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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59). 진짜 찬송을 부를 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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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59). 진짜 찬송을 부를 그 날

요한계시록 15:1-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0-12-13

말씀내용
찬송은 성도의 영적 건강을 보여주는 특징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마음을 움직일 때 성도의가슴에서는 찬송이 터져나옵니다. 이쯤 되면,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어하는 벅찬 감격이 차오를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은 수많은 찬송으로 가득합니다. 기가 막힌 상황에서 조차 시인은 찬송을 부릅니다. 놀라운 것이지요. 이런 찬송은 신앙의 신비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진짜 찬송을 부를 그날]입니다. 그럼 그날 부르는 찬송은 진짜이고 오늘 우리가 부르는 찬송은 가짜라는 말이겠습니까? 그런 의미는 물론 아닙니다. 그냘에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진정성과 의미가 충만한 가슴으로 찬송을 부를 것이라는 뜻에서 말한 것입니다.


1. 15-16장의 문맥
우리는 오늘부터 요한계시록 15장으로 들어갑니다. 15-16장이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먼저 그 맥락을 살필 필요가 있겠습니다. 15-16장은 심판 시리즈의 마지막이자 세번째인 일곱 대접 심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5장은 일곱 대접 심판의 서곡이고, 16장은 심판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15장은 앞의 12-14장, 뒤의 16장을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5-11장에서 우리는 두 개의 심판 시리즈, 일곱 인과 일곱 나팔의 심판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삽입부처럼 12-14장은 영적 전쟁을 기록했습니다. 그것은 용과 여자가 낳은 아이, 그리고 용과 여자 그리고 용과 여자의 남은 자손과의 전쟁입니다. 용은 이 전쟁에서 두 짐승을 동원하여 거짓 삼위일체를 형성하고 성도들을 핍박합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우리가 지난 주일에 살펴 보았듯이, 의인과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추수, 즉 최후 심판으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결국 마귀는 승리하지 못합니다.
이제 15-16장은 마지막 심판 시리즈인 일곱 대접 심판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세 심판 시리즈는 역사의 시간순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이 아닙니다. 세 시리즈가 모두 교회 시대 전체 즉 주님의 부활부터 재림까지 인류에게 일어나는 하나님의 심판의 양상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15장은 12-14장의 영적 전쟁 스토리와 16장의 일곱 대접 심판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그 역할을 하는가 하면, 1절과 5-8절에서는 일곱 천사가 일곱 대접 심판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사이 2-4절에서 갑자기 12-14장의 영적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최후 심판(추수)이 이루어진 뒤에 승리한 성도들이 부르는 찬송을 삽입함으로써, 앞부분과 뒷부분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이제 보여줄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소개하기 전에, 먼저 모든 심판이 마친 후에 그 심판의 결과로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이 하늘에서 누릴 영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1절에서는 일곱 천사가 마지막 재앙이라고 불리는 일곱 대접 심판을 준비했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2-4절에서 승리한 성도들이 부르는 찬송을 보여줍니다. 그리고나서 5-8절에서 다시 1절에서 꺼냈던 일곱 대접 심판의 주제로 돌아와 그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알려준 뒤에, 16장에서 일곱 대접 심판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사도 요한은 왜 15장 1절에서 바로 일곱 대접 심판으로 들어가지 않고 2-4절을 통해서 소위 뜸을 들인 것일까요? 이것이 오늘 말씀에서 생각할 중요한 질문입니다.


2. 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과 혐오
이제 나타날 마지막 심판 시리즈, 일곱 대접 심판 환상은 앞에서 요한이 보았던 일곱 인이나 일곱 나팔 심판과 비교할 때, 그 범위나 정도에 있어서 더 철저하고 가혹하고 무서운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일곱 대접 심판을 보여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네가 본 심판 환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제는 정말 그 결과가 참담하고 가혹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이런 말씀을 듣게 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아니 앞에서 보았던 심판의 모습들도 충분히 무섭고 두려웠는데, 이건 아무 것도 아니라고요? 하나님, 너무 하신 것 아닌가요? 이렇게까지 가혹하게 심판하셔야 만족하시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던지지는 않으시겠습니까?
