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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51). 땅에서 계속되는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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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51). 땅에서 계속되는 전쟁

요한계시록 12:12-17, 데살로니가후서 2:9-1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09-27

말씀내용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요한계시록 12장은 요한계시록의 중심적 환상을 보여줄 뿐 아니라, 요한계시록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 개의 환상 가운데 두 개를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는 큰 붉은 용이 해를 옷 입은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삼키려고 했지만, 실패하게 되는 환상입니다(12:1-6). 여자는 교회를 가리키고 아이는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12:5) 곧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아이는 하나님 앞과 보좌 앞으로 올라갔습니다(12:5). 그리고 여자는 1260일 동안 광야, 곧 하나님께서 예배하신 곳에서 양육을 받게 됩니다(12:6).
두번째 환상은 보이지 않는 세계인 하늘에서 일어난 전쟁입니다(12:7-17). 미가엘과 용 사이의 이 전쟁에서 용은 패배하고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이 전쟁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늘에서 일어난 전쟁입니다. 땅으로 쫓겨난 용은 성도들에게도 패하게 됩니다. 성도들은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용을 이기는데, 성도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는 12장의 세번째 환상이 시작됩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난 용이 여자와 그 남은 자손들과 땅에서 전쟁을 계속 벌이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1. 용의 분노와 마귀의 때 (12b; 11:2; 6:11)
12절 하반절을 먼저 봅시다.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요한계시록 12:12).”
하늘에서 더 이상 있을 곳이 없어진 용이 땅으로 쫓겨 내려오는데,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13장에서 우리는 바다와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을 볼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용으로 상징되는 마귀는 갈보리 십자가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머리가 상할 대로 상하여 패배하였고, 또 하늘의 전쟁에서도 미가엘로부터 큰 패배를 당하여 땅으로 쫓겨났습니다. 그러니 이 마귀는 노가 발할 대로 발한 상태입니다. 마귀는 그렇게 패배를 당함으로써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래서 최후의 발악을 하는 심정으로 땅에 내려와 교회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용의 분노와 마귀의 최후 발악은 여자 곧 교회를 향하게 되었습니다.
마귀에게 주어진 얼마 남지 않은 때는 14절에서 여자가 뱀의 낯을 피하여 양육을 받는 기간인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3년 6개월)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기간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3년 반의 기간은 6절의 1260일이고 11:2에 거룩한 성이 이방인에게 짓밟히는 42개월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은 성도들이 믿음과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하고 그 수가 차야 하는 기간이며, ‘잠시 동안’에 불과한 기간입니다(6:11). 이 기간에 마귀는 인침 받은 성도들의 몸을 박해를 통해서 상하게 할 수 있겠지만, 그들의 영혼을 결코 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마귀가 비록 계속 패배를 당하여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힘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가르치면서 경고합니다. 이 얼마 되지 않는 기간은 전에 없이 위험하고 영적으로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기간이 될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1세기 말 로마 제국과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당하는 성도들이 그들의 적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게 하고, 지금 그 적들에게 어떤 일들을 벌어졌는지를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1세기 말의 성도들은 자신들을 박해하는 원수가 로마 황제이거나 유대인들이 아니라 바로 하늘에서 쫓겨난 마귀라는 사실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마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머리가 상하도록 패배를 당하였고, 하늘의 전쟁에서도 미가엘에게 패하여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났으며,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바,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2. 여자에 대한 용의 박해 (13; 행 9:4-5; 마 25:40, 44-45; 요 15:18-20)
여기서 먼저 오늘 본문의 맥락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13-17절은 6절의 확장입니다. 6절에서, 해를 옷 입은 여자는 아들이 하나님 앞과 보좌 앞으로 올라가자 광야로 도망하여, 1260일 동안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인 광야에서 양육을 받게 됩니다. 이 내용이 13-17절에서 확대 설명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살펴본 7-12절이 5절의 확장이었다면, 13-17절은 6절의 확장인 것입니다. 그래서 13-17절의 환상은 5절과 12절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이제 13절을 봅시다.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박해하는지라(요한계시록 12:13).”
