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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 (15). 메신저를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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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 (15). 메신저를 죽여라

사도행전 7:51-8:3, 마태복음 10:28, 고린도후서 2:1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2-12-18

말씀내용
우리가 지난 주일에 보았듯이, 산헤드린 공회에 선 스데반은 구약 이스라엘 역사를 관통하는 탁월한 설교를 전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위대한 설교가 초래한 결과를 보려고 합니다. 스데반은 내용을 전한 뒤에, ‘우리’라고 하던 어조를 ‘너희’로 바꾸면서 송곳 같은 적용을 시작했습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사도행전 7:51–53).”
설교는 여기까지 였습니다. 우리는 스데반이 여기서 설교를 마치려고 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아마 스데반은 이렇게 설교를 마무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공회원들의 분노에 찬 격렬한 반응이 스데반의 설교를 중단시킨 것은 분명합니다.


1. 설교가 초래한 결과
A. 분노에서 살인까지 (행 7:54,57-59; 2:37; 민 15:35; 요 18:31)
이 탁월한 복음 설교에 대한 회중의 첫번째 반응은 그들이 ‘마음에 찔려’했다는 것입니다(54). 오순절 베드로의 설교에 대한 청중의 반응도 ‘마음에 찔려’했다는 것이었습니다(행 2:37). 두 경우 모두 ‘마음에 찔려’라고 되어있지만, 헬라어로 보면 전혀 다른 단어입니다. 2:37에서는 단순히 감정적으로 찔림을 받는다는 의미의 ‘κατανύσσομαι’가 쓰였다면, 7:54에서는 ‘격분하다, 톱으로 (마음을) 썰다’는 뜻의 ‘διαπρίω’가 쓰였습니다.
두번째로 그들은 이를 갈았습니다(54). 격노하여 이를 간다는 것은 살려 둘 수 없는 원수에 대하여 격노하는 감정입니다. 이것은 스데반의 설교를 오해했기 때문에 보인 반응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설교를 너무나 잘 알아들었기에 격노했고 이를 갈았습니다. F.F.브루스는 “그들의 짜증과 분노는 어 이상 억누를 수 없이 폭발하고 말았다.” 고 표현하는가 하면,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단순히 분노하였다는 뜻이 아니라 광기에 사로잡혔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그런 분노는 이를 가는 행동으로 표출되었다. 사탄의 지배를 받는 자들, 멸망 받게 되어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필연적으로 이런 반응을 보일 수 밖에 없다. 평소에는 점잖아 보였던 위선자들을 광기로 몰아가는 것이 복음의 본질이다.”
이때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의 환상을 보게 되는데(55-56), 이 일은 그들을 더욱 광기로 몰아가게 됩니다.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었습니다(57). 이것이 세번째 반응입니다. 아마 그들은 스데반이 본 영광 조차,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모독이라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들은 전혀 이성적이지 않으며, 스데반의 설교 내용을 논박할 만한 신빙성 있는 논증을 내놓지 못합니다. 그들은 소란과 분노와 폭력에 호소할 뿐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만 갑작스럽게 중단된 것이 아니라, 스데반에 대한 산헤드린 공회의 재판과 심문 절차도 공회원들의 광분함으로 중단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들이 누구입니까? 산헤드린의 공회원들, 유대 최고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이 이성을 잃고 통제 불가능한 폭도로 바뀌었다고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고발합니다. 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많이 배웠고 교양이 있었더라도 그들은 부패한 인간 본성을 가진 죄인일 뿐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들이 취한 행동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스데반을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쳐서 살해했습니다(58). 이들이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고가서 돌로 쳐서 죽인 것은 형식적으로는 신성모독에 대한 율법을 따라 처형한 것으로 보일지라도(민 15:35), 스데반의 죽음은 명백히 사적 폭력에 의한 살인이었습니다. 대럴 벅의 말입니다. “이 기사는 공식적인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는 인민 재판의 사례다. 판결을 구하는 요청도 없다. 죽이기 위해 돌을 던지는 것은 성난 군중이 임의로 하는 행동이었다. 이 군중 행동은 사법 절차를 거쳤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스데반은 성전 맡은 자와 그 수하들에 의해 공회 장소로부터 성 밖, 아마도 예수님이 처형을 당하신 장소로 끌려나갔을 것입니다. 설령 스데반의 죽음이 공회의 사형 판결에 의한 처형이라고 할지라도, 산헤드린 공회에는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처형해달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할 때 그들은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라고 말했었습니다(요 18:31). 스데반의 죽음은 칼빈도 말했듯이 광기에 사로잡힌 군중에 의한 폭력적 살인이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가 가져온 결과는 청중의 회개가 아니라 메신저 자신의 죽음이었습니다. 청중인 공회원들은 메신저인 스데반을 죽임으로써 그의 설교, 그 메시지를 멈추게 했습니다.
