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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33). 죽임 당하신 어린 양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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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33). 죽임 당하신 어린 양 B

요한계시록 5:10-1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05-03

말씀내용
우리는 사도 요한이 본 하늘 보좌 환상을 계속 상고하는 가운데, 지난 주일에는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신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자, 하나님의 보좌 옆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일제히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경배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세상 역사와 우주의 주권이 그리스도의 손에 주어졌다는 사실도 살펴보았습니다. 이 말은 추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지난 과거에 일어난 모든 일, 그리고 현재 일어나고 있고 지금 처해있는 모든 상황들, 그리고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여러분의 미래와 자녀들의 미래가 다 주님의 주권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우연이 없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문답에 이 문구를 생각해보십시오.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시며.”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습니까? 우리가 종종 신앙 고백문으로 사용해온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이 구절이 주님께 대한 여러분의 신앙을 반영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이 환상을 보여주신데에는 믿음의 씨름을 하고 살아가는 1세기 말의 성도들을 격려하시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이것을 놓치지 않고 요한계시록을 통해 주시는 주의 말씀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시제의 문제: “그들이 왕 노릇하리로다”(10b; 마 28:18; 계 20:1-6)
여러분은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대위임령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대위임령을 주실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태복음 28:1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사도 요한이 하늘 보좌 환상에서 본 바, 어린 양께서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두루마리를 취하신 일이 먼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택한 백성의 구속을 성취하셨을 때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상고하는 본문에서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하리로다”라는 말씀이 이미 일어난 일인가, 혹은 언제 일어나게 될 일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 시제 결정이 요한계시록 전체를 해석하는 관점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언제 어린 양께서 두루마리를 취하셨습니까? 혹은 미래의 어떤 시점에 취하실 것입니까? 앞서 말씀드린대로, 이 일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택한 백성의 구속을 이루신 뒤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십사 장로들의 새 노래로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기 시작한 것은 언제입니까? 혹 언제 그 새 노래로 찬송과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까? 이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뒤에 일어났고 영원히 계속될 일입니다. 10절 상반절에서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라고 한 것은, 동사의 과거 시제가 말해주듯이, 이미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의 시제를 보지요.
‘그들’은 주님께서 위하여 죽으신 성도들,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로 삼으셨을 뿐 아니라,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동사의 시제는 분명히 미래 시제입니다. 그대로 받아들이면, 이 말씀은 성도들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는 일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 있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이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서 먼저 사본상의 문제를 잠깐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경 사본에 대한 이해가 많지 않기 때문에 사본에 대한 간단한 설명으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현존하는 성경의 원본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섭리 가운데 사도 요한이 쓴 요한복음이나 요한계시록의 원본을 남겨두지 않으셨습니다. 바울 사도의 서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본은 남아있지 않지만, 다양한 형태로 필사된 사본들이 무수하게 많이 남아있습니다. 요하네스 구텐베르크(1398-1468)가 15세기 중반 금속활자를 발명하기 전까지 모든 복사는 거의 베껴 쓰기 형태인 필사를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신학에는 사본학(寫本學)이라는 분야가 있는데, 이것은 부분적인 혹은 전체적인 많은 사본들을 가지고 원본이 내용을 추적하는 학문 분야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떤 사람들은 그렇다면 우리가 가진 성경이 성령으로 영감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는가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약성경의 경우, 5000여개가 넘는 수많은 사본들이 사소한 차이를 제외하면, 거의 일치하는 본문을 가지고 있으며 큰 의미의 차이를 가져오지 못하는 것들이라는 사실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말씀을 긴 역사 속에서 신실하게 보존해 주셨는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은 역사 속에서 많은 사람들에 의해 필사되었지만 놀랍도록 정확하게 보존되어 온 것입니다. 이것이 사본에 대한 간단한 설명입니다.
