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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19B). 하나님께서 주신 두 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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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19B). 하나님께서 주신 두 책(2)

시편 19:7-14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7-11-01

말씀내용
1.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벧후 1:19)
시인 다윗은 19편에서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를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놀랍게 찬양하고 있습니다. 지난 번에 살펴본 대로, 하나님께서는 자연 만물을 통해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셨고 계속해서 나타내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특별 계시인 성경에 비하면 그 기능이 제한적입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 1장에 쓴 대로 일반 계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드러내지만(롬 1:20), 하나님의 뜻과 복음의 영광, 그리고 하나님의 인격과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분명하게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이 하나님의 놀라운 솜씨를 보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할 충분하고도 넘치는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가볍게 여기면 안 됩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두 책 중에 자연을 보고 또 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는 서로 간에 아무런 모순도 없습니다. 두 계시는 모두 동일하신 하나님을 계시합니다. 다만 특별 계시는 일반 계시에 비해서 더 확실한 예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령의 영감으로 이렇게 썼습니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벧후 1:19).” 여기서 사도가 ‘더 확실한 예언’이라고 한 것이 무엇을 가리킵니까? 그것은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리킵니다. 특별 계시인 성경은 ‘더 확실한 예언’입니다. 사도는 심지어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변화되시고 하늘에서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던 것과 성경을 비교하고 있습니다(벧후 1:17~18). 성경은 사도가 직접 들은 그 음성보다 더 확실한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는 어떤 체험이나 환상도 다 성경 말씀에 의해 판단을 받아야 할 뿐 아니라, 성경 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지는 것은 없다는 것을 이 말씀은 잘 보여줍니다.
2. 태양과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
다윗은 4~6절에서 해(태양)를 언급했습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다윗이 말하려고 하는 특별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율법)으로 이어집니다. 태양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과 공통점이 많습니다. 이제 다윗이 말하듯이, 태양이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운행하고 그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듯이(6)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도 모든 죄인의 허물을 드러낼 뿐 아니라 그 앞에서 숨을 자가 없습니다. 태양이 자연에게 생명을 주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영혼을 소성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7). 다윗은 태양이 주는 생명과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생명을 대조시키면서 태양과 성경, 자연계시와 특별계시를 연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이름(1,7)
우리가 본문에서 한 가지 주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1절에 언급된 ‘하나님’과 7절 이하에(8,9,14) 언급된 하나님에 대한 단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1~6절에는 1절에만 단 한 번 ‘하나님’이 언급되는데, 히브리어로 ‘엘’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엘’은 하나님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이름입니다. 자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는 평이한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하지만 특별 계시를 말하려는 7절에서 시작해서 8,9절 그리고 14절에서 하나님을 가리켜 사용된 히브리어는 ‘야웨’(여호와)입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계시하신 이름이고, 당신의 언약 백성을 기억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언약의 하나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하나님을 언약 백성과의 관계 속에서 언급할 때 성경은 이 이름을 사용합니다. 이렇게 다윗은 7절 이하에 ‘야웨’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특별 계시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위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은 그저 자연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시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자기 백성에게 당신의 거룩하신 뜻을 선명하게 제시하십니다.
4. 특별 계시에 대한 6중 예찬(7~9)
7~9절은 특별 계시인 율법에 대한 6중 예찬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여기서 다윗은 특별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을 여섯 가지 단어로 표현합니다. 시편 119편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매우 다양한 용어들로 표현하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여기서는 율법, 증거, 교훈, 계명,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 법으로 표현됩니다. 율법(law)은 가장 포괄적인 개념으로, 지켜야 할 어떤 명령들이라는 의미 보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모든 것, 즉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의미합니다. 칼빈은 율법을 ‘참된 종교와 경건함을 수성하는 교리 전체’라고 설명했습니다. 증거(testimony)는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입증된 진리,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하시는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도 더 믿을만한(신뢰할만한) 말씀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교훈(precepts)과 계명(commandments)은 하나님께서 결정이나 권위를 가지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명령을 가리킵니다. 권위가 강조되는 개념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fear of the Lord)는 율법의 핵심이자 율법에 반응하는 결과인 하나님 경외함을 율법을 표현하는 대치어로 사용한 것인데, 율법과 동의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법(rules)은 사람의 생각과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 심판, 판결을 의미합니다.

