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SERMON
최근설교 및 강의

Home > 최근설교 및 강의 > 시편강해 - (102). 영원에 닻을 내린 연약함

시편강해 - (102). 영원에 닻을 내린 연약함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시편강해 - (102). 영원에 닻을 내린 연약함

시편 102:1-28, 히브리서 1:10-12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4-01-03

말씀내용
설교를 준비하면서, 시편 102편을 나이 60이 넘어 설교하게 된 것이 감사하다고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 나이의 제한은 없겠지만 말입니다. 102편에는 켜켜이 쌓인 인생의 피로가 자아내는 고백이 있습니다. 단순히 피로라고 표현했지만, 인생의 모든 고통과 수고가 함축된 말입니다. 이 시편은 〔고난 당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의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로하는 기도〕라는 표제가 있습니다. 고난은 시인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고 그 안에 근심을 만들었으며 시인은 그 근심을 하나님께 토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우리의 기도가 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 인생은 없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1-11절에서 자신의 처지를 토로합니다. 그리고 12절은 이 시편의 전환점입니다. 불평을 쏟아 놓던 시인은 12-22절에서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표현하고, 23-28절에서 시인은 나아가 자신의 확신을 새롭게 표명합니다. 이 시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시간의 개념입니다. 1-11절은 날의 무상함이 관통합니다. 특히 3절과 11절에서 ‘내 날’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12-28절에서는 하나님의 연대와 영원이 대조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데렉 키드너는 이 시편의 제목을 ‘나의 날들과 주님의 해들(My days and thy years)’이라고 붙였습니다. 제임스 메이스는 “이 시편의 신학적 관심의 초점은 곤고한 자들이 처한 불완전한 시간성에 대해 주의 영원하심이 갖는 구원의 중요성이다”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 시편을 읽을 때 우리의 질문은 이겁니다. “우리가 병들고 마음이 상하여 유한하고 덧없는 인생과 죽음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떠올려 묵상하는 것은 유익한가? 어떤 면에서 유익한가? 그것이 우리의 고통을 해소해주는가?” 여러분이 마음으로 대답해 보십시오. 고난 속에서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생각하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까? 어떤 면에서요?
오늘 설교 제목을 다시 보십시오. ‘영원에 닻을 내린 연약함/덧없음(Frailty Anchored in Eternity)’입니다. 저는 이 제목을 제임스 보이스의 설교에서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시편 102편을 이 제목 보다 더 잘 드러내 주는 제목을 생각해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1. 불평: 자기 연민(1-11; 삼상 1:10)
1-11절을 먼저 살펴볼텐데, [고난 당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의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로하는 기도]이니 선하고 아름다운 말들—찬양이나 감사—이 나오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문단은 시인의 불평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시인이 개인적으로 당한 고통스러운 처지를 조금 헤아릴 수 있습니다. 비록 불평으로 시작된 기도지만, 고난 속에서 시인이 하나님께 자기 마음을 토로한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우리는 보통 사람 앞에서 마음을 털어놓아야 시원해진다고 느낍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마음을 나눌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계와 위험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강하면 강할수록 우리는 하나님께 마음을 토로하는 기도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마음을 토로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였(사무엘상 1:10).”던 것처럼 말입니다. 시인의 괴로움은 그의 기도를 절박하게 만듭니다.
3절부터 불평의 내용이 등장하는데, 내용 전체는 유한하고 허망한 ‘내 날’(3,11)이 감싸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시인의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하는데, 읽다 보면 한숨이 나옵니다. 첫째로 인생은 연기 같이 소멸하고 풀 같이 시들고 마르는 덧없는 것입니다. 3-4절입니다. “내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숯 같이 탔음이니이다 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으므로 내 마음이 풀 같이 시들고 말라 버렸사오며(3-4).” 우리는 젊어서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삽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시간은 흩어지는 연기 같이 소멸해가는 것임을 자각하는 때가 옵니다. ‘내 뼈가 숯 같이 탔다’는 표현도 타는 듯한 열기로 인생이 소멸되어 감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시인은 슬픔과 고난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버텨낼 의지를 상실했습니다. ‘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으므로’라는 말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태양의 열기 앞에 시들고 마르는 풀처럼 되었습니다.
두번째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시인은 병들어 몸이 아픈 상태라는 것입니다. “나의 탄식 소리로 말미암아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5).” 시인은 의지도 잃었고 병든 몸은 살이 뼈에 붙을 만큼이나 수척해졌습니다. ‘탄식 소리’는 그로 신음하게 만든 고난을 가리키는 환유법입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심한 질병은 인간 관계의 소외와 고독을 낳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외롭고 고립되었다는 것을 ‘광야의 올빼미’와 ‘황폐한 곳의 부엉이’ 그리고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에 비유하여 말합니다(6-7). 광야와 황폐한 곳은 각각 격리와 고독을 보여주고,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는 외로운 와중에도 끊임 없이 먹잇감이 되지 않으려고 경계해야 하는 처지를 보여줍니다. 이런 시인을 원수들은 그냥 두지 않고 종일 비방하며 조롱합니다(8-9). 시인은 슬픔과 수치를 상징하는 재가 자기 주식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3-9절을 가만히 읽어보면, 우리는 욥의 처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욥이 겪었던 것이 이 시인에게 그대로 임한 것입니다.
극심한 고난 속에서 욥을 정말 괴롭혔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정말 나의 죄가 이 고난을 초래하였는가? 그렇다면 어떤 죄가 하나님을 분노하게 했던 말인가? 오, 나는 그 죄악을 떠올릴 수 없구나!” 이것이 욥의 고뇌였습니다. 시인도 이제 말합니다. “주의 분노와 진노로 말미암음이라 주께서 나를 들어서 던지셨나이다(10).”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가 아니라면 자기가 겪는 고난을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에 그의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고백입니다. 분명히 이 모든 일을 행하시고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시인은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시들어짐 같으니이다(11).”라는 말로 자신의 불평을 마감합니다. 생명이 다 지나가버린 것처럼 기울어진 그림자만이 남아서 그의 존재를 증언해줄 뿐입니다. 제임스 메이스는 ‘내 날이 기울어진 그림자 같고’라는 표현에 대해서 “우리가 삶의 중간 쯤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갑자기 우리는 삶의 마지막에 서 있다. 인간은 결국 자신들의 환상을 깨닫게 된다.”고 예리하게 지적하여 말합니다. 예외가 없을 겁니다.


