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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19). 세상과 타협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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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19). 세상과 타협하는 교회

요한계시록 2:18-2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01-26

말씀내용
두아디라 교회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처음보다 나중이 나은 교회였습니다. 주님은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들의 사랑과 믿음, 섬김과 인내는 세월이 흘러가면서 점점 더 나아졌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 책망의 채찍을 드십니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고 말씀하십니다(20). 이 책망의 내용은 두아디라 교회에 대한 칭찬을 상쇄할 만큼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돈에서 약점을 드러냈고, 물질의 영역에서 적당한 타협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교회에는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자 한 자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사랑과 믿음, 그리고 섬김과 인내의 영역에서 믿음을 지키고 신실했던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교회는 이런 가르침을 수용했던 것입니다.


1. 이세벨과 그녀의 가르침(20)
주님은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20). 20절 하반절을 보면, 그녀는 주의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습니다. 이 표현은 사실 우리에게 낯설지 않습니다. 버가모 교회에는 발람의 교훈 즉,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는데, 니골라 당은 교회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했고 행음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이세벨의 행위를 지적하는 말씀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일 이세벨이 니골라 당과 동일한 존재를 가리킨다면, 주님께서 굳이 다른 이름으로 부르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이 어떤 존재를 가리키며 그녀의 가르침이 무엇이었는가를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세벨이라는 이름은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여인의 이름입니다. 북왕국의 타락한 왕조 중에서도 가장 타락했던 오므리 왕조의 두번째 왕 아합의 아내가 이세벨이었습니다. 그녀는 시돈 왕 엣바알의 딸로 아합의 아내가 되어, 가증스러운 우상숭배를 이스라엘 안에 가지고 들어온 여인입니다. 그녀는 남편 아합을 바알 숭배자로 만들었습니다. 열왕기상 16:30-31입니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성경은 이 일이 이세벨의 충동으로 인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왕상 21:25).”아합의 탐욕을 채워주기 위해 거짓 증거로 나봇을 죽이고 그 기업을 도둑질하였습니다(왕상 21:1-16). 이것 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선지자들을 죽였고(왕상 18:4-13) 엘리야까지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수백 명을 먹여 살리기까지 했습니다(왕상 18:19). 명색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왕궁에서 말입니다. 그녀가 아합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아달랴는 남왕국 유다의 왕 여호람과 결혼한 뒤, 모반을 일으켜 정권을 잡고 우상숭배의 암흑기 6년을 통치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니 이세벨은 구약 역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이름인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점에서, 주님께서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이라고 언급하실 때, 이세벨은 그 자칭 선지자의 실명이라기 보다는 그 행태가 구약의 이세벨을 연상시키는 것이었기에, 붙여진 별명이었을 것입니다. 그녀를 ‘자칭 선지자’라고 지칭한 점은, 그녀가 말에 재주가 있는 영악한 여인이었음을 보여주는데, 그녀는 하나님의 뜻을 해석해 준다고 사람들을 속여 이교의 가르침과 절충하는 대가로 번영을 약속했을 것입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도 그랬거니와, 오늘날에도 이런 이세벨 같은 자들은 적지 않습니다.
이것은 두아디라 교회가 처해있던 사회적 환경과 분위기와 깊이 연결되어 있는 문제였습니다. 이미 설명드렸듯이, 두아디라 시의 중심에는 길드가 있었습니다. 상인과 장인 길드가 씨줄과 날줄처럼 촘촘히 시민 생활을 연결시켜 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길드는 이교의 종교 이식에 참여하는 것을 하나의 회원 자격의 기준처럼 여기곤 했습니다. 이런 길드가 시민 생활 특별히 경제 생활을 좌우하는 도시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방 신에게 드려지는 길드의 공동 식사에 참여하는 것 까지는 괜찮지 않겠는가 하는 일종의 타협점에 서려는 유혹을 받았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만일 이것 마저 거절한다면, 그들은 사회적 고립과 경제적 고통을 고스란히 겪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의 가르침은 바로 이 자리를 파고 들었습니다.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며 믿는 자들이 굳이 길드의 ‘공동 식사’라는 단순한 요구까지 거부함으로써 경제적 궁핍을 겪을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어쩌면 그녀는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8:4에서 하신 말씀에 근거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전 8:4).” 그렇다면 그녀는 모든 이단들이 하는 것처럼, 성경 말씀을 가지고 자기의 논리를 만들어내는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타협을 매우 준엄하게 책망하십니다.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라고 말입니다.