이제 본문을 보지요.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는 말씀은 미래 시제와 현재 시제가 둘 다 사본상의 지지를 받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현재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을 다스리고 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고 여긴다는 점에서 미래 시제를 선호하는 편이고 많은 성경번역본들도 미래 시제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 달리 생각해야 할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이것이 천년왕국에 대한 이해와 연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천년왕국에 대해서 들어보셨을 것이고, 여러분 중에는 이 주제에 관한 책을 읽어보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천년왕국은 요한계시록 20장(1-6)에서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고 사탄을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넣고, 성도들이 천 년 동안 왕 노릇한다는 내용에서 나온 신학적 개념입니다. 그런데, 그 ‘천 년’이 언제를 가리키며, 그것은 문자적 천 년을 의미하는가에 따라 해석이 갈리는데, 크게는 예수님의 재림이 천년 왕국 이전인가, 이후인가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뉩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천년 전에 있다고 보는 관점은 전천년왕국론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역사적 전천년설과 세대주의 전천년설(일명 세대주의)로 나뉩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재림이 천 년 이후라고 보는 후천년왕국론은 후천년설과 무천년설로 나뉩니다. 여기서는 예수님의 재림이 천 년 전인지, 후인지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성도가 왕 노릇하는 천 년 전이라고 보는 전천년왕국론의 입장에서 보면, 본문은 미래 시제로 읽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이 천 년 후라고 보는 후천년왕국론의 입장에서 보면, 본문은 현재 시제로 읽을 여지가 있습니다. 특히 후천년왕국론 중에서 천 년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천 년은 주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를 의미한다고 보는 무천년설은 교회가 지금 이미 나라와 제사장으로 묘사되고 있고 현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통치하고 있다고 봅니다. 이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는 현재 시제로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하도다”라고 읽어야 합니다. 이렇게 현재 시제로 읽을 것을 제안하는 학자는 그레고리 비일(Gregory K. Beale)인데, 그는 말합니다. “만일 그 다스림이 현재적인 것으로 이해된다면, 새 창조의 나라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현재 타락한 세상으로 들어왔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미 3:14에서 새 창조가 어떻게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현재 시작되었는지를 보았다. 이것은 신약 성경의 여러 곳에서 증언하는 내용들이다(고후 5:15-17; 갈 6:14-15; 엡 2:10, 15; 골 1:18).”(그레고리 비일, NIGTC 요한계시록 상, (새물결플러스), p.608).
에덴 동산에서 아담은 왕과 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았었습니다. 하지만 불순종함으로써 그 사명에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구원을 받을 때,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지만, 그들도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둘째 아담이고 참 이스라엘로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승리하셨고 이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 참 대제사장으로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심으로써 교회를 나라와 제사장들로 삼으셨고 그들로 지금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10절의 의미입니다.


2. 천사들의 찬송 (11-12; 왕하 6:14-17; 고전 1:18; 골 2:15; 고후 8:9; 고전 1:21,24; 히 12:2-3)
이렇게 이십사 장로들이 부르는 새 노래의 찬송이 마치자, 요한은 더욱 놀랍고 장엄한 광경을 보고 듣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요한계시록 5:11).”
보좌 주변에는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그들을 둘러 선 천사들을 보게 되는데,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입니다. 이것은 수억, 즉 셀 수 없는 숫자를 의미합니다. 요한에게 무수한 천사들을 보이시고 이것을 기록하게 하심으로써 1세기 말의 성도들이 보게 하심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비록 그들은 스스로가 약하고 적으며 힘이 없다고 느끼고 있었겠지만 “너희가 결코 적은 무리가 아니며 수많은 천군천사들과 함께 있으며 약하지 않다”는 하나님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이것은 아람 군대에 의해 포위 되었던 도단 성에서 선지자 엘리사와 그의 사환이 경험한 일과 비슷합니다. 아람 왕은 엘리사를 잡기 위해 말과 병거와 많은 군대를 보내 그가 있는 도단 성을 포위했습니다. 엘리사의 사환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이 광경을 보고는 절망합니다. 그 때 엘리사가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왕하 6:16).” 그리고는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왕하 6:17a).” 그러자 하나님께서 사환의 눈을 열어 보게 하시는데,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요한이 본 환상은 이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환상을 본 요한이나 1세기 말의 성도들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땅에서 왕 노릇하는 모든 시대의 성도들이 절망하지 않도록 눈을 열어 이것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환상은 하늘에서는 이기고 있고 땅에서는 지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결정되었고,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열쇠를 쥐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도들과 함께 지금 땅에서도 왕 노릇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요한은 셀 수 없는 천사들이 찬송을 하는 것을 듣습니다. 12절입니다.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요한계시록 5:12).”