사실,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백이면 백 모두 이런 반응을 할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점잖은 반응에 속할 겁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은 물론,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 자체를 거부하고 혐오합니다. 죽음 이후 내세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과 같은 개념들은 생각하기 조차 싫은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거나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애정에 대한 언급보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언급이 더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문제는 불신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도,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 개념을 거북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신자라면 하나님의 심판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겠지만, 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조금 다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고 여깁니다. 아더 핑크는 “하나님의 진노는 그분의 신실성, 능력 혹은 자비와 마찬가지로 신령한 완전성의 한 측면”이라고 말합니다. 또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의 분노가 종종 그런 것처럼,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이고 성마르고 도덕적으로 비열한 것이 아니라”고 제임스 패커는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는 다 의롭고 심지어 선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선을 즐기시는 것처럼 악도 즐기신다면 어떻게 선하신 하나님이실 수 있겠습니까? 악에 대해서는 진노하심으로 심판을 행하셔야 선하고 의로운 하나님이 아닙니까? 또 선과 악의 기준을 피조물인 인간이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개인이 선과 악의 기준을 정하고 행동하도록 승인해주는 정부나 국가는 없습니다. 하물며 피조물인 인간이 어떻게 그 기준을 스스로 정하고 창조주 하나님의 기준에 대해서 왈가왈부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용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는 현대 사회는 하나님의 진노 개념을 기독교 최악의 부덕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사회적 영향이 만만치 않습니다. 게다가 우리의 관점과 사고는 온전하지도 않습니다. 인간 이성의 한계 때문만이 아니라, 역사의 종국을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식과 관점은 기껏해야 자기 인생의 짧은 연수에 한정되거나, 좀더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지나온 인류의 역사에 의존하여 생각할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본문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가득한’ 일곱 대접 심판을 보여주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먼저 모든 심판이 마치고 난 뒤 하늘에서 승리한 성도들이 그 승리를 만끽하면서 부르게 될 찬송을 살짝 보여주심으로써, 지금 너희의 제한되고 협소한 관점으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판단하지 말고, 하늘에 승리한 성도들이 왜 하나님의 심판이 마쳤을 때, 이런 찬송을 부르는지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3. 마지막 재앙이 선포되다 (1; 12:1,3)
먼저 1절을 봅시다.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요한계시록 15:1).”
1절은 15-16장의 일곱 대접 심판 본문의 공식적 서론입니다. 요한은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봅니다. 요한은 12장 1절에서 ‘하늘에 큰 이적’을 보았고, 12장 3절에서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을 보았습니다. 그 이적은 각각, 해를 옷 입은 여자와 한 큰 붉은 용이었습니다. 이들은 영적 전쟁의 당사자인 교회와 사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요한은 세번째로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봅니다. 이번에는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를 본 것입니다. 여기서 ‘이상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행위가 놀랍다는 말입니다. 요한이 첫째와 둘째 이적에서 본 여자와 용, 교회와 사탄의 전쟁이 교회 시대 전체에 걸쳐서 진행되었듯이, 이제 일곱 천사에 의해 전개될 마지막 재앙인 일곱 대접 심판도 역시 교회 시대 전체에 걸쳐 있게 될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일곱 대접 심판은 ‘마지막 재앙’이라 불립니다. ‘재앙’이라고 한 것은, 출애굽 당시 애굽에 부어진 재앙을 연상하게 하려는 의도이고, ‘마지막’이라고 한 것은 종말론적 재앙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이들은 ‘마지막’이라는 말에서, 이 재앙—일곱 대접 심판—이 연대기적으로 일곱 인이나 일곱 나팔 심판 이후에 오는, 역사 최후의 심판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근거는 미약합니다. ‘마지막’이라는 말은 심판 시리즈의 마지막이라는 의미 또는 요한이 본 심판 환상의 마지막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마치리로다’라는 말은 헬라어에서 부정과거시제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우리 말로는 ‘마쳤다’ 또는 ‘이루어졌다’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미래 시제로 번역한 것은, 이것이 일종의 예언자적 과거시제로, 장래에 일어날 일의 확실함을 확정적으로 말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1절에서 요한이 보게 될 일곱 대접 심판의 서론을 시작하고 나서, 2-4절에서는 갑자기 뒤로 돌아가서 마지막 추수 때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 승리한 성도들이 누릴 영광을 잠깐 보여줍니다. 1절의 선언과 일곱 천사의 심판에 관한 이야기는 5절 이후에 이어질 것입니다.


4. 승리한 하늘의 성도들 (2; 14:3-4; 4:6; 5:6)
요한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있는 성도들을 보았습니다. 그 묘사가 2절입니다.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요한계시록 15:2).”
