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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26). 하늘 보좌와 천상의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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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26). 하늘 보좌와 천상의 예배

요한계시록 5:8-1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03-15

말씀내용
오늘 읽은 본문은 요한계시록 5:8-14절이지만, 우리는 4장과 5장 전체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다음 주일부터 이 본문을 좀 더 자세히 살피겠지만, 전체 그림을 놓치지 않아야 하겠기에, 사도 요한이 본 4-5장의 환상 전체가 어떤 내용이고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먼저 간략히 살펴 보겠습니다.


1. 장엄하고 아름다운 천상의 예배 (5:8-14)
요한계시록 4-5장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장엄한 본문 중 하나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장엄한 본문의 절정이 바로 우리가 읽은 5:8-14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면서 본 최고의 장관이라 할만 한 것은 어떤 것입니까? 또는 지금까지 들은 음악 중 최고의 아름다운 소리나 화음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어떤 사람은 알프스를 말할 것이고, 이과수 폭포를 말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파바로티나 Three Tenors 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2000년도 가을 어느 저녁, 뉴욕 콜롬비아 대학 내에 St.Paul’s Chapel 에서 8명의 남성들이 아카펠라로 놀라운 화음을 들려준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제껏 어떤 멋진 것을 경험했든지, 그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날려보낼 수 있는 최고의 완벽한 화음이 그리고 가장 장엄한 장면이 베일을 벗습니다. 그것은 천상의 화음이고, 천상의 존재들과 세상 모든 피조물이 함께 드리는 예배의 광경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늘에 열린 문으로 올라가 그것을 보고 들었습니다.
먼저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가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지고 새 노래로 노래합니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는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하늘에 천사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들 중에는 음치나 박치가 없을 것입니다. 놀라운 화음, 완벽한 솜씨로 거문고를 타며 찬송을 부릅니다. 그 노래의 가사가 이렇습니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요한계시록 5:9–10).”
그 천상의 존재들이 경배하는 대상은 어린 양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이 노래를 듣다 보니 또 다른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 수가 만만이고 천천이나 되는 수많은 천사들입니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는 높은 지위의 천사들이라면, 이들은 일반적인 천사들입니다. 이들 역시 크고 완벽한 화음으로 찬송을 합니다. 그 내용이 12절입니다.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요한계시록 5:12).”
하늘의 천군과 천사들이 찬송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어느 인간의 노래에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또 듣습니다. 어떤 음성인지를 알아보니, 이는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들의 찬송입니다. 거대한 합창단의 노래를 들어보셨습니까? 이것은 천상과 지상 그리고 해상의 모든 피조물이 부르는 찬송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계 5:13).”
상상할 수 있으십니까? 천군 천사들, 사람들,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함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어린 양의 영광에 압도당하여 모든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이 장엄하고 아름다운 예배의 광경을 세상의 무엇으로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도대체 무엇을 알길래, 무엇을 보았길래, 또 어떤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천군 천사와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과 어린 양께 찬송하는 것일까요? 그 대답이 4-5장의 내용입니다.


2. 4-5장의 맥락(출 33:11; 사 6:1-7; 겔 1:26-28; 고후 12:4)
우리는 지난 주일까지 사도 요한이 받은 첫번째 환상을 다루었습니다. 그 환상의 중심에는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와 지상의 일곱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제 두번째 환상이 시작되는 4-5장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천상의 승리한 교회입니다. 이그래서 4-5장의 내용은 6-16장에서 전개될 심판의 서론입니다. 두번째 환상은 온 세계에 부어질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는데, 일곱 인 시리즈, 일곱 나팔 시리즈 그리고 일곱 대접 시리즈로 16장까지 이어집니다. 4-5장은 이 세 가지 시리즈의 심판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그 근원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좀 전에도 살펴보았듯이, 4-5장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장엄한 본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늘에 열린 문을 통하여 “이리로 올라오라”는 음성을 듣고 하늘의 보좌가 있는 곳에 올라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뵙고 천상에서 일어나는 통치와 예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을 친히 뵙고 십계명을 받았고 또 친구가 대면하여 말하듯이 하나님을 만났지만(출 33:11), 그것은 시내산이었고 회막이었을 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부름을 받을 때 성전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송하는 스랍들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경험했고(사 6:1-7), 에스겔도 선지자로 부름을 받을 때, ‘궁창 위의 보좌의 형상’과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을 보고 그 음성을 듣기도 했습니다(겔 1:26-28). 바울 사도도 삼층천을 경험했지만, 그는 그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라고 기록한 것이 전부였습니다(고후 12:4). 하지만 요한계시록 4-5장은 그 전에 어떤 선지자나 사도도 하지 못한 방식으로, 사도 요한이 본 하늘 보좌의 환상을 장엄하고도 상세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4-5장을 보통 하늘 보좌 환상이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설명했듯이, 이 본문은 요한계시록 전체의 중심부에 해당하여, 어떤 학자는 이 본문을 요한계시록의 지렛목이라고도 말합니다.