전에 말씀드렸지만,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 1685-1759)은 대작 <메시아>의 그랜드 피날레를 장식하는 합창곡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을 작곡할 때, 이 본문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이십사 장로들의 새 노래 처럼, 천사들도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을 찬송합니다. 그 어린 양에게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라는 7중의 찬송을 돌립니다. 이 위대한 7중 찬송은, “능력을 남용하지 않으시고 부를 오용하지 않으시며 지혜와 힘으로 선을 행하실 그리스도는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너무나 합당하다”는 말입니다. 이 찬송의 내용에 담긴 놀라운 역설을 조금 묵상해 봅시다.
천사들은 먼저 ‘능력’을 어린 양께 돌립니다. 능력은 헬라어로 ‘뒤나미스(δύναμις)인데, 여기서 다이너마이트란 말이 나왔습니다.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는 약하심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고후 13:4). 십자가는 약함과 수치와 비참한 패배의 상징입니다. 천사들은 그 십자가에 죽으신 어린 양을 지금 찬송합니다. 찬송하면서 말합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십자가로 능력을 얻으셨다. 십자가는 어린 양의 능력이었다”라고 말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린도전서 1:18).”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회에게는 이렇게 썼습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로새서 2:15).”
만만 천천의 천사들은 지금 이 놀라운 십자가의 역설을 그들의 찬송에 담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부’를 어린 양께 돌립니다. 십자가는 가난을 보여줍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서는 실오라기 하나 걸칠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다 버리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후서 8:9).”
어린 양께서 십자가에서 가난해 지신 것은, 실오라기 하나 걸칠 수 없는 비참하고 가난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실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만유의 주, 만유를 소유한 부요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다’고 찬송합니다.
또 천사들은 ‘지혜’를 어린 양께 돌립니다. 십자가는 세상에서 미련함의 대명사였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어리석은 인생으로 여겨졌고, 십자가의 복음은 어리석은 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린도전서 1:21,24).”
천사들이 어린 양께 돌리는 ‘존귀’는 어떻습니까? 수치스럽게 십자가에 죽으신 어린 양은 최고의 존귀를 얻으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썼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브리서 12:2).”
1세기 말의 성도들만이 아닙니다. 우리도 이 땅을 사는 동안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브리서 12:3).”
천사들은 또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께 ‘영광’을 돌립니다. 죄와 저주의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당신이 위하여 죽으신 수많은 백성들에게서 영원한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끝으로, 천사들은 ‘찬송’을 받으시기 합당하다고 노래합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를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을 찬송하는 이 영광의 자리로 초대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여러분은 만만 천천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께 돌리는 그 장엄한 코러스가 들리십니까? 들리시기를 바랍니다. 요한이 본 것을 기록하게 하신 성령님께서 오늘 여러분에게 그것을 보게 하시고 듣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3. 모든 피조물들의 찬송 (13; 계 4:5; 5:6)
요한이 하늘에서 본 환상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13절입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요한계시록 5:13).”
