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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69). 백마를 타신 정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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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69). 백마를 타신 정복자

요한계시록 19:11-1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05-02

말씀내용
놀랍게도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대한 환상은 전쟁 묘사로 이어집니다. 이런 식의 갑작스럽고 극적인 장면 전환은 묵시문학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건의 시간 순서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본문은 최후의 전쟁(19:17-21)을 위해 등장하는 한 정복자를 소개합니다. 그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오시는 그리스도 예수십니다. 예수님께서 정복하는 용사로 등장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신약성경의 예언들 보다는(살후 1:7-9) 구약성경의 유대적 전통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출애굽기 15:3).”


1.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일곱 가지 묘사 (11-14)
요한은 ‘하늘이 열린 것을’ 보았습니다. 4:1에서는 ‘하늘에 열린 문’을 보았는데 여기서는 ‘하늘이 열린 것을’ 봅니다. 이는 하늘의 일부가 열린 것이 아니라, 하늘 자체가 열리고 거기서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나오시는 장엄한 광경입니다. 이는 인간 역사에서 하나님의 일이 완성될 때가 왔음을 암시합니다. 여기서 요한이 본 “백마와 그것을 탄 자”는 일곱 인의 심판이 시작될 때 첫번째 인에서 등장한 ‘흰 말과 그 탄 자’를 가리키지 않습니다(6:2). 일곱 인 심판에서 등장하는 네 종류의 말 탄 자들은 모두 적그리스도, 사탄의 역사로 보이지만, 여기서 백마를 탄 자는 분명히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백마의 흰 색은 순결함 뿐 아니라 로마의 개선 장군들이 타는 백마가 의미하듯이, 승리와 정복을 상징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백마를 타고 오시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승리자요, 정복자로 오신다는 의미이고, 승리가 가까웠음을 암시합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 11-13절에서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일곱 가지 묘사를 보게 됩니다.
A.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11b; 1:5; 3:14; 21:5; 22:6)
그 첫번째 묘사는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충신과 진실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보여줍니다. 1:5에서 그리스도는 ‘충성된 증인’으로, 3:14에서는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으로 묘사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백성의 참된 특징도 인내로써 믿음을 지키는 충성됨이 강조됩니다(2:10,13; 13:10; 17:14). 주님께서는 악인을 심판하시겠다는 약속을 이루시고 당신의 이름과 당신을 따르는 자들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일에서 충성되고 참되십니다. 또한 충성되고 참되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계시도 신실하고 참됩니다(21:5; 22:6).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요한계시록 22:6).” 그리스도는 충성되고 진실하셔서 우리 믿음의 온전한 대상이 되십니다.
B. 공의로 심판하고 싸우심(11c; 15:3)
백마를 타신 그리스도에 대한 두번째 묘사는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공의로 심판하신다는 것은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라는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에서 드러난 바 있고(계 15:3), 하나님의 심판이 참되고 의롭다는 것은 시편과 이사야 서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공의로 싸우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싸우시는 전쟁이 의롭고 거룩한 전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표현들이 우리 삶과 역사의 현실에서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지를 압니다. 의로운 통치자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의로운 전쟁도 없습니다. 요한과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했던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다 불의하고 부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의 현실 정치에서, 우리는 최악이 아닌 차악을 선택해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2002년 미국의 죠지 부시 대통령이 이란, 이라크,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향해 선포한 전쟁도 의로운 전쟁이라고 불릴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완전한 의와 참된 정의로 심판하고 싸우십니다. 이것이 백마를 타고 오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두번째 묘사입니다.
C. 불꽃 같은 눈 (12a; 1:14; 2:18, 23; 히 4:13)
세번째로 우리는 ‘그 눈은 불꽃 같고’라는 표현을 만납니다. 1:14과 2:18에서 그리스도를 묘사할 때 사용했던 표현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므로 그 눈 앞에서 숨겨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눈이 불꽃 같은 주님은(2: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다 아시고(2:19)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심으로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시는 분이십니다(2:23). 두아디라 교회의 경우에서 보듯이, 주님의 눈이 불꽃 같다는 묘사는 주님의 전지한 속성과 심판의 행위 모두와 관련이 있습니다. 주님의 심판은 경건하지 않은 자들과 충성 되지 않은 자들을 향하게 될텐데 여기에는 한치의 오차나 오판이 없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씀합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브리서 4:13).” 그 눈이 불꽃 같은 분 앞에서 모두가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날 것입니다.
