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SERMON
최근설교 및 강의

Home > 최근설교 및 강의 > 요한계시록 강해 2019 - (35). 하늘 제단 아래 그 영혼들

요한계시록 강해 2019 - (35). 하늘 제단 아래 그 영혼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요한계시록 강해 2019 - (35). 하늘 제단 아래 그 영혼들

요한계시록 6:9-11, 디모데후서 1: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05-24

말씀내용
1. 말씀을 대하는 자세
여러분은 정직하게 성경을 읽고 계십니까? 그리스도인에게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고 믿음과 삶의 유일무이한 기준입니다. 문제는 이 명제에 동의하는가가 아닙니다. 이것을 정말 믿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정말 믿는다면, 그 말씀을 정직하게 읽고 받아들일 것이고 그 내용이 삶에 반영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성경은 그저 우리의 지적 호기심의 대상이거나 뭔가를 배울 수 있는 책이 아니라, 우리의 죽고 사는 문제를 가늠하는 책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에서 특별히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가 시작하는 본문을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도, 남들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여긴다면, 이 말씀은 그저 한 시간 듣는 것으로 끝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이 말씀을 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하늘 성전과 제단(9; 히 8:5; 시 11:4; 사 6:1; 합 2:20; 미 1:2; 계 11:19; 14:17; 15:5; 16:17; 8:3)
오늘 우리는 다섯 번째 인 심판을 살펴볼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 내용을 읽어보면, 앞의 네 인 심판에서와는 달리 심판과 큰 관련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앞의 네 인 심판이 땅에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심판을 그리고 있었다면, 이제 무대는 땅에서 하늘로 옮겨집니다. 어린 양이 다섯째 인을 떼시자 요한은 하늘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을 보게 됩니다. 요한은 먼저 하늘에 있는 제단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하늘을 성전으로 보는 구약의 관점이 반영된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만들게 하신 성막은 본래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이었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히브리서 8:5).”
이와 같이, 구약성경에서 하늘을 성전으로 보는 관점은 여러 군데에서 암시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시편 11:4).”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이사야 6:1).”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하박국 2:20).”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 땅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들아 자세히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언하시되 곧 주께서 성전에서 그리하실 것이니라(미가 1:2).”
요한계시록은 구약성경의 이런 관점을 여러 차례 반영합니다.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요한계시록 11:19).”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역시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요한계시록 14:17).”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요한계시록 15:5).”
“일곱째 천사가 그 대접을 공중에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이르되 되었다 하시니(요한계시록 16:17).”
하늘이 성전이라면, 거기에는 제단도 있을 텐데, 지금 요한이 그것을 보고 있습니다. 지상의 성막과 성전에는 번제단과 분향단, 두 개의 제단이 있었는데 여기서 요한이 본 제단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제단 아래서 순교자들의 영혼을 보았다는 것이, 제단 아래 뿌려지곤 했던 희생 제물의 피를(레 4:7; 출 29:12) 암시한다면 요한이 본 제단은 번제단일 것입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의 영혼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제단은 분향단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8:3입니다.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요한계시록 8:3).”
이렇게 요한이 본 제단이 놋제단이나 분향단을 가리킬 수 있지만, 우리가 반드시 땅의 성소 그림에 제한하여 한 가지를 결정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이 본 제단이 번제단과 분향단의 두 기능을 모두 보여준다면, 그 둘 다를 의미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3. 죽임을 당한 영혼들 (4,9,8,11; 8:3-5; 9:13)
요한이 제단 아래서 본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순교한 성도들의 영혼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네 말과 말 탄 자들로 인한 심판의 과정에서 순교한 성도들입니다. 4절의 ‘죽이게 하고’와 9절의 ‘죽임을 당한’은 같은 단어(σφάζω)가 사용되었습니다. 이미 보았듯이, 이 단어는 단순히 전쟁에서 죽거나 사고나 자연사의 죽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같이 무참하고 야만적으로 죽임을 당하는 죽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또 8절의 ‘죽이더라’와 11절의 ‘죽임을 당하여’가 같은 단어(ἀποκτείνω)입니다. 이 단어도 ‘살해하다, 죽이다’라는 뉘앙스가 강한 단어입니다. 이런 단어들의 의도적 사용은 6:1-8의 네 인의 심판과 6:9-11의 다섯째 인의 내용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즉 네 인의 심판에서 교회가 핍박과 환난을 겪게 된다는 내용을 암시합니다. 하늘 제단 아래 순교자들의 영혼은 둘째 말 탄 자의 공격으로 ‘죽임을 당하고’ 넷째 말 탄 자의 공격으로 살해를 당한 자들입니다.
이들이 하늘 제단 아래 있다는 것은 어디쯤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하늘의 제단은 하나님의 임재 또는 하나님의 보좌와 동등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치 금향단이 지성소의 언약궤 바로 앞 휘장 밖에 놓여졌던 것처럼 말입니다. 먼저 요한계시록 8:3-5을 보지요.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요한계시록 8:3–5).”
이것은 성막의 금향단이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하는 지성소의 언약궤 앞에 있던 것을 연상하게 하는 말씀인데, 9:13도 유사한 내용을 보여줍니다.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들으니 하나님 앞 금 제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서(요한계시록 9:13).”
즉, 순교자들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곳이 아니라, 보좌 바로 앞에서 자신들의 기도를 올려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4. 죽임을 당한 영혼들의 기도(10; 행 7:60; 시 79:10; 롬 12:19; 마 6:10; 계 3:10)
제단 아래 있는 그 영혼들은 큰 소리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10절이 기도의 내용을 보여줍니다.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요한계시록 6:10).”
그들은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라고 부름으로써 완전한 주권을 가지시고 거룩함과 참됨으로 그 주권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을 부르는데, 이 기도는 한 마디로 신원(伸寃)해달라는 간구입니다. 그러나 신약 교회의 첫번째 순교자, 스데반의 마지막 기도가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였고(행 7:60) 스데반도 하늘 제단 아래 죽임을 당한 영혼들 가운데 있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순교자들의 이 기도를 단순히 개인적인 원수를 갚아 달라는 간구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순교자들의 기도는 시편 79:10의 인유입니다. “이방 나라들이 어찌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나이까 주의 종들이 피 흘림에 대한 복수를 우리의 목전에서 이방 나라에게 보여 주소서(시편 79:10).”
이것은 개인적 복수를 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성에 대한 염려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공의를 갈망하는 간구입니다. 하늘 제단 아래 순교자들의 영혼은 로마서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로마서 12:19).”
비통한 복수가 아니라 정당성을 입증해달라는 간구입니다. 인간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죽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법정에서 자신들의 정당함과 하나님의 공의를 입증해 달라고 하는 간구입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주님이 가르치신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기도이기도 합니다(마 6:10).
순교자들은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은 세상에 사는 인류 전체를 가리키지 않고, 하나님께 적대적인 인류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마이클 윌코크(Michael Wilcock)는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이 용어는… 하나님의 말씀과 증거를 붙잡는 사람들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현재 세상 질서를 편하게 느끼는' 사람들을 뜻한다.”(BST시리즈-요한계시록강해(ivp,2015))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주는 메시지에서도 이런 표현이 있었습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요한계시록 3:10).”
같은 의미입니다. 이외에도 여러 차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 표현은 모두 같은 의미로 이해하면 됩니다(8:13; 11:10; 13:8,14; 17:8).


