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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34). 네 말과 말 탄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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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34). 네 말과 말 탄 자들

요한계시록 6:1-8, 마가복음 13:7-8, 로마서 1:24,26,2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05-17

말씀내용
오늘부터 우리는 4-5장의 하늘 보좌 환상에 이어지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심판 시리즈를 차례로 상고하게 될텐데, 그 내용이 6장에서 16장까지 이어집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일곱 인 심판 중에서 첫째부터 넷째 인 심판까지인데, 해석이 어려워서 학자들 간에도 해석의 이견이 가장 많은 본문에 속합니다. 먼저 6-16장의 큰 그림을 간단하게 살펴본 뒤에,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1. 일곱 인—일곱 나팔—일곱 대접 심판 시리즈 (6-16장)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앉으신 성부 하나님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여 인을 떼시면서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일곱 인-일곱 나팔-일곱 대접 심판이 세상을 향하여 쏟아지게 됩니다. 이 세 개의 일곱 심판 시리즈를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의 패턴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번개와 음성과 우레 그리고 지진을 동반하면서 각각의 심판 시리즈가 마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8:5과 11:19 그리고 16:17-18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요한계시록 8:5).”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요한계시록 11:19).”
“일곱째 천사가 그 대접을 공중에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이르되 되었다 하시니 번개와 음성들과 우렛소리가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얼마나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온 이래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요한계시록 16:17–18).”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는 상징들인데, 이 모든 심판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늘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심판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백성들에게 강림하실 때의 장면까지 가지 않더라도(출 19:16), 요한은 하늘 보좌 환상을 볼 때,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는 것을 보고 들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계 4:5).
둘째로 구조적 패턴인데, 각각 일곱 개로 구성되는 심판 시리즈는 처음 네 개와 뒤의 세 개가 분리되고, 처음 네 개는 유사한 패턴을 가지지만, 뒤의 세 개는 각각 독립적입니다. 가령, 오늘 우리가 상고할 처음의 네 인 심판에는 네 명의 말 탄 자들이 등장하고, 네 나팔 심판(8:7-12)과 네 대접 심판(16:1-9)에서는 세상의 네 지역인 땅, 바다, 강, 하늘에 쏟아지는 심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 나팔, 대접 심판에서 뒤의 세 개의 심판 내용은 유사성을 가지지 않는 각각 독립적인 내용을 가집니다.
셋째로, 일곱 인과 일곱 나팔 심판에서 보이는 패턴인데, 여섯째와 일곱째 심판 사이에 막간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일곱 인 심판에서 여섯째 인 심판과 일곱째 인 심판의 사이에 7장의 막간의 환상이 나옵니다. 또 여섯째 나팔 심판과 일곱째 나팔 심판 사이에 10:1-11:14의 막간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일곱 인과 일곱 나팔 심판에서는 최종 심판이 있기 전에 회개의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하지만 일곱 대접 심판에서는 이 막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넷째로, 심판의 범위와 강도에 있어서 세 개의 일곱 심판 시리즈는 점차 강화되고 확대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가령, 인 심판에서는 땅의 1/4이 죽는다면, 나팔 심판에서는 땅의 1/3이 죽습니다. 그리고 대접 심판에서는 땅의 모든 생물에게 심판이 미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 하나님의 심판이 점진적으로 강도를 더해간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큰 그림을 가지고, 오늘 일곱 인 심판의 네 인 심판으로 시작해서 세 개의 심판 시리즈를 모두 살펴보도록 할 것입니다.


