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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77). 거룩한 성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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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77). 거룩한 성의 영광

요한계시록 21:9-1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06-27

말씀내용
요한계시록의 21:9-22:5은 21:2에서 요한이 보았던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대한 상세한 묘사입니다. 특별히 21장 9-11절은 거룩한 성의 외관을, 12-14절은 문과 기초석을 묘사합니다. 15-17절에서는 성을 측량함으로써 그 규모를 보여주고, 18-21절은 성의 재료들이 보석과 진주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22-27절은 거룩한 성 내부의 순결함과 영광을 묘사합니다. 끝으로 22장 1-5절에서는 성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들을 묘사합니다. 오늘 우리는 21:9-14에서 거룩한 성의 첫 모습을, 문과 기초석에 대한 설명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그 천사’와 두 여인 (9; 17:1,4)
하지만, 여기서 본문이 묘사하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무엇인지를 놓치면 아무 유익도 없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새 하늘과 새 땅, 천국이 어떤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교회에 대한 설명이라는 사실을 계속 기억하셔야 합니다. 요한이 본 거룩한 성의 환상은 완성된 교회, 승리한 교회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먼 미래에 주어질 영광이라고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도 그 본질을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본문에서 유념할 것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지구상의 어느 한 지역, 가령 현재의 예루살렘에 임할 실체라기 보다,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성의 영광과 아름다움, 열두 문과 기초석, 규모와 재료로 사용된 보석들 등이 모두 거룩한 성, 완성된 교회의 성격과 본질을 묘사하는 상징들입니다. 이제 본문을 살피겠습니다.
9절은 요한이 한 천사의 인도를 받아 이 환상을 본다고 기록합니다. 그 천사는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인데, 이 천사는 요한이 앞에서 보았던 천사와 같은 천사입니다. 17:1입니다.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로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요한계시록 17:1).”
요한에게 큰 음녀 곧 큰 성 바벨론을 보여준 천사가 이 천사였습니다. 먼저 요한에게 큰 음녀로 일컬어지는 큰 성 바벨론을 보여주었던 천사는 이번에는 어린 양의 신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여줍니다. 말하자면, 이 천사는 너무나 대조적인 두 여인을 보여주는데, 하나는 음녀이고 하나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음녀와 (그리스도인의) 신부, 큰 성 바벨론과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의도적으로 대비시켜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성은 모두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며져 있다는 점에도 비슷합니다. 음녀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 잔을 가졌다”고 했고(17:4), 어린 양의 신부도 21:18-21에 보면 각종 귀한 보석들로 꾸며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여인 모두 매력적이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하지만 음녀의 장식이 국가와 공모하여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고 믿음을 버리고 타협하도록 그리스도인을 미혹하는 세상 경제의 힘을 표상한다면(13:8; 17:2; 18:16), 순결하고 귀한 행실로 단장한 어린 양의 신부는 그녀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합니다(19:8; 21:2). 성도의 순종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 구속은 긴장 관계 속에서 같이 어우러져 교회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드러냅니다. 두 여인, 두 성에 대한 비교를 로버트 마운스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하나는 땅의 것으로 악에 대한 고삐 풀린 열정을 상징하는 반면, 다른 하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모든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의 전형이 된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음녀는 하나님을 반대하는 인간 문화—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회경제적이고 종교적인 문화—를 상징하고, 어린 양의 신부는 문자적 지역이나 성이 아니라 하나님께 구속함을 받은 충성스럽고 신실한 공동체인 교회를 상징합니다.
어린 양의 신부를 소개하는 천사가, 음녀를 소개했던 천사일 뿐 아니라,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라는 사실은 어린 양의 신부의 등장이 일곱 대접 심판과 거리가 먼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여섯째 대접 심판에서 아마겟돈 전쟁이 준비되고(16:12-16) 일곱째 대접 심판에서 세상에 대한 마지막 심판이 일어난 것을 보았습니다(16:17-21). 지금 우리가 보는 어린 양의 신부의 등장은 비록 이 사건들로부터 17-20장까지의 간격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일곱 번째 대접 심판으로부터 어떤 격차를 두고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이 사건들에 이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천사는 요한에게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보이겠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말하는 대신, 어린 양의 신부라고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어린 양’은 29회 나오는데, 그중 7회가 짧은 21:9-22:5 사이에 몰려있습니다(21:9,14,22,23,27; 22:1,3). 이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이 신부인 교회가 지닌 죄의 저주를 완전히 제거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에서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 가능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영원토록 ‘어린 양의 신부’라는 영예로운 이름, 그리스도를 높이는 이름으로 불릴 것입니다.