B. 큰 박해 (행 7:58; 8:1-3; 1:8; 26:10; 4:21; 5:34-40)
메신저인 스데반을 죽인 것이 설교가 초래한 첫번째 반응이었다면, 두번째 반응이 이어졌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에 불어닥친 큰 박해였습니다. 이것은 메신저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모든 메신저들을 죽이려는 시도임이 분명했습니다. 주님께서 승천하기 전에 말씀하신 대로, 성령을 받은 모든 신자는 예수님의 증인--메신저였습니다(행 1:8). 초대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의 이 정체성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공회는 스데반의 죽음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메신저들을 죽이는 일의 선봉에 선 사람이 소개됩니다. 청년 사울입니다. 후일 위대한 사도 바울로 불린 이 사람이 등장하는 맥락이 놀랍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일 때, 먼저 증인들이 돌로 치게 되는데, 증인들은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58). 이 행위는 사울이 어떤 권위를 가진 인물임을 암시합니다. 성도들이 재산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왔던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4:35,47; 5:2). 하워드 마샬은 스데반의 죽음이라는 맥락에서 사울이 등장한 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스데반의 죽음에 감동받지 않고 그가 죽는 것을 지켜보면서 유감을 느끼지 않은 적어도 한 사람(사울)이 있었다.” 우리는 사울이 공회원이었는지는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사도행전 26:10은 그 개연성을 열어 둡니다.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사도행전 26:10).”
8:1은 사울이 스데반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겼다고 못박듯 말하면서, 스데반의 죽음을 기점으로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시작되었다고 전합니다. 외부로부터 교회에 주어진 사탄의 공격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공회의 경고로 시작해서(4:21), 물리적 채찍질로 이어졌으며(5:40) 급기야 스데반의 죽음을 거쳐(7:58-60) 예루살렘 교회를 향한 큰 박해로(8:1) 발전되었습니다. 이 모든 공격은 다 실패했지만, 이 박해의 중심에는 사울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3절은 사울이 각 집에 들어가 믿는 남녀를 잡아 옥에 넘기는 방식으로 교회를 잔멸하려 했음을 보여줍니다. 박해는 계획적이고 조직적이었으며 잔악했습니다. 사울은 아마 자신의 스승인 가말리엘의 조언(5:34-39)에 동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2. 스데반은 영광으로 들어가다 (행 7:55-56; 6:15; 눅 23:46,34)
잠깐 우리는 여기서 눈을 들려 교회의 첫번째 순교자 스데반의 마지막 모습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데반은 자신을 향해 이를 갈고 분노하는 청중을 마주했고, 그 청중은 스데반을 죽이려면 죽일 수 있는 권력자들이었습니다. 그때 스데반은 그들을 주목하는 대신,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했습니다. 칼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절체절명의 위기가 찾아오고 죽음이 눈 앞에 임박한 시점에서 스데반은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던 눈길을 거두고,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의 눈길을 돌렸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자는 복됩니다. 그래서 그는 무엇을 보았습니까?
55절을 보십시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55).” 스데반은 그 순간 삼위 하나님과 친교를 누리고 있었다는 것을 누가는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그는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그 우편에 예수 그리스도를 뵙는 은혜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여전히 천사와 같은 얼굴로(6:15) 외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56).”