2. 네 인 심판 해석의 어려움
오늘 우리는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어려운 본문을 상고합니다. 특히 본문에 등장하는 네 명의 말 탄 자는 요한계시록의 가장 유명한 상징 중 하나인데, 역사적으로 이들에 대한 해석이 정말 변화무쌍합니다. 그 해석의 어려움에서 먼저 세 가지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첫째, 이 심판들이 언제 일어나는 심판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늘 보좌 환상이 시작되는 4장에서 신실한 교회가 휴거를 했다고 주장하는 세대주의의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렇다면 환난을 포함하는 이 심판의 시리즈가 세상에 부어질 때, 교회도 그 가운데 함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언제나 동일한 것으로서 하나님은 당신께 반역하는 세상을 심판하시면서 동시에 당신의 백성을 연단하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하는 일곱 심판 시리즈들은 미래 종말의 어떤 때가 아니라, 이미 예수님의 초림에서 시작되었고 미래의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의 기간에 일어나는 심판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감람산 강화에서 우리는 본문의 네 인 심판과 비슷한 내용을 발견합니다.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마가복음 13:7–8; 참고 마 24:6-8; 눅 21:9).” 이런 일들은 이미 주님이 육신으로 땅에 계실 때에도 있었고 재림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것이 종말의 마지막 신호가 아니라 시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번째로, 네 인의 심판은 역사적으로 시간 순서를 가지고 진행되는 심판인가, 아니면 동시에 일어나는 심판들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네 인 심판은 전쟁과 피흘림, 기근과 죽음을 의미하는데, 이 일들은 순서대로 일어나는 일들이 아닙니다. 교회 시대 전체에 걸쳐 일어나는 심판들인 것입니다.
세번째는, 네 인 심판에 등장하는 말들이 색깔로 구분되는데, 각각의 의미와 그 말 탄 자들의 정체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 말들의 색깔의 의미를 본문의 상징과 암시를 따라 해석하고 말 탄 자들의 신원을 생각하겠지만, 로버트 마운스(Robert Mounce)와 크레이그 키너(Craig Keener)의 말을 주의 깊게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 이 환상을 들은 자들은, 네 가지 색깔의 말 각각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토론하기 보다, 분명 전쟁과 피 흘림과 기근과 죽음이 자신들의 상상의 무대를 가로질러 맹렬하게 달려오는 것을 보고 공포에 질렸을 것이다. 환상은 분석하기 보다 경험하는 것이 더 낫다.”(로버트 마운스).
“네 말탄 자들은 심판의 천사들로 보이지만 이들의 상징적 문학적 기능을 고려할 때, 그들의 정체가 지나치게 강조되어서는 안 된다.”(크레이그 키너)


3. 네 말과 말 탄 자들
이제 네 인 심판에 나오는 네 말과 말 탄 자들을 살펴볼텐데, 이 심판들은 역사 전체에 걸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다른 본문들과 마찬가지로, 사도 요한은 성령의 영감으로 이 본문을 기록하면서도 구약의 본문들을 인유하는데, 특히 네 말에 관한 본문은 스가랴 1:8-17과 6:1-8입니다. 많은 것을 스가랴의 말씀에서 가져오지만, 언제나처럼 사도 요한은 성령에 이끌려 원래의 이미지를 자유자재로 변형합니다. 가령 스가랴의 말들은 땅을 살피는 기능으로 보냄을 받지만, 요한계시록의 말들은 심판을 행하라고 보냄을 받는 것입니다.