‘또 내가 보니’라는 말은 1절을 중단시키고 14장에 나온 최후 심판의 주제로 돌아가기 위한 장치입니다. 요한이 본 것은 하늘에 있는 성도들에 대한 큰 환상이었습니다. 요한이 본 사람들은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입니다. 이들은 14장 3절에서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이고 4절에서는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과 같이, 모든 싸움을 이기고 승리한 성도들입니다. 밧모섬의 요한은 주님의 재림과 최후 심판 때에 구속 받은 성도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입니다.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성도들을 박해한 원수들이 특정되고 있는데,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임을 암시합니다. 이 성도들은 개인적 유혹을 이겨냈고 종교적 압박과 경제적 압박을 모두 이겨낸 사람들입니다. 그들 중에는 무력하게 죽임을 당하는 방식으로 이긴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들과 역사 속의 수많은 순교자들이 거기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순교자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로버트 월(Robert Wall)은 “종말론적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순교가 아니라 오직 충성됨이 요구된다.”고 말합니다. 성도들이 어떤 방식의 죽음을 죽는가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사는가 입니다. 믿음, 그 충성되고 신실한 믿음으로 사는가? 삶에서 그 믿음의 신실함을 드러내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 주일학교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에도 있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입니다. 그 믿음은 입술로만 고백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 믿음은 참된 믿음, 살아있는 믿음,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이제 성도들이 어디에 서 있는지 보십시오. 그들은 ‘유리 바다 가에’ 서 있습니다. ‘유리 바다 가에’ 서 있다는 표현은 유리 바다 ‘위에’ 서 있다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한글번역본 중에는 [새번역]과 [우리말성경]이, 영역본에서는 KJV이 이런 의미로 번역했습니다. ‘유리 바다’는 구약 성경에서 ‘하늘 위의 궁창(창 1:7)’ 개념이나 솔로몬의 성전에 있던 ‘놋바다(왕상 7:23)’ 또는 에스겔 선지자가 보았던 환상 중에 ‘수정 같은 궁창의 형상(겔 1:22)’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요한은 4장의 보좌 환상에서 이미 ‘유리 바다’를 본 적이 있습니다. 4:6입니다.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요한계시록 4:6).”
유리 바다는 보좌 앞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또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5:6). 이 말씀에 의하면, 어린 양이 서 있던 곳은 보좌 앞 ‘유리 바다 위’였습니다. 어린 양은 죽임을 당하였다가 부활하신 승리자로 거기에 서 계셨습니다. 승리한 성도들도 지금 유리 바다 위, 보좌 앞에 서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서 있다’는 이 표현은 승리자로 서 있다는 암시라고 말합니다. 어린 양처럼, 성도들도 승리자로서 보좌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특별히 요한계시록에서 ‘바다’는 우주적 악을 내포하는 곳입니다. 홍해는 바다 괴물의 처소로 간주되었고(사 51:9-10; 시 74:13-14) 짐승이 바다에서 나오며(단 7:3; 계 13:1)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바다가 없습니다. 바다는 혼돈을 의미했습니다. 깊이를 알 수 없고 속이 보이지 않는 바다가 이제는 하나님의 주권 앞에 정복을 당하여 이제 수정 같이 맑은 유리 바다가 되었습니다(4:6). 그런데 본문은 ‘불이 섞인 유리 바다’라고 기록합니다. 불은 심판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어린 양이 서 계신 자리, 승리한 성도들이 서 있는 그 자리는 바로 원수들을 심판하신 그 자리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원수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마치고 승리한 성도들은 승리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보좌 앞 유리 바다 위에 서 있습니다. 이들은 주님께서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상을 약속하셨던 ‘이기는 자’들입니다. 주님께서 이들에게 약속하신 것은, 생명나무(2:7), 둘째 사망을 면하는 일(2:11), 감추었던 만나(2:17),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2:26), 흰옷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3:5),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되고, 그들 위에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되는 영광을 얻는 일(3:12),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보좌에 앉는 영예를 누리는 것입니다(3:21).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이기는 자들이 받아 누릴 영광의 한 단면을, 그들이 부르는 찬송으로써 요한과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5.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 (3-4; 14:2; 5:9-10; 14:3; 출 15:1-8; 신 32:1-43)
승리한 하늘의 성도들은 14:2에서처럼, 거문고를 가지고 노래를 부릅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입니다.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세가 불렀던 노래, 곧 어린 양에 대한 노래’라는 말입니다. 이 노래는 사실상 이십사 장로가 불렀던 새 노래(5:9-10)나 구속 받은 성도들이 부른 새 노래(14:3)와 다르지 않은 노래일 것입니다.