D. 머리에 많은 관들을 쓰심(12b; 2:10; 3:11; 4:4; 12:1; 14:14; 12:3; 13:1)
백마를 타고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네번째 묘사는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라는 표현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두 종류의 관이 나옵니다. 하나는 승리의 화관(στέφανος)인데,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고 하셨을 때(2:10), 승리한 성도들에게 씌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3:11 참조). 요한이 천상의 보좌실에서 본 이십사 장로들이 머리에 쓰고 있던 금관도 이것입니다(4:4). 12:1에서 ‘해를 옷 입은 여자’(구약교회)가 쓴 열 두 별의 관도 이것입니다. 그러나 이 관은 주님도 쓰셨습니다.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요한계시록 14:14).”
두번째로, 통치자가 쓰는 왕관(διάδημα)이 있는데,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 머리에 쓰신 많은 관들이 이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이것을 쓴 자는 그리스도를 제외하면 용과 짐승 뿐입니다.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요한계시록 12:3).” 일곱 왕관은 통치권을 상징하는 왕관입니다. 그리고 그 수하로서,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도 이것을 쓰고 있습니다.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요한계시록 13:1).” 짐승이 쓴 ‘열 왕관’ 역시 통치자의 왕관입니다. 결국 거짓 삼위일체를 구성하는 용과 짐승은 온 세상의 주재이신 성부 하나님과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그리스도를 모방하기 위하여 이 왕관을 쓴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은 백마를 타고 오시는 주님께서는 머리에 ‘많은 관들’을 쓰셨다고 기록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통치가 무한하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시간적으로뿐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신 그리스도의 통치는 무한합니다.
찰스 스펄전은 특유의 표현력을 사용하여 많은 관들을 쓰시고 영광을 얻으신 주님의 머리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 머리는…일찍이 유아 때는 여인의 품에 기대었던 머리, 한 목수에게 유순하게 고개를 조아리고 순종했던 머리, 수년 후 샘물이 되었고 눈물의 저장고가 되었던 머리,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던 머리, 침 뱉음을 당하고 머리카락이 잡아 채인 적이 있는 머리, 가시관을 쓰고 마침내 죽음의 어두운 고통 속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끔찍한 죽음의 비명을 질렀던 머리, 후에는 무덤에서 잠을 잔 머리입니다. 다른 어떤 사람보다 더 상한 얼굴을 한 그 머리, 이제까지 어떤 사람보다도 하늘과 땅의 폭풍우로부터 많은 고난을 당한 그 머리가 이 많은 왕관들, 곧 별이 박힌 면류관들을 쓰리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라는 구절을 읽을 때,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절대적 통치를 확정적으로 선언하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자에게는 그리스도의 절대적 통치 만큼 위로와 기쁨이 되는 교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온 세계를 영원히 통치하시는 주님께 우리 인생의 무게와 모든 염려를 다 맡겨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시 68:19). 참된 신자의 영혼은 그리스도의 가슴에 기대어 온전한 만족과 안식과 안전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영광을 입으신 우리 구주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사모하는지 우리는 지난 주일에 말씀을 상고하지 않았습니까?
E. 자기 밖에는 아는 자가 없는 이름 (12c; 신 34:10; 계 2:17; 19:12)
백마를 타신 그리스도에 대한 다섯 번째 묘사는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이가 없고’라는 것입니다. 주님 자신을 제외하면 어떤 피조물도 알 수 없는 이름을 가지셨다는 것은, 그 이름이 유한한 능력으로는 파악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신성의 참된 본질을 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주시길 구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다고 하시면서 그를 반석 틈에 숨기시고 당신의 손으로 덮어 당신의 등만을 보여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출 33:20-23).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모세였을지라도(신 34:10), 하나님의 참된 본질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리처드 필립스는 말합니다. “이 표현에 대한 최고의 설명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신성의 깊이가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표현은 2:17에 근거하여 조금 더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2:17은 버가모 교회의 승리한 성도들에게 주실 상급을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요한계시록 2:17).”
