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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67). 찬송이 가득할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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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67). 찬송이 가득할 그날

요한계시록 19:1-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04-11

말씀내용
19장은 17-18장에서 보았던 음녀, 큰 성 바벨론의 멸망이 일단락되고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큰 성 바벨론의 멸망을 결론 짓는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19:6이하에서 시작되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대한 장면을 이어가는 역할을 합니다. 큰 성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정당하고 의로운 심판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말입니다. 이 맥락에서 본문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1. 너희는 즐거워하라 (18:20)
본문은 18:20에서 연결되는 이야기입니다. 큰 성 바벨론에 대한 무서운 심판과 멸망의 환상이 이어지는 가운데, 하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음이라 하더라(요한계시록 18:20).”는 음성입니다. 우리는 큰 성 바벨론의 멸망 앞에서 땅의 왕들과 상인들 그리고 로마 제국에 붙어 부를 누리던 모든 뱃사람들이 울며 장송곡을 부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와중에, 요한은 이 심판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는 명령을 듣습니다. 바벨론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는 것은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즐거움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 명령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기본적으로 이 즐거움은 바벨론에게 행해지는 하나님의 심판이 의롭고 참되고 합당한 심판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세상에 유일하게 참된 심판자는 하나님 뿐이십니다. 물론 세상에는 합법적인 권위를 가지고 심판을 행하는 재판관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행하는 모든 재판은 그 특성상 정의를 세우는 것이어야 하고, 참됨에 기초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판사들은 자기 마음대로 판단을 내리지 않고 법률에 근거하여 판단을 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인간인 판사가 종종 자신의 성향에 따라 굽은 판결을 내리게 되면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또한 인간 판사가 아무리 의롭고 참된 판결을 내리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세상의 법정에서 오심은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런 모든 한계속에서도 우리는 정의롭고 참된 심판이 내려질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 심판은 완전한 정의를 실현하는 심판이고, 진리에 부합하는 참된 심판입니다. 이 근거에서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즐거워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구별된 세 찬송의 소리를 듣습니다. 이것은 마치 바벨론 멸망에 대한 세 그룹의 장송곡에 맞추기라도 한 듯(18:9-19), 세 그룹의 찬송소리처럼 들립니다. 1-2절에서 하늘에 허다한 무리가 큰 음성으로 찬송합니다. 그리고 3절에 두번째 음성의 찬송이 들립니다. 4절에서는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의 찬송이 이어집니다. 마지막 5절은, 보좌에서 나오는 음성이 땅에 있는 모든 성도들을 향하여 이 찬양에 너희도 참여하라고 초청합니다.


