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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27). 하늘에 열린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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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27). 하늘에 열린 문

요한계시록 4:1, 마태복음 27:51, 히브리서 4:1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03-22

말씀내용
우리는 요한계시록 4-5장 전체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이제 4-5장의 전체 그림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하고, 본문을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실, 우리가 요한계시록 4장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요한계시록에 있어서 루비콘 강을 건넌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개는 요한계시록 3장까지 살펴보고 멈추곤 합니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그래도 1-3장은 본문 자체가 그렇게 어렵다고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1-3장에 비해서 4장부터 요한계시록은 해석이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4-5장의 하늘 보좌 환상이 요한계시록의 앞 부분과 뒷 부분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 본문을 알지 못하면 사실상 요한계시록을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우리가 요한계시록 4장으로 넘어온 것은, 이제 본격적으로 요한계시록을 상고하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먼저 본문 1절은 “이 일 후에 내가 보니”라고 시작합니다. 이것은 사도 요한이 받은 새로운 환상의 시작을 알리는 표현입니다. 이 말씀을 잘못 읽어서 지상의 전투하던 일곱 교회가 휴거했다는 말씀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계시록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세대주의 전천년주의자들은 4:1을 교회의 휴거로 읽는 것입니다. “이리로 올라오라”는 말씀은 교회를 향해서 하신 말씀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인 참된 교회는 하늘로 휴거하여 곧 시작될 세상에 쏟아질 심판과 대환난을 면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하나님의 심판이 진행되는 동안(계 4-19장) 지상에 있지 않고 휴거되어 천상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2-3장에서 19번이나 사용된 ‘교회’라는 용어가 4-19장에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 것도 증거로 내세웁니다. 그리고 7년의 대환난이 마치면 주님께서 재림하신다고 말합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요한계시록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들었거나 알고 있을만한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요한계시록을 문자적으로, 연대기적으로 이해하는 옳지 않은 전제 위에 서 있습니다.
이 해석은, “이 일 후에 내가 보니”라는 구절을 사건의 전후관계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요한계시록에서 몇 차례 더 사용된 표현인데(7:1,8; 15:5; 18:1; 19:1), 언제나 새로운 환상의 시작 혹은 환상의 시간적 순서를 알리는 표현이지, 사건들의 시간적 순서를 말하는게 아닙니다. 쉽게 말해서, 밤에 꿈에서 여러 장면을 보게 되었는데, 첫번째 장면에 이어 두번째 장면이 있었고 하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지,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의 순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보니’라는 표현도 에스겔(1:4,15; 2:9; 8:2,7,10; 44:4)과 다니엘서(8:3,15; 10:5; 12:5)에 많이 나오는데, 묵시적 환상을 보게 될 때 사용하는 관례적 표현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원리가 이제 나옵니다. 앞으로 특별히 4-5장에 이어 나오는 심판 시리즈들—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심판—을 볼 때, 사건들의 시간적 순서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마치 여러 산의 정상에서 아래의 일들을 내려다볼 때 다른 관점, 다른 각도에서 보는 설명들과 같이 읽어야 합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열쇠입니다.
가령, 1:19에서도 설명드렸듯이,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에서, 1장의 환상이 과거(‘네가 본 것’)이고 2-3장의 지상 교회의 모습이 현재(‘지금 있는 일’)이며, 4장 이후에 펼쳐지는 심판과 구원의 이야기가 미래(‘장차 될 일’)라고 해석하게 되면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됩니다. 그 이유들은 여러분이 이제 요한계시록을 살펴보는 가운데 깨달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이 일 후에 내가 보니”라는 구절로 가봅시다. 여기서 ‘이 일’은 1-3장(정확하게는 1:10-3:22)의 환상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제 4-5장의 하늘 보좌 환상으로 넘어가려는 것입니다.


2. ‘하늘에 열린 문’
자, 그럼 요한이 본 환상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요한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먼저 그가 본 것은 ‘하늘에 열린 문’이었습니다. 밧모 섬의 요한이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한 문이 있었고 그 문은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물론 하늘의 열린 문을 통해 요한이 본 것은 보좌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그리고 보좌에 앉으신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었습니다. 사실, 요한계시록은 다른 두 곳에서 ‘하늘에 열린 문’과 유사한 표현을 보여줍니다. 먼저, 11:19입니다.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요한계시록 11:19).”