이 구절과 오늘 본문의 표현을 연계하면, 성도들은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는 새 이름을 받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의 새 이름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19:12). 주님 밖에 알 사람이 없는 그리고 주님에게 기록된 그 새 이름이 성도인 우리들에게도 기록된다니 이것은 얼마나 영예로운 일이겠습니까?
F. 피 뿌린 옷 (13a; 사 63:1-3)
여섯 번째 특징은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라는 표현입니다. 이 피는 예수님 자신의 피를 가리키거나 또는 주님의 원수들의 피를 의미할 것입니다. 물론 요한계시록에서 많이 등장하는 순교자들의 피를 가리킬 수도 있겠지만(6:10; 16:6; 17:6; 18:24; 19:2), 그 개연성은 적어 보입니다. 이 표현은 구약성경과 깊이 연관되는데, 특히 이사야 63:1-3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에돔에서 오는 이 누구며 붉은 옷을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이 누구냐 그의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이가 누구냐 그는 나이니 공의를 말하는 이요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이니라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틀을 밟는 자 같으냐 만민 가운데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무리를 밟았고 분함으로 말미암아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이사야 63:1–3).”
이사야의 본문은 포도즙틀을 밟는 것으로 묘사되는 심판 행위에서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옷에 포도주가 튀어 의복을 더럽히는 그림을 보여주는데, 이것이 본문의 그리스도의 ‘피 뿌린 옷’을 설명해 줍니다. 이어지는 17-21절이 최후의 전쟁을 묘사한다는 점도 고려하면, 그리스도의 ‘피 뿌린 옷’은 심판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원수들의 피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G.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 (13b; 요 1:1; 계 19:15)
백마를 타신 그리스도에 대한 일곱 번째 묘사는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리스도의 이름과 관련한 내용이 많이 등장합니다. 첫째로는 ‘충신과 진실이라’는 이름(11), 둘째로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는 새 이름(12), 세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16절에 마지막으로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여기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를 말씀으로 묘사한 요한복음 1:1을 연상하게 합니다. 요한복음 1:1의 ‘말씀’이 살아계시는 계시의 주체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면, 오늘 본문의 ‘하나님의 말씀’은 세계 만국의 멸망이 그 한 마디에 달려있는 권세와 권위를 가진 말씀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고 그 심판을 집행하라는 명령을 주십니다. 이것은 15절에서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라는 말씀으로 연결됩니다.


2. 그리스도의 전쟁 준비 (14-16)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백마를 탄 정복자로 묘사하는 내용이 마치면서, 이제 14-16절은 전쟁을 준비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H. 하늘의 군대가 따름 (14; 슥 14:5; 마 16:27; 살후 1:7; 계 17:14; 14: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백마를 타신 그리스도를 따릅니다. 전쟁이 준비되는 모습입니다. 여기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천사들을 가리키는지, 하늘에 승리한 성도들의 무리를 가리키는지 여기서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먼저 이 구절은 스가랴 14:5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이를지라 너희가 그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들이 주와 함께 하리라(스가랴 14:5).”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하는 이 본문에서 ‘거룩한 자들’은 천사의 무리를 가리킵니다. 이런 주제는 주님의 재림을 묘사하는 신약성경에서도 발견됩니다. 주님은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태복음 16:27).”고 하셨고, 바울 사도도,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데살로니가후서 1:7).”라고 썼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고려하면 본문의 ‘하늘에 있는 군대들’은 천사의 무리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7:14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요한계시록 17:14).” 앞의 구절들보다 훨씬 더 본문의 내용에 가까운 이 구절에서,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은 하늘의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또한 ‘따르더라’는 말은 종종 제자도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다는 점도 고려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입니다(계 14:4).
이런 말씀들을 모두 고려하면, 백마를 타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하늘에 있는 군대들’은 천사들과 승리한 성도들 모두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있다는 언급도, 이들이 천사와 성도들을 가리킨다는 해석을 강화해줍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천상의 존재인 천사들(4:4; 15:6)과 성도들(3:4-5; 6:11; 7:9, 13-14; 19:8)이 모두 흰 세마포를 입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순결함 뿐 아니라, 로마의 개선장군이 입었던 세마포를 연상하게 한다는 점에서 승리를 상징하고 이들이 탄 백마 역시 그러합니다.