3. 4-5장의 개요와 주요 개념들
그럼 이제 4-5장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A. 보좌
사도가 하늘에 열린 문을 통하여 올라간 곳은 하늘 보좌가 있는 방이었습니다. 거기서 사도 요한은 하늘의 보좌와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계신 것을 봅니다(4:1-2).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4-5장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단어는 보좌입니다.
신약성경에는 보좌라는 단어가 총 62번 나오는데, 3/4 이상인 47번이 요한계시록에 나오고, 그중 4-5장에만 1/3이 넘는 17회가 사용됩니다. 그만큼 보좌라는 단어는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어이고, 특별히 4-5장의 키워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좌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절대적 통치권, 왕되심과 주권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보좌가 있는 보좌실에서 온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다스리십니다. 1세기 말 교회를 위협하던 로마 제국과 황제 그리고 적대적인 유대인들 모두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아래 존재합니다. 이들 모두가 천상에 보좌를 베풀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무릎 꿇고 엎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권 개념은 6장 이하부터 전개되는 온 세상을 향한 세 개의 시리즈 심판에서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심판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보좌에서 시작됩니다.
두번째로 이 보좌는 홀로 영광과 예배를 받으시기 합당하신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예배와 영광은 오직 최고의 존재에게만 바쳐지는 것입니다. 황제 숭배를 요구했던 로마 황제의 문제는 자기가 최고의 존재, 즉 신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최고의 존재는 하나님 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외애 다른 신을 두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죽을지언정 황제 숭배를 하나의 요식 행위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에 베풀어진 보좌입니다(4:2). 그 보좌는 모든 피조계 위에, 모든 피조물 위에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그 보좌 위에 앉으신’ 분이고 거기서 온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그래서 그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온 세상의 영광과 예배를 받으시기에 유일하게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B. 네 생물과 24 장로들
계속해서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는 것을 사도 요한은 봅니다. 그 보좌들에는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아 있습니다(4:4). 이십사 장로가 금관을 쓰고 보좌에 앉아 있다는 것은 그들이 왕적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사도 요한은 이십사 장로 외에 보좌 앞에서 네 생물의 존재를 보게 됩니다. 네 생물은 하나님의 보좌와 이십사 장로들의 보좌 사이에 있어서 하나님의 보좌에 더 가깝게 존재하는 자들입니다(4:6).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은 나중에 각각 자세히 살피겠지만, 모두 천상적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고, 또한 하나님께 찬송하고 예배하는 일을 감당합니다.

C. 두 경배와 찬송의 차이(4:8-11; 5:8-14)
4장과 5장의 뒷 부분(4:8-11과 5:8-14)은 모두 천상 예배와 찬송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예배 장면에는 중요한 차이가 하나 발견됩니다. 4장에서 예배의 대상은 보좌에 앉으신 이,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네 생물의 찬양 내용인 8-9절에서,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그리고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는 모두 성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러자 이십사 장로가 화답하며 찬송합니다. 그 내용이 10-11절인데, 10절에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와 11절에 ‘우리 주 하나님’도 모두 성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성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송하는 내용은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라는 것입니다(4:11b). 경배와 찬송의 주제는 성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 사역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 5장 뒷부분의 경배와 찬송은 그 대상이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입니다. 이것이 4장의 경배와의 두드러진 차이입니다. 5장 9-10절은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의 경배와 찬송 내용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요한계시록 5:9–10).”
여기서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신’ 분은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신’ 분,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둘러선 수많은 천사들의 찬송이 이어지는데 그들도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요한계시록 5:12).”라고 찬송합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께 돌리는 경배와 찬송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거대한 코러스로 찬송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계 5:13).” 이 경배의 마무리 부분에서는, 4장과 5장의 찬송의 결론인데,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 경배와 찬송을 돌립니다. 그러자 이 찬송을 시작했던(4:8; 5:8) 네 생물이 ‘아멘’으로 화답하고 이십사 장로는 ‘엎드려 경배’합니다(5:14).
이렇게 천상 예배의 장엄한 장면이 마칩니다. 4장에서는 성부 하나님을, 5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했습니다. 이는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신 예수님께서 모든 피조물의 경배와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왜 경배의 대상이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성자 하나님께로 전환되는지를 보겠습니다.