또 한 구절은 15:5입니다.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요한계시록 15:5).” 이 구절은 신천지가 좋아하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구절에서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렸다’거나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렸다’는 표현은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4:1과 차이를 가지지 않습니다. 요한은 ‘하늘에 열린 문’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들은 말이 무엇입니까? 그는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가리킵니까? 요한이 처음 환상을 볼 때의 장면으로 가보지요.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요한계시록 1:10).”
본문은 1:10의 나팔소리를 언급합니다. 요한이 처음 밧모 섬에서 환상을 보게 되었을 때, 그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소리가 아니라 음성이었습니다. 그 음성은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일곱 교회에 보내라”는 명령이었습니다(1:11).
그런데 지금 새로운 환상이 시작되려는데, 그는 동일한 나팔 소리 같은 음성을 듣습니다. 그 음성이 이번에는, “이리로 올라오라”고 명령합니다. 하늘의 열린 문을 통해 하늘로 올라오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교회에게 올라오라고 한 것이 아니라 요한에게 올라오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말씀합니다. “이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접근할 때, 가장 많이 범하는 실수는, 이 책이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연대기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도 그 관점에서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말의 강조점은, 단순히 미래의 사건들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발생해야만 할 일들에 있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앞으로 전개될 심판 시리즈들을 오해 없이 읽을 수 있습니다. 4-5장 이후에 나오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심판의 시리즈들은 시간적 순서로 발생할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역사의 주인이시기에 모든 심판의 과정들을 친히 주관하신다는 것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4-5장의 하늘 보좌 환상이 존재하는 한 가지 이유입니다.


3. 굳게 닫혀 있던 하늘 문
하늘 보좌 환상이 시작되는 4장은 사도 요한이 ‘하늘에 열린 문’을 보는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말은 ‘하늘이 열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늘은 마지막 날에 열릴 것입니다(계 21:2). 지금 요한이 본 것은 하늘에 들어가는 문이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에게 “이리로 올라오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당시 묵시문학에서 하늘 문은, 하나님과 영원한 지복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키는 상징이었습니다. 야곱은 벧엘 광야에서 환상 가운데 하늘에 닿아있는 사닥다리를 보았고 천사들이 그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일어난 후에, 그는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라고 고백합니다(창 28:17). 또 시편 기자는 광야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만나를 먹이신 것을 “그가 위의 궁창을 명령하시며 하늘 문을 여시고” 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시 78:23). 그러나 지금 요한은 단지 본 것만이 아니라, “이리로 올라오라”는 음성을 들었고 올라가게 됩니다.
본래 하늘 문은 범죄한 인간에게 닫혀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하늘 문이 열리고 그 위로 닿아있는 사닥다리와 천사들이 왕래하는 것을 보았지만, 스스로 올라가지는 못했습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도 하늘 문을 열고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만나를 먹었을 뿐, 하늘 문으로 올라가지는 않았습니다.
심지어 초대교회의 순교자 스데반도 죽을 때,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으나 바로 순교를 하였지, 살아서 올라간 것은 아니었습니다(행 7:56).
하지만, 요한은 하늘에 열린 문을 통과하여 들어가 거기서 보좌와 그 보좌에 앉으신 이가 계심을 보게 됩니다. 그는 들어갔습니다. 사실, 이 말은 대단히 충격적이고 놀라운 말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에 에덴 동산에서 쫓겨남을 당하고, 하나님께서 죄 없이 하나님의 임재를 누렸던 그 동산으로 들어오는 길을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로 막으셨습니다(창 3:24).
모세의 율법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범죄로 말미암아 진노하여 하늘을 닫으신다고 말씀합니다(신 11:17). 그리고 이 말씀 그대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 시대에 아합 왕과 그 백성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늘을 닫고 비를 주지 않으셨습니다(왕상 17-19).