2.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찬송 (1-2; 11:15; 7:9; 16:7; 6:10-11; 마 6:9-10; 빌 3:10)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할렐루야입니다. 1-6절에 네 번 나옵니다. 할렐루야의 뜻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을 것입니다. 이 히브리어는 헬라어로 음역되어 그대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이 라틴어로 음역되는 과정에서는 알렐루야로 약간 바뀌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히브리어는 우리말로도 그대로 음역이 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라는 말은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입니다. ‘할렐’은 찬양하다라는 의미이고, ‘야’는 하나님의 성호인 야웨, 여호와의 축약형입니다. 그러므로 그 의미가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가 됩니다. 이 단어가 우리에게는 너무 익숙해서 성경에 많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성경 전체에서 이 말이 등장하는 경우는 시편과 요한계시록 뿐입니다. 시편에 23회, 요한계시록 19장에 4회 사용된 것이 전부입니다.
특별히 시편 가운데, 113-118편은 할렐 시편이라 불리는데, 이 시편들은 주로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을 찬송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가족들이 함께 식사를 할 때 이 할렐 시편을 부르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아마 주님께서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하실 때에도, 이 할렐 시편들을 찬송하셨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 자신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물론 제자들에게야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겠지요. 유월절 마다 그들은 그렇게 해왔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은 자기 백성을 위한 진정한 출애굽을 목전에 두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유월절 어린양이 되어 죽으심으로써 당신의 피로 자기 백성에게 미칠 하나님의 진노를 막으실 것이었습니다. 그런 뜻으로 주님은 할렐 시편을 찬송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고 찬송하는 것이 할렐루야, 즉 여호와를 찬송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밋밋하게 부를 수 없는, 큰 감격으로 부르는 찬송인 것이지요.
우리는 이미 11:15을 토대로 헨델의 《메시아》 중 ‘할렐루야 코러스’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요한계시록 11:15).”그리고 우리는 요한이 처음 하늘 보좌 환상을 보았을 때, 경험한 하늘 보좌 주변에서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과 모든 천군과 천사들이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는 장관에 대해서도 읽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할렐루야 찬송이 터져 나오는 장면은 하나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온 세상을 좌우하고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사로잡았던 경제 체제인 큰 성 바벨론이 한 순간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했습니다. 맷돌이 바다에 던져져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처럼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하늘에서는 하늘과 땅의 성도들을 향하여 즐거워하라는 음성이 들립니다. 그리고 요한이 하늘에 허다한 무리가 부르는 큰 찬송을 듣습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라는 찬송입니다.
또 상상해 보십시오. 1세기 말 로마의 압제 아래 신음하고 핍박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지키던 성도들이 이 예언의 말씀을 듣게 되었을 때, 그들은 이 1절에서 참을 수 없을 만큼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찬송을 함께 부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우리는 ‘하늘에 허다한 무리’가 천상의 영적 존재들인지, 하늘에 속한 승리한 성도들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7:9에서 우리는 요한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서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찬송하는 소리를 들은 것을 압니다. 그 허다한 무리가 하늘의 승리한 성도들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오늘 본문에서 요한이 들은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찬송도 하늘에 승리한 성도들의 찬송일 개연성이 큽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라는 찬송은 승리한 천상의 교회가 부르는 찬송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성취된 진정한 출애굽이 이제 완성되었습니다. 새로운 애굽인 큰 성 바벨론,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하던 세력인 로마 제국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한 순간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이 진정한 의미에서 할렐루야를 부를 시간이 온 것입니다. 그러니 하늘에 승리한 성도들의 허다한 무리가 먼저 그 찬송을 온 세상을 향하여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라고 불러 외치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노래합니다.
하늘에 허다한 무리는 찬송을 계속합니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고 외칩니다(2).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가슴에서 찬송이 터져 나오게 한 요인입니다. 일곱 대접 심판 시리즈에서 셋째 천사가 대접을 쏟았을 때 제단이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라고 찬송했습니다(16:7). 여기서 천상의 허다한 무리가 같은 내용을 찬송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 자신의 신실한 언약에 기초를 두고 있기에 참되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에 기초를 두고 있기에 의롭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역사상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로 정의로운 법률의 기준을 완전히 능가하는 완전한 하나님의 의로운 기준에 의하여 이루어질 심판이기에 도덕적으로 참되고 법적으로 정당합니다. 아무도 이 심판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음녀’를 향한 심판입니다.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시는’ 심판입니다. 심판의 법적 근거는 음녀인 큰 성 바벨론이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더럽게 했다는 것은 이중적 의미를 가집니다. 말 그대로 더럽게 했다는 의미 외에도, 땅을 멸망시켰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음녀인 바벨론이 한 일은 결국 땅과 함께 땅의 거민들을 멸망케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습니다.” 이것은 6:10에서 순교한 영혼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입니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요한계시록 6:10).” 거기서 주님은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계 6:11).”고 말씀하셨는데, 드디어 그 수가 찼고 그 때가 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종들의 피 값을 음녀에게 갚으십니다. 바벨론의 멸망은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순교자들만의 기도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달라는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 6:9b-10a). “나라가 임하시오며!” 지난 2000여년 동안 오고 오는 세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기도를 하나님께 드려왔습니다. 이 기도는 “이 세상 나라는 멸망 당하게 하옵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려면, 이 세상 나라는 멸망 당해야 합니다. 부활의 권능에 참여함을 알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살아야 하듯이(빌 3:10), 하나님이 주권으로 다스리시는 나라가 오려면 이 세상 나라가 멸망하고 물러가야 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서려면, 이 땅을 통치하던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망하고 물러가야 했듯이 말입니다. 음녀, 큰 성 바벨론의 멸망은 기도의 응답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아직 이 결정적인 날은 역사 속에서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도 기도합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말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 기도를 드렸던 성도들, 그들은 그 날에 큰 기쁨과 감격으로 할렐루야의 찬송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3. 두번째 할렐루야 코러스 (3; 14:11; 사 34:10)
요한은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이 부르는 할렐루야 찬송을 들은 뒤에, 이어서 두번째로 할렐루야 코러스를 듣습니다. 3절입니다. “두 번째로 할렐루야 하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이것 역시 할렐루야로 시작하는 찬송입니다. 이 찬송을 부른 주체도 ‘하늘에 허다한 무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불려지는 할렐루야 찬송은 단순한 찬양의 반복을 넘어,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성을 더욱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는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고 덧붙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심판의 불이 타오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연기는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표를 받은 사람들이 밤낮 쉼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14:11입니다.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요한계시록 14:11).” 그리고 이 연기는 지옥의 쉼 없는 고통을 상징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에돔의 심판에 대한 말씀을 이렇게 예언합니다. “낮에나 밤에나 꺼지지 아니하고 그 연기가 끊임없이 떠오를 것이며 세세에 황무하여 그리로 지날 자가 영영히 없겠고(이사야 34:10).”