6절에서는 여자로 상징되는 교회가 광야로 도망간 사실만을 말했는데, 13절에서는 박해의 내용도 밝힙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를 향한 박해는 곧 예수님에 대한 박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 9:4).” 그러자 사울이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묻고, 주님은 다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대답하십니다(행 9:5). 사울은 교회와 신자들을 박해했지, 주님 자신을 박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교회와 성도를 박해하는 것이 곧 당신 자신을 박해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심판 때의 일을 말씀하실 때에도 이것을 언급하셨습니다.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마태복음 25:44–45).”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는 말씀도 같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교회, 당신의 성도들을 당신 자신과 동일시하신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이렇게 하십니까? 그 이유는 명백합니다. 교회를 박해하는 마귀의 적개심의 뿌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증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요한복음 15:18–20).”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여자 곧 교회에 대한 마귀의 박해는 곧 주님 자신에 대한 박해로 간주하시고 주님께서 친히 싸움을 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1세기 말 박해를 경험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은 이 사실을 기억함으로써 위로와 힘을 경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3. 큰 독수리 두 날개로 도우시는 하나님(14; 출 19:4; 사 40:31; 단 7:25; 12:7; 약 5:17; 왕상 17; 19:18)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대한 마귀의 박해를 그냥 보고만 계시지 않으십니다. 14절입니다.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요한계시록 12:14).”
여기에서 출애굽의 장면이 연상됩니다. 마귀는 애굽 왕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좇듯이 좇아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갈라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애굽기 19:4).”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그 넓은 날개 위에 얹어서 데리고 가듯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는 겁니다. 어느 누가 독수리로부터 새끼를 움켜갈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독수리의 두 날개를 여자에게 주어 광야로 날아가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받아’라고 하는 말은 신적 수동태로,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뱀의 낯을 피하도록 독수리의 두 날개를 제공하셨다는 것입니다. ‘큰 독수리의 두 날개’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 표현은 또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과도 연관이 됩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이사야 40:31).”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은 마치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가는 것 같은 새 힘입니다. 여자는 교회인데, 교회는 하나님만을 앙망하고 기다리고 소망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교회에게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가는 것 같은 새 힘을 주신다고 하신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대로, 교회는 뱀의 낯을 피하여 독수리 두 날개로 날아 광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으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14절 하반절에서 말씀하듯이, 거기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습니다. 이것은 6절에서 1260일 동안 하나님께서 양육하신다는 말씀을 재진술한 것입니다.
그 양육의 기간은 3년 반, 42개월, 1260일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승천 이후에 교회가 땅 위에 존속하는 기간입니다. 여러 표현 중에서 여기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라고 3년 반의 기간을 언급한 것은 의도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3년 반은 주전 2세기 유다 역사에서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성전을 더럽히고 무섭도록 여호와 신앙을 박해한 기간입니다(단 7:25; 12:7). 이뿐 아니라, 주전 9세기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 왕 때 있었던 기근도 3년 반이었습니다(약 5:17). 이 혹독한 시간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인 교회를 보호하셨고 양육하셨습니다. 특히 엘리야 선지자는 3년 반의 기근과 아합과 이세벨의 박해 속에서 광야로 옮겨져서 생활해야 했습니다(왕상 17).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보호하고 양육하신 것입니다. 또한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명을 남기셨는데 이들은 모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신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왕상 19:18).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마귀의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자기 백성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 혹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주어 광야,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으로 인도하여 그들을 보호하시고 양육하십니다. 그러하기에 마귀는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를 죽일 수는 있어도 이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원수 마귀의 공격과 박해는 비록 그가 갈보리에서 패배하고 하늘의 전쟁에서 무너졌을지라도, 여전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행해집니다. 거듭되는 참패 속에서 마귀는 악에 받히고 독이 올라 교회를 공격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교회, 하나님을 앙망하는 교회를 마귀는 이길 수 없습니다.


