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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44). 작은 두루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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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44). 작은 두루마리

요한계시록 10:1-1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08-09

말씀내용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본문은 여섯째 나팔과 일곱째 나팔 심판 사이에 등장하는 막간에 해당하는 본문입니다. 이 막간은 10장에서 시작해서 11:13까지 이어지는데, 두 가지 내용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인 10장은 작은 두루마리를 든 천사로부터 요한이 그 두루마리를 받아 먹음으로써 새로운 사명을 받는 내용이고 둘째는 11:1-13에 두 증인의 사역 환상입니다. 오늘 우리는 10장의 내용을 살펴보고 이어서 다음 주일에 두번째 내용을 살펴볼 것입니다.


1. 막간(10:1-11:13)의 역할
먼저 이 막간의 성격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일곱 인 심판에서 보았듯이, 여섯째 인과 일곱째 인 심판 사이에도 막간이 있었고 7장이 그 내용이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144,000명의 하나님의 백성이 그 이마에 인침을 받는 것을 보았고 이어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찬송을 부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말하자면, 여섯째와 일곱째 인 심판 사이에서, 하나님은 교회의 정체성과 그들을 보호하시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보이심으로써 자기 백성이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하나님의 심판을 대할 수 있도록 위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최후의 심판이 임하기 전에, 회개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을 이 막간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바도 있었습니다.
두번째 막간인 오늘 본문도 처음의 막간과 비슷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여섯째 나팔과 일곱째 나팔 심판 사이에서 하나님은 이 막간을 통해 교회의 정체성과 소명을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리처드 필립스). 박해와 환난의 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백성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회개의 기회가 아직 남아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앞에서 넘치는 재앙에서 살아남은 불신자들이 회개하지 않고 우상숭배에 여전히 몰두하는 모습을 보았듯이(9:20-21) 회개의 기회를 주기 위한 막간이라는 점에서는 그 가능성이 처음보다 줄어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읽을 때 특별히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의 심판 시리즈를 읽다 보면 자주 시간적, 혹은 연대기적 순서로 일어나는 심판들로 오독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막간에 나오는 내용들은 시간적으로 여섯째 나팔 심판과 일곱째 나팔 심판의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도리어 처음 여섯 나팔 심판의 기간에 해당하는 교회 시대 전체에 대한 추가적 해석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조금 뒤에 보겠지만, 힘 센 천사는 ‘지체하지 아니하리니’라고 맹세하는데(6), 이 말 그대로, 여섯째 나팔 심판 이후에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 일곱째 나팔 심판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 막간을 시간적 지체가 아닌 문학적 지체로 보아야 한다고 그레고리 비일은 말합니다. 로버트 마운스도 같은 입장에서, “(막간은) 연속적 사건 안에 존재하는 일시적 중단이라기 보다 이 세계 역사의 최후 가운데 교회가 취할 역할과 운명에 대한 교훈을 주려는 문학적 장치”라고 설명합니다. 윌리엄 헨드릭슨도 말합니다. “여섯째 나팔과 일곱째 나팔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있는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다른 면에서 본 현 세대, 이미 진술한 바 있는 교회의 수난, 능력, 임무와 최후의 승리를 묘사한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막간의 기능에서 중요한 것은 이 삽입 부분이 요한계시록 전반부와 후반부를 하나로 연결해주는 문학적 연동 장치의 기능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막간을 지나, 요한계시록은 후반부로 진입하게 됩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서 우리는 10:1-11:13의 막간을 살펴볼 것입니다.


2. 작은 두루마리를 가진 힘 센 천사와 일곱 우레 (1-4)
오늘 본문은 대략 세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4절에서는 작은 두루마리를 가진 힘 센 천사의 환상과 기록되지 않은 일곱 우레가 소개됩니다. 5-7절은 천사의 맹세로 ‘지체되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8-11절에서 요한은 그 두루마리를 먹으라는 명령을 받고 먹음으로써 새로운 사명을 받게 됩니다. 먼저 첫번째 단락인 1-4절을 보겠습니다.

