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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62). 그날에 깨어있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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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19 - (62). 그날에 깨어있는 자

요한계시록 16:12-21, 에베소서 6:1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1-01-10

말씀내용
우리는 오늘 대접 심판의 남은 부분, 여섯째와 일곱째 대접 심판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는 널리 알려졌지만 바르게 알려지지 않은 아마겟돈 전쟁이 등장하는데, 이 개념에 대해서도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1. 여섯째 대접 심판 (12-16)
A. 유브라데 강이 마르다 (12)
여섯째 천사가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음으로써 여섯째 대접 심판이 시작됩니다. 여섯째 대접 심판의 핵심은 아마겟돈 전쟁을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대접을 유브라데 강에 쏟았고 강물이 말랐다는 의미를 생각해보지요. 유브라데 강은 1세기 말 로마 제국과 파르티아 제국의 국경이었고 언젠가 말씀드렸듯이, 로마는 파르티아 제국에게 두 차례 패전을 경험한 바 있었습니다. 유브라데 강은 구약적 배경에서 볼 때에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의 동쪽 경계였습니다(창 15:18; 신 1:7-8; 수 1:3-4). 국경이 큰 강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안전을 담보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고대세계에서 큰 강을 건너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용이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강물이 말랐다고 합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가로막힌 장벽, 장애물이 무너지고 침략이 가능해졌음을 암시합니다. ‘동방에서 오는 왕의 길들이 예비되었더라’는 말씀이 그것을 가리킵니다.
본래 홍해가 마르고 요단강이 마른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과 관계가 있는 것이었지만, 여기서는 심판과 멸망의 전조를 보여줍니다. 실제로 이사야 선지자는 강물들을 마르게 함으로써 고레스 왕이 바벨론을 침략하고 멸망시킬 것을 예언한 바 있습니다(사 44:27-45:3). 그래서 그레고리 비일은 유브라데 강물이 마른 것은 마지막 때 큰 성 바벨론의 멸망의 전조가 되는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이 일은 유브라데 강이 말라 동방 왕들로 대표되는 세상 곧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교회를 공격하는 길이 열림으로써 시작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봅니다.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유브라데 강이 마른 것을 보고 힘을 얻어 교회를 공격하겠지만, 그것은 곧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사건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B.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 (13-14a; 13:14; 요 8:44; 마 24:24; 살후 2:9-10)
13-14절은 그 일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보여줍니다. 먼저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나오는데, 이는 12-13장에서 보았던 용과 두 짐승을 가리킵니다. 땅에서 나온 짐승은 이적을 행하고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는 속성 상(13:14) 여기서 거짓 선지자로 불립니다. 이 악의 삼위일체가 유브라데 강이 마른 것을 보고 온 힘을 다하여 하나님과 주의 교회를 대적하려고 합니다. 그들의 입에서 각각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나왔습니다. 여기서도 입이 중요합니다. 그들의 본질은 속임이고 주님의 말씀대로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고 그들의 입에서 나온 더러운 영들이 할 일도 속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요 8:44). 그들의 입에서 나온 영들이 개구리 같다는 것은, 애굽의 재앙을 상기시킬 뿐 아니라, 모세의 율법에서 더러운(부정한) 동물에 속하는 개구리를 통해 그 더러움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레 11:10-11). ‘더러운 영’이라는 말은 복음서에서 귀신을 부르는 호칭이었습니다(막 1:23,26,27). 14절에서는 이들을 ‘귀신의 영’이라고 부연함으로써 그 본질을 강조합니다.
이들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군대를 소집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전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들이 미혹하는 수단은 이적입니다. 세 더러운 영은 온갖 감언이설로 사람들을 미혹하여 하나님과 교회를 대저하게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이나 바울 사도의 말씀에서 이미 예언된 바입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태복음 24:24).”또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데살로니가후서 2:9–10).”
C. 아마겟돈 전쟁 (14b,16; 19:19; 20:8)
12절에서는 동방의 왕들을 언급했는데 여기서 세 더러운 영들은 ‘온 천하 왕들’을 미혹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게 합니다. 여기서 ‘온 천하’는 짐승의 표를 받고 살아가는 자들 곧 ‘땅에 거하는 자들’과 동의어입니다. ‘동방에서 온 왕들’은 여기 ‘온 천하의 왕들’로 확대됩니다.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을 전쟁’이라는 말은 이 전쟁이 우주적 규모의 전쟁임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16절은 이 전쟁이 아마겟돈에서 벌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마겟돈 전쟁’이라고 불립니다.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이라는 말은 6:17에서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진노의 큰 날’로 표현되었고, 창세로부터 있던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이 완성되는 날을 가리킵니다(마 25:34; 엡 1:4; 히 4:3). 이 전쟁은 사탄의 세력이 성도들을 향해 퍼붓는 최후의 공격이 될 것입니다.
