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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20). 거의 죽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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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20). 거의 죽은 교회

요한계시록 3:1-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02-02

말씀내용
우리는 이제 다섯 번째 교회인 사데 교회에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상고하는 데까지 왔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와 함께 가장 혹독한 책망을 받은 교회가 사데 교회입니다. 우리는 1세기 말 소아시아에 소재했던 교회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메시지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1. 사데 그리고 1세기 말의 사데 교회 상황
사데는 두아디라에서 남동쪽으로 50-60킬로미터에 위치한 고대 도시였습니다. 주전 1200년 경에 세워진 고대 왕국 리디아의 수도로서, 3면이 460미터 정도의 절벽으로 되어 있는, 트몰루스 산에 세워진 천연적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사데는 전투에 져서 함락된 적이 없는 도시였고, 군사력은 주변국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주전 546년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의 군대가 사데를 함락시켰는데, 이는 고레스 왕의 병사 하나가 도저히 오를 수 없는 절벽을 기어올라가 성으로 잠입하여 성문을 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약 300 여년이 더 지난 주전 214년, 시리아의 안티오커스 3세도 사데를 점령하게 되는데 이때에도 군사 15명이 절벽을 타고 올라가 성에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두 경우가 모두 경비병들의 부주의로 말미암은 패배였다는 것은 사데 사람들을 비통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천연적 요새로서의 조건을 가진 곳이 사데였기 때문에, 고대 세계에서 불가능한 일을 이루었다고 할 때, ‘사데를 함락시켰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사데는 천연적 요새로서 완벽했고 군사력이 강성했던 것 외에, 경제적 부요함도 대단했습니다. 사데는 거대한 양모 산업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트몰로스 산에서 흘러내려오는 강에서 건져내는 사금은 사데에 부를 가져다주는 요인이었습니다. 이런 자연적 조건들은 사데를 방탕과 쾌락, 사치로 물들였고 게으름의 온상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사데가 고대 도시 중 최초로 금화와 은화를 주조한 도시라는 사실도 사데가 누리던 물질적 부의 수준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입니다.
당시 사데에는 매우 강력한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1958년부터 하버드-코넬 발굴팀이 고대 사데를 발굴하기 시작했는데, 사데의 고대 경기장 옆에서 유대교 회당의 유적을 발굴했습니다. 이 회당의 사이즈는 거의 축구장 크기에 해당할만큼 컸고,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정도로, 지금까지 발굴된 고대 회당 중 최대 규모의 회당이었습니다. 물론 이 회당은 3세기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이것은 1세기말에도 흩어진 유대인들이 사데에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추정하게 합니다.
1세기 말 사데 교회는 주변 유대인 공동체나 도시의 지도자들과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크레이그 키너는 이 본문 안에 “박해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말합니다. 사데 교회는 비교적 평화로운 환경 속에서 도시의 부를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는 외부의 압력이나 이단의 문제가 다른 지역의 교회들에게 비해 심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다만 이들의 문제는 이교적 세상의 환경과 그 정신을 받아들임으로써 영적 죽음의 자리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윌리엄 헨드릭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데교회는 매우 평온한 교회였다. 그러나 그들이 즐긴 평강은 공동묘지의 평강이었다!” 사데 교회가 누린 평안은 결코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허락하여 누리게 하시는 평안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데 교회에게 이보다 더 심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1b).”


2. 사람의 관점 대 주님의 관점(1; 막 11:20; 딤후 3:5; 고후 6:9-10)
죽은 교회라는 것은 사데 교회를 향한 주님의 판단이었습니다. 물론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는 말씀(2)과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라는 말씀(4)에 비추어, 사데 교회를 ‘거의 죽은 교회’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주님의 판단에 근거하여 사데 교회를 상상해 본다면 그 교회는 어떤 교회였을까요? 주님께서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라고 말씀하신 것도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의 관점은 주님의 관점과 달랐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사데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였습니다. 살아있다는 표현을 쓸 때, 그것은 그저 생명이 남아있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생동감있고 활동적인 것을 일컫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보통 우리가 살아있는 교회라고 할 때, 그런 교회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역동적인 사역, 분주하게 돌아가는 프로그램들, 교인들의 밝은 표정,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 화려한 건물, 넓은 주차장, 좋은 시설, 생동감 있는 현대식 예배, 조명과 음악들이 아닙니까? 하지만 이런 요소들은 과연 살아있는 교회에 본질적인 요소들인가요? 저는 한 유명 승려의 강연을 듣는 사람들의 얼굴을 화상으로 지나치며 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얼굴이 하나 같이 밝고 웃음짓는 얼굴들이었던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거기에 살아있는 교회가 있는 것입니까? 이런 요소들은 모두 사람들이 보고 느끼고 판단하는 외적 조건들에 불과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교회는 예배가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모든 평신도가 사역하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역동하는 제자훈련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들도 사람들의 말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관점이고 주님의 판단입니다.