아마 이세벨은 두아디라 교회에서 존경받는 위치와 지위를 누리던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어떤 사본에는 20절 말씀에,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네 아내, 이세벨”이라고 쓰여진 사본이 있습니다. ‘네 아내’라는 말이 더해진 것입니다. 만일 이 설명이 옳다면, 그녀는 두아디라 교회의 핵심 지도자 중 한 사람의 아내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녀와 그녀의 가르침을 무시하긴 쉽지 않았을 겁니다. 어쨋든 두아디라 교회는 그녀를 용납했습니다. ‘용납함이니’라고 할 때, 이 말은 ‘관용과 지원을 내포하고, 해로운 가르침에 저항하여 적극적 대응을 하지 않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 시대의 다원주의적 태도와 닮은 태도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비진리에 대한 관용을 책망하십니다. 그녀는 교회를 꾀었습니다. 꾀었다는 말은 요한계시록에서 사탄의 대리자들이 하는 전형적인 행위입니다. 이점에서 이세벨은 음녀 바벨론과 흡사합니다(계 18). 바벨론은 온 세상을 미혹하게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세벨이 행음하게 했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이해하기 보다 경제적 타협—바벨론의 방식으로 살아가라는—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음녀의 죄에 참여하지 말라고 요구하십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구체적으로 두아디라 교회에게 있어서, 이세벨이 제시한 타협은 교회에서의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세상에서는 세상 방식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길드에 참여하여 물질적 손해를 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이렇게 벌어들인 수입에서 더 많은 헌금을 함으로써 자신들의 찜찜한 타협을 정당화하고자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세벨의 메시지는 복음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녀의 메시지는 적당히 타협하면서 신앙을 유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두아디라 교회에서는 그녀의 메시지가 먹힐 수 있었습니다. 모든 시대에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입장은 분명합니다.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고전 10:19-22).”
주님께서는 이세벨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21a).” 주님께서는 사도 요한이나 요한의 동료를 통해 이세벨의 행동을 책망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21b).” 요한계시록에서 우리는 ‘회개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몇 차례 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멸망 받을 죄인의 뚜렷한 특징입니다.


2. 이세벨과 추종자들에 대한 심판(22-23)
이제 주님께서는 회개의 기회를 받았음에도 회개하지 않은 이세벨과 그의 추종자들을 향한 심판의 경고를 발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22-23).”
주님은 18절과 23절에서 묘사하고 언급한대로, “그 눈이 불꽃 같아”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선지자 예레미야가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라고 하신 말씀을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렘 17:10). 신자가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의로우신 분노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 경외심을 갖고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너무나 중요합니다.
교회의 주인이고 머리 되신 주님은 불꽃 같은 눈으로 교회를 안팎으로 살피시면서, 교회의 순결과 보존을 지키십니다. 우리 눈에는 다 무너졌고 다 더럽혀진 것 같을지라도, 주님은 당신의 남은 자를 지키시고 붙들어 주사 참된 교회를 지켜 내신다는 것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주님은 잘라내야 할 자들을 잘라 내십니다. 22절에서 주님은 이세벨을 침상에 던지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침상은 고통과 질병의 은유적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큰 환난에 던져질 것입니다. 이세벨의 자녀들은 죽이실 것입니다. 이 무서운 말씀 속에서도 우리는 약간의 희망을 봅니다. 이세벨에게는 회개의 기회가 지나갔지만,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에게는 ‘회개하지 아니하면’이라는 단서가 붙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십시오. 그들에게는 여전히 회개의 기회가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결국 물질적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타협한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는, 사실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자비로운 메시지인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에서 이세벨을 따라 세상과 타협한 사람들을 향한 이 심판의 경고는 듣고 돌이켜 회개하라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3. 신실한 남은 자들을 향한 권고(24-25)
두아디라 교회의 상당수가 이세벨을 용납했고 그녀의 가르침을 따라 세상과 타협하는 길을 걸었지만, 여전히 신실한 남은 자들은 있었습니다. 이제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24-25).”