2. 성의 영광스러운 외관 (10-11; 겔 40:1-2; 마 16:18; 고전 3:16; 겔 43:2,5; 사 60:1)
요한은 다시 성령의 인도를 받아 크고 높은 산에 올라 새 예루살렘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17:3에서 요한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광야로 가서 음녀를 보았던 정황과 비슷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말은 요한이 새로운 환상에 들어갔다는 표시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산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장소로서, 특별한 영적 의미를 지녔습니다. 시내산에서 모세는 율법을 받았고(출 19-20), 느보산에 올라 하나님께서 주실 약속의 땅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신 34:1-4). 에스겔 40:1-2입니다. “우리가 사로잡힌 지 스물다섯째 해, 성이 함락된 후 열넷째 해 첫째 달 열째 날에 곧 그 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되 하나님의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에 이르러 나를 매우 높은 산 위에 내려놓으시는데 거기에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더라(에스겔 40:1–2).” 에스겔 선지자가 ‘매우 높은 산 위’에서 말일의 성전 환상을 본 것도, 오늘 본문과 상당히 유사합니다.
요한은 거기서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봅니다. 이 표현은 2절에 이어 다시 한 번 교회의 기원을 보여줍니다. 어린 양의 신부인 교회는 인간의 성취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합니다. “내가 교회를 몇 개 세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못된 말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6:18). 그리고 어린 양의 신부로 거룩하게 예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영향력 있는 목사나 교인이 교회를 세우는 게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려 죽으신 대속의 죽음으로 시작되었고 성령님께서 믿음을 주사 중생하게 하신 성도들로 구성되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온전하고 거룩하게 완성하여 어린 양의 신부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라는 말이 두 번 반복되는 것은 이런 의미를 함축합니다(2,10).
거룩한 성의 첫 모습을 요한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요한계시록 21:11).” 거룩한 성의 핵심 특징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린 양의 신부의 아름다움은 여러 보석으로 묘사되는데, 이 모든 묘사의 핵심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그들과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시는(21:3)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우리가 22절에서 보겠지만, 새 예루살렘의 특징은 성 안에 성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언제나 그 성 안에 세워진 하나님의 성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습니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21:22). 교회 즉,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계시는 성과 성전입니다. 바울 사도는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린도전서 3:16).”고 말씀한 바 있습니다. 장소로서의 거룩한 성에서 교회인 성도들은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와 혼인한 신부입니다. 이것을 그레고리 비일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의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임재)이 머물렀던 일시적 장소였다. 하지만 새 창조에서는 하나님의 임재가 성전 구조물에 제한되고 백성은 구조물 바깥에 있는 양상을 띠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백성 자신이 하나님의 임재가 거하는 성인 동시에 성전이 될 것이다(21:2-3, 12-14).”
교회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에 달려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진리입니다. 교회의 영광은 건물이나 유력한 자들, 또는 사람의 숫자나 교회가 보유한 재정에 있지 않습니다. 제 아무리 화려한 대리석과 고가의 자재로 지어진 교회당일지라도, 하나님의 임재가 없고 그 영광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교회는 그 본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요한이 본 거룩한 성, 어린 양의 신부인 교회의 첫 인상은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강조점은 에스겔이 보았던 성전 환상에서도 동일했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 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영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더라(에스겔 43:2,5).”
이사야 선지자도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되는 모습을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이사야 60:1).” 하나님의 백성, 어린 양의 신부인 교회의 교회됨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으로만 측정되고 평가될 수 있습니다.
이제 요한은 거룩한 성이 지닌 하나님의 영광을 시각적이고 감각적 언어로 묘사합니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조금 전에 읽은 에스겔 43:2과 이사야 60:1도 그 영광을 빛으로 묘사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성의 아름다움은 빛으로 묘사됩니다. 요한은 성의 빛은 마치 각 면 마다 빛을 내는 다이아몬드 같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고 했습니다. 앞에서 요한이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뵈었을 때,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요한계시록 4:3).”고 한 것으로 볼 때, 벽옥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을 묘사하는 특별히 중요한 보석인 것 같습니다. 벽옥은 21:18에서는 성곽의 재료로, 21:19-20에서는 성전의 첫째 기초석을 이루는 보석으로 나옵니다.
사실 벽옥(jasper)은 투명한 보석은 아니라고 합니다. 보통 붉은 색, 노랑, 갈색, 혹은 진녹색의 불투명한 수정 모양의 보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고 할 때, ‘맑다’는 단어는 ‘빛난다’는 번역할 수 있습니다. 10-11절의 요점은 요한이 본 성의 첫 인상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영광이고 본질입니다.


