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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48). 상과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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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48). 상과 심판

요한계시록 11:15-1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09-06

말씀내용
지난 주일 우리는 일곱째 나팔이 불려지면서 요한이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로다”라는 하늘에 큰 음성들의 코러스를 들은 장면을 상고했습니다. 이 세상 역사가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순간입니다. 이 선언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선언은 불신앙의 세상을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신자들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선언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은 우리 영혼의 상태를 진단하는 하나의 시금석으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이 선언이 여러분의 소망을 견고하게 하고 위로를 더해준다면, 여러분의 신앙은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 이 선언이 부담스럽고 두렵기만 하다면, 여러분의 신앙은 어디선가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소망은 이 땅에서 우리가 원하는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소망은 이 땅에 기독교 국가를 세우거나 이 땅에서 무언가를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 땅에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 나라는 받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34절입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태복음 25:34).”


1. 인자가 오실 때 주어질 영벌과 영생(마 25:31,34,41,46)
주님께서는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마 25:31a)’ 일어날 일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언어로 말하면 이것은 일곱째 나팔이 불려질 때 일어날 일입니다. 그때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주님은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시고 양과 염소를 구분하실 것입니다(마 25:31b). 오른편에 둔 양에게는 조금 전에 읽은 것처럼,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고 하시겠지만, 왼편에 있는 염소에게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실 것입니다(마 25:41).
주님은 두 가지를 하십니다. 죄인을 영벌에, 의인을 영생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마 25:46). 이것이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일어날 두 가지 일입니다. 이것은 일곱째 나팔이 불려질 때 일어날 일이기도 합니다. 일곱째 나팔이 가지는 두 가지 성격을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볼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무서운 심판을 가져오겠지만, 신자들에게는 영광스럽고 즐거운 상 받는 날이 될 것입니다.


2. 이십사 장로의 경배와 찬양 (16-18; 22:5)
본문에서 하늘에 큰 음성들에 이어진 것은 이십사 장로들의 찬송이었습니다(16-18).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 있는 각각의 보좌에 앉은 이십사 장로의 존재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상기해봅시다. 이들은 구약과 신약의 모든 성도, 곧 모든 시대의 교회를 대표하는 천상의 존재들입니다. 이십사 장로들이 ‘자기 보좌에 앉아’ 있다는 묘사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세세토록 왕노릇함으로써 하나님의 왕권에 참여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계 22:5). 그래서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았다는 표현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찬송합니다. 이십사 장로가 찬송하는 내용은 적어도 두 가지를 말해 줍니다. 실현된 미래와 주님 재림의 성격입니다.

A. 실현된 미래 (17; 1:4,8; 4:8; 출 3:14)
먼저 실현된 미래를 생각해봅시다. 본문은 이상할 정도로 동사들을 헬라어의 부정과거시제를 사용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어날 미래의 일들에 대한 절대적 확실성을 보여주려는 의도입니다. 승리가 목전에 왔고 이미 승리의 함성이 천상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세기 말, 복음의 증거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고난에 처해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그들이 바라는 미래의 소망이 이미 실현된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십사 장로의 찬송은 얼마나 가슴 벅찬 말씀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의 구속 드라마의 최종편이 이제 완성을 향해 가고 있을 때, 하늘의 천군 천사가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되었다고 선포하였듯이, 이십사 장로도 동일한 방식으로 미래가 이미 실현되었다고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17절입니다. “이르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이 자주 사용하는 하나님에 대한 호칭을 만납니다.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라는 표현입니다. 이미 몇 차례 이런 표현을 보았기에 익숙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1장 4절에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시며”라고 하였고, 1장 8절에서는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4장 8절 하반절에서는 네 생물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이렇게 찬양합니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요한계시록 4:8).”
자 그런데, 오늘 본문 17절에 등장하는 하나님 호칭은 앞에서 보았던 것들과는 약간 다르다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앞에서 성부 하나님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고 묘사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표현하는 삼중 묘사로, 출애굽기 3:14에서 하나님께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여호와 성호에서 연유한 표현입니다. 시작도 끝도 없고 영원히 자존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구약의 성호를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라고 풀어서 쓴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이 빠졌습니다. ‘현재-과거-미래’의 구조가 여기서는 ‘과거-현재’로만 나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본문은 미래의 소망이 이미 실현되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미래 소망이 실현되었다는 확실성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동사들도 현재나 미래 시제가 아니라, 부정과거시제를 의도적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을 생략한 것은 매우 의도적인 것입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오심이 실현되었고, 세상 나라가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고 그가 이미 세세토록 왕 노릇을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7절 하반절에서 이십사 장로는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노릇 하시도다”라고 찬양합니다.
여기서 ‘큰 권능’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속성인 전능하심을 의미하기 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대적을 정복하시고 승리하신 최종적 승리를 얻게 한 능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마귀의 세력을 꺾으시고 승리하셨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십사 장로의 경배와 찬송은 모든 성도가 소망하고 바라는 미래가 이제 실현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실현된 것과 마찬가지이며 그만큼 확실하다는 사실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의 선언은 1세기 말의 성도들 뿐 아니라, 모든 시대에 믿음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동안 고난과 박해와 많은 불이익과 손해를 경험하는 성도들을 위로하기에 충분한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렇습니까?

