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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54). 땅에서 올라온 또 다른 짐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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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54). 땅에서 올라온 또 다른 짐승

요한계시록 13:11-18, 마가복음 13:6, 22, 고린도후서 11:14-1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10-25

말씀내용
우리는 13장 전반부에서 용의 조력자로 바다에서 나온 첫번째 짐승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짐승은 교회를 박해하는 ‘국가-정부’가 가진 무력을 사용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용과 짐승을 경배하게 하는 존재였습니다. 이제 13장 후반부인 오늘 본문에서는 땅에서 올라온 두번째 짐승을 보게 되는데, 이 짐승은 주로 미혹하고 속임으로써 첫째 짐승을 경배하게 하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용과 두 짐승은 악의 삼위일체를 구성하고 활동하게 됩니다. 이들의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용과 짐승을 경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24)”고 주님게서 말씀하신 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바로 오늘 말씀의 둘째 짐승과 관련됩니다. 램지 마이클(J. Ramsey Michael)은 “두 짐승의 관계는 국가와 국가-종교와의 관계”라고 잘 지적하여 말했습니다. 이 지적은 오늘 본문이 우리가 사는 현 시대에 매우 적실성 있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1. 둘째 짐승은 거짓 선지자다(11; 5:6; 마 7:15; 계 12:9; 16:13; 19:20; 20:10; 막 13:6,22; 고후 11:14-15)
요한은 11절에서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봅니다. 그 짐승은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 처럼 말을 하더라”고 했습니다. 이 짐승이 ‘어린 양’같은 모양이라는 점은 그리스도를 흉내 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두 뿔이 있다는 것도 일곱 뿔을 가지신 그리스도에 대한 모방임을 보여줍니다(5:6). 이것은 주님께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태복음 7:15).”고 경고하신 말씀을 기억하게 합니다. 그들의 본성은 속이는 것입니다.
이 짐승은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내용에 있어서는 성령님을 모방한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라고 하셨듯이(요 14:16), 여기서 요한은 ‘또 다른 짐승’을 봅니다. 바다에서 나온 첫째 짐승이 그리스도를 모방했듯이, 땅에서 올라온 이 짐승은 보혜사 성령님을 모방합니다. 이 짐승이 용처럼 말을 하더라는 것은, 사탄 곧 용의 유혹하고 미혹하는 말을 반영합니다. 12:9을 다시 보지요.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요한계시록 12:9).”
또 이 짐승은 첫째 짐승에게서 받은 권세를 가지고(12,14) 자신을 높이는 대신,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는 일을 합니다(12). 이점도 성령님께서 그리스도를 높이시는 것과 비슷합니다(요 15:26).
이 짐승의 존재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그가 다른 본문들에서 거짓 선지자라고 불린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세 구절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계 16:13).”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계 19:20).”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 20:10).”
이 세 구절은 이 짐승의 존재가 거짓 선지자의 역할로 나타난다는 것을 확증해주기에 충분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주님께서도 미리 경고하신 바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막 13:6, 22).
첫째 짐승이 교회 밖에서 무력으로 교회를 압박하고 박해한다면, 둘째 짐승은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와서 용과 짐승을 경배하는 것이 얼마나 신앙적 행위인지, 신앙에 위배되지 않는 것인지를 속여 말함으로써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교회 밖의 상대는 비교적 식별하기 쉽지만, 교회 안에서 거짓된 가르침으로 미혹하는 존재는 가려내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둘째 짐승은 용의 형상이나 짐승의 모습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양처럼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게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린도후서 11:14–15).”
실제로 거짓 선지자나 거짓 교사들은 이런 방식으로 사도들의 시대에도 교회에 가만히 들어와서 사람들을 미혹했던 것이고, 그것은 모든 교회 시대에 그러했으며, 지금도 물론 마찬가지입니다. 그레고리 비일은 말합니다. “참 선지자는 사람들을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이끌지만, 거짓 선지자는 국가(그리고 나아가 마귀)를 경배하도록 이끈다.” 이 말은 첫째 짐승이 국가(정부)의 힘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짐승을 섬기게 몰아가는 반면, 둘째 짐승은 경배의 대상을 국가로 삼게 함으로써 종교의 세속화를 만들어낸다는 말입니다. 바다에서 나온 짐승이 교회를 박해하는 모든 정치 세력을 대표한다면, 거짓 선지자(땅에서 올라온 짐승)는 스스로 신격화를 조장하거나 종교나 이념을 전파하는 자들이고 거짓 종교나 이단 사이비 등을 가리킬 것입니다. 그리고 1세기 말 요한계시록이 쓰여지던 당시, 이 두 짐승은 힘으로 황제 숭배를 강요하던 로마 제국과 황제 숭배가 신앙을 배반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 거짓 선지자들 안에서 나타났던 것입니다.


