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SERMON
최근설교 및 강의

Home > 최근설교 및 강의 > 요한계시록 강해 2019 - (53). 바다에서 나온 짐승

요한계시록 강해 2019 - (53). 바다에서 나온 짐승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요한계시록 강해 2019 - (53). 바다에서 나온 짐승

요한계시록 13:1-10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10-18

말씀내용
우리는 13장에서 사탄인 용을 도와서 성도들과 싸우는 두 짐승, 바다에서 나온 짐승과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을 살펴보는 중입니다. 이 두 짐승과 함께 용은 거짓 삼위일체를 이루는데, 이들의 모든 모습은 삼위 하나님을 모방하는 거짓입니다. 특별히 13장의 두 짐승 중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은 사탄의 정치적 세력을, 그리고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은 종교적 세력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둘은 구분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짐승들이 적그리스도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지난 설교에 이어, 오늘도 바다에서 나온 짐승을 좀 더 살펴보려고 합니다.
짐승의 정체와 관련해서 우리가 다시 한 번 확인할 것은, 적어도 요한계시록의 첫번째 독자였던 1세기 말의 소아시아 성도들에게는 이것이 그리 복잡한 해석을 요하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두 짐승은 정치적으로 박해하는 로마 제국(또는 황제)과 종교적으로도 황제 숭배를 강요하는 로마 제국 혹은 모든 거짓 교사들과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 종교들을 가리키는 것이 너무나 분명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를 거듭하면서 학자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던 시대 혹은 과거의 역사에서 두 짐승의 존재를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면서 두 짐승의 정체와 관련한, 그리고 부수적인 묘사들이 의미하고 가리키는 대상이 누구 혹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많은 논의들이 시대마다 있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저는 두 짐승의 존재가 적그리스도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적그리스도들은 이미 사도들의 시대에 나타나 활동하고 있었고 모든 시대에 그러하겠지만, 그 마지막 때에는 아주 강력하고 두드러진 존재로 나타나 교회를 대적할 것입니다. 이런 적그리스도에 대한 킴 리들바거의 말이 도움이 되겠기에 조금 인용합니다. “적그리스도의 최후의 등장은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모독하고 이단 교리를 퍼뜨리는 신부와 사탄의 권세를 받아 국가(정부)의 형태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사탄의 진노를 퍼붓는 신랑 간의 불경한 결혼이 될 것이다. 이 두 세력(이단과 국가 숭배)이 그 안에서 합쳐진 인물의 출현은 말세에 이 세상을 심판하고 죽은 자를 일으키며 모든 것을 새롭게 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가장 확실한 최후의 전조가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문을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국한해서 생각하지 않고 시간적으로 긴 안목에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 짐승의 부활, 그리고 용과 짐승 경배 (3-4)
바다에서 나온 짐승이 주님의 부활을 모방하는 3절의 내용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흉내 내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학자들이 이것을 네로 황제를 가리킨다고 이해했습니다. 왜냐하면 네로는 자살했지만, 유대 문헌 중에는 ‘네로 황제의 귀환’이라는 전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문서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부활하여 동쪽의 파르티아 제국으로 피신했다가 그 군대와 함께 돌아와서 로마 제국을 무너뜨린다는 내용인데, 로마 제국을 증오했던 유대인들에게 이것은 일말의 희망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황당한 바램에 불과했지만 말입니다.
죽게 된 것 같다가 나았다는 표현을 일반화 시켜서 이해한다면, 이 짐승이 가진 엄청난 생명력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이런 짐승의 존재는 죽는 것 같지만, 또 다시 살아나고 또 살아나곤 합니다. 이점을 그레고리 비일은 잘 지적하여 말합니다. “짐승의 소생은 교회를 박해하는 국가나 세계 제도나 사회적 구조의 반복되는 흥망성쇠와 연결시키는 것이 낫다.”
그런데 이 세력의 부활은 ‘온 땅’을 놀라게 합니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라고 3절 하반절은 말씀합니다. 여기서 ‘온 땅’은 땅에 거하는 자들, 곧 불신자들을 가리킬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놀라서 그 짐승을 따른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그를) 따라가는 자”입니다(계 14:4).
자,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4절입니다.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계 13:4).”
짐승의 부활에 놀란 온 땅, 불신자들은 용에게 경배하고 짐승에게 경배를 합니다. 결국 이 따름은 따르는 대상에 대한 경배로 이어집니다. 천군천사들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께 경배를 돌리듯이, 이들은 용과 짐승에게 경배합니다. 물론 여기서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준다는 표현도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모방한 것이고, 지난 시간에 설명 드렸던 것처럼, 이 짐승에 대한 경배의 이유는 짐승의 도덕적 탁월함이 아니라 그가 소유한 강력한 힘에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만일 세상을 살아가면서 힘을 상징하는 돈과 물질과 기타 이런 류들을 추구하고 따라가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지금 짐승을 경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짐승과 그리스도는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점은, 분명 이 짐승은 정치적 힘을 가진 존재인데, 그것이 종교적 성격을 가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경배의 문제이고 예배의 문제인 것입니다.