이들은 이세벨의 교훈을 받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이세벨의 가르침이 1세기 말의 이단, 영지주의의 가르침과도 섞여 있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세벨의 가르침에는 이런 논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믿는 자들이 자기 능력의 한계를 정확히 알고 승리하려면 먼저 사탄의 요새에 들어가야 한다. 믿는 자들의 영성은 몸에 행해진 일로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이교도의 길드 축제에 참여한다고 해서 신앙과 영혼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악은 은혜의 본질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라.”
얼마나 그럴 듯한 가르침입니까? 이세벨은 우상 숭배에 참여하는 것을 이런 교묘한 논리로 정당화했을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사용하되 그것을 특유의 논리로 왜곡하여 가르치는 모든 가르침들은 ‘사탄의 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성경이 명백하게 가르치지 않는, 비본질적인 것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나 지식들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탄의 깊은 것’이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2장 10절에 비슷한 표현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여기서는 ‘하나님의 깊은 것’이 나옵니다.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여 아십니다.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도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사탄의 깊은 것을 아는 자들은 사탄의 자녀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경험하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두아디라에 참으로 경건한 주의 자녀들은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라, 내 영혼과 내 신앙에는 하등 영향을 주지 못하므로 나는 우상 숭배의 의식과 식사에 참여해도 무방하다는 생각으로 그 행음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들은 사실 자신들이 받은 그 복음의 진리를 굳게 붙잡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까지 붙잡았던 그 복음의 진리를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고 권면하십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더 이상의 짐을 지우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이미 그들은 충분히 자신들이 당한 믿음의 싸움을 잘 싸우고 감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26-28)
이제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의 마지막 부분에 왔습니다. 그것은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상급의 약속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이기는 자는 누구입니까? 이세벨의 가르침에 따라 세상과 타협하여 물질적 손해를 보지 않고 사는 삶을 거절하고, 복음의 진리를 굳게 잡고 믿음의 좁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이기는 자입니다. 이세벨의 달콤한 가르침을 거절하고 세상과의 타협을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손해와 불이익을 당할지라도, 주님이 금하신 길을 걸어가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돈과 주님을 모두 사랑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주님은,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약속하십니다. 이기는 자는 철장(철막대기)을 가지고 이세벨과 더불어 간음한 자들, 곧 이세벨의 자녀들을 질그릇 깨듯 부술 것입니다. 마치 주님께서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신 권세로 다스리시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날마다 세상 권세 앞에, 황제의 권력과 로마 제국의 권력 앞에서 질그릇 처럼 깨어지기를 반복하는 신실한 성도들에게 이 약속은 얼마나 시원한 약속이었을까요? 그날에 모든 것이 역전될 것입니다. 성도들이 철장을 가지고 세상을 통치하고, 이세벨과 더불어 세상과 타협한 자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의 다가 아닙니다. 주님은 새벽별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새벽별은 주님 자신을 가리키는 상징입니다. 요한계시록 22:16을 보지요.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또 새벽별(금성)은 고대 세계와 로마에서 주권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새벽별을 주시겠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만국을 다스린다는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증해 주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기는 자만이 이 영광스러운 메시야의 통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언제 우리는 이 메시야의 통치에 참여하게 됩니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것은 그저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는 질문이 아닙니다. 1세기에 이 편지를 받았던 두아디라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 질문은 폐부를 찌르고 뼈를 파고 드는 실존적인 질문이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기는 자에게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고 새벽별을 주겠다”고 하실 때, 그들은 날마다 당하는 고난 속에서 이렇게 물었을지 모릅니다. “언제요? 그날이 언제인데요? 주님?”