4. 마귀의 공격(15-16; 출 1:22; 시 18:4; 사 43:2; 계 1:16; 2:16; 11:5; 9:17-18; 16:13; 2:2,14,20; 2:9; 3:9; 살후 2:11-12)
15절은 마귀의 공격을 보여줍니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요한계시록 12:15).”
마귀는 아말렉이 그랬듯이, 비겁하게 ‘여자의 뒤에서’ 공격합니다. 이 본문에서 용이 뱀과 혼용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십시오. 뱀이 여자를 공격하는 무기는 홍수 같은 물입니다. 이 부분도 애굽 바로 왕이 이스라엘 백성이 낳은 남자 아이들을 나일 강에 버리게 한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출 1:22). 실제로, 구약 성경에서 홍수는 강력한 악이나 환난을 상징하는 보편적 은유였습니다. 시편 18:4에서는 홍수가 불의와 악을, 이사야 43:2은 환난을 상징한 경우입니다.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시편 18:4).”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이사야 43:2).”
하지만 이스라엘 역사에서 대적이 홍수로 이스라엘을 박해한 사례는 찾기 어렵고, 그 입에서 토한 강물이 문자적으로 홍수를 의미한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입’입니다.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입은 상징적으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여섯째 나팔 심판(9:12-21)을 상고할 때, 이미 설명하였지만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가령, 요한이 환상 가운데서 본 영광을 입으신 주님의 모습은,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는 모습이었습니다(계 1:16). 또 회개하지 않으면 당신의 ‘입의 검으로 싸우리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계 2:16). 이외 19장 15절과 21절에도 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또 우리가 11장에서 본 두 증인의 경우에서도,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라고(계 11:5a) 입의 이미지를 사용했습니다.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검은 말씀입니다. 말씀의 검으로 심판하시고, 증인들도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여기 뱀의 입에서 나온 강물은 무엇입니까? 이것도 뱀의 미혹하는 말, 거짓 복음을 가리킵니다. 여섯째 나팔 심판에서 2억의 마병대의 말의 입에서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왔다는 것은 그 마귀적 존재가 거짓 복음과 속임으로 사람들을 멸망에 처하게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계 9:17-18). 여기서는 뱀의 입에서 ‘불과 연기와 유황’ 대신 강물이 나오지만 의미는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입과 관련하여 하나 더 살펴본다면, 16장 13절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요한계시록 16:13).”
더러운 영들이 어디서 나옵니까? 용의 입, 짐승의 입,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옵니다. 또한 이 세 존재는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모방입니다. 그러므로 홍수가 입에서 나온다는 것은, 거짓 속임과 거짓 복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덴동산에서부터 마귀의 주요한 무기였습니다(창 3:1-6). 그리고 지금도 동일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바깥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미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보았듯이, 이런 거짓 가르침은 이미 교회 안에 파고 들어와 있었습니다(계 2:2,14,20). 물론 지금도 그렇습니다. 신천지가 교회에 사람들을 몰래 집어넣은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언제나 그런 일이 있어왔고, 그러기에 교회가 뱀의 입에서 토해지는 거센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으려면, 올바른 가르침 아래 믿음으로 서는 일은 더 없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외에도 외부의 거짓 고소와 중상 모략도 적지 않았습니다.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는 자칭 유대인이라는 하는 자들의 거짓 비방의 표적이 되어야 했습니다(계 2:9; 3:9). 모든 상황이 언제나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바로 지금 한국교회가 그런 상황에 놓여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것은 결코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마지막 때(바로 지금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마귀의 역사를 이렇게 경고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데살로니가후서 2:11–12).”
이런 뱀의 공격 앞에서 하나님은 다시 땅을 통해서 여자-교회를 도우십니다. 16절입니다.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요한계시록 12:16).”


5. 여자의 남은 자손(17)
땅이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다 삼키자, 용이 어떻게 행합니까?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요한계시록 12:17).”