이 전쟁에 대한 언급은 요한계시록에서 몇 차례 등장합니다. 아래 두 구절이 모두 같은 전쟁에 대한 언급입니다.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와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요한계시록 19:19).”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요한계시록 20:8).”
본문의 ‘온 천하 임금’은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들(19:19)’이고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20:8)’입니다. 이 싸움의 주체는 용과 짐승이고 이들이 싸움을 벌이는 대상은 ‘말탄 자와 그의 군대(19:19)’ 곧 그리스도와 성도들이며,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 곧 교회입니다(20:9). 16절에 보면, 결국 세 영은 임금들을 아마겟돈으로 모읍니다. 그래서 이 전쟁은 아마겟돈이라고 불리는데, 아마겟돈은 히브리어로 ‘하르마겟돈’이라고 읽습니다. 하르는 산을 의미하므로, 이것은 므깃도의 산이라는 뜻입니다. 문제는 실제 므깃도의 지형은 평원이지 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므깃도의 산, 즉 아마겟돈으로 왕들을 모은다는 것일까요?
므깃도는 갈멜산 남쪽에 위치한 성읍으로 팔레스타인 내륙에서 북방의 두로나 시돈으로 갈 때, 또는 메소보다미아에서 수리아를 거쳐 애굽으로 갈 때 반드시 통과해야 할 교통 요충지로서, “므깃도를 얻으면 일천개의 도시를 점령하는 것 보다 낫다”는 말을 할 정도로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므깃도에서는 유독 전쟁이 많이 벌어져서, 데렉 토마스는 “그곳은 이스라엘의 전장이었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사사 드보라와 바락의 전투가 므깃도에서 벌어졌었고(삿 5:19-21), 유다의 요아스 왕은 므깃도에서 애굽과 전투를 하다가 전사했습니다(대하 35:20-24).
므깃도에 대한 이필찬교수의 설명은 유익합니다. “므깃도라는 도시는 구약에서 전쟁이나 심판과 관련하여 주로 사용되는데, 특히 사사기 5:19-21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압박하는 왕들의 패배를 언급하고(참조.삿 4:7),열왕기상 18:40에서는 (엘리야 선지자에 의하여) 거짓 선지지들이 패망하는 장면을 소개하며, 열왕기하 23:29-30과 역대하 35:20-25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잘못 이끌었던 왕들의 죽음의 장소로 언급되고, 스가랴 12:11-14에서는 하나님을 배역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통하는 모습을 므깃도 골짜기에 있던 애통에 비교한다. 이러한 본문의 공통점은 하나님올 대적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의 장소로 므깃도가 사용된다는 점이다. 요한계시록에서 바로 이러한 배경의 므깃도를 어근으로 하는‘아마겟돈'이리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만국을 이끌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 전쟁을 일으키려는 바로 용, 짐승, 거짓 선지자에 대한 심판의 장소로 제시하려는 목적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세 영이 왕들을 모으는 장소인 므깃도의 산, 아마겟돈은 문자적인 의미라기 보다 그런 심판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상징적 장소로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므깃도의 산은 존재하지 않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세대주의적 해석은 므깃도를 실제 지명인 므깃도로 이해하고, 아마겟돈 전쟁이 문자적으로 칠년 대환난 후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있기 전, 인류의 마지막 전쟁으로 벌어질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유프라테스 강이 말라, 러시아, 중국, 또는 이슬람 세력이 이스라엘을 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만일 이처럼 중요한 사건이 역사의 한 시점에 벌어질 것이라면, 성경은 그것을 모호하고 어려운 해석의 과정을 거쳐 소수의 사람들만이 발견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전쟁은 상징적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요한계시록의 해석에 비추어서도 바른 해석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아마겟돈 전쟁은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전세계적으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일으키는 영적 전쟁인 것입니다.