스데반의 이 말은 공회원들의 가슴에 붙은 분노의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되었습니다. 스데반의 말은 얼마 전 바로 이 자리에서 신성모독으로 사형선고를 받아 죽으신 예수님이 지금 하늘의 통치권을 장악하고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선포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 밖으로 끌려간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를 하게 되는데, 누가는 그의 마지막 기도를 59-60절에 기록합니다. 이 마지막 기도에 대한 칼빈의 설명입니다. “그의 기도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자신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맡기는 전반부에서는 자신의 변함없는 믿음을 보여주고, 자신의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는 후반부에서는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증언한다. 우리의 완전한 경건이 이 두 가지에 달려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스데반의 죽음 속에서 경건하고 거룩한 죽음의 희귀한 사례를 보게 된다.” 그는 성부 하나님께 당신 자신을 맡기셨고(눅 23:46) 당신을 못박는 자들을 용서해주시기를 기도하셨던(눅 23:34) 주님처럼 기도하고 죽음에 이름으로써, 예수님의 죽음을 재연합니다. 그리고 이 최후의 기도를 통해,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어떻게 죽음을 맞아야 하는지도 선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렇게 복음의 메신저는 순교의 죽음을 통해 영광으로 들어갔습니다.


3. 두려워하지 않는 메신저들 (행 8:1-2,5,40; 11:19-20; 마 10:28)
이 일로 인한 큰 박해가 일어난 와중에 등장하는 일단의 용감한 무리가 있었습니다. 8:2입니다.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8:2).” 이 경건한 사람들이 정확하게 어떤 사람들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제가 이들이 용감하다고 한 것은, 당시 처형당한 죄수의 장례 규정에서 매장은 허락되었지만 애도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을 위한 애도는 유대 권력자들에 대한 공개적 항변이거나 대중적 저항으로 비쳐짐으로써 그들 스스로를 상당한 위험에 노출시킬 수 있는 행위였습니다. 하지만 이 경건한 사람들은 큰 박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스데반을 장사하고 크게 애도하였습니다.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이들만이 아니었습니다. 8:1 하반절을 보십시오.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8:1b).” 어떤 사람들은 흩어진 성도들을 겁장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친 것이 아니라 원수들의 광기를 가라앉힐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그들 스스로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흩어진 성도들 다수는 스데반이 속해 있던 헬라파 유대인들일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이 생각합니다. 뒤따르는 누가의 기록은 헬라어를 사용할 줄 아는 신자들이 사마리아로 이주해서(8:5) 후에 가이사랴에 정착하는(8:40) 빌립, 그리고 페니키아, 구브로, 안디옥에 정착하게 되는 무명의 신자들(11:19-20)과 같이 다른 지역에서 평생 거주하게 되었음을 시사합니다. 그들은 겁장이가 아니라 스데반과 샅은 메신저요 예수의 증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흩어졌지만,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남았습니다. 이 사실도 박해가 주로 헬라파 유대인—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것이었다고 생각할 단서가 됩니다. 사도들은 남아서 히브리파 유대인—그리스도인들을 돌보는 역할을 당분간 지속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본문은 비록 스데반의 순교가 예루살렘 교회를 향한 큰 박해로 이어졌지만, 당신을 죽이려고 분노하는 공회원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았던 주 예수님과 스데반 처럼 교회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태복음 10:28).”
우리가 이어지는 말씀들을 통해 살펴 보겠지만, 칼빈의 표현을 빌면, “이렇게 해서 예루살렘 성벽 안에 갇혀 있던 그리스도의 몸은 더 멀리 그리고 더 넓게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4. 교훈과 적용 (마 23:30; 행 7:51; 고후 2:16)
스데반의 설교의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결말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설교자를 죽이거나 복음전도자를 죽이는 일은 우리 시대에 일어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스데반이 말한대로, 유대인의 조상들은 역사적으로 많은 선지자를 죽인 사람들이었습니다. 1세기 유대인들은 조상들이 선지자들을 죽였던 것을 인정하면서 그런 조상들의 행태를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자기들은 다르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마태복음 23:30).”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조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죽였고 스데반의 메시지 앞에서 광분하여 그도 죽이고 말았습니다.