5. 하나님의 때(11; 7:9; 히 12:23)
이제 순교자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볼까요? 11절입니다.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요한계시록 6:11).”
먼저 하나님께서는 그들 각각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십니다. 이것은 흰 색의 발에 끌리는 긴 예복으로서 존귀함과 고귀한 신분을 상징합니다. 비록 신원의 날은 더 기다려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순교한 영혼들의 정당성을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흰 두루마기는 더 많은 것을 의미합니다.
흰 옷은 먼저 의로움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7:9에서도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6:11과 같은 옷입니다. 흰 옷은 그리스도의 피로 씻은 옷이지 순교의 공로로 얻은 옷이 아닙니다. 순교자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흰 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흰 옷은 순결을 상징합니다. 이는 환난의 불로 연단 받은 믿음의 인내가 낳은 순결함입니다. 하늘에 있는 순교자의 영혼들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후 자신들의 성화가 완성된 신자들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들을 가리켜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이라고 말했습니다(히 12:23).
또 흰 옷은 승리를 상징합니다. 로마 황제들은 개선 행진이 있을 때 승리를 기리기 위해 흰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순교자들은 땅에서 죽임을 당할 때 실패한 것처럼 보였지만, 하늘에서 그들은 숭리자들의 흰 옷을 입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각각 흰 두루마기를 주시면서, “아직 잠시 쉬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직은 그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때는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는 때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까지 더 많은 순교자들이 있을 것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순교자들의 특정 숫자를 갖고 계시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분에 따라 일하시지 않고 정해진 계획과 뜻을 갖고 일하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 계획과 뜻은 지금 어린 양이신 주님께서 인을 떼고 계신 그 두루마리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잠시 동안 쉬라’고 말씀하시는데, ‘잠시’라는 말은 임박한 역사의 종말을 암시하지만, 하나님의 잠깐이 인간에게는 긴 세월일 수도 있다는 점도 유념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연(delay)’의 주제는 다섯째 인의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여섯째 인이 떼어지고 일곱째 인이 떼어지기까지 주어지는 7장의 막간도 그 지연의 표시로 볼 수 있습니다. 지연의 기간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기까지 남아있는 기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성취될 것입니다.