어쩌면 사데 교회는 위에서 언급한 요소들을 다 갖춘 교회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네가 죽은 자로다”라고 판단하셨습니다.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의 대화에서 종교적인 냄새를 풍길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상한 고기맛을 숨기기 위해 뿌리는 고춧가루의 역할에 그칠 수 있다. 또한 교회는 교리적인 기초에서 이탈되거나 신조를 구주보다 더 중시하거나 혹은 회중들이 건전한 신조에 잠들어 버릴 수 있다.”
이렇게 사데 교회는 잎이 무성했지만 열매가 없었던 무화과나무와 같았고(막 11:20), 열매 없는 이스라엘 백성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디모데후서의 말씀대로,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이었습니다(딤후 3:5).
주님께서 보시는 교회의 본질, 진짜 교회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주님께서는 “내 하나님 앞에서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2). 주님이 사데 교회에서 찾을 수 없었던 그 ‘온전한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열렬히 사랑하는 성도들, 고난 속에서도 믿음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 성도들, 형제 간에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고 물질을 나누는 성도들,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는 성도들, 주의 말씀을 신실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전하는 주의 종들, 사적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양무리를 사랑하여 목숨을 주는 목자들..이런 요소들이야말로 살아있는 교회의 증거들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누가 볼 수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의 내면을 정확히 볼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제 내면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아시고 보시며, 주님께서 판단하십니다. 우리가 불꽃 같은 눈으로 교회의 외양이 아닌 중심을 보시는 주님을 경외함으로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는 주님의 판단은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멀리서 방문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교회를 정하려고 오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여러분도 그들 중 한 분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관점으로 벧샬롬교회를 보고 판단하여 교인이 되기로 결정하셨습니까? 여러분의 관점과 판단은 과연 주님의 관점과 판단에 부합합니까? 일치합니까?
어쩌면 우리는 승려의 강연을 듣는 분들의 밝은 얼굴 표정에 비하면 덜 밝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고린도후서의 말씀에 의하면, 참된 본질에는 이런 역설이 존재합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린도후서 6:9–10).”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중심을 보신 주님은 사데 교회는 죽었다고 판단하셨습니다.


3. 다섯 가지 명령(2-3)
주님은 죽은 교회인 사데 교회에게 다섯 가지 명령을 주십니다.
A. “일깨어”(2; 마 24:42-43; 25:13)
첫째는 ‘일깨어’라는 명령입니다. 새번역은 ‘깨어나라’고 번역을 했고, 여러 영역본들(ESV, NIV, NLT)도 ‘Wake up!’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사데는 역사적으로 두 차례나 경비병들의 부주의로 말미암아 함락이 된 슬픈 역사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신 차려!’, ‘깨어 일어나!’하는 말들은 사데 사람들에게는 뼈아픈 단어였습니다. 70년 전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은 우리에게 “잊지 말자, 육이오!”같은 구호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자다가 두 번이나 멸망을 경험한 사데 만큼이나, 사데 교회도 자다가 멸망을 당할 위기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이 바로 “깨어나라”라는 주님의 첫번째 명령입니다.
사실, 이 말은 단순히 잠에서 깨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이 깨어있는 상태를 늘 유지해야 한다는 더 포괄적 의미를 가집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깨어 있어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마 24:42-43; 25:13). 사데 교회는 영적 죽음, 영적 무감각에서 깨어 일어나야만 했습니다. 사데 교회의 영적 무감각은 사실 불신앙적이고 이교적인 문화 앞에서 자신들의 믿음을 적극적으로 증언하지 않고 살아가는 동안 자신들도 모르게 빠져든 함정이었습니다. 어떤 설교로도, 어떤 말씀으로도, 어떤 기회로도 은혜를 받지 못하는 영적 무기력함, 이것이야말로 영적 죽음의 상태가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영적으로 살아난 영혼이라면 은혜를 받아야 하고 은혜에 반응을 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세상의 잠에 빠져 하나님의 은혜에 더 이상 반응하지 못하는 심령이야말로 “네가 죽은 자로다”라는 판단을 받아야 하는 심령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은 오늘 주님으로부터 “너는 일깨어”라는 말씀을 들어야 할 사람이 아닙니까?
