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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강해 (1) - 고난을 이기는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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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강해 (1) - 고난을 이기는 위로

고린도후서 1:1-1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7-01-28

말씀내용
고린도후서의 배경
고린도는 주전 146년에 로마에 의해 파괴된 후, 100년 동안이나 버려졌다가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에 의해 주전 44년에 재건된 도시였습니다. 바울이 고린도를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것은 주후 50년 어간인데, 당시 도시의 인구는 8만 정도였고 이제 90년 정도의 새로운 역사를 가진 젊은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고린도는 빠르게 성장하여 제국 내에서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에 이어 세번째로 중요한 도시가 되었고 경제 기적을 일구어 많은 도시의 시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에서는 스포츠와 유흥문화가 발달되었고 여행과 성산업과 종교적 다원주의 그리고 물질주의가 편만했습니다. 고린도의 이런 점이 오늘날의 캘리포나아와 유사해서 레이 스테드만(Ray Stedman)목사님은 고린도전서와 후서를 ‘캘리포니아 전서와 후서’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비단 이것은 캘리포니아와 유사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경향과 유사하다고 생각됩니다.

바울은 그의 2차 전도여행 중, 고린도에서 1년 반을 머물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행 18:1~17). 그리고 에베소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에 왔을 때 거기서 고린도전서를 쓴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그가 고린도를 떠난지 3년이 지났을 무렵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를 쓰면서 그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모금을 하기 위해 고린도를 방문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고전 16:1~11). 그러나 그 사이에 디모데를 보냈고 디모데가 고린도에서 본 것은 우상숭배와 음행과 거짓 교사들로 인해 교회가 무너지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곧 고린도를 계획과는 달리 잠깐이라도 방문하여 교회의 징계문제를 다루려고 2차 방문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방문은 ‘고통스런 방문’이 되었습니다(고후 2:1). 그들은 사도의 권위 자체를 문제삼았고, 바울 사도의 사역과 인격에 대해서까지도 비난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사도 바울에게 도전하였습니다. 바울이 진짜라면 왜 그렇게 그의 삶에는 고난이 많은가? 왜 그의 사역은 다른 ‘지극히 큰 사도(super-apostles)’들과 비교하여 활기가 없는가? 왜 그의 설교는 와닿는게 없는가? 왜 그는 하나님이 자기 삶을 인도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방문하겠다는 계획을 변경할 수 있는가? 왜 그는 다른 대부분의 설교자들처럼 사례를 받지 않는가? 그가 모금한다는 것은 믿을만한 것인가? 왜 그는 다른 사도들처럼 추천장이 없는가?

고린도 교회의 바울 사도에 대한 비난과 의심은 그들이 거짓 교사들로부터 받은 ‘다른 복음’(고후 11:4) 때문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심히 상처를 받고 2차 방문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회개를 촉구하며 심한 내용의 편지를 써서 디도 편에 보냈습니다(고후 2:4). 이 편지는 잃어버려진 편지로 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린도교회는 그의 편지를 읽고 회개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다시 바울과 그의 복음에게로 돌이켰지만 여전히 그의 권위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세번째로 고린도를 방문하기에 앞서 이제 고린도후서를 쓰게 됩니다. 이 때는 바울 사도가 에베소에서의 3년의 사역을 마치고 마게도냐로 갔을 때였습니다. 아마 마게도냐 지방의 빌립보에서 썼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고린도후서를 읽고 상고하면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런 배경들을 볼 때 우리는 고린도후서는 바울 사도가 쓴 가장 감정이 깊이 배어있는 편지임을 알게 됩니다.

안부(1,2절)
바울 사도는 두 가지를 분명하게 씁니다. 자신의 사도됨과 고린도 사람들의 교회와 성도됨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고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면 그의 사도직을 거부하고 그를 반대하는 것은 그를 세우신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를 거절하고 반대하는 것임을 여기서 분명하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또 그는 수신자를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그리고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라고 표현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여전히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더러운 음행을 하고 용납하였지만 ‘성도들(the saints)’이었습니다. 그들이 성도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거룩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거룩함(sanctification)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비록 그들이 자신을 ‘만물의 찌끼’처럼 대우했지만(고전 4:13) 그들을 하나님의 교회요, 성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어서 그들에게 성부와 성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하고 축복함으로써 이 서신을 시작합니다.

고린도후서를 통해서 바울 사도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계속해서 견지하는 주제는 “약함은 강함의 원천이고 고난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의 도구이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의 처음 이야기도 자신의 고난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1. 고난의 사람, 바울(행 9:15~16).
오늘 본문에는 ‘고난’, ‘환난’ 그리고 이런 의미의 단어가 무척 많이 등장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고난을 설명하고 싶어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고린도교회에서 여전히 바울을 대적하는 사람들은 바울이 참 사도라면 그런 고난과 어려움을 겪을 수 없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A. 그리스도의 고난(5절)
그는 자신이 받는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설명합니다. 그가 당하는 고난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자리에 기꺼이 섰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었습니다. 그가 처음 다메섹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다메섹에 거하는 아나니아란 인물에게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보여주신 계시의 내용이 이렇습니다(행 9:15~16).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그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사도적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도로서 교회를 세우면서 주셨던 특별한 부르심이었기에 오늘날의 선교사나 목사와 같은 복음의 사역자들이 당하는 고난과는 절대적 의미에서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자신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표현할 때에도 절대적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바울 사도의 고난은 다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당하는 고난을 통해 자신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연합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죠지 맥도날드의 말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의 고난을 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고난이 자신의 고난과 같은 것이 되게 하기 위해 죽기까지 고난받으셨습니다.”