2. 둘째 짐승의 목적: 처음 짐승을 경배하게 함(12-14; 요 16:14)
12절은 이 짐승이 하는 일을 명확하게 보여주는데 그것은 처음 짐승을 경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시리라는 주님의 말씀과 같이(요 16:14) 둘째 짐승은 처음 짐승을 경배하게 함으로써 처음 짐승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합니다. 다시 한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고 함으로써, 처음 짐승의 부활 패러디 소재를 사용하고 있고 이것은 14절에서도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이라는 말로써 반복해서 강조됩니다. 사도들의 복음 증거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강조했던 것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입니다.
둘째 짐승인 거짓 선지자가 처음 짐승을 경배하게 하는데 사용하는 주된 도구는 이적입니다. 12절은 “그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라고 했는데, 13-14절에 보면 이 권세는 주로 이적에 행하는 권세입니다.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요한계시록 13:13–14).”
그는 큰 이적을 행합니다. 이 말은 모세가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을 통해 하나님의 이적을 보여주었던 일을 모방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출 4:17,30). 그리고 불이 하늘에서 땅에 내려오게 하는 이적은 갈멜산의 제단에서(왕상 18:36-39) 그리고 아하시야 왕이 자기를 잡으라고 보낸 군사들을 향해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했던 엘리야 선지자의 이적(왕하 1:10-14)을 모방한 것입니다. 이 거짓 선지자는 이적을 통하여 구약의 양대 선지자인 모세와 엘리야를 모방함으로써 자신을 믿게 합니다. 여기 ‘사람들 앞에서’라는 말은, 둘째 짐승이 거짓 삼위일체의 선전 책임자로서 사람들을 현혹하는 존재임을 강조해서 보여줍니다.
이제 이적을 행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한 둘째 짐승은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고 말합니다(14). 이 우상은 처음 짐승을 위한 우상이기도 했지만, 15절에 보면 ‘그 짐승의 우상(형상)’입니다. 결국 거짓 선지자가 하는 일은 우상을 하나님의 교회 안에 가져와서 그 짐승의 우상을 경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1세기 말에는 이미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소재했던 그 도시들마다 황제를 신으로 모시는 신전들이 하나 이상씩은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는 황제 숭배가 신앙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 둘째 짐승은 교회 안에 우상을 들여다 놓는 일을 하게 됩니다.


3. 죽이고 압박하여 짐승의 표를 받게 함(15-17a)
이제 처음 짐승을 경배하게 하려는 둘째 짐승인 거짓 선지자의 행위는 절정으로 치닫게 됩니다. 15절은 이 거짓 선지자가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1세기 말에 널리 유행했던 마술사들의 복화술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 귀신의 실제적인 활동을 암시합니다. 생기를 받은 그 짐승의 우상은 이제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라.”고 말함으로써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성도들을 죽이게 합니다.