그날은 물론 결정적으로는 주님이 재림하실 날입니다. 그날에 완전한 그리스도의 통치가 실현되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통치는 사실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향한 율법의 형벌과 저주를 종식시키셨을 때, 이미 메시야의 통치는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이 말씀대로 주님께서 이미 다스리고 계십니다. 지금 온 세상을 우리 주님께서 통치하십니다. 여기에 십자가의 역설이 있고 신비가 있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롬 8:36).” 이것이 1세기 성도들이 처한 자리요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둘러싼 앞과 뒤의 구절을 보십시오. 로마서 8장 35절과 37절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35)…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 얼마나 놀라운 선언입니까? 이것은 지금, 바로 지금 그리스도께서 주권자로서 통치하고 계시고 우리가 그와 함께 통치하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신자가 현재 이 세상에서 누리는 승리와 통치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결정적 승리)까지 생애 전체에 걸쳐 하나님께 충성하심으로써 이기셨던 그 방식으로 이김에 동참하는 것입니다(요 16:33; 계 5:5~6).
이것은 역설입니다. 여러분이 타협하지 않고 죄를 이기려 한다면 그리고 이긴다면, 여러분은 세상에게 정복당하고 밟히며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죄를 이긴다면 여러분은 세상으로부터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끝까지 붙잡고 믿음으로 살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여러분이 세상에게 정복을 당하고 멸망을 당하고 죽임에 이를지라도, 그것은 여러분의 승리가 될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똑같이 겪으셨듯이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협하고 적당히 타협하고 살라고 유혹하는 이 세상에서 이기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충성하다가 고난의 자리에 비참하게 던져진다면, 그것이 이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굳게 붙잡았기 때문에 불이익과 손해를 겪는다면, 그것이 이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 이김은 우리의 죽음으로써 완성될 것입니다.


5. 타협하지 않는 성도들(29)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정리해보지요. 여러분은 무엇을 들으셨습니까? 1세기 말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은 오늘 21세기를 사는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 첫번째 중요한 교훈은, 다른 복음, 거짓 진리를 용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형태의 다른 복음과 싸우십시오. 거짓 진리를 용납하지 마십시오. 오늘날 우리는 관용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Everything is okay.” 또, “모든 것이 가하다”고 말하는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어놓으신 모든 경계선과 구별이 무너진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아닌 것에 대해서 ‘No!’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경건을 무너뜨리는 유해한 모든 가르침에 대해 적극적인 대항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 자신이 진리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있어야만 하고 그 말씀을 바르게 알고 깨닫고 굳게 신뢰해야만 합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모든 타협의 유혹으로부터 지켜주고, 다른 복음과 거짓 진리를 대항할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를 어지럽혔던 이세벨의 가르침은 오늘날 21세기에 번영신학의 옷을 입고 다시 등장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이세벨을 용납했듯이, 오늘날 너무나 많은 교회가 이 번영 신학을 용납했습니다. 영원한 천국의 복락을 보장받고, 이 세상의 번영도 보장해주는 신학, 주님이 말씀하신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말하는 거짓 복음을 너무나 많은 교회가 용납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물질을 추구하는 자신들의 욕망을 채워주는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가짜 복음은 인간이 가진 쇠성에는 매력적으로 보이고, 그래서 받아들여집니다. 이 번영신학의 복음으로 인해 기독교는 십자가는 없고 영광만 있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는 말씀을 알지 못하는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이 번영신학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지는 않았습니까? 여러분의 믿음은 안전합니까? 여러분 중에 만일 자신의 믿음이 이 바이러스에 조금이라도 감염이 되었다고 느낀다면, 이 주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상상할 수 없는 큰 환난 가운데 던져질 것입니다. 우리 모두 참으로 이기는 자가 되기를 사모합시다. 어떤 불이익과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그리스도께 충성함으로써 이기는 자가 됩시다. 십자가를 지나 영광에 이르신 우리 구주 예수님을 따라갑시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십시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