헨드릭슨의 말입니다. “아마겟돈은 모든 전쟁의 어려운 상태, 즉 성도들이 억압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고난 받는 자기 백성의 유익을 위해 갑자기 능력을 보이며 원수를 무찌르는 것을 상징한다… 최후의 아마겟돈 전쟁은 사탄의 짧은 때(11:7-11)와 일치한다. 세상이 사탄의 통솔 아래 적그리스도의 정권과 적그리스도의 종교가 교회와 대결하는 최후의 전쟁을 위해 모일 때 하나님의 자녀들은 고통이 극심해지며 모든 부분에서 억압을 받게 된다. 이들 자녀들이 구원을 부르짖을 때 홀연히 극적으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그의 백성을 구원해 내실 것이다.”
비록 아마겟돈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온 천하의 왕들이 집결하여 하나님과 교회를 대적할지라도, 이 전쟁은 검이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와(19:15) 원수들을 박살낼 때 순식간에 끝날 것입니다. 그레고리 비일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는 왕들의 패배(삿 5:19-21), 거짓 선지자들의 파멸(왕상 18:40), 백성을 근심으로 이끈 잘못된 왕들의 죽음(왕하 23:29-30), 그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오고 이스라엘 온 지파를 애통에 빠지게 한 모든 이방 나라들의 장래의 멸망(슥 12:9-14)을 가리킨다.” 하나님과 교회를 대적하려는 목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세력은 아마겟돈에 총집결하겠지만, 결국 하나님의 의도는 만천하에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배후에서 그들을 한꺼번에 심판하시기 위해서 한 자리에 불러모으신 것입니다.
D. 깨어있는 자는 복이 있도다 (15; 20:9-10; 6:11; 19:8)
교회는 이처럼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로부터 나오는 세 더러운 영에게 미혹을 받은 모든 불경건한 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문자적 전쟁이 아니라 영적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대비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이 전쟁의 기사를 말하던 사도 요한은 잠깐 멈추어 이렇게 성도들을 권면합니다.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요한계시록 16:15).”
사도는 임박한 주님의 재림을 말하면서 성도들에게 권면하는데, 이것은 경고이기도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국경선이 뚫리고 적들의 총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교회의 위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짐승이 전체 신앙 공동체인 교회를 궤멸하려고 획책하고 그 총공격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큰 날’에 있을 이 총공격은 언제라도 불시에 일어날 수 있고 그러므로 신자들은 믿음으로 굳게 서서 그 일이 일어날 때 타협하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오리니”라고 1인칭이 사용된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주님의 재림은 도둑이 오듯, 예고 없이 잠 잘 때에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다가 주님을 맞으라는 것입니다. 잠을 자다가는 옷을 빼앗기게 될 것이고, 벌거벗은 부끄러움 가운데 주를 맞게 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전쟁이 다가오는데 왜 주님의 재림을 언급하고 재림을 대비하라는 것일까요? 적들의 총공세가 시작되고 교회가 크게 위험에 처하게 될 때 사람들은 흔들릴 것이고, 타협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소망이 없구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 스스로는 이 전쟁을 이길 능력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오시면, 그 순간 모든 전세가 역전될 것입니다. 주께서 그들을 불로 태우시고 마귀와 짐승과 거짓 선지자를 불과 유황못에 던져넣으실 것입니다(계 20:9-10).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세상에 대한 교회의 승리는 주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때가 언제일지 예측할 수 없지만, 주님은 홀연히 오실 것인데, 여기에 성도의 위로가 있는 것입니다. 조지 래드는 말합니다. “이 구절의 전체적인 강조는 주 오심의 예기치 않은 성격에 있다. 때에 대한 불확실성의 관점에서, 신자는 긴장을 늦추거나 잠을 자서는 안 되고 깨어 있어야 한다.”
엄청난 영적 전쟁 앞에서 성도가 왜 영적으로 깨어서 주님을 기다려야 하는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것만이 이 전쟁을 이길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깨어 있어야 합니까?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제단 아래서 신원하여 달라고 구하는 순교자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셨습니다(계 6:11). 또 19:8에서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에서 성도들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이와 같이 옷은 주님이 주시는 영예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미 성도들은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들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라디아서 3:27).” 그러므로 본문에서 ‘옷을 지켜’라고 말씀하는 것은 성도의 신분을 지키라는 말씀이고, 성도 답게,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이 주신 성도의 영예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서 ‘복이 있다’고 표현한 7복 중 하나입니다(1:3; 14:13; 16:15; 19:9; 20:6; 22:7,14). 도둑 같이 임할 주님 재림의 날에 깨어있는 자는 복된 자입니다. 그는 영광의 승리를 경험하고 그 승리에 참여할 것입니다.