이 죽음의 위협 앞에서 많은 사람이 굴복하여 짐승의 우상을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둘째 짐승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할” 것입니다(16). 여기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은 인간 사회 전체를 표현하는 수사적 표현입니다. 실로 사회 각계 각층의 많은 사람을 끌어들여서 처음 짐승을 경배하게 할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짐승은 사람들이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합니다. 이 표는 짐승의 표인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한 백성의 이마에 인을 치시는 것을 모방한 것입니다(계 7:3-8). 이 짐승의 표는 종말론에 관심을 가지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끈 주제입니다.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지 않는다면 매매를 할 수도 없도록 경제 활동을 압박함으로써 둘째 짐승은 많은 사람이 짐승의 표를 받게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씀하는 짐승의 표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먼저 이 표가 하나님의 인에 대한 대응이라는 점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은 하나님의 보호를 의미하고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짐승의 표는 짐승의 보호를 받는 것을 의미하고 짐승에게 속한, 짐승을 섬기는 백성이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짐승의 표를 받지 않는다면, 매매를 할 수 없다는 것은, 실제로 1세기 말의 소아시아 성도들이 경험하던 바였습니다. 이미 일곱 교회에게 주시는 편지에서 우리가 여러 차례 살펴본 바와 같이, 당시의 시민들은 상인 조합이나 장인 조합과 같이 경제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조직들에 속해 있었는데, 거기서는 1년에 한번씩 황제 숭배 의식이 행해졌고, 이 의식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 조합 안에서 정상적인 경제 활동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저 1년에 한 번 형식적으로 황제 숭배 의식에 참여하기만 하면 모든 경제 활동을 보장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많은 성도들에게 유혹이 되었습니다. 교회 안의 거짓 선지자들은 이렇게 해도 신앙을 위배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짓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짐승의 표는 1세기 말의 성도들에게는 어려운 문제가 아닌 실제적이고 분명한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이 말씀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 짐승의 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한때 이것을 바코드라고 하거나 신용카드를 의미한다고 말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는 미국에서 사람의 의료정보를 미세한 칩에 저장하여 사람의 팔에 심어 놓는다는 베리칩(VeriChip)의 개념이 나왔을 때에도 이것을 짐승의 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이 가시적이 아닌 것처럼, 짐승의 표도 가시적인 표식은 아닐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다만 짐승의 우상을 섬기고 그것을 신앙적으로 정당화하며 따르는 무리들이 바로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 중 다수는 둘째 짐승인 거짓 선지자들과 함께 교회 안에 머무르며 신앙을 자처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가장 두렵게 경계해야 할 문제입니다.


4. 짐승의 수 666 (17b-18; 22:4; 14:1)
17절 하반절은 이 표가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고 말씀합니다. 짐승의 표가 짐승의 이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성도들이 그 이마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갖고 있다고 한 말씀처럼(22:4)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이 그 이마에 짐승의 이름을 갖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본문에 이어지는 14:1에서 바로 성도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는 말씀도 이 의미를 잘 보여줍니다. 인이나 표를 받았다는 것이나, 그 이름이 이마에 쓰여져 있다는 것은 그들이 누구에게 속하였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짐승의 이름 보다 ‘그 이름의 수’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18절에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니라”고 했습니다. 소위 666이라는 짐승의 수가 여기에 나옵니다.
고대에는 각 알파벳에 숫자를 부여해서 숫자를 표현하는 방식이 있었는데, 이것을 ‘게마트리아’라고 합니다. 많은 성경 해석가들이 666을 해석할 때 게마트리아의 방식으로 해석을 하려고 시도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네로 카이사르’를 히브리어로 음역하고 그것을 게마트리아로 풀면 바로 666이 되므로 짐승의 표 666은 네로 황제를 가리킨다고 해석을 한 것입니다. 네로가 교회를 박해한 최초의 로마 황제로서 대표성이나 상징성을 가지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 해석의 난점은 초기의 교부들 중에서 이런 해석을 한 사람들이 없을 뿐 아니라, 카이사르에 대한 히브리어 음역도 어떤 알파벳으로 표현할지에 대해서는 일치하지도 않습니다. 게마트리아를 적용하여 나중에는 히틀러나 미국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가리킨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만일 666을 게마트리아의 방식으로 해석해야 한다면, 그 해석의 가능성은 매우 넓고 임의적인 방식으로 끼워 맞추는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방식이 퍼즐을 푸는 것처럼 흥미를 유발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요한이 의도한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666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요한계시록은 상징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숫자의 상징도 적지 않게 사용됩니다. 