2. 짐승의 활동 (5-8)
이제 5-8절에서는 짐승이 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데, 그 핵심은 주로 입으로 하는 신성 모독과 비방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자신이 경배를 받는 것입니다. 본래 이 짐승의 일곱 머리들에는 신성모독하는 이름들이 있었습니다(1). 이제는 또한 과장되고 신성모독하는 입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 입으로 42개월 동안 일할 권세를 받습니다. 여기 5,7절에는 받았다는 단어가 4번 나오는데, 이것은 짐승의 종속적 성격을 보여줍니다. 궁극적으로 이 단어의 주체는 용이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짐승은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기간 동안에(42개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만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이 신성 모독과 성도들을 이기는 일(7), 그리고 자신을 경배하도록 만국을 통제하는 권세(7-8)입니다.
먼저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해봅시다. 짐승은 이미 그 입이 사자의 입 같다고 했습니다(2). 이것은 다니엘 7:8에서 네째 짐승에게서 나온 작은 뿔이 ‘큰 말을 하였더라’는 말씀과 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라는 25절의 인유입니다. 다니엘 7:8의 ‘큰 말’은 ‘과장된 말’과 같은 의미로, 하나님의 이름을 악용하거나 비방하는 신성모독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한 두 번 하는 행위가 아니라 짐승이 받은 그 입으로 지속적으로 행하는 일입니다. 얼마 동안 그렇게 하는가 하면, 42개월입니다. 이것은 이방인이 거룩한 성을 짓밟도록 허용된 기간과 같습니다(계 11:2). 6절은 좀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비방하는 일을 밝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짐승의 신성 모독은 단지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장막은, 11:1-2에서 교회가 성전과 동일시되었듯이 여기서는 ‘하늘에 사는 자들’ 곧 성도들과 동일시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짐승이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비방하는 것 뿐 아니라, 교회를 비방하는 것까지도 신성 모독이라고 여기신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를 비방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이 짐승은 더 나아가 권세를 받고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는데(11:7 참조), 이 승리는 허락된 42개월에 국한됩니다. 여기서 짐승이 성도들과 싸워 이긴다는 말은 짐승이 무력으로써 성도들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의미입니다. 짐승에게는 그런 정치적 권세가 주어집니다. 이것은 다니엘 7:21를 인유한 것이기도 합니다. “내가 본즉 이 뿔이 성도들과 더불어 싸워 그들에게 이겼더니(다니엘 7:21).”
짐승이 받은 권세는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이지만, 짐승의 권세 아래 있는 이들은 짐승을 따르고 하나님을 반대하며 성도들을 박해하는 믿지 않는 만국입니다. 짐승은 시간적 한계(42개월) 뿐 아니라 공간적 한계도 가집니다. 짐승은 비록 범세계적으로 다스릴 권세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오직 자기를 경배하는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만 구속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요한계시록 13:8).”
짐승이 다스리고 짐승을 경배하는 자들은 ‘땅에 사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또한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들입니다. 먼저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의 이름이 기록된 명부일텐데, 이 생명책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바로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 사역이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이라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해석이 갈리는 부분은, ‘창세 이후로’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정확하게 ‘창세로부터’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 말이 창세로부터 생명책에 기록을 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창세로부터 어린 양이 죽음을 당했다는 것인지 문법적으로 명확하지 않습니다. 한글개역개정역은 ‘창세로부터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의미로 번역했습니다. ESV, NASB, RSV 등이 이 해석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KJV, NIV, NLT 등은 헬라어 구문론의 순서대로,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렇다면, 창세로부터 있었던 일은 생명책에 구원받을 자들의 이름이 기록된 일입니까, 어린 양의 죽음입니까? 만일 요한계시록 17:8을 근거로 본다면, 이것은 창세로부터 이름이 기록된 것을 가리킨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사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놀랍게 여기리라(요한계시록 17:8).” 그리고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고 한 에베소서 1:4을 보더라도, 이렇게 읽는 것은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KJV, NIV, NLT 등이 왜 반대로, 어린 양께서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하셨다고 표현하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헬라어로 읽을 때 그렇게 읽는 것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읽는다면,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음은 영원한 작정(구속언약) 안에서 선언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무시간적 영원의 개념 속에서는,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창세 전에 죽임을 당한 것으로 여겨졌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이 그것을 강조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한 20여년 전 쯤, 이 구절이 이렇게 읽힐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정말 소스라치게 놀랐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창세 전에 이미 죽임을 당한 것으로 여겨지셨기에, 나도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을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정말 무섭고도 놀라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렇게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아니한 사람들은 결국 짐승에게 경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짐승의 세력 앞에 놀라고 굴복하고 따르고 경배하는 자들, 곧 불신자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3. 성도들의 승리 (계 15:2; 12:11; 13:10; 렘 15:2)