6. 교훈과 적용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적용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A. 성도의 기도와 하나님의 심판(10; 8:3-5)
첫째는 하나님의 심판과 성도들의 기도의 상관관계에 대한 교훈입니다. 사실 다섯째 인의 내용은 땅에 쏟아지는 심판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다섯째 인이 떼어지자 요한은 이 땅에서 순교한 영혼들이 하늘 제단 아래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점에서 다섯째 인은 이 세상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심판이 성도들의 기도와 어떤 연결이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5:8에서 이십사 장로들이 성도의 기도를 의미하는,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다고 한 묘사에서도 살짝 암시되었었고, 8:3-5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요한계시록 8:3–5).”
일곱 인 심판이 마치고 일곱 나팔 심판이 시작되는 장면에 등장하는 이 내용은, 성도의 기도가 하나님의 심판과 직결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오늘 본문 10절에 기록된 것입니다.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요한계시록 6:10).”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이 내용은 이방인의 기도가 아닌 성도의 기도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성도들의 기도는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목적인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방인의 기도의 특징입니다. 성도가 일용할 양식으로 대변되는, 경제적 문제와 어려움을 놓고 기도하면 안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도의 삶과 기도의 목적이 무엇이냐가 중요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목적이 자기 목적이 되고, 하나님의 뜻이 자기 뜻이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구합니다. 그 기도의 향연이 하늘 보좌에 드려지면서 ‘땅에 거하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의 기도와 하나님의 심판의 상관관계가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 이 이상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성도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무엇을 최우선의 기도제목으로 삼아야 할지를 보여주지 않습니까?