I. 입의 검으로 심판하심 (15; 사 11:4; 49:2; 살후 2:8; 시 2:9)
15절은 그 전쟁이 어떻게 진행될지를 보여줍니다. 최후의 전쟁은 17-21절에서 설명하지만, 15절은 이 전쟁이 오랜 전쟁이 되지 않을 것을 암시합니다. 역사 속에서 몇 년 혹은 몇 십년 간 지속되는 전쟁들이 있었지만, 주님이 재림하실 때, 그 최후의 전쟁은 그리 시간을 오래 끌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와’ 만국을 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이사야 11:4과 49:2의 인유입니다.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이사야 11:4).” 여기 ‘막대기’는 작은 창이나 왕의 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의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를 갈고 닦은 화살로 만드사 그의 화살통에 감추시고(이사야 49:2).” 바울 사도도 데살로니가후서에서 말씀합니다.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데살로니가후서 2:8).”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라는 말씀은 시편 2편의 인유입니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시편 2:9).”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라는 말씀도 여러 차례 살펴본대로, 심판의 은유적 표현입니다.
J. 만왕의 왕, 만주의 주 (16; 출 32:27; 삿 3:16; 시 45:3)
끝으로, 우리는 백마를 타신 그리스도의 또 다른 이름을 16절에서 봅니다. 이름이 쓰여진 위치를 먼저 주목해 보십시오. ‘그 옷과 그 다리에’라는 말은 ‘그의 옷 위 즉 그의 다리에’라는 말인데, 다리를 덮은 옷 부분, 또는 보통 검이 위치해있는 허벅지를 가리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허리’ 또는 ‘허벅지’로 번역이 되었습니다(출 32:27; 삿 3:16, 21; 시 45:3). 여기에 쓰여진 이름은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는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스스로를 땅의 모든 통치자, 왕들을 다스리는 주권자로 여기던 로마 제국의 황제들을 비웃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는 자신의 가신 왕들을 다스리지만(17장)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 만유의 주권자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는 이 이름과 오늘 본문은 ‘전사 메시아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라고 선언합니다.


3. 교훈과 적용
주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요한은 하늘이 열리고 그리스도께서 백마를 타고 공의로 심판하고 싸우기 위하여 오시는 환상을 보고 기록했습니다. 그날은 옵니다. 가시관을 쓰셨던 그분의 머리는 셀 수 없는 많은 왕관들을 쓰고 계십니다. 그는 만왕의 왕이고 만주의 주이십니다. 그는 한 순간에 당신 입의 예리한 검으로 만국을 치실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그분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늘 보좌에 오르신 주님, 한때 가시관을 쓰고 피 흘리셨고 온갖 조롱과 천대, 침뱉음을 당하셨던 그 머리에 이제는 수많은 왕관을 쓰시고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분이 오늘 여러분의 왕이시고 주가 되심이 맞습니까? 온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고 싸우러 오실 그리스도가 오늘 여러분의 왕이고 주님이십니까? 하늘 보좌에 앉아 영광의 왕관들을 쓰시고 그 전능하신 능력과 전지하신 지혜로 오늘도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시는 그분의 권세 앞에 무릎 꿇어 감사합시다.
마르틴 루터가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종교개혁의 현장에서 쓴 찬송시 “내 주는 강한 성이요”는(찬 585장) 오늘날까지 많은 성도들의 사랑을 받는 찬송가입니다. 우리말 번역에 그 의미가 분명하게 전달되지 않는 3절 가사의 일부를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무서운 어두움의 왕을, 우리는 두려워 떨지 않네.
그의 분노를 우리는 견딜 수 있네, 왜냐하면 보라, 그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도다.
한 작은 말씀이 그를 넘어뜨릴 것이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두렵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만왕의 왕이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시라면, 성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그 아들을 아끼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오늘과 영원히 전능하신 그리스도의 품 안에 있으니 무엇을 염려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또한 그리스도와 싸우려는 시도는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그것은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이 아닙니까? 그가 만왕의 왕, 만주의 주요, 백마를 타고 오시는 정복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사랑의 대상이 된 성도들이 누리는 복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할 수 없는 복이 아닙니까? 백마를 타고 오시는 온 세상의 정복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를 누리고 삽시다.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와 평안과 만족을 누리고 삽시다. 이런 은혜를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삼위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드리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