여기서 ‘여자의 남은 자손’이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해서는 이견들이 존재합니다. 이 해석은 17절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데, 그레고리 비일은 17절은 13-16절을 반복하는 요약으로 볼 수도 있다고 제안합니다. 13-16절에서 말한 땅으로 쫓겨난 용이 교회를 박해하는 것, 즉 교회와 용의 전쟁을 요약정리하여 말씀한 것이 17절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자의 남은 자손은 단순히 교회를 의미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더 가능한 설명은, ‘여자의 남은 자손’을 성도 개개인으로 보는 해석입니다. 용이 여자와의 전쟁에서도 이기지 못하자, 이제 여자의 남은 자손들인 성도 개개인들을 공격한다는 것으로 17절을 해석하는 것입니다(윌리엄 헨드릭슨, 조엘 비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각 지체들인 성도들과 엄격하게 구분하기는 쉽지 않을지라도, 가능한 해석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12장에서 교회에 대한 몇 단계와 관점들을 구분지어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먼저 1-4절에서 해를 옷 입은 여자, 아이를 낳으려고 하는 여자는 그리스도 이전의 메시아 공동체-구약 교회입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은 뒤 광야로 도망하는 여자(6절), 즉 오늘 본문 13-17절에 언급된 아이를 낳은 여자는 그리스도 승천 직후의 박해 받는 메시아 공동체-신약 교회를 상징합니다.
이와는 별도로, 하늘의 관점과 땅의 관점에서 교회를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1-6절과 13-16절은 하늘의 관점에서 보는 교회의 고난을 서술하고 있다면, 17절은 땅의 관점에서 교회의 고난을 묘사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관점으로 보는 교회는 해를 옷 입은 듯 영광스럽고 아름답지만, 땅의 관점에서 교회는 온갖 박해 속에서도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붙잡아 지키고 예수의 증거를 굳게 가지는 것이야말로 교회가 마귀의 거짓 복음에 휩쓸려가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6. 교훈과 적용 (살후 2:9-10; 시 119:11; 민 14:24)
이제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적용적 관점에서 정리해봅시다. 교회를 향한 마귀의 공격은 오늘도 쉬지 않습니다. 여자의 남은 자손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인지, 개개인 신자들을 가리키는지 상관없이 마귀는 교회와 신자들을 공격합니다. 그 무기는 거짓 진리, 속임, 기만, 거짓 복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한 영적 전쟁은 언제나 진리 전쟁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특정한 은사를 통하여 능력을 행하는 전쟁이기 전에, 진리의 전쟁입니다. 진리 전쟁에서 이기려면,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바르게 서는 것입니다. 11절에서 말씀했듯이, 성도들은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마귀를 이깁니다. 우리가 마귀의 모든 궤계와 거짓에 미혹을 당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가진 증거에 꼭 붙어있어야 합니다. 꼭 붙어있다는 것은, 그 말씀을 배우고 깨닫고 순종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경고의 말씀이 여기 있습니다.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데살로니가후서 2:9–10).”
구원을 받지 못하고 멸망하는 자들의 특징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아서 멸망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멸망하는 자들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멸망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여자의 남은 자손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라고 묘사됩니다. 우리가 가공할 힘을 가지고 온갖 거짓으로 우리를 미혹하는 용을 상대로 싸우기 위해서는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의 말씀을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주의 말씀을 사랑하고 주야로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기를 즐거워해야 하겠습니까? 그 말씀이 가르쳐지는 모든 자리에서 얼마나 힘써 배워야 하겠습니까? 시편 기자의 말씀대로, 우리는 주께 범죄하지 않기 위해 주의 말씀을 늘 자신 앞에 두어야만 합니다(시 119:11).
우리가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갈 수 없기에, 우리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 어떤 박해 가운데에서도, 갈렙처럼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를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민수기 14:24).”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을 더 사랑하고 그 말씀에 견고히 붙어있도록 은혜를 구합시다. 그리고 그 진리의 말씀의 가르침 아래 신실하게 살아갑시다. 이것이 마귀의 모든 공격과 역사를 이기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