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SERMON
최근설교 및 강의

Home > 최근설교 및 강의 > 요한계시록 강해 2019 - (71). 천년왕국A

요한계시록 강해 2019 - (71). 천년왕국A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요한계시록 강해 2019 - (71). 천년왕국A

요한계시록 20:1-3, 마가복음 3:27, 히브리서 2:1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05-16

말씀내용
1.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관용을, 모든 일에는 사랑을!” (행 17:11)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관용을, 모든 일에는 사랑을!”(In essentials Unity, In Non-Essentials Liberty, In All Things Charity.” 5세기의 신학자 어거스틴의 말입니다. 기독교회 안에는 비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한 불일치가 존재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경에 근거하여 신앙의 내용을 가지게 되지만, 성경을 해석하는 입장 차이에 따라 교리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말씀입니다. 가령, 장로교회가 유아세례를 믿고 시행하는가 하면, 침례교회는 유아세례를 부정하고 당사자의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주는 세례만을 인정합니다. 교회 정치에 있어서도, 회중교회와 장로교회, 감독교회가 나뉩니다. 이런 차이들이 비본질적이라고 할 때, 이 주제들이 중요하지 않고 사소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중요하지만, 불일치한다고 하더라도 서로를 주 안의 형제로 용납한다는 점에서 비본질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상고할 요한계시록 20장과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교회 안에는 몇 가지 해석 그룹이 존재해왔습니다. 소위 ‘천년왕국’이라는 주제 아래 크게 세 가지(혹은 네 가지) 해석 그룹으로 나뉩니다. 먼저, 전천년주의(premillennialism)라고 불리는 그룹은 예수님의 재림 후에 천년왕국이라는 황금 시대가 시작될 것이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이 입장은 역사적 전천년주의와 세대주의 전천년주의, 둘로 다시 나뉩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천년왕국이라는 황금시대가 있을 것이라고 보는 후천년주의(postmillennialism)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역사 속에 특정한 의미에서의 천년왕국이라는 황금 시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의 교회 시대가 바로 천년왕국이라고 보는 무천년주의(amillennialism)입니다. 이것은 천년이 없다는 의미로 오해를 받기도 하기에, 시작된 천년주의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여러분 중에는 벌써 어지러운 분들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뜨거운 논란이 있는 이 본문에서 천년왕국이라는 주제를 얼마나 깊이 다루어야 하는가 많이 고민했습니다. 일단, 각각의 입장을 비교하여 설명하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이 주제를 좀 더 자세히 살피고 싶은 분들을 위해, 서종범 목사님이 강의한 30분이 채 안되는 두 개의 영상을 오늘 오후, 홈페이지와 유튜브 채널에 올릴 것입니다. 천년왕국에 대한 여러 입장을 일목요연하게 잘 비교하여 설명한 동영상입니다. 여러분은 그 동영상을 통해 유익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이런 불일치를 경험합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 공교회가 교의(Dogma)로 받아들인 핵심 진리—본질—에 대한 불일치는 이단으로 정죄 받겠지만, 천년왕국과 같은 비본질적인 교리(doctrine)에서의 불일치는 주 안에서의 형제애를 깨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한때 제가 부교역자로 섬겼던 교회가 교회의 신앙고백에서 “우리는 전천년주의를 믿는다”고 쓴 것을 보고 이건 수정해야 한다고 건의한 적이 있습니다. 이점에서, 저는 여러분이 베뢰아 사람들처럼 설교를 들으시고 이것이 과연 그러한가 성경을 살필 수 있기를 바랍니다(행 17:11). 저는 벧샬롬의 모든 교우가 천년왕국에 있어 정확한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천년왕국에 대한 문제는 장로교회로서 우리가 유아세례를 믿고 시행하며, 장로교의 정치체제를 가지는 것과는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유아세례를 시행하고 장로교 체제를 가진 것은 장로교회의 정체성 문제이지만, 천년왕국은 장로교회 안에서도 용인되는 해석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우리 교회의 신앙고백에서 종말론 부분은 이러합니다.
[재림, 몸의 부활, 최후 심판]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격적이며 가시적으로 지상에 재림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을 믿는다. 우리는 몸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 의인의 영원한 행복과 악인의 영벌을 믿는다(마 16:27; 막 14:62; 요 14:3; 행 1:11; 빌 3:20; 살전 4:15; 딤후 4:1; 딛 2:13; 고전 4:5; 고전 15; 살후 1:7-10; 계 20:46,11-15).