메시지가 싫으면 메신저를 죽이라는 말 그대로 그들은 행했습니다. 메신저를 죽였느냐 죽이지 않았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메시지에 대한 반응입니다. 공회원들이 스데반을 죽인 것은 그 메시지가 싫었기 때문입니다. 이 착한 사람을 죽여야 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을 죽일 이유가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복음은 죄인을 향해서 스데반이 말한 것처럼 말합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사도행전 7:51).” 이것은 죄인에 대한 성경의 정의이고, 죄성에 대한 성경의 표준적 진술입니다. 저는 오늘 다시 한 번 여러분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을지라도, 이 말을 듣는 참된 성도는 이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주님 없는 제 존재는 이런 존재였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로 이제는 값없이 의롭다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저를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자로 용납하여 주옵소서”. 은혜를 받은 성도는 이 메시지 앞에서 메신저가 자신을 모독했다고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도리어 자신이 받은 주님의 은혜의 크심을 생각하며 더욱 감사할 것입니다. 이 차이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성령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리 배웠고 교양이 있으며 점잖은 성품을 지녔다고 할지라도, 메시지 앞에 격분하고 이를 갈며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는 광부하는 공회원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메시지가 싫어서 메신저를 미워하는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성령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여러분은 앞에서 제가 인용한 칼빈의 말을 기억하십니까? “평소에는 점잖아 보였던 위선자들을 광기로 몰아가는 것이 복음의 본질이다.” 우리는 본문에서 이것을 보았습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어떤 사람에게는 사망에서 사망에 이르는 냄새지만 또 다른 사람에게는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는 냄새입니다(고후 2:16). 복음은 사람들을 둘로 가릅니다. 이것은 복음의 본질입니다. 칼빈의 말을 더 들어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사람을 올바른 심령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소망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받게 된다. 가르치는 직분을 맡은 자들이 자신의 직분을 신실하고 충성되게 수행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과 첨예하게 충돌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리로서는 그 결과가 언제나 우리가 바라던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경건의 가르침을 대담하게 증언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흠향하실만한 향기로운 제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언젠가 여러분은, 전해지는 메시지에 불쾌함을 느낄 때가 올지도 모릅니다. 그때 여러분은 메신저를 죽이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저 설교자—메신저가 지금 나 들으라고 저 말을 하는 것인가?”라고 생각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메신저를 미워할 것입니다. 마음에서 메신저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설교는, 모든 복음의 메시지는 여러분 각자를 향한 성령의 표적 메시지가 아닙니까? 공회원들은 스데반이 자신들을 공격했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공격한 것이 스데반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마음이 찔려 분노하고자 할 때 우리는 이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성령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할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돌이키라고, 그 위험한 자리에 더 이상 머물지 말라고, 아버지의 품에 다시 안기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복음의 메신저가 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이것은 신구약 전체 역사가 증명합니다. 유대 전통은, 이사야 선지자가 므낫세의 통치 때에 톱에 잘려 산산 조각나서 순교했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를 애굽으로 강제로 끌고 간 사람들이 던진 돌에 맞아 순교했다고 전합니다. 스데반은 죽음으로써 이 구약의 메신저들을 계승했고 사도들이 모두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가진 증거, 그 메시지 때문에 말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공회원들에게는 회개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들은 정반대의 길로 갔습니다. 메신저를 죽인 조상들의 길로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 길로 가지 마십시오. 일평생 하나님의 말씀, 그 메시지 앞에서 은혜를 받으십시오. 은혜를 받는 자리에 머물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주님은 ‘너희가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 1:8). 세상에 메신저로 보냄을 받은 교회와 성도는 세상 속에서 언제나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할지라도,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이 복음의 메신저로 세상 속에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