B.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2)
두번째 명령은,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는 것입니다(2). 여기서 ‘남은 바’라는 말은 문법적으로는 중성이지만, 사람이나 사물을 모두 가리킬 수 있는 말입니다. 사람을 의미한다면, 소수이지만 살아있는 사데 교회의 성도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4절에,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라고 말씀한 그들입니다. 그러나 ‘그 남은 바’가 굳건하게 할 필요가 있는 교회의 영적 속성들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거의 다 죽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됨의 본질에 관한 살아있는 것들이 있다면, 그 남은 것들을 굳건하게 해야 합니다. 단순히 기존의 온갖 프로그램들을 돌리고 그것들을 유지하는데 전력 투구할 것이 아니라, 교회됨의 본질에 전력 투구하라는 것입니다. 덩치 큰 괴물이 되어버린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세습이나 기타 성경에서 벗어난 경영 방식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태도들은 사실상 주님의 책망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2절 하반절에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라고 하신 말씀은 왜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해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주님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야 온전한 것이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슬프고 두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는 말씀은 네 안에 꺼져가는 불씨를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가느다란 영적 갈망을 다시 불일 듯 불러일으키라는 말씀입니다.
C. “생각하라”(3)—기억하라.
세번째 명령을 보겠습니다. 그것은 3절에 ‘생각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라는 말씀하십니다. 생각하라는 말은 그 정확한 의미가 ‘기억하라’에 더 가깝습니다. 사데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이 처음에 받았고 들은 복음의 진리를 기억해야 했습니다. 처음에 사도들이 전하고 가르쳤던 복음의 진리는 생소해질 만큼 잊혀졌기 때문입니다. 거짓 교사들이 와서 복음에 물을 타기 전, 그들이 처음에 들었던 그 복음의 진리를 기억하고 그 복음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죽은 교회가 다시 소생하는 일은 언제나 복음으로 돌아감으로써 가능해집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이 그랬습니다. 죽은 교회가 사도들이 전했던 이신칭의의 복음을 다시 기억함으로써 살아난 것입니다. 이것이 언제나 죽은 교회가 소생하기 위해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D. “지켜”(3; 1:3; 마 7:24-25)
네번째 명령은. ‘지켜’라는 명령입니다. 사데 교회의 문제 중 중요한 것 하나를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많은 말씀들을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에 따라 움직이는 데는 소극적이었습니다. 순종은 성경을 사랑하는 것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의 중요한 본능입니다. 요한계시록 1:3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읽고 듣는 것이 성경의 목적이 아닙니다.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했습니다(계 1:3). 주님은 산상수훈을 마치실 때에도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의 삶을 반석 위에 집을 지어 흔들리지 않는 집에 비유하여 설명하셨습니다(마 7:24-25).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듣는 것만으로 모든 신앙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있어야만 합니다.
E. “회개하라”(3)
끝으로 다섯 번째 명령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 사람들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을 떠난 것처럼 느껴지거나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 깊숙이 들려지지 않는 상태에 있었을 것입니다. 마음은 강퍅해질대로 강퍅해져 있었을 것입니다. 회개는 이렇게 강퍅해진 마음이 다시 부드럽고 은혜 받을 수 있는 상태로 돌아가기 위한 유일한 길입니다. 신자의 마음은 언제나 회개를 통해서 회복을 경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회개를 통해서 신자는 다시 주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만일, 여러분의 마음의 상태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이 무덤덤하고 그저 이론에 불과한 것처럼 여겨진다면, 바로 여러분이 회개해야 할 사람인 것입니다. 회개 없는 영혼의 회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주님은 경고도 더하십니다. 만일 일깨지 않으면, 정신 차리지 않으면 도둑 같이 이르러 심판하시겠다는 경고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재림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은 역사의 한 순간에 오셔서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물론 그 순간은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그렇게 오셔서 주님은 교회의 촛대를 옮기실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일은 역사의 한 순간에 사대 교회에 일어났습니다.
오늘 밤 잠자리에 들기 전, 여러분의 영혼을 위하여 사데 교회에 주시는 주님의 다섯 가지 명령을 다시 한 번 조용히 되새겨 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큰 유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4. 상급의 약속(4-5; 계 14:4; 3:5; 7:14; 슥 3:4; 막 9:3; 계 21:27; 단 12:1; 마 10:32-33; 히 11:16)
사데 교회는 거의 죽은 교회였지만, 그래도 교회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옷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표현은, 이교적, 우상숭배적 관습과 타협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요한계시록 14:4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신실한 사람들은 몇 명에 불과했습니다. 사데 교회에는 많은 신자들이 있었겠지만, 불과 몇 명만이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어떨까요? 우리 교회는 어떻겠습니까? 이 시대에 많은 대형교회 건물들에서는 수많은 인파가 주일 아침마다 예배당에서 밀려나옵니다. 그들 중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요?
주님은 그들이 흰 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다닐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축복과 상급은 영원히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합당한’ 자들입니다.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과 어울리기 합당한 자들입니다. 그들의 옷이 더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하는 자, 곧 이기는 자에게 주님이 약속하시는 상급은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주님은 5절에서 이기는 자에게 주실 상급을 약속하십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요한계시록 3:5).”