심플하지요? 이 고백은 종말론 신앙에서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최저선을 보여줍니다. 주님의 인격적, 가시적 지상 재림, 그리고 몸의 부활과 최후의 심판을 통해 만인이 영생과 영벌에 처해질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여기에서 불일치한다면 주안에서의 교제에서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천년왕국에서는 관용을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점을 주의하여, 자칫 지나치게 협소하여 마땅히 사랑하고 용납해야 할 형제들을 문밖에 세워두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천년왕국을 바르게 알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물론 있습니다! 첫째, 성경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천년왕국에 대한 이해는 단순히 먼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는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시대를 어떻게 읽고 사회와 문화를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고 대하면서 살아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2. 요한계시록 20장
다시 말씀드리지만, 요한계시록 20장은 교회사에서 뜨거운 논쟁의 중심에 있는 본문입니다. 본문 1-6절에 ‘천 년’이라는 말이 6번 나오는데, 이 본문 외에 소위 천년왕국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본문은 전무합니다. 그래서 천년왕국을 이해하는 일차적 방법은 이 본문을 해석하는 것인데, 해석하되 요한계시록 안의 다른 본문들 그리고 성경의 모든 가르침에 비추어 이해하는 것입니다. 저는 설교에서 그 논쟁을 일일이 소개하거나 설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제가 무천년주의의 입장에서 본문을 해석하고 그 해석을 중심으로 주님의 교훈을 얻고자 한다는 점을 밝힙니다. 그 어느 설명도 완전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무천년주의가 가장 이 본문을 잘 이해한 설명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먼저 20장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봅시다. 1-3절은 마귀가 천 년 동안 결박 당하여 무저갱에 던져진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4-6절은 그 천 년 기간 동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성도들이 왕 노릇 한다는 내용입니다. 7-10절은 천 년의 기간이 마치고 마귀가 잠깐 풀려나서 만국을 미혹하고 그리스도와 그 백성을 대적하여 전쟁을 벌이려다가 멸망을 당한다는 ‘또 하나의(?)’ 최후의 전쟁 이야기입니다. 11-15절은 그 전쟁과 함께 크고 흰 보좌 앞에서 온 세상이 심판을 받는다는 최후 심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1-3절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3. 19장과 20장의 시간 순서
제일 먼저 살필 문제는 19장과 20장의 환상이 보여주는 사건들의 시간 순서입니다. 1절은 ‘또 내가 보매’라고 시작합니다. 우리가 이미 여러 차례 보았듯이, 이 표현은 요한이 보는 환상의 순서일 뿐, 그 환상의 사건들이 일어나는 시간적 순서는 아닙니다. 물론 시간적 순서로 연결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리고 ‘또’라는 표현이 반드시 문법적으로 사건의 시간 순서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20:1-6의 환상에서 보는 사건은 19장의 환상이 묘사하는 최후 심판과 마지막 전쟁보다 앞선 시대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천사가 마귀를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은 천 년의 기간이 어느 시기를 가리키느냐 하는 문제를 남깁니다.
여기서도 ‘천 년’을 상징으로 볼 것인가, 문자적으로 볼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요한계시록의 144,000이나 666 같은 숫자들은 상징적인 수라는 것을 우리는 봐왔습니다. 여기서도 천 년은 문자적 천 년이라기 보다 완전수인 10의 삼배수로서 사탄이 결박 당하여 무저갱에 갇혀있는 긴 시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천 년이 문자적인 천 년이 아니라면, 그 천 년의 시기는 언제를 가리킬까요? 이것은 사탄의 결박이 언제 일어났는지를 결정하면 쉽게 나올 수 있는 답입니다.


4. 사탄의 결박 시점과 결박 정도 (9:1)
사탄의 결박이 언제 일어났고 그 결박이 완전한 무능의 상태를 의미하는지, 사탄이 하는 주요한 일을 제한한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논점입니다. 본문을 살펴봅시다. 요한은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는데, 그 천사는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손에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9:1에서 “하늘에서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그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고 한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별은 1:17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의 사자, 천사를 가리킵니다. 아마 20:1의 천사가 9:1의 천사와 같은 존재일 것입니다. 이 천사는 무저갱의 열쇠를 가지고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저갱은 악령들이 최후의 운명을 맞을 날을 기다리는 거대한 지하 동굴 같은 감옥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영적 영역입니다. 이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열쇠’가 네 번 나오는데, 먼저 주님이 ‘사망과 음부의 열쇠’와(1:18), ‘다윗의 열쇠’를(3:7) 가지신 분으로 묘사됩니다. 다윗의 열쇠는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로서 현세에서 사탄의 모든 간계로부터 당신의 충성된 교회를 보호하는데 사용하시는 열쇠입니다. 그리고 9:1에 무저갱의 열쇠를 가진 천사가 오늘 본문과 함께 나옵니다. 다윗의 열쇠를 제외하면, 모두 같은 의미의 열쇠입니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나 무저갱의 열쇠는 모두 악의 세력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주권적 통제권을 갖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정치적 세력으로 등장하는 짐승이나, 종교적 세력인 거짓 선지자, 그리고 그들을 통해 만국을 미혹하는 사탄이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 통제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본문의 천사는 ‘큰 쇠사슬’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열쇠에 더하여 사탄의 손을 벽에 묶어놓는 역할을 암시하지만, 역시 상징입니다. 이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도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줍니다.