2. 일곱째 대접 심판 (17-21; 요 19:30; 계 21:6; 행 10:31)
여섯째 대접 심판은 한편 전쟁 준비의 차원이었습니다. 이제 일곱째 천사가 대접을 공중에 쏟습니다. 공중은 악의 핵심 영역(엡 2:2,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을 의미하고 다섯째 대접이 짐승의 왕좌에 부어진 것과도 연결되는 개념입니다(16:10). 이제 사탄의 전영역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집니다. 이때 하늘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큰 음성이 나오는데,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성부 하나님 혹은 성자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 동일하지는 않지만,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신 말씀과 의미가 다르지 않습니다(요 19:30).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속죄를 완성하셨는데, 이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은 전적으로 주님의 속죄 사역의 완성에 근거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보겠지만, 21:6에서 다시 하나님께서 “이루었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되었음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는 싸인들이 나타납니다. 18절은 시내산에 하나님께서 강림하셨을 때의 상황을 상기시킵니다. 번개, 음성들, 우렛소리 그리고 유사 이래 없었던 큰 지진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어지는 17-18장에서 큰 성 바벨론의 멸망을 자세히 보겠지만, 여기서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졌다는 것은 완전한 파멸을 상징합니다. ‘만국의 성들’이 함께 무너집니다. 이는 큰 성 바벨론을 축으로 돌아가는 세상의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중심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기억하신 바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사도행전 10:31).” 하나님의 기억은 상과 벌을 가져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본 것을 못 본체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20절은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 데 없더라”고 말씀합니다. 섬과 산들은 영구적인 것의 표상입니다. 고려 말 길재의 시조에는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다’는 유명한 표현이 있습니다. 산천은 옛날 그대로 변함이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섬이 없어지고 산악이 간데 없다고 말씀합니다.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은 이제 애굽의 우박 재앙을 상기하게 하는, 한 달란트 무게의 큰 우박을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쏟아냅니다. 한 달란트는 20-60kg 의 무게를 말합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와중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비방한다는 사실입니다. 대접 심판은 사람이 회개한다는 것에 대한 여지를 조금도 주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퍼부어집니다.


3. 교훈과 적용 (엡 6:18; 계 16:15)
성경은 교회 시대 내내 하나님의 심판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이 올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영적 전쟁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큰 전쟁에 대해서도 말씀합니다. 이것은 교회와 성도들에게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스스로의 힘으로 이 상황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성도의 소망은 주 예수님의 재림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어떻게든지 이 상황을 스스로 이겨내보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 싸움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들을 불로 태우시고 심판하심으로써 막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점에서 성도들에게 큰 그림을 보여줍니다. 영적 영역에서의 싸움이 지상의 인간 역사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교회와 성도는 이 전우주적인 싸움의 한 복판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자신 안에 남아있는 죄성, 죄의 오염과 싸우고 살아가는 것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싸움은 개인적 차원의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우주적 차원의 싸움 안에 있고, 그 영향 하에 살아갑니다. 성도 개인도, 지역 교회도 다 그렇습니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 교회에게 쓰는 편지를 마치면서 성도들이 영적 싸움의 한 복판에 있음을 말씀한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에베소서 6:18).”
사도 바울도 깨어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깨어 있음은 이 영적 싸움에서 중요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길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주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순간을 맞이하기 위함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승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여러 성도’를 위해 기도하라고 한 것은 모든 성도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모든 성도, 모든 교회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나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싸움이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주님은 그래서 우리를 교회로 부르신 것입니다.
다시 15절을 봅니다.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요한계시록 16:15).”
주님께서 도둑 같이 예상치 못한 시간에 오실 것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전쟁이 마칠 것입니다. 그날의 영광을 맞아 누리기 위해 깨어있는 자는 복된 자입니다. 옷을 지키고 성도의 본분을 지키다가 주님을 맞이하는 자는 복된 자입니다. 그 영광의 날에 그 자리에 서기 위해, 오늘도 깨어 주님을 기다리는 은혜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형제들을 돌아보고 우리가 같이 싸운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형제들을 위해, 벧샬롬 교회를 위해, 이 땅에 세워진 모든 주님의 교회를 위해, 전세계에서 그 일을 감당하는 주의 종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깨어 간구하는 사람은 주의 말씀대로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