4.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의 찬송 (4; 시 106:48)
세번째 할렐루야가 나옵니다. 그것은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부르는 찬송입니다. 그 천상의 존재들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찬송합니다. “아멘 할렐루야!”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앞의 두 할렐루야 찬송을 완성하는 찬송입니다. ‘아멘’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의지하다, 믿다, 의뢰하다’라는 뜻의 ‘아만’에서 파생한 단어로서 주로 기도나 송영에서 ‘그대로 믿습니다, 그대로 이루어지리라, 그대로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아멘’이 ‘할렐루야’와 함께 사용된 예는 이 구절 외에는 유일하게 시편 106:48에서만 발견됩니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시편 106:48).”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아멘 할렐루야”라고 외친 것은 앞에서 허다한 무리가 부른 찬송의 내용을 승인하고 보증하고 확증한다는 뜻입니다. 이 장면은 요한계시록에서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입니다.


5. 너희는 찬송에 참여하라 (5; 19:9)
이제 요한은 보좌에서 한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는 내용입니다(5). 보좌에서 나온 음성이 그리스도의 음성이라고 보는 스펄전은 “하나님이신 어린양을 제외하고 하나님 외에 누구도 보좌에 앉을 수 없으므로,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고 말씀하시는 분은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의 위대한 대표로서 앞서 그들이 즐거워한 것을 확증하고 동조하시면서 땅의 성도들에게 이 찬송에 참여하라고 명하십니다. 이 명령은 하늘의 존재들과 하늘에 승리한 교회만이 아니라, 지상의 교회들도 이 찬송에 참여하라는 초청입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의 모든 독자들을 향한 감당할 수 없는 과분한 초청이고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신실한 믿는 자들의 모임 전체를 가리킵니다. 목사나 선교사들만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종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소유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은 요한계시록에서 거룩함과 인내를 요구 받는 성도들의 삶의 핵심 요소이자, 성도의 본질적인 특성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들은 ‘작은 자나 큰 자’ 모두를 포함합니다. 이는 세상적으로 지위를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들, 사회에서 유명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모두를 포함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지상 교회 전체를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사실, 이 초청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로의 부름이기도 합니다. 이 부름이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러운지를 9절이 말합니다.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요한계시록 19:9a).” 이어지는 말씀에서 우리가 더 확연하게 보게 되겠지만, 우리 중 아무도 이 자리에 합당한 사람은 없습니다. 바벨론과 함께 영원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지옥이 우리에게 합당한 곳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던 자들입니다. 주님의 부르심만이, 그 유효한 부르심만이 우리를 그 자리에 합당한 자로 만들어 영원히 그 영광스럽고 복된 자리에 있게 할 것입니다. 찬송에 참여하라는 초청은,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초청은 자기가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던 자들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과분한 은혜의 초청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 자리에 있습니다. 예배당에 나아와서 예배를 드리든지 있는 곳에서 영상으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예배하든지 말입니다. 이 사실을 아십니까?


6. 교훈과 적용
우리는 하늘에 승리한 교회의 찬송 그리고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의 찬송을 들었습니다. 온 세상을 미혹하여 음행하게 한 음녀,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에서 들려온 할렐루야 코러스를 요한은 들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바벨론이 심판을 받아 멸망하는 것에 대한 기쁨만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이 이루어졌기 때문이고, 너무나 참되고 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바벨론이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함으로써, 드디어 온 교회가 기다리던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열릴 시간이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의 온 교회와 천상의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들이 기쁨으로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스펄전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 날이 올 것입니다. 날 중의 날, 시간의 절정과 영광이 올 것입니다. 곧 모든 투쟁과 위험과 심판이 영원히 끝나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고 영원히 주와 하나가 되어 살며 사랑하고 그 결합이 영원히 지속되며 지극히 높으신 이의 영광을 함께 받을 날이 올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그 자리에 있고 싶습니까? 여러분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확실하게 드러내십시오. 여러분이 땅에서 지금 어린양을 의지하고 있지 않다면, 영광 중에 계신 어린양과 함께 통치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린양을 속죄 제사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어린양의 신부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께서 멸시 받는 날에 주님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주와 함께 영광을 받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제물인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여, 나는 주와 함께 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것이 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님을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어린양의 혼인에 참여할 것이라는 좋은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마지막 날 있게 될 장엄한 장면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왜 그것을 요한에게 보이셨고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까? 음녀 바벨론의 힘 아래서 인내와 순종으로 믿음을 지키고 살아가는 성도들을 위로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위로만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승리자처럼 찬송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역사의 그날이 와야만 할렐루야 찬송을 부를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 그리고 지금, 그 역사의 결정적인 날이 이미 일어난 것처럼 믿음의 눈으로 그 날을 바라보면서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라고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이 땅을 사는 동안, 이 찬송에 참여한 자들이 그 영광의 날에도 그 감격의 찬송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복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