A. 힘 센 천사 (1-3; 5:2; 18:21; 단 7:13; 마 24:30; 겔 1:28; 계 4:3; 마 17:2; 28:18-20; 계 5:5)
요한은 힘 센 다른 천사를 환상 중에 보게 됩니다. ‘힘 센 천사’의 등장은 앞에서도 한 차례 볼 수 있었습니다. 5:2에서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라고 할 때, ‘힘있는 천사’가 ‘힘 센 천사’와 같은 표현입니다. 그리고 18:21에서도 또 한 번 등장합니다. 물론 이들은 모두 같은 천사일 수도 있지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말 그대로 강한 힘을 가진 존재들이지만, 요한에게서 경배를 받는 대상은 아닙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이 천사에 대한 묘사는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라고 생각하게 될 정도입니다. 먼저 그 천사는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다니엘이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라고 예언한 것과(단 7:13) 매우 유사한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태복음 24:30).”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하여 종말론적 영광을 드러내는 표지이고 또는 하나님의 심판의 표지가 되기도 합니다(14:14-16).
이 천사에 대한 두번째 묘사는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스겔이 본 하나님에 대한 묘사(겔 1:28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나 앞에서 요한이 보좌 환상에서 보았던 바,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계 4:3)는 표현을 생각하게 합니다. 둘 다 하나님에 대한 묘사이고, 이 무지개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은 무지개 언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의 약속입니다.
이어지는 세번째 묘사는 ‘그 얼굴은 해 같고’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변화산에서 변형된 주님을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라고 묘사한 것을 기억합니다(마 17:2).
네번째로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라는 묘사인데, 이것은 출애굽기의 불기둥과 구름기둥 주제를 연상하게 합니다(출 14:19,24).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와 보호하심을 상징합니다.
이 힘 센 천사에 대한 묘사는 2절에서는‘그 오른 발은 바다를 밟고 왼 발은 땅을 밟고’라는 묘사로 이어집니다. 이 천사는 한 작은 천사가 아니라 거대한 모양을 가진 천사입니다. 발로 밟는다는 표현은 정복과 통치를 의미하는데, 이 천사는 온 세상을 지배하고 권세를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12-13장에서 우리는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는 용’(12:17)과 ‘바다에서 나온 짐승’(13:1) 그리고 ‘땅에서 올라온 짐승’(13:11)을 보게 될텐데, 이들 모두를 주권적으로 지배하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보여줍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 그리스도는 천상의 주권과 지상의 주권을 갖고 계십니다(계 5:5; 마 28:18-20).
이 천사는 ‘사자가 부르짖는 것 같이 큰 소리로’ 외칩니다(3). 이것도 어린 양이신 주님께서 ‘유대 지파의 사자’로 묘사된 것(5:5)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 거대한 천사는 온 우주와 온 천하에 미치는 큰 소리로 사자처럼 울림이 있는 소리로 외쳤습니다.