그러나 우리는 성도들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온 세상이 짐승을 따르고 짐승을 경배할 때, 성도들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궁극적으로 성도는 짐승을 이긴 자들입니다. 15:2입니다.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요한계시록 15:2).”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이 성도입니다. 또 우리가 12장에서 본 바, 성도는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짐승)를 이겼습니다.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요한계시록 12:11).”
성도들의 이김은 죽임을 당함으로써 이기는 이김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버리느니 자신들의 생명을 버리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들의 승리는 십자가에서 주님이 얻으신 승리와 동일한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수신자들의 주의를 집중시킨 다음, 10절에서 매우 중요한 것을 언급합니다.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요한계시록 13:10).”
이 구절은 에레미야 15:2을 인유한 것입니다.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죽을 자는 죽음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지니라 하셨다 하라(예레미야 15:2).”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 말씀을 했을 때, 죽고 기근을 당하고 칼을 받고 포로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구절을 가지고 와서, 그 의미를 완전히 바꾸어 사용합니다. 본문에서는 사로잡히고 칼에 죽는 것은 불순종 때문이 아니라, 신실한 믿음과 순종의 결과입니다. 성도들은 믿음과 순종으로 인내한 결과, 사로잡힘과 죽임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성도들은 그들의 선배요 순교자인 버가모 교인 안디바와 같이 목숨을 빼앗길지언정(계 2:13) 신앙과 가진 증거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본문은 믿는 성도들에게 핍박과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냉혹한 현실이 주어질 것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4. 교훈과 적용
이제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적용적 관점에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로 우리에게 영적 싸움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신앙 생활을 잘 하고 싶습니까? 그래서 결심을 하셨습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생각과 기대처럼 잘 되고 있습니까? 기도를 하기로 결심했는데 그것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이 모든 일에서 여러분의 영적 삶을 무너뜨리는 원수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공부는 하기로 결심하면 할 수 있습니다. 운동도, 기타 여러 영역에서 우리는 결심하고 그것을 성실히 행하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일, 신앙의 영역에는 다른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말씀과 기도 안에서 하루를 잘 살았다고 해도, 가만히 와서 여러분의 경건을 무너뜨리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아무도 없고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빈터에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전쟁터에서 집을 짓고 있는 것임을 명심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싸움이기 전에, 하나님의 싸움입니다. 그랜트 오즈번의 말입니다. “짐승과 맞서 싸우지 말라. 자기 백성을 위해 전쟁에서 승리하시는 분은 여호와시다. 짐승과 싸우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충성되게 살고 증언할 때 인내하라. 싸움은 주님께 맡겨라.”
이 말은 영적 싸움을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짐승과 단순히 맞서 싸우는 게 아니라, 우리는 믿음으로 신실하게 살아가고 복음의 증인으로써 인내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저 개인의 경건을 유지하는 수준을 말하지 않습니다. 교회와 성도는 자신이 세상에 복음의 증인으로 보냄 받은 증인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는데 인내와 믿음이 요구됩니다. 성도가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인내와 믿음으로 감당하는 것은 짐승을 대적하는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또한 이 싸움은 그리스도의 싸움입니다.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하심으로써 이 싸움의 승패를 결정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차매 여자에게서 나심으로써(갈 4:4) 이 땅에 성육신하여 오셨고 십자가에서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모든 승리는 그리스도께 돌려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으로서 봉인된 책의 일곱 인을 떼실 자격을 가지셨고, 또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들을 유효하게 만드셨습니다. 이 싸움은 마지막 날 아마겟돈 전쟁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어린 양의 승리로 결정지어진 전쟁입니다.
끝으로 경배의 대상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경배하십니까? 여러분의 경배의 대상은 누구 혹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를 경배합니까, 아니면 용과 짐승을 경배합니까? 어떻게 이것을 알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말이 아니라, 여러분이 따르는 대상으로써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돈과 권력을 따른다면, 여러분은 짐승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힘을 상징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돈과 물질이 그렇고, 정치적 권력이나 이름도 다 세상의 힘을 상징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추구하고 따라간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경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짐승은 힘으로써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힘이 아니라 진리를 따릅니다. 성도는 짐승이 아니라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그가 가진 믿음 때문에 때로는 세상 힘의 논리와 권력에 의해 사로잡혀가거나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시기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매일 은혜를 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