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SERMON
최근설교 및 강의

Home > 최근설교 및 강의 > 요한계시록 강해 2019 - (43). 둘째 화, 여섯째 나팔 심판

요한계시록 강해 2019 - (43). 둘째 화, 여섯째 나팔 심판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요한계시록 강해 2019 - (43). 둘째 화, 여섯째 나팔 심판

요한계시록 9:12-2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08-02

말씀내용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주제를 연속적으로 상고하고 있습니다. 심판이라는 주제는 일반적으로 유쾌한 주제는 아닙니다. 어쩌면 섬뜩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언제까지 심판 이야기만 할 것인가? 나는 위로가 필요하단 말이야.”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반응하는 분이 계시다면, 그것은 설교자인 제가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잘못 전달했거나 또는 그분이 잘못 들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다루는 요한계시록은 이 땅에서 믿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기 때문입니다.
3년 쯤 전에, 저는 이 강단에서 [설교 듣기]라는 주제로 8 번에 걸쳐 말씀을 전했습니다. 설교를 잘 듣는 것이 우리 신앙에 사활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잘못 알아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 당대 지도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므로 주님의 이 말씀을 다시 가슴에 새기고 주의 말씀을 들으십시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눅 8:18).”
본문 12절은 “첫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아직도 이 후에 화 둘이 이르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본문은 일곱 나팔 심판 중 뒤의 세 심판을 특별히 ‘화’라고 규정합니다. ‘화’는 재난이 미치는 상황에 대한 탄식의 외침입니다. 처음 네 심판이 화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뒤의 세 심판을 ‘화’라고 선언하는 것은 이 세 심판이 얼마나 가혹하고 잔인할지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실로 다섯째 심판/첫째 화가 그러했습니다. 자연계에 임한 처음 네 심판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바, 사람들에게 임하는 심판이었습니다. 무저갱이 열리고 거기서 해와 공기를 어둡게 함으로써 가치 판단 자체를 혼란스럽게 하는 연기가 올라왔습니다(9:1-2). 그 연기와 함께 올라온 것은 무서운 괴물의 형상을 한 황충 곧 메뚜기 떼였습니다. 이 메뚜기 떼는 전갈의 권세로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데, 사람들은 너무나 괴로워서 죽기를 구하지만 죽음이 그들을 피합니다. 생지옥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먼 미래에 있을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바로 그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세상임을 우리 모두가 압니다. 이것이 첫째 화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두 개의 화가 남았다고 말씀합니다. 이제 보게 될 여섯째 나팔 심판, 곧 둘째 화는 다섯째 심판보다 더 심각하고 잔혹할 것입니다.