B. 너희의 고난(6,7절)
바울 사도는 나아가서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라고 말합니다(6). 그리고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라고 말합니다(7). 이것이 사도적 고난이 절대적이고 특별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고난과는 다르지만 사도와 그리스도를 묶어주는 것처럼, 사도의 고난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겪는 고난과 다르지만 역시 사도와 고린도 성도들을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역시 하나님의 이름과 복음을 위하여 당하는 고난을 말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C.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8~10)
사도 바울은 나아가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뼈아프고 힘들었던 고난을 설명합니다.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입니다(8). 그것은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게’ 한 환난이었고(8),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것으로 느끼게 했던 일이었습니다(9). 복음의 사도로서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경험하였던 바울이지만(4:8~12; 11:23~33), 그는 특별히 이 환난은 최고의 환난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정확하게 어떤 사건을 가르치는지 의견이 분분합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 사도가 견딜 모든 힘을 잃었으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2. 바울이 경험한 위로
그러나 바울 사도가 이런 고난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기 연민에 빠졌기 때문은 아닙니다.사도는 고난을 이기는 하나님의 위로에 대하여 말하고 싶어합니다. 성경 전체에서 본문만큼 위로를 강조하는 본문은 없습니다. 3절부터 7절 사이에만 ‘위로’라는 단어가 10번 나옵니다.

A. 보혜사 하나님(3,4,5절)
바울은 본문에서 ‘위로’라는 말을 사용할 때 헬라어로 사람이 혹독한 시련을 겪을 때 그의 곁에 서서 그를 격려한다는 뜻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제 말하고자 하는 고난과 환난 중에 있는 자신과 모든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 3절에서 사용된 ‘위로의 하나님’이란 말은 거의 보혜사 하나님이라는 뉘앙스를 전달해주기에 충분한 말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즉 성삼위 하나님께서 모두 우리의 보혜사가 되셔서 우리를 위로하신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러한 위로는 사실상 복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적 행위입니다. 이 사실을 그는 경험했고 그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4절에서 ‘우리를 위로하사’라는 말에서 사용된 동사의 현재 시제는 바로 우리의 하나님께서 돌발적으로나 간헐적으로가 아니라 계속해서, 틀림없이 우리를 위로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는 특정한 종류의 환난 가운데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B. 위로의 목적(4,6절)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고난 중에 주신 위로의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고난 가운데 있는 자들을 위로할 수 있도록 하는 하나님의 능력주심이었습니다(4). 마치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경험하지 못하신 분이 아니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되듯이(히 4:15), 바울이 경험한 모든 환난은 모든 환난당한 자들을 동정하고 위로할 수 있는 능력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6절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당하는 환난도,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위로도 다 ‘너희’를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이미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썼던 진리와 관계가 있는 말씀입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도 같이 고통을 당하는 교회의 몸의 원리에 대하여 그는 이미 쓴 적이 있습니다(고전 12:26이하). 바울 사도는 자기가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고난의 경험과 위로의 경험을 개인적 차원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결국 이 모든 경험은 자신이 섬기고 사랑하는 성도들을 향하여,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쓰이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3. 고난을 보는 성경의 관점
우리는 여기서 성경이 말하는 고난에 대하여 잠깐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부정적 차원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빠질 수 있는 고난에 대한 오해를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A. 오해들
먼저, 금욕주의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오해들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반드시 고난을 받을 것인데, 고난이 없다면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증거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고난을 당할수록 그는 영적인 사람이다라는 생각도 성경적으로 지지를 얻을 수 없는 견해입니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고난 자체를 예찬하지 않습니다. 고난을 추구하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두번째로는 번영의 신학과 관련된 오해입니다. 고난은 죄 때문에 온다고 단정할 수 없고, 믿음의 결핍으로 말미암는 것만도 아닙니다. 이런 종류의 오해야말로 바울 사도가 바로잡기를 원해서 고린도후서를 쓰는 목적인 것입니다.

고난은 본질적으로 선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의 미덕도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은 하나님의 믿음의 학교에서 사용되는 교과서의 한 페이지이다.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일 뿐이다.