B. 주 재림의 성격(18; 시2:1-5; 계 20:12-13; 19:2; 17:1; 민 35:33-34; 렘 2:7; 16:18; 히 11:6; 계 1:1; 13:16; 19:5,18; 20:12; 시 115:13; 고전 3:8; 약 2:14-17)
이어서 우리는 18절에 기록된 이십사 장로들의 찬송을 살펴볼텐데, 이것은 일곱째 나팔 심판이 가지는 두 가지 성격을 잘 보여줄 뿐 아니라, 일곱째 나팔 심판이 실로 셋째 화였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내려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이 내용은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을 향한 심판의 사건과 함께 온다고 선언합니다. 먼저 이방들의 분노를 말하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시편 2편의 인유입니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시편 2:1–5).”
하나님과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대한 세상의 분노는 때때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죄로 타락한 세상은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다스림을 싫어하고 분노합니다. 자기가 왕이고 자기 왕국을 세우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에 두 왕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1세기 말, 교회를 향한 로마제국의 박해나 유대인들의 적대감은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곱째 나팔이 불려지고 주님이 재림하실 때, “주의 진노가 내려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라고 말씀합니다. 죽은 자를 심판하신다는 말씀은 여러분에게 어떤 느낌을 가져옵니까? 이 말씀은 모든 시대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이었는지 모릅니다. 세상에서는 피의자가 죽으면 죽은 사람을 기소할 수 없고 재판을 진행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자를 심판하십니다.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하여 먼저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그리고 심판이 행해질 것입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요한계시록 20:12–13).”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세상 역사는 참된 공의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악한 자가 편안히 살다가 편안히 죽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불의한 재판을 받고 억울한 일을 심하게 겪거나 억울한 죽음을 죽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모든 신자들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라는 사도신경의 구절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주님의 재림 때 행해질 심판은 죽은 자를 포함하는 심판입니다. 18절에서 ‘죽은 자’는 믿지 않고 죽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하반절에서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이고 주님은 이들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누가 ‘땅을 망하게 하는 자’입니까? 요한계시록 19장 2절입니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요한계시록 19:2).”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는 큰 성 바벨론이고(계 17:1) 짐승의 제국이며 세상 나라입니다. 땅을 더럽힌다는 개념은 구약 성경에서 언급된 바 있습니다. 피흘림—살인으로 땅을 더럽히거나(민 35:33-34), 불신앙과 불의 그리고 우상숭배로 땅을 더럽힐 수 있었습니다(렘 2:7; 16:18).
그러므로 ‘땅을 망하게 하는 자’는 결국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요 왕이 되어 산 불신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미워했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분노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싫어합니다. 주님은 심판의 날에 그들 모두를 죽음에서 일으켜 당신의 진노를 보이실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뒷부분에서 좀 더 자세히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셋째 화입니다.
하지만, 그 심판은 믿는 자들에게는 상주심이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브리서 11:6).”고 기록했듯이, 상주심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고난과 박해와 죽음을 불사한 성도들에게 주님은 그들의 소망대로 상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에 대한 묘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입니다.
여러 범주가 나옵니다. 종, 선지자, 성도들, 작은 자와 큰 자,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종’은 선지자와 성도들을 총칭합니다. 우리가 이미 몇 차례 살펴보았듯이, 요한계시록에서 ‘종’이라는 표현은 요한과 같은 사도나 특정 지도자들에게만 국한되어 사용된 말이 아닙니다. 1:1에서 보듯이, 종들은 모든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됩니다. 여기서도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종들 중에는 선지자도 있을 것이고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선지자라는 말이 언급된 것은, 11장에서 보았듯이 교회가 두 증인으로 세상에서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점에서, 교회와 성도의 선지자적 사명을 강조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성도를 수식하는 말입니다.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특히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모두가 동등하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이런 표현이 적잖이 등장합니다(13:16; 19:5,18; 20:12). 이 표현은 참된 신자들에게는 위로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작게 여길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사소한 존재로 여기지 않으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판단하는 크고 작음은 주님 앞에서 유효하지 않을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큰 스님’이라는 말을 씁니다. 하지만, 기독교에 ‘큰 목사’는 없습니다. 사람이 인간적 잣대로 누군가를 그렇게 여길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도 중요합니다.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는 상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작은 자와 큰 자의 중요한 공통의 성질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 주님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업적을 남겼는가가 아닙니다. 주의 이름을 경외하고 살았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교회에서의 직분, 그의 학위, 영향력이 아닙니다. 주의 이름을 경외했는가, 그런 사람이었는가로 하나님은 우리를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한 모든 자에게 상을 주실 것입니다. 시편 115:13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리로다(시편 115:13).”
이들이 받을 상은 분명히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고려해야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면, 그 경외함은 주님을 섬기는 삶으로 표현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3장 8절에서 말씀합니다.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린도전서 3:8).”
‘일한 대로’입니다. 이것은 우리 신자의 삶이 위선적이거나 비뚤어진 삶이 되지 않고 신앙의 진정성을 가지고 살게 하는 포인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교회의 멤버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그치면 안 됩니다. 그것이 전부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진정 예수님을 믿는 교인이라면, 진정 주님을 경외하는 자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경외함, 곧 신앙의 진정성은 주님을 섬기는 삶을 통해서 나타날 수 있어야 합니다. 야고보서의 말씀도 다르지 않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야고보서 2:14–17).”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힘써 주를 섬기십시오.
이십사 장로는 지금이 바로 상을 주시고 진노를 내리실 때라고 말합니다. 언젠가 그날이 오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요한계시록 11:18).” 지금이 그 때라고 고백하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3. 열린 성전의 언약궤와 심판(19)
이어지는 19절에서 요한은 또 한 광경을 봅니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보게 되고 또한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앞에서 본 이십사 장로의 찬양에서 언급한 내용에 대한 결과입니다. 먼저 하늘 성전의 언약궤를 본 것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을 위한 상과 관계가 있습니다. 반면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은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는 하나님의 진노와 관계가 있습니다.
여기서 열린 성전은 지상의 성전이 아닙니다. 이 하늘의 성전에서 언약적 사랑(헤세드)에 대한 자비로운 약속과 의로운 분노가 동시에 분출되어 나옵니다. 신자에게는 자비의 약속이, 죄인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집니다. 언약궤를 보여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을 성취하시는 당신의 신실하심을 요한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성도들이 자신들의 코앞에 닥친 진노의 날에도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영원한 상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을 확신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교제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상징이었습니다. 지성소의 휘장 안에 감추었던 언약궤가 보였다는 것은, 주를 경외하는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과의 교제의 문이 활짝 열려졌다는 것을 시사하고 이것은 그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이자 상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인들, 죄와 불의로 땅을 더럽히고 망하게 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그들은 이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 이 땅의 역사는 마무리될 것입니다.