이와 같이 ‘힘 센 천사’에 대한 본문의 묘사들을 보면, 이 천사는 그리스도를 묘사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이 천사는 요한의 경배를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6절에서 이 천사가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는 부분도 그리스도라고 보기에는 어색한 면이 있습니다. 또 구약에서 성육신하시기 전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사자(혹은 천사)로 나타나셨던 것을 생각하더라도, 요한계시록에서는 그런 방식으로 그리스도가 묘사되고 있지 않다는 점도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이유들로, 이 힘 센 천사가 그리스도라고 단정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 천사는 특별한 천사로서 아마 미가엘이나 가브리엘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계 12:7-9; 단 12:7). 비일은 이 천사가 그리스도일 것이라고 추정하면서도,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그리스도의 특성을 소유한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천사일 가능성을 열어둡니다. 이런 여러 학자의 해석을 종합해볼 때, 이 천사는 ‘그리스도의 특별 사자(천사)로 그리스도의 영광과 사명에 참여하는 존재’이거나(그랜트 오즈번), ‘자신이 섬기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여주도록 의도된 존재’(리처드 필립스)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B. 작은 두루마리 (2; 5:1)
두번째로 살펴볼 주제는 이 천사가 손에 가지고 있던 ‘펴 놓인 작은 두루마리’의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미 보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 손에 있던 두루마리의 존재를 살펴보았습니다(계 5:1). 그 두루마리는 일곱 인으로 봉해져서 아무도 능히 펴거나 볼 자가 없었습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인을 하나씩 떼시면서 그 안에 쓰여진 하나님의 작정대로 세상에 대한 심판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구원이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되는 것을 우리는 일곱 인 심판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두루마리와 지금 이 천사가 들고 있는 ‘작은 두루마리’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일단 문법적으로 보면, 본문의 두루마리는 ‘작은 두루마리’입니다. 헬라어로 두루마리(βιβλίον)와 작은 두루마리(βιβλαρίδιον)는 단어가 다른데, ‘작은 두루마리’는 지소사(指小辭)로서, 소와 송아지 같이 사물이나 생물의 작은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같지만 똑같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근거로 두 개의 두루마리는 다르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8절은 예외적으로 ‘작은 두루마리’라고 쓰지 않고 그냥 ‘두루마리(βιβλίον)’라고 쓴 점을 보면 두 단어는 혼용된다고 볼 수 있고, 두 개의 두루마리가 다르다고 단정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아 보입니다. 먼저 이 두 개가 다르다고 본다면, 그 내용이 막간의 두번째 환상(11:1-13)을 담고 있거나(로버트 마운스), 요한계시록 전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리처드 필립스).
그러나 문제는, 이 ‘작은 두루마리’가 5장의 두루마리와 다르다는 관점을 견지하면, 이 ‘작은 두루마리’가 어떤 책인지를 밝히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합리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두 개의 두루마리가 동일하다고 보는 것인데(그레고리 비일, 그랜트 오즈번, 리처드 보캄), 힘 센 천사의 경우에서처럼, 이 판단이 10장의 해석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어린 양이 일곱 인을 떼셨다는 점에서, 여기서는 ‘펴 놓인’ 두루마리라고 했을 수 있고(물론 일곱째 인이 모두 떼어졌느냐에 대한 논란이 가능하지만), 요한이 이 두루마리를 먹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작은 두루마리’라고 표현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두루마리에 대해서는 우리가 8절 이하에서 다시 살펴볼 것입니다.

C. 일곱 우레 (3-4; 8:5; 11:19; 16:18; 시 29:3)
이제 일곱 우레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힘 센 천사가 사자 같이 큰 소리로 외치자 그때 ‘일곱 우레가 그 소리를 내어 말하더라’고 했습니다(3). 요한은 일곱 우레가 말하는 것을 듣고 그것을 기록하려고 하는데, 다시 하늘에서 ‘일곱 우레가 말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 하늘에서 난 소리는 권위있는 소리로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의 소리였을 것입니다(14:13, 로버트 마운스).
우레는 보통 하나님의 거룩한 보응과 관련하여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 8:5에서는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고 했고, 일곱 나팔 재앙에서도,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요한계시록 11:19)”는 말씀에서 우레가 등장합니다. 일곱째 대접 심판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우레가 등장합니다(계 16:18).
이것은 구약성경에 뿌리를 가집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통한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를 노래하는 시편 29편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우렛소리’라고 표현한 것입니다(시 29:3).
이런 점에 근거하여, 많은 학자들은 이 일곱 우레가 세 개의 심판 시리즈인 일곱 인, 일곱 나팔 그리고 일곱 대접과 마찬가지로 준비된 또 하나의 칠중 심판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다만 이것은 우리에게 계시되지 않았습니다. 아마 이것은 문맥상 취소되거나(로버트 마운스), 말 그대로 계시되지 않은(그레고리 비일), 일련의 추가적 심판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일곱 우레의 심판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계시하시거나 계시하지 않으실 주권을 갖고 계시기에, 우리가 그 이유를 완전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맥을 통하여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있습니다. 로버트 마운스는 “회개하지 않으려는 인류의 완고한 결정(9:20-21)은 또 다른 재앙의 시리즈를 쓸모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라고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레고리 비일도 비슷한 설명을 합니다. “회개하지 않는 불신자들의 모습을 볼 때(9:20-21) 또 하나의 심판 시리즈를 보낼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일곱째 나팔과 함께 최후의 심판이 지체 없이 임할 것이다. 일곱 우레의 재앙은 그것이 실행되지 않을 것이기에 요한에게 계시되지 않았다.”