A. 결박의 시점 (막 3:27; 눅 10:18-19; 요 12:31-32; 히 2:14; 골 2:15; 계 12:7-12)
천사는 용을 체포하는데, 그 용은 12:9에서 표현한 대로,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고 정체를 밝힙니다. 천사는 사탄을 천 년 동안 결박합니다. 자, 이제 이 결박이 언제 일어났는지 살펴봅시다. 전천년주의는 주님이 재림하셔서 천사를 결박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무천년주의는 천사가 사탄을 결박한 시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본문 안에서는 명확히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해석을 뒷받침해줄 성경의 설명들은 적지 않습니다. 먼저 주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마가복음 3:27).” 주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자, 사탄의 힘을 빌려 그렇게 한다고 비난합니다. 그때 주님이 하신 대답입니다. 주님은 사탄을 결박했기 때문에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결박은 계시록의 본문과 같은 단어가 쓰였습니다. 또 주님은 전도를 위해 파송되었던 70인의 제자들이 돌아와 귀신들이 항복하더라며 기뻐하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누가복음 10:18–19).” 이 말씀들은 사탄의 결박이 주님의 초림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또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한복음 12:31–32).” ‘이 세상 임금’은 물론 사탄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사탄의 쫓겨남과 주님의 십자가 지심(들림), 모든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심은 함께 일어나는 일입니다. 여기서 쫓겨난다(ἐκβάλλω)는 헬라어 단어는 결박한다(βάλλω)는 헬라어 단어에서 파생한 단어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님께서 오셔서 마귀의 세력을 멸하셨다고 선언합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히브리서 2:14).” 바울 사도도 골로새교회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로새서 2:15).” 이는 모두 주님의 초림에서 사탄의 결박이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말씀들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안에서도 그 실마리를 발견합니다. 12:7-12에서 용은 하늘 전쟁에서 미가엘에게 패하여 땅으로 내쫓겼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뱀의 머리를 밟으셨을 때 하늘에서 일어난 일을 달리 묘사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탄이 결박 당한 것은 12:7-12에서 일어난 그 일과 같은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사탄의 결박은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일어난 사건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초림은 성육신, 십자가 죽음, 부활, 승천의 모든 사건을 포함합니다.
B. 결박의 정도 (고후 4:4; 벧전 5:8; 엡 2:2; 6:12; 요 12:31; 마 28:18)
그렇다면, 사탄을 결박하여 천 년 동안 무저갱에 던져 가둔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사탄이 천 년 동안 옴짝달싹 못하는 완전 무능의 상태에 들어갔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그의 역사를 현저하게 제한한다는 의미입니까? 첫번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우리는 3절에서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라는 문구를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탄의 주요 활동의 특징인데, 그를 결박함으로써 이 주요 활동을 막고 제한하신 것입니다. 그 증거가 있습니까?
전천년주의는 사탄의 결박은 완전 결박이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이 재림하셔서 사탄을 결박하셔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이, 성경의 다른 본문들은 주님의 초림에서 사탄이 이미 결박 당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사탄이 여전히 불신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고(고후 4:4),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으며(벧전 5:8), 지금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고(엡 2:2),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로서 교회와 성도들을 대적하고 있는 것을(엡 6:12)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비록 그럴지라도 사탄은 자신의 주요한 일, 만국 가운데 복음이 전파되고 택한 백성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에서는 무력하게 쫓겨난 존재일 뿐입니다(요 12:31).
사탄이 결박 당했다는 것의 핵심은 그가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초림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대위임령을 주실 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8:18). 이것이 제자들이 모든 민족을 예수님의 제자로 삼을 수 있는 근거입니다. 사탄은 더 이상 만국을 미혹할 수 없도록 결박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가 여전히 불신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한다고 하더라도(고후 4:4), 모든 민족 가운데 있는 택한 백성들에게 복음이 증거되고 그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에서는 어떤 결정적인 역할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천사가 사탄을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을 하였다는 말도 사탄의 완전한 무력화를 의미하지만은 않습니다. 인봉이라는 말은 인침과 같은 말인데, 그레고리 비일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봉은 절대적 감금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인침은(7:3; 9:4) 그들을 모든 면에서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해를 받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므로 물리적 박해는 겪을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 사탄을 인봉하는 것(인침)은 사탄의 악한 활동의 절대적 중단을 함축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영적인 해를 입히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택한 백성, 인침 받은 성도들을 미혹하는 능력의 박탈을 의미한다.”