1.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주라 (13-15; 6:9-10; 8:3-5; 7:1; 창 2:14; 15:18; 사 8:7-8; 계 6:7-8)
요한이 여섯째 천사가 나팔 부는 소리를 듣자, 곧 하나님 앞에 있는 금 제단의 네 뿔에서 한 음성이 흘러나옵니다. 이 음성이 제단의 네 뿔에서 나왔다는 것을 주목해 보십시오. 먼저 제단에서 나왔다는 것은 다시 하늘 보좌실의 하나님의 보좌 앞 제단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먼저 제단이 등장한 것은 다섯째 인을 뗄 때였습니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요한계시록 6:9).”
요한은 거기서 순교한 영혼들의 기도 소리를 들었습니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요한계시록 6:10).”
그리고는 제단이 일곱째 인이 떼어질 때 다시 등장합니다.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요한계시록 8:3).”
두 경우 모두 성도들의 기도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금 제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왔다는 것은 이 음성이 그들의 기도와 무관하지 않음을 시사합니다. 말하자면,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주라”는 음성은 성도들의 기도의 응답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네 뿔’이라는 표현도 주목해야 합니다. 넷은 온전함을 상징하고 뿔은 능력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기도에 응답하시는데, 당신의 능력의 온전함으로 그 일을 시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음성은 하나님 자신의 음성일 수도 있지만, 성도의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던(8:3-5) 천사-제사장의 음성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 음성은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주라”는 것입니다(14).
이것은 나팔을 부는 천사에게 어떤 행동이 요구된 유일한 경우입니다. 그런데 이 명령은 어떤 의미를 가지겠습니까?
먼저 이 네 천사의 존재를 생각해 봅시다. 본문의 네 천사는 7:1에서 “땅 네 모퉁이에” 서서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던 네 천사와는 다르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입니다. 7:1의 네 천사는 재앙이 임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면, 9:14의 네 천사는 파괴의 재앙을 몰고 올 악한 천사들이고 이제 등장하게 될 악한 마병대의 지도자들입니다.
이 네 천사는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되어 있었습니다. 유브라데 강은 에덴에서 발원한 네 강 중의 하나일 뿐 아니라(창 2:14), 우리가 세계사에서도 고대 문명의 발상지를 다룰 때 배우는 강이기도 합니다. 이 강은 서부 아시아에서 가장 긴 강으로 2850km에 달합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이 유브라데 강이라는 지명은 유의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나 로마인들에게 이 강은 매우 의미있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유대인들에게 유브라데 강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의 동쪽 경계였습니다(창 15:18; 신 1:7-8; 수 1:4). 말하자면 유브라데 강은 국경의 의미였는데, 언제나 이 강 너머에는 강력하고도 적대적인 제국들이 언제라도 강을 넘어 공격할 수 있는 두려운 존재로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유브라데 강 너머에 있는 앗수르의 공격을 유브라데 강의 강력한 범람으로 표현하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은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을 뒤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골짜기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가득하여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가 펴는 날개가 네 땅에 가득하리라 하셨느니라(이사야 8:7–8).”
이런 점을 고려하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브라데 강은 호의적 장소가 아니고 적국의 침략을 상기시키는 두려움과 공포의 이름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것은 1세기 말 로마 제국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로마 제국의 동쪽 경계 역시 유브라데 강이었습니다. 천하무적 로마 제국의 군대는 유브라데 강 너머에 있는 파르티아 제국을 점령하지 못했습니다. 주전 53년과 주후 62년 두 차례에 걸쳐 로마군은 파르티아군에게 고배를 마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사람들에게 유브라데 강 건너의 파르티아군 특히 그 마병대는 큰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사실, 본문 16절에 등장하는 마병대는 파르티아 군을 연상하게 하는 표현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나중에 보겠지만, 여기 유브라데 강에 대한 언급은 여섯째 나팔 심판을 여섯째 대접 심판과 연결시켜 줍니다. 이 두 심판은 동일한 사건을 다른 관점에서 묘사하는 것입니다. 유브라데는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여 자신의 세력을 집결시키는 장소인데, 이 장소 개념은 지리적 개념이라기 보다(그게 지도상에서 어디야?라고 묻지 않도록) 영적 개념입니다.
자, 이제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는 표현이 어떤 의미인지를 아시겠습니까? 네 천사가 결박에서 풀려남으로써 그들이 지휘하는 거대한 군대의 세력이 유브라데 강을 넘어 밀어닥치게 될 것입니다. 이 거대한 군대가 등장하기 전에 먼저 본문은 네 천사의 임무를 15절에서 설명합니다.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준비된 자들이더라(요한계시록 9:15).”
이들은 황충이 사람들을 괴롭히기만 할 뿐 죽일 수는 없었던 것과는 달리, 사람을 죽일 권세를 가진 존재들이며, 심지어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준비된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죽일 사람의 범위를 1/3로 한정하십니다. 무조건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모든 사람을 죽일 권세가 아닙니다. ‘사람 삼분의 일’입니다. 넷째 인을 뗄 때에 청황색 말과 그 말 탄 자가 죽이는 사람은 사분의 일이었는데(계 6:7-8), 여기서는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합니다. 그 범위가 더 커졌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그 년 월 일 시’도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헬라어 본문에는 ‘그 시 일 월 년’이지만, 우리 말로 익숙한 표현대로 번역이 되었고 이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시간에 멸망의 천사들이 인류 위에 활보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 일은 우발적으로 세계의 지도자들의 실수나 결심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시간표에 따라서 일어납니다.