3. 힘 센 천사의 맹세 (5-7; 단 12:7; 계 6:9-10; 11:15; 마 6:10):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이제 그 힘 센 천사가 맹세하는 장면이 5-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힘 센 천사가 하늘을 향하여 오른 손을 들고 하나님을 가리켜 멩세합니다. 손을 드는 것은 마치 법정에서의 맹세를 연상하게 하는데, 구약 시대에도 맹세하는 전형적인 태도였습니다(창 14:22-23). 여기서 하나님은 “세세토록 살아 계신 이 곧 하늘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라고 묘사됩니다(5b-6a). 온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요한계시록의 전형적인 묘사입니다. 어떤 심판이 주어져도, 어떤 환란이 찾아와도 이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으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안전하게 지키신다는 것을 틈틈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세토록 살아계신 이’는 순교에 직면해야 하는 1세기 말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적합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소아시아의 교회들이 겪을 순교적 상황에서 그리스도께 신실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도록 강요 받을 것이지만, 그들은 세세토록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 ‘하늘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라는 표현은 자신이 시작하신 일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힘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와 구속의 목적을 종말의 모든 사건들을 통해서 성취하고야 마실 것입니다.
이렇게 맹세하는 천사의 말의 핵심은 ‘지체하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에 있고 그 내용이 7절입니다.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요한계시록 10:7).”
지체하지 않는다는 말은 다니엘 12:7에서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지기까지이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고 한 말씀과 관련이 됩니다. 나중에 12장에서 우리가 자세히 보겠지만, 여기 ‘한 때 두 때 반 때’라는 시간은 종말적 시간으로,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주님의 재림 이전의 특정한 때라기 보다 주님의 승천에서 재림까지의 교회 시대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와 구속의 목적을 완성하시고 역사를 끝내시는 일이 지체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지체하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을 사건의 흐름을 지탱하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이 천사가 영원이 가지게 될 무시간의 특성을 장담하려고 맹세했다고 이해하는 것은 어색해 보입니다.
지체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한편 하늘 제단 아래서 자신들의 피값을 신원하여 달라고 기도하는 순교자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기도 합니다(6:9-10). 그렇다면, 일곱째 나팔이 울려 퍼질 때,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는 복음의 성취, 곧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말합니다. 그 내용은 일곱째 나팔이 불려지는 11:15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요한계시록 11:15).” 오랜 세월 하나님의 백성이 기도해왔던 대로(마 6:10),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4. 요한이 받은 새로운 사명 (8-11; 겔 2:8-3:3; 신 8:3; 시 119:103; 렘 15:16,18; 시 19:10): “갖다 먹어 버리라.”
본문의 마지막은 요한이 작은 두루마리를 먹는 이야기입니다. 하늘에서 또 음성이 들립니다.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지라”는 것입니다(8). 이 음성을 들은 요한이 천사에게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고 하자, 천사는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고 말하면 두루마리를 줍니다(9). 그리고 천사에게서 두루마리를 받아 먹은 요한은, 천사의 말대로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고 고백합니다(10). 그리고 요한은 새로운 사명을 받습니다.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에언하여야 하리라(11).”
두루마리를 먹는 이야기는 에스겔 선지자의 경험을 연상하게 합니다(겔 2:8-3:3). 에스겔은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먹으라는 음성을 듣고 먹습니다. 먹자 입에서 달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재앙과 심판의 메시지였음에도 에스겔의 입에서 달았다고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생명 유지의 특성 곧 그 말씀의 사역을 수행할 수 있는 힘을 주는 능력을 보여줍니다(신 8:3).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편 119:103).”