A. 첫째 인—흰 말과 그 탄 자(1-2)
어린 양께서 첫째 인을 떼시자, 네 생물 중 하나가 우렛소리 같이 ‘오라’고 말합니다. 네 인의 심판에서는 각각의 경우에 네 생물들이 ‘오라’고 불러내면(6:1,3,5,7), 말 탄 자들이 말들과 함께 등장을 하는데, 이는 네 생물이 하나님 보좌의 수행원으로서(4:6; 5:6,11; 7:11; 14:3) 천상의 경배를 이끌 뿐 아니라(4:8-9; 5:8-10,14; 19:4) 신적 심판을 수행하는 존재임을 보여주며, 또한 이 모든 심판이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첫째 인에서는 흰 말, 백마가 등장합니다. 백마는 보통 로마의 장군들이 개선 행진을 할 때 승리를 기념하여 타는 말이었습니다. 뒤에 보면 주님께서도 백마를 타고 등장하십니다(계 19:11-16). 백마는 승리를 상징합니다. 말 탄 자는 활을 가졌는데, 활은 로마의 무기는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그리스나 아나톨리아, 근동 등지에서 사용된 무기인데 특히 파르티아 사람들은 궁사(弓師)로 유명했습니다. 파르티아인들은 주전 55년과 주후 62년 두 차례 로마군을 패배시킴으로써 로마가 유일하게 무서워했던 존재였고, 백마는 이들의 전매특허였습니다. 백마를 탄 자는 면류관을 썼는데, 이 면류관은 요한계시록 19장에서 백마를 타신 그리스도의 왕관과는 구별되는(계 19:12) 승리자에게 주는 월계관을 가리킵니다. 이 말 탄 자는 ‘이기고 또 이기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백마와 백마를 탄 자는 누구를 가리킬까요? 이 해석이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입니다. 첫째는 그리스도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근거는 19장에서 백마를 탄 자는 명백히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계 19:11-16). 흰 색은 요한계시록에서 거룩을 상징하며 부정적 의미로는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도 이 해석을 지지합니다. 또 둘째 인을 떼면서 시작되는 피흘림과 기근과 죽음의 심판이 오기 전에,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져야 한다는 말씀도 이 해석을 지지하는 근거가 됩니다(막 13:10; 마 24:14). 면류관은 주권이고 활은 복음을 상징합니다. 이 견해는 2세기 말의 이레네우스가 주장했고 현대에는 윌리엄 헨드릭슨이나 조엘 비키가 이 해석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정반대로 백마를 탄 자는 적그리스도라고 보는 견해가 요즘 더 많은 학자에게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 본문과 요한계시록 19장의 백마를 탄 그리스도의 본문은 백마를 탔다는 것 외에 공통점이 없다고 말합니다. 활과 입에서 나오는 칼의 차이, 월계수관과 왕관의 차이 등을 주목할 뿐 아니라, 첫번째 인의 백마 탄 자는 정복의 맥락을, 19장에서는 의로운 심판을 말한다고 이해합니다. 이들은 본문의 백마 탄 자는 사탄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모습이라고 봅니다(고후 11:14). 주님께서도 거짓 그리스도가 올 것을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마태복음 24:4–5, 참고, 막 13:5-6; 눅 21:8).”
이뿐 아니라, 네 말과 말 탄 자들의 등장은 하나의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할텐데, 첫번째만 긍정적이고 나머지 세 경우가 부정적인 심판을 보여준다는 것은 맥락상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봅니다. 또 이 말 탄 자들은 사탄 편의 파괴행위자들로서 에스겔 38-39장의 곡과도 연결되는 본문으로 봅니다. 또 백마 탄 자의 이김도 하나님께서 짐승이 성도들과 싸워 이기도록 허용하신 것과 일치합니다(계 13:7). 백마 탄 자를 적그리스도로 보는 해석을 조금 일반화해서, 일반적인 군사적 정복자들로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로마트 마운스와 크레이그 키너의 말을 염두에 두면서, 이 네 말이 한 팀으로 움직이는 심판의 역사라는 맥락을 간주한다면, 백마 탄 자는 그리스도라기 보다 적그리스도, 사탄의 역사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는 백마와 백마 탄 자가 가져오는 심판의 이미지는 전쟁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B. 둘째 인—붉은 말과 그 탄 자(3-4)
어린 양이 둘째 인을 떼실 때 둘째 생물이 다시 ‘오라’고 하자 붉은 말과 탄 자가 등장합니다. 탄 자는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거하고 서로 죽이게 하며 또 큰 칼을 받습니다. 말의 붉은 빛은 분명히 피흘림을 상징하는데, 전쟁에서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둘째 인 심판은, 단순히 군사적 정복을 넘어 내전과 사회 안의 유혈사태를 강조합니다. 화평을 제거하여 서로 죽이게 한다는 표현은 사회 안에서의 심각한 분열상을 암시하고 ‘죽이게 한다’는 말은 전쟁에서의 죽음 보다, 한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야만적 학살이나 처형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총 10회 사용되는데(요한일서 2회, 요한계시록 8회)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라고 할 때(계 5:6,9,12)와 성도들의 죽임 당함(순교, 계 6:9)이나 형제간의 살인(요일 3:12)에 대해서 사용됩니다. 이것은 둘째 인의 심판이 교회에 대한 박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주님은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과거와 현재의 박해 뿐 아니라 장차 올 환난에 대해서도 언급한 바 있습니다.

