고 바랐던 사람, 하지만, 빌립보 사람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고 말한 사람을 우리는 압니다(빌 1:25). 왜 이런 바램이 바울 사도만의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신자의 특권이고 영광입니다. 신자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사람이고(롬 14:8)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빌 1:20).
하지만 오늘 본문은 전혀 다른 것을 보여줍니다. 슬프게도 불신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그분을 믿지 않고 거절하는 사람들에게는 황충의 괴롭힘만이 있을 것입니다.


6. 황충의 정체 (9:11)
다섯째 나팔 심판이자 첫째 화를 불러오는 이 황충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11절은 황충의 배후를 밝힘으로써 그 정체를 보여줍니다. “그들에게 왕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어로는 그 이름이 아바돈이요 헬라어로는 그 이름이 아볼루온이더라(요한계시록 9:11).”
황충들의 왕은 ‘무저갱의 사자(천사)’입니다. 이 천사는 타락한 천사로, 1절에서 무저갱의 열쇠를 받아 무저갱을 여는 그 별—천사—와는 구별되는 존재로 보입니다. 그 이름이 히브리어로는 아바돈, 헬라어로는 아볼루온입니다. 히브리어 아바돈은 멸망 혹은 멸망의 자리(음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헬라어 아볼루온은 파괴자를 의미하니, 히브리어 아바돈과 의미가 다르지 않습니다. 이 존재는 사탄 자신이거나 사탄의 높은 수하를 가리킬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왕으로 따르는 그리고 무저갱에서 올라온 황충들은 무엇입니까? 이들은 무저갱(지하세계)의 거류자들 즉, 사탄을 섬기고 그를 따르는 영적 존재들입니다.


7. 교훈과 적용
우리가 오늘 살펴본 다섯째 나팔 심판 즉 첫째 화의 내용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합니까? 1세기 말의 성도들은 이 본문에서 어떤 교훈을 얻었겠습니까? 그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별의 존재, 무저갱에서 나오는 연기와 황충의 의미, 그리고 황충에 대한 묘사들, 황충이 섬기는 왕인 아바돈 혹은 아볼루온의 정체 등을 하나 하나 정확하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는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A.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있다.
첫째,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그 심판은 반드시 옵니다. 그것은 자연 세계에 대한 심판을 넘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신이 되고 자기가 중심이 되어 살았던 모든 불신자들을 향하게 될 것이고, 잔인하고 무서운 생지옥 같은 심판이 될 것입니다. 그 심판은 종말의 끝에 특별히 주어질 것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의 시간에 하나님 없는 인간들이 경험하는 심판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우리는 특별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도 없습니다. 신문의 사회면을 보십시오. 생지옥 같은 이야기들이 그칠 새가 없습니다. 어린 자녀를 잔인하게 학대하는 부모, 수년 동안 딸을 성폭행하는 아버지, 온갖 종류의 성폭력과 성추행의 사건들, 중학교 다니는 아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가혹적 폭력 행위들, 강간, 사기, 살인 그리고 권력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갖은 종류의 폭행들 말입니다. 이 뿐입니까? 성(性)의 혼란은 결혼과 가정의 정의와 현실을 깨뜨려버렸고, 간음과 혼전 순결의 무너짐, 누구나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는 음란한 영상과 글들, 매체들, 이외에도 인종 차별의 문제, 혐오와 학대, 마약과 술 등 이 모든 것들이 아바돈/아볼루온의 파괴적 속성을 잘 보여주는 것들이 아닙니까? 그리고 이런 세속적 인본주의, 물질주의, 자기 중심적 쾌락주의들이 인간에게 남겨주는 것은 영적 고통과 정신적 괴로움, 감정적 비통함들이 아닙니까?
황충을 통한 심판은 주님의 재림 직전에 특별한 방식으로 임할지라도, 이미 우리에게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십시오.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있습니다.

B. 하나님은 심판의 대행자로 사탄을 사용하신다(잠 16:4).
둘째, 이 모든 심판이 아바돈/아볼루온이나 황충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심판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며, 이 모든 심판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행해집니다. 1절에 “그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3절에 “권세를 받았더라,” 4절에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와 같은 표현들은 일어나는 모든 심판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대행자로 사탄을 사용하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언 16:4).”
모든 심판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것은, 아바돈/아볼루온이나 그 어떤 황충도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성도들을 아무도 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의 자녀들은 종말과 관련한 환난의 주제에 접근할 때 두려움에 붙잡힐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주권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께만 있습니다. 어떤 환난 속에서도 그리고 생지옥처럼만 여겨지는 세상의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당신의 자녀들을 평안과 은혜로 붙드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약속을 믿고 그 은혜를 누리는 우리는 삼위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드리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