이제는 이 찬송이 만만 천천의 천사를 넘어, 온 우주의 모든 피조계로 확장됩니다.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라는 표현은 온 세상, 우주 전체를 가리키는 고대인들의 관습적 표현인데, 그 관습적 표현을 넘어,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란 표현이 더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의 모든 피조계에 있는 피조물들이 예외 없이 합창을 합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이 찬송은 어린 양을 넘어 삼위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됩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는 성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어린 양’은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입니다. 이 찬송에 표면적으로는 성령 하나님이 등장하시지는 않지만, 성령 하나님은 ‘보좌 앞의 일곱 등불’로(계 4:5), 어린 양의 ‘일곱 눈’으로(계 5:6) 하나님의 통치와 그리스도의 구속을 대행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시기에, 모든 피조물의 찬송은 삼위 하나님께 돌리는 찬송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은 보좌에 앉으신 성부 하나님께 돌리는 찬송이었고 5장(1-12)은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께 돌리는 찬송이었는데, 이제 4-5장의 보좌 환상은 성 삼위 하나님께 돌리는 찬송으로 마치게 됩니다(5:13-14).


4.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의 화답 (14)
우주 가운데 울려 퍼지는 이 장엄한 코러스에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화답합니다. 14절입니다.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요한계시록 5:14).”
요한이 본 하늘 보좌 환상은 피조물을 대표하는 네 생물과 성도들과 교회를 대표하는 이십사 장로들의 화답으로 마치게 됩니다.


5. 교훈과 적용
우리는 성도가 이 땅에서 왕 노릇한다는 말씀의 시제를 살펴보았습니다. 성도들은 미래 종말의 어느 날, 왕 노릇하게 될 것만이 아니라, 이미 지금 현재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우리는 여전히 약하여 건강을 잃기도 하고, 가난하여 물질을 누리지 못하기도 하며, 존귀함 대신 수치를 경험하기도 하고, 어리석은 자로 여김을 받으며 찬송과 영광 대신 비난과 조롱을 받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어떻게 왕 노릇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가르칩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왕 노릇하는 것은 십자가의 역설을 경험하는 왕 노릇이며, 믿음으로 누리는 왕 노릇이라고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한 순간도 만왕의 왕이 아니신 적이 없으셨지만, 이 땅에서는 십자가의 길과 삶을 보여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성도는 그렇게 이 땅에서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우리가 영광을 입으신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는 존재요 신분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 우리의 현실을 이기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한 사례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루마니아는 1965년부터 공산 정권이 무너지던 1989년까지 24년 동안,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라는 악랄한 공산 독재자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그 기간에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무섭고도 혹독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들 중에 요세프 쏜(Josef Tson)이라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자신을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비밀경찰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당신의 최고의 무기는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의 최고의 무기는 죽는 것입니다. 선생님, 당신은 내 설교가 테잎으로 전국에 퍼져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당신이 나를 죽이면 나는 내 피를 나의 설교 테잎들에 뿌리게 될 것입니다. 이후에 내 설교 테잎을 듣는 사람들은 “들어보는 게 좋겠어. 이 사람은 자기의 피로 이 설교를 인쳤잖아”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 설교 테잎들은 전보다 열 배나 더 크게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자 이제 나를 죽이십시오. 그러면 나는 궁극의 승리를 얻을 것입니다.” (데렉 티드볼, 십자가: BST 시리즈 (IVP, 2003), p.459-460)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는 승리, 성도가 이 땅에서 왕 노릇하는 것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요한계시록 4-5장은 성경 전체 중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요한이 하늘에서 본 이 환상은, 단순히 종말에 있을 미래적 일만이 아니라, 현재적이면서 미래적인 내용입니다. 장엄한 천사들의 찬송과 예배는 오늘 우리의 찬송과 예배와 잇닿아 있는 것이고, 함께 드려지는 것이며 영원히 그러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아십니까?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을 찬송하는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속해 있습니까?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때, 여러분은 그 영광의 자리에 속할 수 있는 확신이 있습니까?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고전 6:9-10).” 교회는 정죄받았던 죄인들로 구성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당함이나 합당함이 아니라, 우리 대신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께서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고 노래하고 찬송해야 마땅합니다. 오만한 박해자였던 바울이 자기를 위해 자신을 버리신 그리스도를 높여 찬송하듯이, 동일한 은혜를 받은 우리도 그리스도만을 높여 찬송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찬송이 그렇게 그리스도께 드려진다면, 여러분은 그날에도 그 영광의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