‘흰 옷’은 성도가 받을 상급의 영광입니다. 요한계시록 7:14을 보지요.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요한계시록 7:14).”
성도가 이 땅에 살면서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나 더럽히지 않고 완전한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옷을 더럽히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일평생 입은 옷은 이렇게 저렇게 더럽혀져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환상 중에 보았던 것도 이것이 아닙니까?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천사 앞에 서 있고 사탄이 그 오른편에 서서 여호수아를 대적합니다. 여호수아는 더러운 옷을 입고 서 있습니다. 신실한 대제사장도 온전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대적하는 사탄을 책망하시면서, 천사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스가랴 3:4).”
이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8에서 말씀한 대로, 흰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도들이 자기 능력으로, 자기 행동의 온전함으로 의로움을 이룰 수 있고 이루어야만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살고, 믿음을 지키고 살아간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입혀 주시는 영예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씻어, 주님께서 변화산에서 변화되셨을 때처럼,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흰” 옷을 주시는 것입니다(막 9:3).
주님은 사데 교회의 이기는 자에게 또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라고 약속하십니다. 생명책은 구원받은 자들의 이름이 적힌 책입니다(계 21:27).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다니엘 12:1).” 이 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은 구원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계 13:8; 17:8; 20:15).
주님은 한 가지를 더 말씀하십니다.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공생애 기간에 이미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내용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태복음 10:32–33).”
시인한다는 말은 공개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고백한다는 뜻입니다.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예배 중에 만이 아니라, 우리의 세상 살이 속에서, 직장에서, 주변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주요 주님이시라고 부끄러움 없이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하십니까? 여러분을 아는 주변 사람들이 여러분이 주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주님은 주님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신실하게 주님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고백한 성도들의 이름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와 천사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시인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이고 우리를 자랑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11:16입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브리서 11:16).”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았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심을 자랑스럽게 여기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로서는 말도 안 되고, 감당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이것들이 이기는 자에게 주실 상급에 대한 주님의 약속입니다.


5. 소망은 오직 주께 있다(1,6; 1:4).
사데 교회는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와 가장 흡사한 교회가 아닐까 싶습니다. 세상의 물질적 풍요 속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박해와 핍박 보다 세상의 문화적 유혹이 더 거세게 교회를 흔들고 있습니다. 강단이 타락하면서 우리가 처음에 받았고 들은 복음의 진리는 퇴색해버렸고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듯 보입니다. 대다수 신자들이 온전한 신앙 생활을 추구하기 보다 적당한 신앙 생활에 안주하고 살아갑니다. 교회 안에는 과거 유럽과 미국에서 우려하던 명목상의 신자들이 넘쳐납니다. 참된 거듭남과 회심이 없는 무늬만 신자인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이런 사데 교회를 향해 “네가 죽은 자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판단이 옳다면(이보다 옳은 판단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사데 교회와 같이 죽은 자요, 죽은 교회임에 분명합니다.
물론 몇 명은 있을 것입니다. 사데 교회도 그랬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몇 명에게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일깨어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해야 할 사람들, 복음의 진리를 다시 기억하고 지켜 회개해야 할 사람들을 죽음의 깊은 잠으로부터 깨우십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6).”라고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 시대의 신자라 하는 모든 사람이 이 말씀을 듣고 반응해야 합니다.
깨어 일어납시다. 주님의 말씀대로, “깨어 있다”가 주님을 만나뵙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입혀 주신 옷을 더럽히는 삶을 청산하고 거룩한 삶을 추구합시다. 지금 일깨어 적당히 안주하는 신앙생활을 벗어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것을 추구하며 살아갑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당장 어떤 상태에 있든지 상관없이, 지금 이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에 주님의 말씀으로 들리고 있다면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 은혜에 반응해야 합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결심이나 의지나 힘으로 이 깊은 죽음의 잠에서 깨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죽은 교회를 살리는 것, 죽은 영혼을 살리는 것은 오직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사데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은 1절에 묘사된 대로,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은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1:4에서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이 성령님을 가리키듯이 말입니다. 성령님을 교회에게 주시는 분은 주님 자신이십니다. 죽은 교회인 사데 교회는 오직 성령님의 사역을 통해서만 회생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님만이 이 교회를 다시 거룩한 불로 타오르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곱 영을 가지신 주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성령님을 주실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곱 영을 가지신 주님께 구하십시다. 우리 교회에, 이 땅 도처의 교회들에게 오셔서, 우리를 죽음의 깊은 잠에서 깨워 주시고 거룩한 불을 다시 한 번 붙여주시도록, 주님을 위해 거룩하게 타오르는 교회가 되게 해주시기를 구하십시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일곱 영을 가지신 주님께 있음을 고백하며 그 자비하신 주님 앞에 나아가 은혜를 구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