B. 성도는 고난을 당한다(요 16:33; 벧전 3:14,17)
그러나 성경이 일관성있게 말씀하는 고난에 대한 진술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결코 무시해서도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먼저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또 베드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벧전 3: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기본적으로 ‘믿음’을 가지고 불신의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고난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이 불신 세상에서 마음이 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동일하게 이 세상에서 ‘뱀과 같이 지혜로와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고난을 자초하는 것이 지혜는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리 지혜롭게 해도 이 세상에서 신자는 마음으로 혹은 육신적으로 고난을 경험합니다. 그래도 이런 구별은 필요합니다. 굳이 성도들이 겪는 고난을 나누어서 생각하자면, 적극적 차원과 소극적 차원의 고난으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i. 적극적 고난(딤후 1:8; 3:12; 마 5:10~12)?복음을 위한 고난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딤후 1:8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마 5:10~12). 그러나 그들은 복됩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위로를 성삼위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말입니다.

이런 고난이 저와 여러분에게 많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믿음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고 손해를 당하는 일이 간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넘치도록 주신 위로와 함께 말입니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말입니다.

ii. 소극적 고난(고후 12:7)?‘육체의 가시’
소극적 고난도 있습니다. 이것은 직접적이고 능동적으로 ‘주의 이름과 복음을 위한’ 고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언급한 ‘육체의 가시’와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 육체의 가시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릅니다마는, 아마도 바울 사도가 가지고 있던 지병인 간질병이거나 안질이거나 그런 종류의 고난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종류의 고난은 다 찾아옵니다. 질병으로, 경제적 실패로, 자녀들의 문제로, 심적 고통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옵니다. 이런 것은 바울 사도가 말했듯이, ‘그리스도의 고난’(5)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들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면서도 저는 여전히 소극적 고난보다 적극적 고난이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서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C. 고난을 대하는 자세
문제는 우리가 이런 고난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적극적 고난이든, 소극적 고난이든 우리 인생에서 그런 고난을 맞을 때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i. 고난은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한 것이다(5,9절).
제일 먼저 생각할 점은 고난은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위로를 넘치게 받게 하는 도구입니다. 바울 사도는 5절에서 고난이 넘친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의 위로는 더욱 넘칩니다.

여러분이 만일 정직하게 주와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당했다고 말씀할 수 있는 경험이 있으시다면 여러분은 지금 바울 사도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아실 것입니다. 그 넘치는 위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선교사들의 전기나 일기들을 읽어보십시오. 그들이 자신들에게 넘치는 고난 만큼 아니 그와 비교할 수 없는 넘치는 하나님의 위로를 어떻게 경험했는지 말입니다. 허드슨 테일러, 윌리암 캐리, 데이빗 브레이너드, 헨리 마틴, 짐 엘리엇, 아도니람 저드슨, 에이미 카마이클…..이루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출판되어 있습니다. 고난은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고난은 또한 이런 점에서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주님과 같이 ‘고난?죽음?부활’의 사이클(그리스도의 사이클)을 품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고난당하셨고, 죽으셨으며 다시 사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말하면서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았다고 말합니다. 그토록 힘에 지난 고생을 받은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는 고백합니다.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려 하심이라”(9절).

결국 바울 사도는 그 환난을 통해서 자기의 힘과 자기의 능력과 자기의 가진 것을 내려놓고 포기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자기의 힘이 능력의 원천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자기의 실력이 사역의 비결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분, 그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여러분, 어디서 이런 값비싼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까? 바로 고난을 통해서입니다. 여러분은 이제까지 여러분의 인생에서 경험한 고난을 통해서 이 진리를 배우셨습니까?
고난은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ii. 고난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신 것이다(4,6,11절)
고난은 우리 개인의 차원에서만 유익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고난을 통해서 교회라는 온 몸의 모든 지체와 관련을 맺게 됩니다. 나의 고난이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능력의 출발점이 됩니다(4,6). 교회 안에서 한 지체의 고난은 결코 그 지체 한 사람의 고난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형제의 고난에 대한 동정심의 결여가 곧 우리의 믿음의 결여라고 선언합니다(고전 12). 우리가 개인적으로 경험한 고난과 위로는 온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혼자서 고통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형제와 자매들에게 그 고난을 나누십시오. 그들은 함께 기도하면서 도울 것입니다. 이것이 11절의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는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고 부탁합니다. 많은 사람이 기도해주어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보고서 모두가 감사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서로 연합하는 것입니다.

iii. 고난 속에서의 확신(10절)
그리고 바울은 고난 속에서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확신은 같은 단어로 세번씩이나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강조가 되고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고후 1: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건지셨고’는 과거의 경험을 말합니다. 그리고 ‘건지시리라’는 가까운 미래에 그렇게 하실 것을 확신하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건지시기를…..바라노라’는 말은 궁극적 미래에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실 것에 대한 확신입니다.
여러분, 이 확신을 놓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건지시는 분이십니다.

4. 고난은 위로를, 위로는 감사를 가져온다(11절).
확실히, 고난은 위로를, 위로는 감사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도 인정해야 합니다. 이 세상과 세상의 방식을 따라 살면서, 주의 이름을 위하여 아무 대가도 지불할 생각이 없이 살아가면서 당하는 고난에 적용될 위로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5.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3,4절).
결국, 하나님의 넘치는 위로는 모든 고난 속에서 우리로 견디게 하고, 이기게 하며, 온 교회를 위로하게 만드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