3. 성곽과 열두 문 (12-13; 사 62:6; 겔 48:30-35)
요한은 12-13절에서 외관상의 성곽과 성곽에 있는 열두 문을 설명합니다.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동쪽에 세 문, 북쪽에 세 문, 남쪽에 세 문, 서쪽에 세 문이니(요한계시록 21:12–13).”
성곽은 17-18절에서 좀더 자세히 묘사되지만, 여기서는 ‘크고 높은 성곽(a great high wall)’이라고만 언급됩니다. 성곽은 공성포가 사용되기 전 고대 세계에서 적들로부터 성을 보호하고 방어하는 용도로, 안전을 담보하는 상징이고 실재였습니다. 하지만 사탄을 포함하여 모든 원수들이 이미 둘째 사망 곧 불못에 던져졌기에, 거룩한 성은 안전이나 보호의 의미에서 성곽을 필요로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크고 높은 성곽’은 성의 안전함과 튼튼함을 강조하려는 의도이고, 그 성에 가득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의 크기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거대하고 높은 성곽에는 동서남북 사면에 각각 세 개씩 총 열두 문이 있다고 묘사됩니다. 이 열두 문은 동서남북에서 모여든 하나님의 자녀들로 구성된 보편적 공동체인 교회의 보편성을 상징합니다. 요한계시록 7:9에서 요한이 본 천상 교회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리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열두 천사가 각 문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천사들의 존재는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의 역할 뿐 아니라 성벽 위의 파수꾼을 연상하게 합니다(사 62:6). 이사야 선지자는 파수꾼이 선지자들, 깨어있는 백성이라고 이해했지만, 파수꾼을 천사로 이해했던 유대 전통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문에서 요한이 발견한 또 하나의 특징은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본 성전에도 열두 문이 있었고 각 문들이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으로 불렸다는 점이 비슷합니다(겔 48:30-35). 그러나, 에스겔 본문은 문들이 지파들의 이름을 따라 지어졌고 각 문이 각 지파가 자기 지파 소유의 영토에 들어가는 문이라면,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 열 두 문 위에 씌어져 있지만 어느 문으로 들어가든지 그 안에 구분이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의 성을 상속받는(21:7) 사람들(21:3)이 이 열두 문을 통해 거룩한 성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4. 열두 기초석 (14; 엡 2:20)
오늘 본문에서 마지막으로 언급되는 성의 외관은, 열두 기초석에 대한 것입니다. 14절입니다.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요한계시록 21:14).” 성곽의 기초석은 주춧돌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초석 위에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쓰여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성곽의 열두 문 위에는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 쓰여져 있었고, 열두 기초석 위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쓰여져 있습니다. 이렇게 거룩한 성은 열두 지파와 열두 사도, 구약과 신약의 언약 공동체가 연합된 통일성을 강조합니다. 무엇보다 기초석 위에 쓰여진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은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었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엡 2:20).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졌다’는 말씀은 사도들과 신약 선지자들이 전한 복음 메시지, 곧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토대라는 의미입니다. 이점에서 성경이 교회의 토대요, 기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엘 비키의 말입니다. “성경은 교회의 기초다. 교회가 진로를 유지하고, 생존하며, 계속 성장할 것이라는 유일한 보장은 우리가 성경으로 계속 돌아 오는 것 뿐이다. 우리는 그 책에서 읽은 내용에 비추어 교회 생활, 우리 자신의 삶, 그 밖의 모든 것을 계속해서 개혁할 수 있다.”


5. 교훈과 적용 (겔 8-11)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도전하십니까? 교회의 교회됨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영광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기에 교회이고,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교회는 거룩합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환상 가운데, 거룩함을 잃어버린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겔 8-10).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간 성전은 심판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겔 11). 교회도 동일합니다. 제사장들이 성전의 거룩함을 지켜야 했듯이, 오늘 주의 백성들, 성도들은 교회의 거룩이 훼손되지 않도록 지켜야 합니다. 거룩한 성인 교회를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한다면, 모든 죄와 오염으로부터 교회의 거룩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천사는 두 여인을 보여주었습니다. 두 여인은 모두 매력적이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음녀의 매력은 현세적이고 지금 당장 맛보고 원하면 체험할 수 있다고 유혹하는 매력입니다. 그러나 어린양의 신부의 매력과 그 아름다움은 지금은 다 드러나지 않지만 장래에 온전하게 주어질 영광입니다. 이것은 믿음으로만 보고 취할 수 있습니다. 어린 양의 신부의 아름다움은 믿음의 눈으로만 파악되고 빠져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두 여인 중 한 여인의 매력에 취하여 살아갑니다. 믿는다는 이들 중에도 음녀의 매력에 빠져 믿음을 타협하고(이것이 저버리는 것입니다) 교회의 거룩함을 더럽히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믿음의 눈으로 어린 양의 신부의 매력과 아름다움을 보기에, 거기에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며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어디 편에서 살아가십니까?
또 하나의 도전은 거룩한 성은 미래의 교회를 보여줄 뿐 아니라 현재의 교회를 보여줍니다. 비록 지금 완전히 드러나지는 않았을지라도 교회는 어린 양의 신부의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야 하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기에 그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먼 미래에 충만하게 나타날 그 영광과 아름다움이 지금도 희미하게나마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그렇습니까? 오늘 벧샬롬교회가 그러한가 말입니다. 비록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일지라도, 교회는 말씀 선포와 성례와 공동체의 삶은 빛나는 거룩한 성의 모습을 반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과 성례를 통해서, 사랑을 나누는 코이노니아를 통해서 우리는 하늘에 속한 백성임을 경험하고 그 빛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교회인 저희가 주님께서 저희에게 부여하신 아름다움과 영광을 보게 하옵소서. 그리고 저희가 어린 양의 신부로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드러내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