모세의 노래는 출애굽 이후 홍해를 건너고 바로와 그 군대가 홍해에 수장된 뒤에 모세가 불렀던 노래를 가리킬 것입니다(출 15:1-8). 본문 3-4절의 노래 내용은 출애굽기 15:1-8의 압축이라고 볼 수 있고, 신명기 32:1-43에 기록된 모세의 노래와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 내용은 어느 신(용과 짐승들)과도 비교불가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원수들(용과 짐승들 그리고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을 심판하고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며 결국 만국이 주를 경배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의롭고 참되므로 하나님은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는 것입니다.
3-4절을 보지요.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요한계시록 15:3–4).”
먼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크고 놀랍다고 찬송하고,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다고 찬송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않거나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찬송할 이유는, 오직 주만 거룩하시고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오직 주만 거룩하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과 구별되시고 세상 위에 계시는, 비교 대상이 없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거룩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도덕적 순수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능력을 가리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외에 세상을 심판할 분은 없습니다. 또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기에 하나님을 찬송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의로우심은 구원과 심판에서 모두 나타났습니다. 그의 구원도 의롭고, 심판도 의롭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경험하면 누구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만인구원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국 가운데서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와 경배하는 자들이 있으리라는 선교적 주제를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이 모든 일은 결국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을 통해서 이루어진 일이기에, 이 노래는 어린 양에 대한 노래요 찬송입니다.


6. 진짜 찬송을 부를 그날을 기다리며
지금 우리에게는 온갖 유혹과 종교적, 경제적 압박을 받는 가운데, 신앙을 지키고 살아가려는 몸부림이 있습니다. 이런 몸부림은 참된 성도의 특징입니다. 짐승의 표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런 신앙적 몸부림이 있을리 만무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삶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언젠가 영광스럽게 하나님의 보좌 앞 유리 바다 위에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자로 서게 될 날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날을 바라보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날에는 믿음과 복음 때문에 겪는 괴로움이 다 사라지고,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영원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조엘 비키의 표현을 빌면, 지금 우리는 ‘절반만 마쳐진(half-finished)’ 시간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날이 오면, ‘하나님의 진노가 다 마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마치게 될 그날이 오면 우리는 인생에서 겪은 숱한 아픔과 고통에 대한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리처드 브룩스의 말입니다. “당신과 나는 여전히 이 세상에 살고 있다. 여기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고,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일들도 많으며 우리가 쉽게 잘못 해석할 수 있는 일들이 가득하다. 가정과 교회, 국가와 개인 생활에서 우리는 이런 일들을 무수히 경험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더 큰 관점, 우리 자신의 짧은 인생에 갇힌 관점 보다 더 큰, 하나님의 관점과 목적들에 비추어 보는 역사에 대한 더 큰 관점이 필요하다.”
그 관점은 그날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진노도, 하나님의 심판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인하여 기뻐하며 넘치는 찬송을 부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찬양의 진리들을 구속 역사의 맥락에서 보고 있고, 멀리서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기에 지금도 그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그날을 생각해 보십시오. 헤르만 훅세마(Herman Hoeksema)의 말입니다. “그날은 세상 역사 중에서 가장 놀라운 시기 가운데 하나이다. 만물의 목적이 달성 되고 하나님의 거룩이 최대로 드러나며 하나님의 말씀이 악한 세상 위에 진리로 나타나고 주의 이름이 만물 위에 영광과 승리로 계시될 때이다. 그날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학수고대하며 제단 아래의 영혼들이 밤낮으로 쉬지 않고 부르짓던 탄원이 성취되는 사상 최대의 사건이 발생 되는 시점이다. 그날이야말로 죽임을 당했던 어린 양이 만왕의 왕으로써 전능자로서, 시온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온세상에 역력히 드러내는 놀라운 순간이다. 그날은 마귀의 모든 활동들이 무력하고 부질없는 것이었음이 증명되고 어둠의 왕국이 종식되는 시간이다. 그날은 세상 역사에 있어 최고의 순간으로서 하나님의 모든 뜻이 실현되는 시기이다.”
요한이 본 바, 하늘의 승리한 성도들이 부른 이 찬송이 그날 우리가 부를 찬송입니다. 일평생 이렇게 찬송해본 적이 없다고 느낄 만큼, 우리는 그날 하나님과 어린 양께 이 찬송, 이 노래를 불러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날을 바라고 소망하는 성도들은 이 땅에서도 그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어떤 유혹과 압박 속에서도, 그날을 바라보는 성도들은 그 찬송을 하나님과 어린 양께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비록 우리의 관점, 우리의 시야, 우리의 안목은 여전히 좁고 한정된 것이지만, 장래에 그 일이 일어날 것을 알기에, 오늘도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면서도 그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부르고,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께 감사와 찬송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진짜 찬송이 가득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