이 각각의 용어들을 통해서 다윗이 표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기능들은 어떤 것들이겠습니까? 먼저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줍니다. 성령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영혼을 거듭나게 하십니다(벧전 1:23; 약 1:18). 두 번째로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증거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신뢰할 수 있는 ‘확실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증거를 믿고 그리로 행하는 자는 지혜로운 자입니다. 잠언은 내내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우둔한 자는 가치관이 서지 않아서 쉽게 잘못된 길로 들어가는 자이며, 듣는 것을 다 믿으며 분별력이 없으며 총명과 지식과 지혜가 없는 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증거를 신뢰하고 따르는 자이며, 그래서 그는 지혜로운 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머리로만 배우는 지식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길을 걸을 때 신뢰하고 그대로 순종하여 행할 수 있는 안내판입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는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친히 권위를 가지고 주시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에 생명을 주고, 지혜를 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기쁨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인생을 사는 기쁨입니다. 그 기쁨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기쁨입니다. 결코 하나님의 교훈과 명령은 우리 인생을 강요하여 불편함과 불쾌함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가려운 귀를 긁어서 즐거움을 주는 스승이 아닙니다. 말세에 이런 것을 원하는 자들이 많을 것이라고 했는데(딤후 4:3) 성경은 정직하게 바른 것을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역시 하나님과 같이 빈 말이 아니라 참된 말로써 형제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바울 사도는 권면하였습니다(엡 4:15). 이어서 ‘하나님의 계명은 순결하다’고 할 때 순결하다는 말은 빈 말이 아닌, 거짓이 없는 참된 말을 의미합니다. 거짓된 말들을 계속 들으면 그 사람의 눈이 어두워질 것이 분명합니다. 역사상 많은 왕과 독재자들이 옆에 있는 간신들을 통해서 경험한 바이고, 우리도 이런 위험에 늘 노출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내게 거짓된 혀로 빈 말을 할지라도 하나님의 교훈과 계명은 정직한 것을 말합니다. 그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결코 눈이 어두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왕들이 율법책을 옆에 두어 떠나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신 17:18~20).” 이 말씀이 왕들에게만 해당되겠습니까? 바로 우리 모두를 위한 말씀입니다. 다섯 번째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라고 한 것을 살펴보지요. 율법은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도(말씀)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죄에서 떠난 내적으로 순결한 삶입니다. 이것이 ‘정결하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함은 한 때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영원까지 이르는 은혜입니다. 마지막으로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판단은 진실하고 의롭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심판과 판단에 대해 불평하거나 판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진실하고 의로움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은 악인의 형통 때문에 불평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며 그 심판은 진실하고 의로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 삶의 현실과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상 주시는 분임을 믿고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5.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과 말씀의 기능(10~11)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런 표현들은 다윗이 신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경험한 산 지식이었습니다. 그는 단지 성경에 대한 교리를 나열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누구나 조금만 배우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말씀이 자기에게 생명과 지혜와 기쁨을 주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여러분도 그것을 아십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분별력을 주고, 정결함과 거룩함을 주며, 우리의 입술에서 불평과 원망을 제하여 주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도 이것을 아십니까? 그래서 그는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라고 고백합니다(10). 수전노가 돈을 밝히는 것 보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 원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이것이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삶의 비결이라면 비결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모든 것을 다윗 안에서 행하셨습니다. 그것을 다윗이 알았습니다. 11절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경고를 하고,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상을 받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를 듣는 것은 왜 중요합니까?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 16:25).”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길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안내 표지판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살며 행하는 모든 길에서 모든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말씀으로써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여기서도 참된 믿음은 순종을 가져온다는 지당한 진리를 보여줍니다.
6. 인생을 반석 위에 짓는 삶(12~14; 마 7:24~27)
다윗이 자연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다 보니 자신의 부족함, 무가치함을 깊이 느낀 것 같습니다. 그리고 태양의 열기에서 피할 수 없듯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피할 수 없음을 안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12).” 말씀은 기도로, 그리고 회개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숨은 허물은 알려지고 공개된 죄보다 더 위험합니다. 밖으로 드러난 상처는 보고 고칠 수 있지만, 속에 생긴 출혈이나 감염은 밖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치명적인 위험을 가지는 것과 같습니다. 밖으로 드러난 죄는 누군가 도와줄 수 있지만, 자신의 은밀한 죄악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즐긴다면 그는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말하는 숨은 허물의 위험입니다. 숨은 허물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결국 그 영혼을 망하게 합니다. 다윗은 이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3~24).” 우리도 이것을 두려워함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서야 합니다. 다윗이 또 두려워한 것은 ‘고의로 죄를 짓는 일’이었습니다(13). 이것을 고범죄라고 하는데, 이 죄는 알고 짓는 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죄를 지을까 두려워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한 사람만이,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만이 가지는 의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알기 위해,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설교 말씀을 들을 때 성령님께서 그 말씀을 조명해주시기를 마땅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우리의 기도가 그치면 안됩니다. 다윗처럼, 우리도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않게 해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끝으로 14절의 기도를 우리는 주목합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다윗은 자기 입의 모든 말, 마음의 모든 묵상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가 되기를 열망합니다. 아,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충만히 거할 때 그럴 것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충만히 거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말씀을 사랑하여 애독해야 합니다. 그 말씀의 경계를 받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다윗은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까?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인생을 반석 위에 짓는 삶입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나로 성경을 가장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그는 회심한 이후에 일평생 하나님의 말씀에 매달렸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1533년 이런 글을 적었습니다. “나는 해마다 성경을 2번씩 읽어왔다. 성경을 크고 강한 나무, 성경 안에 기록된 말씀들을 작은 가지들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 가지들에 무엇이 달려 있는지, 그리고 그 가지들이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열망에 불타올라 모든 가지들을 흔들었다.” 존 번연은 어떻게 <천로역정>이라는 우화 속에 성경의 그 놀라운 진리들을 담아낼 수 있었을까요? 그가 성경을 사랑했고 성경의 진리가 그의 핏속에 흘렀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책(성경)이 당신을 죄로부터 지켜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죄가 이 책을 멀리 하도록 당신을 지켜줄 것이다.” 우리는 죄를 가까이 하든지, 성경을 가까이 하든지 둘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시인 다윗은 하나님께서 주신 두 책, 자연과 성경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성령의 영감으로 이 시편 19편에 담아냈습니다. 우리는 두 책을 보고 또 보아야 할 너무나 타당한 이유를 가집니다. 자연과 성경 이 두 책을 같은 작품의 두 권으로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가장 지혜로운 자입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자기의 집을 반석 위에 짓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