예레미야 선지자도 자신이 전할 메시지, 주의 말씀을 먹었다고 말할 때 이런 고백을 합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예레미야 15:16).”
하지만 언제나 기쁨과 즐거움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메시지가 반대와 저항에 직면하자 예레미야는 바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찌 됨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예레미야 15:18).”
두루마리가 입에 달았다고 말한 에스겔도 사실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먹었지만, 그가 전할 메시지가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라는 사실(겔 2:10)은 그것을 먹은 후에 그것이 썼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요한도 그랬습니다. 두루마리를 먹었을 때, 입에는 달았지만 배에는 썼다고 그는 말합니다. 윌리엄 헨드릭슨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복음은 영광스럽고 달지만 복음을 전파하는데는 항상 쓰디쓴 고난이 따른다…요한은. 복음을 단순히 이해하고 소화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단 것과 수난(쓴 것), 즉 이 복음을 충실하게 전하는 자의 몫인 십자가의 멍에를 짊어져야 했다.”
하나님의 말씀, 복음은 언제나 신자에게 기쁨과 즐거움이 됩니다. 그것은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답니다(시 19:10b).” 그러나 배에서는 쓰다는 표현이 두 가지 면을 생각하게 합니다.
첫째는 말씀을 듣고 공부하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말씀을 살아내는 것, 그 말씀이 내 삶과 하나가 되는 것은 대가를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종종 아픔과 쓰라림을 동반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요한처럼 그 말씀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감당하려면, 거기에는 많은 저항과 거부와 반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번째 면은 11장의 두 증인 환상에서 더 자세히 보게 될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1세기 말의 성도들에게는 매일의 삶에서 직면하며 살아가야 하는 실재였습니다. 요한이 그 두루마리를 먹었을 때 입에서는 달았으나 배에서는 썼다는 말씀이 이런 의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질문을 더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전하라고 하시면 될 것을 두루마리를 먹으라고 하셨을까요?
두루마리를 먹으라고 한 것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그러했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남에게 전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것으로 흡수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먹는다는 것은 선지자적 사명으로 부름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래서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는 말씀을 듣습니다(11). 종종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은 교회를 가리키지만 때로는 불신자들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족속이 임금으로 대치되었습니다. 문맥상, 여기서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계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가진 증거 때문에 밧모 섬에 유배온 노사도 요한은 이제 다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이 사명은 단지 노사도인 요한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1세기 말의 교회, 그리고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는 길이 아무리 쓰디 쓸지라도 말입니다.


5. 적용과 교훈 : 복음을 살아내고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 (계 1:3; 22:7)
이 본문을 통해서 주님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복음은 달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신앙 생활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즐거움일 뿐 아니라, 대가를 지불하는 삶의 비통함도 요구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서두에서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요한계시록 1:3).”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끝에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계 22:7).”
요한은 두루마리를 먹어야 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단지 귀로만 듣는다면 얼마든지 그 말씀을 가지고 즐길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거기까지만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입에는 달지만 배에서는 쓸 그 말씀을 우리는 먹어야 합니다. 그렇게 신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혐오 메시지(hate speech)로 여기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점점 더 심해질지도 모릅니다. 이런 세상 앞에서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기독교를 싫어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주의 말씀에 쓰신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 어떤 적대적 세상이 펼쳐진다 할지라도 우리는 복음을 살아내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정체성이고 사명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을 먹은 사람이 아니면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막간 때문에, 일곱째 나팔이 여섯째 나팔 이후에 바로 불려지지 않은 것을 보았습니다. 헨드릭슨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는 수난과 능력, 임무 그리고 교회의 최후 승리를 미리 알려줌으로써 심판이 임할 때 성도들이 위로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신자는 두려워 하지 말라. 안심하라.”
관건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살이 되고 내 피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말씀의 사람이 되고 말씀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에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교회가, 그리고 신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