가령, 일곱 심판의 시리즈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심판의 완전함을 7이라는 숫자로 표현한 것을 우리는 압니다. 7은 완전을 의미하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께만 해당하는 숫자입니다. 그러나 6은 완전에 이르지 못하는 불완전함을 의미합니다. 게다가 666은 삼중의 6으로 삼위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모방하려는 짐승의 시도를 잘 보여줍니다. 그래서 윌리엄 헨드릭슨은 666을 ‘실패에 대한 실패에 대한 실패’라고 말합니다. 거의 7에 이르는 것같이 보이지만, 자신을 경배의 대상인 하나님으로 삼으려고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결국에도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또 18절은 이 666이 ‘사람의 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헬라어 원문에서 사람은 정관사가 없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수’가 아니라 그냥 ‘사람의 수’라고 읽을 수 있는데, 이는 어떤 개인을 특정하려는 의도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짐승의 수요, 사람의 수인 666은 네로 황제와 같은 특정인을 가리키기 보다, 하나님께 미치려고 하나 미칠 수 없는 불완전함, 실패의 반복, 즉 사탄의 삼위일체가 잠시 권세를 행사함으로써 성공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궁극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런 메시지를 1세기 말의 성도들과 모든 시대의 성도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5. 교훈과 적용 (18; 단 11:33; 12:10)
이 말씀의 결론으로, 우리는 18절에서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보라”는 말씀을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와 총명은 666이 가리키는 사람을 찾아내는 지혜나 총명이 아닙니다. 둘째 짐승,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거짓 선지자로서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와서 삼위 하나님을 모방하고 성도들을 미혹하는 것을 분별해내는 지혜와 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참되신 하나님의 역사와 거짓된 마귀의 역사를 분별하는 지혜와 총명입니다. 참 신자들이 어지러운 시대를 인내와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는 참 하나님과 거짓 하나님, 참 경배와 거짓 경배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니엘이 자신의 시대에 꿈과 환상을 해석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였던 지혜와 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단 11:33; 12:10).
여러분은 거짓 선지자인 둘째 짐승을 잘 분별하고 계십니까? 둘째 짐승은 1세기만이 아니라 지금도 활동하고 있고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는 더욱 특별한 방식으로 활동할 것입니다. 마이클 윌콕은 이 본문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두번째 짐승은 현대 용어로 이데올로기(그것이 종교적이든, 철학적이든, 아니면 정치적이든 간에)를 말하며 이것이 하나님과 관계없이 조직된 인간의 사회 구조에 ‘생명을 불어넣어준다’” 무서운 말이 아닙니까?
로버트 마운스도 그의 주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용, 바다 짐승 그리고 땅의 짐승은 사탄의 삼위일체로 정치적인 세계에 잠입해 들어와서 우리의 경배의 방향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서 보이는 권세로 바꿔 버리고 또한 우리를 속여 자기 만족이라는 가시적인 결과를 가져다 주는 종교나 신념 체계를 믿게 한다.”
이런 언급들은 오늘날 한국사회 안에서 우리 기독교회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지 않습니까? 국가와 이데올로기 또는 진영 논리를 거의 신앙의 수준으로 만들어버리고 그것을 설교하고 그것을 하나님을 섬기는 도리라고 여겨 하나님을 섬기듯 그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또 그 일을 설교의 행위로써 부추기는 목사들도 많습니다. 이것은 과연 지혜와 총명으로 짐승의 수를 세어보고 분별하라는 주의 말씀을 깨닫고 순종하는 것이 맞습니까?
나찌 독일에서 히틀러에 대하여 열광하는 것을 신앙적으로 승인해주었던 독일의 교회 지도자들이나, 일제 때 신사참배를 합당한 신자의 도리라고 가르치고 행하게 했던 당시의 교회 지도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또는 북한 공산당이 인간을 신으로 경배하게 했던 지난 70년의 역사만이 이 둘째 짐승의 역사를 보여준다고 생각할 것도 아닙니다. 지난 역사, 남의 역사에서는 보일지 모르지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이 시대에 교회와 관련하여 일어나고 있는 일을 식별하고 분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땅에서 올라온 짐승인 거짓 선지자의 역사는 분별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거짓 선지자는 양의 옷을 입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혜와 총명이 중요합니다. 말씀 위에 바로 서서 이 모든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분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 처음 짐승을 경배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할 뿐 아니라,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자들은 매매 행위조차 할 수 없게 할지라도, 분별한 성도들은 인내와 믿음으로 타협하지 않고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로버트 마운스의 말대로, “반쪽짜리 그리스도인들은 진심으로 믿지도 않는 대의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반쪽짜리 그리스도인입니까, 아니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성도입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사 참과 거짓을 분별하게 하시고 인내와 믿음으로 천로역정을 완주하는 복된 은혜를 더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