4. 교훈과 적용(마 24:42-44; 살전 5:2; 마 25:34)
자,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십니까? 먼저, 주님의 심판 날에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상이 주어지는 반면,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에게는 멸망이 임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아십시오. 오늘날 보편주의 구원론을 말하는 현대 신학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결국에는 다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입니다. 10년 전에는 미국 복음주의권에서 잘 알려진 랍 벨(Rob Bell) 목사가 [사랑이 이긴다]라는 책을 통해 결국 다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복음주의 교회를 시끄럽게 한 적이 있습니다. 점점 이런 주장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겠지만,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주장일 뿐입니다. 심판날에 영벌에 들어갈 사람들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둘째로, 주님께서는 주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우리가 생각하는 크고 작음의 기준으로 평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라는 말을 주목하십시오.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라면, 주님은 작은 자와 큰 자를 구별하지 않으시고 상을 베푸실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대단한 삶을 살아야겠다든지, 좀 더 대단한 삶을 살아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있는 그 자리에서 자신에게 더 크고 멋진 것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할 이유가 없습니다. 있는 자리에서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주를 경외함으로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입술만의 고백이 아니라, 주를 경외함이 주를 섬기는 삶으로 나타나도록 수고로이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끝으로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세번째 교훈은, 그 일곱째 나팔이 불려지는 날이 곧 온다는 것입니다. 그날은 반드시 옵니다. 주님은 역사 속에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날이 언제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예고나 지체없이 임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도둑 같이 생각지 않은 때에 오실 것이기에 준비하고 있으라고 경계하셨습니다(마 24:42-44). 바울 사도도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데살로니가전서 5:2).”고 하였습니다. 1세기 말, 요한계시록을 제일 먼저 받았던 성도들에게나 21세기 초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나 이 메시지는 동일합니다. 주님의 재림은 너무나 확실합니다. 다만 그 날이 언제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날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언젠가 여러분이 인생에서 원하는 것들을 이루고, 어느 정도 즐긴 다음에 그날을 준비해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마십시오. 지금 그리고 오늘 여러분은 그날을 준비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최선이고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삶의 최고봉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노라면, 언젠가 주님을 뵈올 것이고, 그날에 주님으로부터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 25:34)는 말씀을 들을 수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된 삶을 오늘 살아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