2. 마병대가 가져오는 재앙들 (16-19; 창 19:24,28; 계 16:13; 1:16; 2:16)
이제 요한은 또 다시 무언가를 듣는데, 그것은 마병대의 수가 ‘이만 만’이라는 것입니다. ‘이만 만’은 10000 x 10000 x 2 로 2억을 의미하지만, 사실은 셀 수 없이 많은 숫자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2억에 달하는 마병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 1세기 로마 제국의 군대는 24군단으로 약 125,000명이었다고 하는데 거의 2000배가 되는 숫자입니다. 그것도 군인만이 아니라 말들의 수를 포함하는 마병대가 말입니다. 이들을 도열시켜 놓는다면, 너비 1마일(1.6km), 길이 85마일(136km)를 차지할 것이라고 합니다. 미래주의 입장에 서 있는 존 왈부드(John Walvoord)는 이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미래의 어떤 때에 중국, 인도, 러시아의 군대가 일어날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바른 해석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이만 만’은 헤아릴 수 없는 큰 무리를 가리킵니다.
마병대 라는 이 말만으로도 파르티아 마병대를 두려워하던 로마 제국의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기에 충분한데, 그들의 수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만 만이라는 마병대의 수를 들은 요한은 이제 그 마병대를 환상 중에 봅니다. 17절입니다. “이같은 환상 가운데 그 말들과 그 위에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줏빛과 유황빛 호심경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요한계시록 9:17).”
가장 먼저 나오는 묘사는 호심경에 대한 것입니다. ‘불빛과 자줏빛과 유황빛 호심경’이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마병에 대한 묘사인지, 군마에 대한 묘사인지 혹 둘 다에 대한 묘사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강한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이 호심경은 ‘불빛, 자줏빛, 유황빛’의 세 가지 색을 가졌는데 이는 붉은 색, 푸른 색, 노란 색을 가리킵니다. 말의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의 색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라고 묘사합니다. 앞서 나온 황충의 이빨은 ‘사자의 이빨’같다고 했는데(9:8) 여기서는 말들의 머리가 그렇습니다. 둘 다 잔인함과 멸망의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거대한 마병대의 심판을 완성하는 것은 말탄 자들이라기 보다 말들입니다. 이 말의 입에서는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는데 이것들은 18절에서 ‘세 재앙(들)’이라고 묘사됩니다. 구약성경에서 이 세 가지가 다 등장하는 본문은 유일하게 소돔과 고모라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을 때입니다.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지역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 가마의 연기같이 치솟음을 보았더라(창세기 19:24,28).”
소돔과 고모라에 임한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은 그저 리허설일 뿐입니다. 여기서 죽임을 당하는 것은 단지 육적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고 영적, 육적 죽음 모두를 의미합니다.
19절은 “이 말들의 힘은 입과 꼬리에 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말들의 파괴적 힘이 나오는 ‘입과 꼬리’ 중 먼저 입을 생각해봅시다. 18절에서도 불과 연기와 유황은 말의 입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입에서 나온다는 것은 여섯째 대접 심판에서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라고 한 말씀(계 16:13)과 유사합니다. 주님의 입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왔고(계 1:16), 주님은 당신의 ‘입의 검’으로 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계 2:16). 모두 진리의 말씀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악한 자의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온갖 속이는 것과 미혹하는 것, 더러운 것 뿐입니다. 본문 17-19절에서 묘사하는 것은, 심판의 강력한 원천이고 수단이 되는 그 악한 피조물들의 입이 죽음만이 아니라 속임의 심판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이 속임은 고통의 본질적인 단면이기도 합니다. 이 속임이 사람들을 우상 숭배라는 늪으로 데리고 가서 그들을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미혹과 속임은 구약 시대의 거짓 선지자들, 신약 시대의 거짓 교사들,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도 거짓 목사들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마귀는 사람 삼분의 일을 죽입니다.
마병대의 말들에 대한 또 하나의 묘사는 ‘꼬리’에 그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더라’고 했습니다. 꼬리를 뱀의 형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그 의도가 분명해 보입니다. 마병대가 마귀에게 속한다는 악마적 기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3. 회개하지 않는 자들 (20-21; 고전 8:4; 10:20; 계 18:23; 2:14-15, 20-24; 22:18-19)
여섯째 나팔 심판-둘째 화는 모든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모두를 심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최후의 심판은 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놀라운 것은, 그 심판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하나님을 대적할 뿐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들의 비참함과 두려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들이 행하고 살던 우상숭배와 더러운 삶을 여전히 고집한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처럼 인간의 죄성, 인간의 전적 부패의 교리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 있을까요? 사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이라고 할 때 ‘이 재앙’은 여섯째 심판을 가리킬 것입니다. 왜냐하면 재앙이라는 단어가 18절에서 처음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는 말은 20절과 21절에 두 번 반복됩니다. 강조하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그들은 하던 일을 계속하는데 그것은 두 가지, 귀신 숭배와 우상 숭배입니다.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요한계시록 9:20).”
사실, 귀신 숭배와 우상 숭배는 한 가지입니다. 성경은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은 생명도 없고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고전 8:4). 그러나 또한 우상 숭배는 귀신 숭배입니다. 우상 숭배의 배후에는 마귀적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10:20).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고린도전서 10:20).”
우상의 배후에는 언제나 미혹하는 마귀의 세력이 있습니다. 우상 숭배는 영적, 도덕적 가치 판단을 흐리게 하여 결국 범죄로 인도합니다.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요한계시록 9:21).”
살인, 복술, 음행과 도둑질이 그 결과들입니다. 여기서 살인, 음행, 도둑질은 십계명에서 다루는 내용들이고, 복술은 주로 속임, 미혹함과 관련된 것입니다. 본래, 복술에 해당하는 헬라어(φάρμακον)는 ‘약, 독물, 주문’등을 의미하는 말이고 여기서 약학 또는 약국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pharmacy 가 나왔습니다. 이것이 복술(마술)과 어떻게 연결이 될까요? 그리스-로마세계에서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주로 종교적 의식에서 모종의 ‘신비의 약물’과 같은 것을 사용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어떤 부족사회에서는 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여튼, 여기서 복술은 마술의 관습과 그 관습에서 사용하는 모든 종교적 숭배 의식과 물질을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요한은 이 복술을 정죄하는데, 요한계시록 18:23은 이 개념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비치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인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로 말미암아 만국이 미혹되었도다(요한계시록 18:23).”
바벨론은 복술로 만국을 미혹하여 그들이 멸망하게 만들었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말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사람들을 죽이고(18),이 말들의 힘이 입’에 있었다(19)는 말씀을 생각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불과 연기와 유황’을 현대화된 전쟁 무기들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이상, 영적-육적으로 사망을 낳게 하는 미혹의 파괴력을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레고리 비일(Gregory Beale)은 강조합니다.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마귀의 미혹은 언제나 거짓 교사들을 통한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것이 1세기 말 요한계시록이 쓰여지던 당시 교회들이 겪고 있던 심각한 문제들이기도 했습니다(2:14-15, 20-24; 22:18-19).