C. 셋째 인—검은 말과 그 탄 자(5-6)
이제 어린 양께서 세번째 인을 떼시고 세번째 생물이 오라고 하자, 검은 흑마와 그 탄 자가 등장합니다. 그의 손에 가진 저울은 기근을 의미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저울은 기근과 관련해서 등장합니다(겔 4:16; 레 26:26). 그런데 갑자기 네 생물 사이에서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는 또 한 번의 음성이 들립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그것으로 한 사람의 하루 양식인 밀 한 되나 세 사람의 하루 양식인 질 낮은 보리 석 되를 살 수 있다는 말은 원래 가격에서 8-16배나 폭등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여기에도 판이한 두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감람유와 포도주를 부자들만 누리는 사치품으로 보는 견해인데, 그렇다면 이 기근은 사회의 부유층에는 영향을 그다지 미치지 못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극심한 기근이 될 것입니다. 어느 정도 이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감람유와 포도주를 기본생활용품으로 보는 입장도 있는데, 이 입장에서 보면 사회적 불평등이라기 보다, 보편적이고 장기간의 재난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제한을 두시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흑마로 상징되는 셋째 인의 심판은 보편적으로는 경제적 재난을 의미하는데, 믿음을 지키고 살아가려는 신자들이 불신앙의 사회에서 겪을 수 있는 불이익과 손해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소아시아의 신자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으면 상업 길드에서 제명되므로 경제적 불이익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보았고(계 2:14), 뒤에서는 짐승의 표를 받지 않으면 매매와 같은 경제 활동을 할 수 없게 된다는 말씀도 보게 될 것입니다(계 13:17).

D. 넷째 인—청황색 말과 그 탄 자(7-8)
이제 어린 양께서 네번째 인을 떼시자, 청황색 말과 그 탄 자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청황색은 시체의 창백한 빛, 엷은 녹색을 가리킵니다. 여기서는 말 탄 자의 이름이 사망이라고 언급되고 음부(하데스)가 그 뒤를 따르더라고 합니다. 음부는 죽은 자의 거처인데, 여기서는 마치 음부가 사망을 따라 다니면서 시체들을 모아 담는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여기서 사망은 질병이나 전염병을 가리킨다고 보는 해석이 일반적입니다. 근거는 8절 하반절에,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이더라”는 말씀인데, 이 말씀은 에스겔 14:21의 인유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내가 나의 네 가지 중한 벌 곧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전염병을 예루살렘에 함께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중에서 끊으리니 그 해가 더욱 심하지 아니하겠느냐(에스겔 14:21).”
사도 요한은 전염병을 사망이라고 고쳐 썼습니다. 또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은 ‘그들’은 네 말 탄 자 모두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은 이 네 인 심판 전체를 정리하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전쟁과 피흘림과 기근으로 주어지는 심판의 끝은 죽음입니다.


4. 교훈과 적용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보여주신 네 인의 심판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인류가 살아온 역사와 우리의 현실세계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전쟁과 분열, 피흘림과 경제적 기근으로 죽음에 이르는 문제가 아닙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본 것들이 과연 언젠가 벌어지게 될 일들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역사와 우리 인생에서 수없이 많이 보아온 일들입니다.