D. 두루마리
4장에서 5장으로 넘어가면서 중요한 것이 하나 등장하는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오른손에 들려진 두루마리입니다. 두루마리는 고대의 책이지요. 그 두루마리에는 안팎으로 글이 쓰여져 있었고 아무도 볼 수 없도록 일곱 인으로 봉해져 있었습니다. 이 두루마리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가 기록된 책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심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구속 계획이 다 담겨진 책입니다. 이 두루마리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오른 손에 들려져 있지만, 아무도 이 두루마리의 인봉을 떼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할 자가 없습니다.

E. 죽임 당하신 어린 양
이때 한 힘센 천사가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고 큰 소리로 외칩니다(5:2). 이 말은 누가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모든 일이 이루어지도록 이 두루마리를 열고 그것을 이룰 것인가 하는 뜻입니다. 침묵이 흐릅니다. 아무도 그 인을 뗄 자가 없는 것입니다. 이 두루마리의 인봉을 떼고 두루마리를 열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사도 요한은, 인을 뗄 사람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크게 울었습니다(5:3).
그때 이십사 장로 중 하나가 말합니다.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계 5:5).”
그렇게 말할 때, 사도 요한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 양입니다. 놀랍지요? 장로는 두루마리의 일곱 인을 뗄 자는 ‘유대 지파의 사자’라고 했는데, 정작 사도 요한이 본 것은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 양이었으니까 말입니다. 장로는 사자를 지목했는데, 요한은 어린 양을 봤습니다.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 사자이고 그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는 것을 사도 요한은 봅니다(5:7). 이것은 이제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통치권을 넘겨 받으시고 세상 역사를 이끌어가는 역사의 주권을 행사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어린 양이 두루마리를 취하시자, 이제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경배하는 것이 오늘 읽은 본문입니다.