4. 교훈과 적용 (7:3-4)
본문은 먼 미래에 일어나게 될 핵전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미래는 핵전쟁으로 종국을 고하게 될 것이라고 쉽게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일이 세계의 영향력 있는 국가 지도자들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 년 월 일 시’는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인침을 받는 일은 마쳤습니다. 천사들이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는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이 해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계 7:3). 이미 인침을 받는 일이 마쳐졌고 그 수가 찼습니다(계 7:4).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오늘 이 시간에 예배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 곧 여러분이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사람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두려운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경박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말씀이 그들을 두렵게 하는 대신, 더욱 경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은 회개입니다. 보십시오. 살아남은 자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질병과 사고와 기타 많은 이유로 생각지도 못한 시간에 죽어갑니다. 우리는 그런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 보내는 일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나에게도 그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할지라도, 회개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살아오던 대로 우상을 섬기고 살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미혹하는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된 가르침에 속아서 그렇게 됩니다. 그들은 그 거짓된 가르침과 거짓 선생들을 좋아하고 따릅니다.
현대의 우상들은 금, 은, 동, 목석으로 만든 신상들이 아닙니다. 우상은 하나님의 자리에 서있는 모든 것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원(願)이 없겠다”거나 “이것만 있으면 행복하겠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여러분의 우상입니다. “나는 이것 때문에 불행하다”고 느끼거나 “이것만 없어지면 내 인생이 살만 할 것 같다”고 여기는 그것이 여러분이 섬기는 우상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돈도 물질도 아닙니다. 명예도 권세도 인정도 아닙니다. 쾌락과 섹스와 성공과 약물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합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나는 이런 짓은 하지 않는다고 자부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포르노 따위는 보지 않는다, 나는 음담패설이나 성적 농담을 입에 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존 파이퍼가 지적했듯이,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그런 악한 것 에서 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여기에 복술 곧 미혹의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은 존 파이퍼의 말대로, 사과 파이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대적하는 가장 큰 대적은 독이 아니라 사과 파이다…이 후자의 욕구가 하나님을 향한 욕구를 대체하게 되면 우상 숭배는 간파되기 힘들고 치유되기도 너무나 힘들기 때문이다.” 사과 파이가 악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선악간에 중립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들이 우리를 망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사과 파이는 TV시청이거나 스마트폰 사용, 인터넷 쇼핑 또는 넷플릭스일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자체로 악하지 않습니다. 금이나 은, 돈도 결코 그 자체로 악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고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이 악하지 않습니다. 스포츠 경기에 참여하고 일의 성공과 성취를 추구하고 레저와 취미가 악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여러분의 시간과 생각을 빼앗아가고 있어서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들을 빼앗아간다면, 여러분은 미혹을 당하고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돌이켜야 합니다. 여러분이 시간이나 마음을 빼앗아가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느끼지 않습니까? 그것들을 그만 두어야 한다고 혹은 줄여야 한다고 느끼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그 심판이 일어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안전하십니까? 여러분은 영혼과 몸을 죽이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회개는 돌이키는 것입니다. 회개(悔改)의 한자어는 뉘우칠 회(悔)와 고칠 개(改)의 합성어입니다. 뉘우치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 뉘우치고 돌이켜 고치는 것이 성경적 회개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주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는 회개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회개의 열매를 맺는 복된 은혜를 우리 모두에게 주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