B. 죽임을 당한 영혼들은 누구인가? (1:9; 7:9,14; 마 16:24; 24:9; 딤후 3:12; 행 14:22; 벧전 4:12; 계 12:11)
두번째 교훈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누구인가 와 관련됩니다. 아벨로 시작해서 구약 시대의 순교자들과, 스데반, 야고보와 다른 사도들을 포함한 1세기의 순교자들이 거기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역사 이천 년 동안 죽임을 당한 많은 순교자들도 거기에 더해졌을 것입니다. 3세기의 교부 터툴리안(155-240)은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 되었다고 말할 만큼,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인정되는 4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처음 300년 동안 초대교회는 극심한 박해를 겪었고 많은 순교자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놀라운 사실은 지난 세기인 20세기 10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과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은 이전 열 아홉 세기에 죽은 순교자들을 합한 숫자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순교자들의 숫자는 차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하늘 제단 아래 그 영혼들’은 교회 역사에 순교한 분들을 가리킨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까요?
그레고리 비일(Gregory Beale)은 본문에서 순교자는 비유적 표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당하는 모든 성도들이라는 겁니다. 비록 요한은 당시 살아있었지만, 그도 역시 말씀과 그 증거로 인하여 밧모 섬에 유배옴으로써 예수님의 환난과 참음에 동참하는 사람이었습니다(1:9). 그리고 2-3장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는 주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온갖 형태의 고난과 박해 아래서 살아가는 모든 교회를 대표합니다. ‘죽임을 당한 영혼들’은 일찍이 죽음을 당하신 어린 양의 고난에 동참하고 그 어린 양을 따르는 자들, 곧 신실한 성도들입니다.
또 11절에 ‘그 수가 차기까지’라는 말은 7장에서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와 연결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7:9).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7:14이 이들을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라고 묘사한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제가 설교의 서두에 우리가 성경을 정직하게 읽고 있는가를 물은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요한이 본 바 구원받은 셀 수 없는 큰 무리의 성도들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희희낙락하며 즐기다가 온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의 조건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마 16:24). 또 주님은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마태복음 24:9)”고 경고하셨습니다.
우리가 정직하게 성경을 읽는다면, 신자들이 이 땅에서 겪는 환난에 대한 말씀들이 적지 않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디모데후서 3:1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사도행전 14:2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베드로전서 4:12).”
그래서 제임스 보이스(James M. Boice)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볼 때, 놀라운 것은 그 오랜 역사 속에서 내내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주님은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상급을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이기는 자입니까? 요한계시록 12:11입니다.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요한계시록 12:11).” 주의 말씀과 믿음을 지키려고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은 자들이 이겼다고 말씀합니다. 이들이 제단 아래 있는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 땅의 신실한 성도들입니다.
순교자를 의미하는 영어 martyr 는 헬라어 마르튀스(μάρτυς)에서 파생한 단어입니다. 마르튀스의 일차적 의미는 증인입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이 가진 증거 때문에 죽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 영어 단어의 의미는 증인이 아니라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신약학자 죠지 엘든 래드(George E. Ladd)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본질상 순교자다. 요한은 여기서 고난을 당한 모든 신자들을 보고 있다.” 또 필립 휴즈(Philip E. Hughes)의 말입니다. “교회의 역사에서 세상은 주님의 신실한 증인들을 죽임으로써 침묵하게 할 수 있었고 그들의 죽음은 하나님의 패배요 교회의 후퇴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 죽음은 거듭될 때마다 복음의 진보로 이끌었습니다.”

C.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7:14; 딤후 1:8)
본문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그들은 구속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신실한 신자이며,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들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고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입니다(계 7:14).
이 말씀을 정직하게 읽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이 땅에서 잘 즐기고 살다가 천국에 간다는 막연한 생각을 내려놓아야 하지 않을까요?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까? 우리는 과연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성도들입니까?(계 1:9) 믿음을 지키기 위해 손해를 기꺼이 감수했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 자기를 부인한 일이 언제입니까? 만일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데도 불구하고 그로 인한 환난과 시험이 없다면 그것은 오히려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까?
주께서 바울 사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디모데후서 1:8).”
주님의 이 말씀이 부담스럽게 느껴지십니까? 하지만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아무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고,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오해 없이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선하신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허락하여 즐기게 하신 것들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지금 이 말씀은 금욕주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허락하신 것들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십시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여러분이 가진 믿음과 그 말씀으로 인해 여러분이 감당해야 할 자기 부인, 십자가 짐, 손해와 불이익, 외로움과 고난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못 본체 피하고 살아갈 수 없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마음을 다하여 기도할 수 없는 이유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순교자들은 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그토록 간절히 하늘 제단 아래에서 조차 기도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삶이 없다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우리의 기도는 공허할 수 밖에 없습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자들에게 그 기도는 결코 공허할 수도 없고 큰 소리로 부르짖는 절규가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의 말씀을 듣고 깊이 돌아봅시다. 그리고 그 영광의 날에,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로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에 섞여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라고 찬송하는 영광의 자리에 우리 모두 함께 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