4. 교훈과 적용
이제 말씀을 정리하면서, 이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께서 우리 자신에게 주시는 교훈을 생각해봅시다.
먼저,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많은 호칭 가운데서, 유독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을 예수님을 가리키는데 주로 사용했습니다. ‘어린 양’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니온(ἀρνίον)은 신약성경에서 오직 요한계시록에서만 사용되었고 그 전부인 29회가 모두 4-22장에서 사용됩니다. 왜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을 이렇게 표현하기를 선호했을까요? 어린 양 보다는 사자가 더 낫지 않습니까? 왜 사도 요한은 그 장로의 말대로 사자를 보지 못했을까요? 예수님은 야곱의 예언대로 ‘유대 지파의 사자’시지만(창 49:9), 요한은 어린 양, 그것도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 양을 보았습니다. “사자가 어린 양이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이김이 사자의 이김이 아니라 어린 양의 이김이라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김은 강한 군대로 로마 제국을 굴복시키고 정복한 이김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심을 통해 얻으신 이김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복음의 비밀이 있고 1세기 말 성도들을 향한 풍성한 위로가 있습니다. 주님은 로마 제국의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사형 집행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주님은 비록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그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셨지만, 그 죽음으로써 주님은 죽음을 죽이고 정복하셨고, 마귀의 권세를 멸하셨고, 당신의 택한 백성의 구속을 완성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당신의 흘리신 피로써 자기 백성을 사셨습니다. 이로써 주님은 두루마리를 받아 인봉을 떼시기에 합당한 분이 되셨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로부터 온 우주의 통치권을 받으셨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역사의 열쇠를 가지셨습니다. 유대 지파의 사자이신 주님의 이김은 사자의 이김의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이김은 유월절마다 죽임을 당하던 어린 양과 같은 죽임당함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보좌와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 사이에서 늠름하게 서 있는 사자가 아니라, ‘한 어린 양이 서 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것도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 양을 말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이김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왔습니다.
사도 요한은 노구를 이끌고 밧모섬으로 유배를 와서 비참한 노후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육신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당시 교회들은 이미 일곱 교회에 주시는 메시지를 통해서 우리가 살펴본 바, 로마 제국의 박해와 유대인들로 인해 겪는 환난 아래 있었고 장차 올 환난에 대한 말씀도 듣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주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한 어린 양으로써 승리하셨고 그 승리로써 이제 하나님의 두루마리를 받으시고 주권과 통치권을 가지고 역사의 마침표를 찍으시기까지 역사를 다스리신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요?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되심으로써 주님은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왕으로 보좌에 앉으신 주님이 약속하신 것을 기억하십니까?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요한계시록 3:21).”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세상을 이깁니까? 모든 불이익과 고난과 심지어 죽음이 우리에게 닥쳐올지라도 믿음을 굳게 잡아 지킴으로써 그 모든 것을 당할 때, 그렇게 당함으로써 우리는 이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기는 자들을 주님은 당신의 보좌에 앉게 하실 것입니다.
그 보좌를 사도 요한은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과 역사를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천상의 보좌를 그는 보았습니다. 세상 역사는 로마 황제의 보좌가 있는 곳에서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은 하늘 보좌에 앉으신 이의 손에서 결정됩니다. 왜 이 보좌를 요한에게 보이셨고 1세기 말의 성도들에게 보여주셨을까요? 4-5장의 위대한 하늘 보좌 환상은 임박한 환난의 그림자 가운데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여전히 다스리고 계심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4-5장의 하늘 보좌 환상은 개인적으로도 밧모섬의 외로운 사도에게 주시는 선물이고 위로였을 것입니다. “요한아, 지금도 내가 온 세상을 다르리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란다. 조금만 견디어라. 내가 이긴 너를 내 보좌에 앉게 하여 주리라.” 이 환상은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고난을 선택하는 모든 시대의 모든 성도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메시지입니다. 이 환상은 하늘 보좌의 시각으로 오늘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보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절망과 조급함과 염려와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 보좌의 시각으로 이 땅의 일들을 보는 것, 내 인생의 모든 일들을 보는 것,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이기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신자들이 이 땅을 살아가면서 잃어버리지 말아야 하는 자태입니다.
4-5장의 하늘 보좌 환상은 4장과 5장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은 예배와 찬송으로 마무리됩니다. 본문의 예배는 천상의 예배, 마지막 때의 완성된 예배를 보여줍니다. 본문은 “예배는 이런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삼위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모든 예배의 표준을 여기서 찾아야 합니다. 그 예배는 하나님 중심의 예배입니다. 우리의 감동을 위해서 있는 예배가 아닙니다. 방문자들을 섬기는 예배도 아닙니다. 오직, 그 예배의 모든 초점은 하나님과 어린 양께 있습니다. 예배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능력에 감동하고, 어린 양의 구속과 그 사랑에 압도 당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또 기억해야 합니다. 예배는 눈에 보이는 우리들만의 예배가 아닙니다. 오늘 비상한 상황으로 인하여, 많은 분들이 각 가정에서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지금 우리는 하늘의 네 생물, 이십사 장로, 그리고 천군 천사들과 함께 예배하고 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라고 말입니다. 천군 천사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계의 모든 피조물이 함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 예배의 자리에서 우리에게 돌릴 영광은 없습니다. 왜 모든 영광을 하나님과 어린양께만 돌리는 것입니까? 우리가 언젠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 앞에 서게 될 때, 내 구원, 내 죄의 속함, 내 거룩함, 내 의로움을 가지고 서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잘난 줄 알고 살았을지라도, 우리는 눈곱 만치도, 털끝 만큼도 내세울 의가 하나님 앞에 없다는 것을 직감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구원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정으로 이루어졌고 어린 양의 죽으심으로 일어난 것을 안다면, 자기를 자랑하는 우리 입은 모두 닫힐 것이고,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어린 양만을 찬송하고 경배하고 높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어린 양께 합당한 예배를 드린 적이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은 그 하늘 보좌에 앉아 온 세상을 왕으로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과 우리의 구속과 의로움과 거룩함이 되시려고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