하늘 문과 관련하여 얻을 수 있는 교훈은 특별히 성막에서 나타납니다. 성막은 우주의 축소판입니다. 성막 안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늘을, 성막의 밖은 세상을 상징했습니다. 성막의 중심인 지성소에 있는 속죄소는 그룹들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보좌에서 이스라엘 뿐 아니라 온 우주를 통치하신다는 메시지를 이스라엘 백성은 배웠습니다. 이렇게 성막은 본래 왕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왕이신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 거처를 상징했습니다. 그 왕은 또한 온 세상의 왕이셨습니다. 이렇게 영광스러운 메시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을 통해 누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성막이 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출입금지 메시지입니다.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은 순서대로 직무를 담당하는 제사장들 뿐이었습니다. 게다가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은 모세 외에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1년에 단 한 번 속죄일에 자신의 죄와 백성의 죄를 속하는 희생의 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막의 위를 덮고 있는 세마포와(출 26:1) 각 입구의 휘장에 수놓아진 그룹을 통해서(출 26:31) 하나님께서 주시는 엄중한 메시지였습니다. 누구든지 허용된 규례를 떠나서 그곳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그가 누구일지라도 이 메시지를 어기면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다는 메시지입니다. 이것은 대제사장 아론의 첫째와 둘째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의 죽임을 통해서 무섭게 보여졌습니다(레 10). 성막이 하늘 자체가 아니라 하늘의 상징이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접근 금지!”라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은 배워서 알아야 했습니다.


4. 십자가에서 열린 하늘 문 (마 27:51)
이렇게 굳게 닫혀 있던 하늘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례를 받으실 때 열렸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마태복음 3:16).”
여기서 열린 것은 단지 하늘에 있는 문이 아닙니다. 하늘이 열렸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성 삼위 하나님이 모두 등장하십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태복음 3:16–17).”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일은 죄 없으신 당신께서 공식적으로 죄인으로 간주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세례는 이방인 중에서 유대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이나 죄인들이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아오는 사람들은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마 3:6).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은, 예수님에게는 비하요, 비천해 지심이며 낮아지심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예수님 위에 임하셨고, 그 열린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죄인의 자리에 서서 죽으신 십자가의 리허설이었습니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영광스러운 일이기에, 이와 같이 하늘이 열리고 성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성령 하나님의 임하심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사건은 십자가에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성경은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전합니까?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마태복음 27:50–51).”
왜 예수님이 운명하신 그 순간에, 마태, 마가, 누가복음서는(막 15:37-38; 눅 23:45-46) 모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진 것을 제일 먼저 기록하여 특별히 강조했을까요?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이루고자 하셨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뽑아버리신 것입니다. 대제사장일지라도, 희생제물의 피가 없이는 들어갈 수 없었던 그곳, 그룹들 사이에 계시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이 이제 그리스도의 피흘리심과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를 가지고 하늘 성소에 들어가심으로써, 이제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와 그 임재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문이 열린 것입니다. 그것이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고 있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진 일의 의미입니다. 당시 헤롯 성전의 그 휘장은 거의 4층 건물 높이 정도로 추정됩니다. 그 두께도 무려 4인치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휘장이 아래에서 위로 찢어진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찢으셨다는 것이 아니면 설명되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종말이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보여준 사건입니다. 하늘 보좌로 나아가는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문이 열렸습니다. ‘출입금지’라는 두려운 팻말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하늘에 들어가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히브리서 9:24).”
그러므로, 이제 하늘 문이 열리고 사도 요한이 성령에 감동 되어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다는 것은 단지 하늘 보좌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늘에 열린 문의 은혜를 깊이 누리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라고 밖에 이해할 수 없습니다.


5. 우리에게 열린 하늘 문
여러분은 이 하늘 문이 열렸다는 것의 의미를 얼마나 아십니까? 이것이 여러분에게 정말 중요합니까? 그 유익을 여러분은 충만히 누리고 계십니까? 그리고 하늘에 열린 문을 통하여 우리가 누리는 유익은 과연 무엇입니까? 저는 150여년 전 찰스 스펄전이 이 구절을 본문으로 전했던 설교에서 몇 가지 영감을 얻은 것을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 하늘에 열린 문은 거룩하신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의 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열어놓으신 그 문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그 교제의 모든 은혜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브리서 4:16).”