전쟁의 역사는 일일이 헤아릴 수 없습니다. 히틀러가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홀로코스트, 스탈린이나 모택동이 수천만 명씩을 학살한 일, 폴 포트가 200만 명의 캄보디아인들을 죽인 일, 르완다의 투치족 학살, 40년 전 광주에서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이 민간인을 학살한 일 등 이것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지금도 지구상의 어느 곳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우리나라는 여전히 남과 북이 대치중이며 남한사회 안에서도 정치적으로 심각한 분열상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온갖 갑질로 얼룩져있고 n번방의 인권유린과 학대는 입에 담을 수도 없을 지경입니다. 기근은 어떻습니까? 2019년 세계기아지수(Global Hunger Index)에 의하면, 2015년 기아 인구는 7억 8천 5백만 명에서 2018년에는 8억 2천 2백만 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이것이 정말 음식이 부족해서 생기는 문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불균형의 문제이고 인간 탐욕의 문제입니다. 지구상의 한곳에서는 엄청난 양의 음식들이 버려지지만, 다른 한 곳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갑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현실을 정직하게 직시한다면, 이 세상은 정말 혼란스러운 전쟁터 같고, 지옥 같이 무섭습니다.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1979년작 [지옥의 묵시록]에서 윌라드 대위는 베트남의 전쟁터에서 미친듯이 쏘고 퍼부어대는 병사에게 묻습니다. “이보게, 누가 이곳의 지휘관인가?(Hey soldier, do you know who's in command here?)”
우리가 이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누가 엉망이 되어 돌아가는 이 세상의 지휘관입니까? 성경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지휘관이시고 그분이 역사의 고삐를 쥐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세상은 왜 이 모양입니까? 성경의 대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심판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로마서 1:24,26,28).”
이것이 세상에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지휘 하에 시작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주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의 욕심과 정욕과 더러움을 제한된 형태 나마 허용하심으로써 심판을 행하십니다. 그랜트 오즈번(Grant Osborne)은 말합니다. “네 기수는 함께 떠다닌다. 그들의 행동은 이기기 위한 욕심에서 내전으로, 흉년으로, 재앙 및 사망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심판을 쏟아 붓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부패가 돌고 돌도록 허용하신다. 죄는 스스로 드러나고 자기 파괴에 이르므로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통상적인 주제다.”(p.361)
오늘 본문에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심판의 고삐를 쥐고 계심을 보여주는 실마리들이 있습니다. 흰 말을 탄 자는 면류관을 받았다고 했는데, 여기 ‘받고’라는 말은 하나님의 활동을 나타내는 신적 수동태입니다. 말 탄 자들은 주님으로부터 허락을 받아서 심판을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백마 탄 자에게 면류관을 주셨고, 붉은 말을 탄 자에게는 화평을 제거하고 서로 죽이게 하는 허락을 주셨으며 큰 칼도 주셨습니다. 청황색 말을 탄 자는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 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심판을 지휘하십니다. 또 이 말들과 탄 자들은 네 생물의 명령에 따라 움직입니다. 감람유와 포도주를 해치지 말라는 것도 주님께서 친히 그 심판의 범위와 강도를 한정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망이라는 흑마 탄 자를 음부가 따른다고 했는데, 주님은 친히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십니다(계 1:18). 말 탄 자들은 다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행동합니다.
지금도 온 세상이 전례 없는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조심해야 하지만, 분명히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한 형태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또한 이제 때가 가까왔다고 말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막 13:8).
이 모든 것의 열쇠는 주님이 쥐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마땅합니까? 이 모든 것이 세상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일지라도, 우리에게는 당신의 백성을 정결하게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일 뿐입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이렇게 일어난다면,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어느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없이 일어나는 일이 있겠습니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우리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만나도 주의 자녀들은 두려워할 것이 아닙니다. 담대하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이미 세상을 이기셨습니다(요 16:33). 그리고 이 온 세상을 통치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