정리하면 결박되어 천 년 동안 무저갱에 갇힌 사탄은 두 가지 점에서 능력이 제한됩니다. 첫째로 교회 시대 동안 사탄은 택함 받은 자를 미혹하여 그들이 구원받지 못하도록 그리고 모든 민족 가운데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질 수 없도록 방해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사탄은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이 될 때까지 교회에 대한 마지막 공격을 감행하기 위해서 만국을 미혹할 수 없습니다. 이 두번째 경우가 3절 하반절에 ‘그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는 말에 잠깐 나오고, 7-10절에서 마지막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사탄은 주님이 재림하시기 직전에 잠깐 무저갱의 결박에서 풀려날 것이고, 주님과 주님의 군대를 대적하는 전세계적인 전쟁을 벌이려고 할 것입니다. 다시 아마겟돈 전쟁, 최후의 전쟁이 반복하여 묘사되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 (행 14:16; 창 12:1-3; 행 1:8; 마 24:14)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탄의 결박은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일어났고, 사탄이 무저갱에 결박, 감금당하는 천 년은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에 이르는 교회 시대를 가리킵니다. 이때 사탄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력해지는 것이 아니라 만국을 미혹하던 그 권세를 더 이상 부릴 수 없게 됨으로써, 복음이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는 일을 막을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루스드라에서 전도할 때, 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사도행전 14:16).”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그를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게 하겠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지만(창 12:1-3), 하나님의 복은 아브라함의 육신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의 경계를 현저하게 넘어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전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사탄을 무력화하시고(골 2:15) 멸하시고(히 2:14) 결박하셨습니다(막 3:27). 드디어 복음이 만국 모든 민족에게 전해지게 하셨고, 그 일이 교회 역사에서 지금까지 이루어져왔습니다. 주님은 모든 민족을 주님의 제자로 삼으라는 대위임령을 주셨고(마 28:18-20) 땅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행 1:8). 물론 교회 역사에서 수많은 복음의 증인들이 그 증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었고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이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사탄이 그 모든 수단을 다 사용해서 복음전도자들을 괴롭히고 죽인다고 할지라도, 사탄은 만국 백성을 미혹함으로써 그들이 복음에 반응하게 되고 믿어 주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일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는 결박 당하여 이 일에서 철저하게 무력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태복음 24:14).” 그 끝은 언제입니까? 주님이 재림하시는 때입니다. 교회 역사 내내, 사탄은 결박 되었기에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증거 되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모으시는 일을 저지할 수 없습니다. 비록 주님의 재림 직전에 ‘잠깐 놓인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사탄과 그 세력을 심판하여 완전히 멸하시고 영원한 불못에 던져 넣으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일이 될 뿐입니다.


6. 교훈과 적용
본문을 통해 주시는 주님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인생, 가정, 자녀들의 삶이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만만하게 살아가며,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고 자랑하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모든 인생을 주관하시고 심지어 영적 세력인 사탄도 결박하여 무저갱에 가두시는 주권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택한 백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러니, 만일 우리에게 불신 배우자나 부모 혹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있다면, 우리는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구원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가 불신 영혼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을 날마다 순간마다 주권자이시며 무한히 자비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값없이 베풀어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주님께 맡기십시오.
둘째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복음이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도록 섭리하신 은혜의 때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삶에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언제나 대가를 지불하는 삶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비록 사탄이 무저갱에 결박당하여 있다고 할지라도, 복음전도자를 고난과 순교의 자리로 데려갈 수 없는 게 아닙니다.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있기에사탄은 크게 분내어(계 12:12) 우리가 요한계시록 11장에서 본 것처럼 갖은 방법으로 복음이 증거 되는 것을 막으려고 하고 복음의 증인들을 죽이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두려워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바로 이어지는 말씀에서 죽음 조차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을 두렵게 할 존재는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이 시대에 주님이 교회에 주신 최고의 사명이라는 사실을 다시 기억합시다. 개인으로서 복음의 증인된 삶을 사는 것, 그리고 공동체로서 벧샬롬교회가 복음의 증인으로 세계 선교를 감당하는 일에 물질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드리십시다.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그 대가를 치르는 일을 무서워하지 맙시다. 이렇게 하는 것만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와 교회가 그 영광스러운 소망을 세상 앞에 드러내는 삶의 방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