하늘의 문이 열렸기에 우리 기도는 하늘 보좌에 상달됩니다. 게다가 하늘의 이십사 장로들이 성도들의 기도인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계 5:8). 우리의 불완전한 기도 조차, 하나님의 보좌에 올라갈 수 있음은 하늘 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로, 찬송으로, 그리고 주의 말씀을 읽고 듣고 배움으로 하나님과 교통합니다. 하늘에 열린 문을 통해 이루어지는 삼위 하나님과의 교통은 멈추지 않습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환난을 당하는 신자들에게는 얼마나 큰 위로요 소망입니까?
여러분이 기도하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묵상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영혼이 고양되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생각을 하고 그 영광을 기뻐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하늘에 열린 문을 통해 영광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구주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지만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사랑한다면(벧전 1:8) 여러분은 열린 하늘 문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는 것입니다. 후일, 하늘 문이 아니라 하늘이 열릴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통을 방해하는 모든 죄로부터 완전한 자유함을 얻을 것이고 천상의 네 생물처럼 밤낮 쉬지 않고(계 4:8) 하나님과 어린 양을 찬송하게 될 것이고 그 기쁨을 만끽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맛볼 수 있습니다. 하늘에 열린 문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무한히 선하심과 자비하심 그 언약의 사랑을 기억하고 묵상하는 일,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신 순종과 피흘려 죽으신 고난을 생각하고 그 모든 일이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우리에 대한 사랑이었음을 기억하며 그리스도에 대하여 애정어린 생각을 하는 일은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런 일이 언제 가장 많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예배 가운데에서 입니다. 우리가 성 삼위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는 천상에서 예배하는 무리들과 연합됩니다. 하늘에 열린 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요한계시록 5:13–14).”
하늘에 열린 문을 통해서 지상의 성도가 누리는 유익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이 땅에서 함께 누리는 교제를 통해서도 우리는 하늘에 열린 문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우리 구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기뻐할 수 있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말하면서 즐거워합니다.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은 구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허물어졌습니다(엡 2:14). 그래서 우리는 성령 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늘에 열린 문의 은혜를 누리는 성도들은 서로 더 많이 사랑할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부족함과 못마땅함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우리는 서로를 향하여 이 모든 것을 넘어 장차 천국에서 우리가 함께 누릴 사랑과 영광을 바라보면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지상에서 누리는 성도의 교제의 절정은 성찬에서 일어납니다. 우리가 주님의 상에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피, 우리를 위해 찢기신 살을 받아 먹을 때, 우리 모두는 하늘 문이 열리고 천상에 계시는 그리스도와 다같이 하나가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너무나 많은 질문들이 있습니다. 내가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내 인생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왜 내 자식을 먼저 데려 가셨는지, 수많은 질문들이 우리 인생에는 일어납니다. 언젠가 하늘이 열리고 우리가 거기서 주님을 뵈올 때, 그 모든 질문들이 풀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늘이 열린 은혜와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늘에 열린 문의 은혜를 충분히 누리고 계십니까? 그 은혜의 자리를 사모하고 더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해달라고 구하십시오. 여러분 안에 성령님께서 거룩한 갈망을 부어주시고 견딜 수 없도록 채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혹시 여러분 중에는 이게 무슨 말인가 여기실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직 주님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이 시간 정직하게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도해보십시오. 정말 그것을 알고 싶다고 말입니다. 내 안에서 영적 갈망을 발견하고 내가 영적으로 살아있는 자인 것을 보게 해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하지만 여러분은 영적 갈망으로 채워지기 전에, 먼저 영적으로 살아나야만 합니다. 거듭나야 합니다. 그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렇지 않은 상태로 오래도록 교회당에 나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허무한 일입니까? “요한이 보았고 들어간 하늘에 열린 문이 오늘 제게도 열리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자비하신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구하는 자에게 주님은 약속하신 대로 주시고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