2. 반전: 전환점 (12-13)
시편 102편의 놀라운 점은 12절에서 드러납니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에 대한 기억은 대대에 이르리이다(12).” 시인의 기도는 여기서 엄청난 반전을 만납니다. 마르틴 루터는 “앞의 모든 구절(1-11절)이 모두 이 구절을 바라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제임스 보이스의 말입니다. “이전 구절에서 시인은 자신의 연약하고 소모적인 상태를 묘사했습니다. 그는 사라지는 연기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은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그가 신뢰하는 분은 바로 그분입니다.” 자기 연민에 푹 빠져있던 시인은 이제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성도가 극심한 고난 가운데 마음이 상해 있을 때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도는 결국 우리의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서 하나님께로 옮겨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에서는 반전이 11절 마지막 단어와 12절 시작하는 구절에서 확연하게 나타납니다. 12절은 접속사로 시작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번역 성경들은 ‘그러나 여호와는’이라고 번역합니다. 11절의 마지막 단어는 ‘시들다’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절 표시로 분리되지 않은 히브리어 성경으로 11-12절을 이어서 읽게 되면, “(나는) 시들지만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라고 읽게 됩니다. 앞에서(1-11절) 시인 자신과 관련하여 ‘날’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면, 이제 12절부터 여호와 하나님과 관련하여 해(연대), 세대, 그리고 영원, 무궁이 등장합니다(12,18,24,27). 곤고한 자의 줄어드는 유한한 시간과 영원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이 대조됩니다.
제가 앞에서 던진 질문을 다시 생각해보지요. 우리가 병들고 마음이 상하여 유한한 인생과 죽음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떠올려 묵상하는 것은 유익합니까? 우리의 고통을 해소해줍니까? 시인이 처한 개인적 곤궁함이 해결되었습니까? 우리가 23-24절 상반절을 보면, 시인의 처지가 변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시인은 지금 “주님이 돌보셔야 하고, 주님이 원하시면 도울 수 있는 저는 곧 비참하게 죽어 영원히 사라질 텐데 주님은 영원하고 흔들리지 않는 영광 속에 앉아 계시네요. 왜 저를 이렇게 대하시는 거죠?”라고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에게는 힘이 있어요. 주님은 저를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치유 받는 것은 저의 믿음의 권리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유를 요청합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은사주의자들이 가르치는 것처럼, 기도는 이런 게 아닙니다. 기도는 모든 수단이 다 사라졌을 때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치유나 환경의 개선 같은 것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 자신에게 소망을 두는 것이 기도이고 신앙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배워야만 할 중요한 교훈입니다. 아플 때 하나님께 치유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야 하고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건강은 권리가 아니며, 병들고 아픈 것은 건강함 만큼이나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시인은 지금 이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인생의 덧없음과 연약함에 머물러 표류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원에 닻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시인은 자기 연민에서 복음적 연민으로 나아갑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만을 향한 은혜가 아닙니다. 그 증거가 14-22절에 시인의 변화된 기도에서 나타납니다.


3. 믿음이 바꾼 기도: 복음적 연민 (14-22; 창 12:1-3)
시인의 기도는 먼저 시온을 향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하자, 자신의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교회의 영적 현실에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시온 즉 교회를 향한 시인의 마음의 간절함은 14절에서 표현됩니다. 공동번역은 14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당신의 종들은 그 폐허의 돌들마저 아끼고 먼지조차 눈물을 자아냅니다(14).” 시인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은 설교의 신실함, 교회 지도자들의 경건함, 성결에 대한 사람들의 열심, 언약 자녀들의 회심, 교회가 영적으로나 숫적으로 강건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병상에 누워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가지는 것임을 본문은 보여줍니다. 시온을 향한 기도는 16절을 지나 17절까지도 이어지는데, 시온의 회복은 결국 자신과 같이 빈궁한 자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주어질 것이라고 시인은 확신합니다(17). 둘째로, 시인의 기도는 민족과 열방이 주께로 돌아오기를 구하는 선교적 기도로 연결됩니다. “이에 뭇 나라가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며 이 땅의 모든 왕들이 주의 영광을 경외하리니(15).” 시온의 회복, 즉 교회의 영적 회복과 부흥은 열방이 주께로 돌아오게 할 것입니다. 시인의 마음에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결국 성취되고 말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창 12:1-3). 그리고 이제 시인의 기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후손들, 장래 세대들을 향합니다.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18).” 18-19절은 미래 세대를 위한 기도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고난을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미래 세대가 연결되어 있음을 주목하면서, 자신의 고난이 미래 세대를 위한 간증, 이야기가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우리가 다음 세대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그들이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만큼 기도와 담대한 증거에 영감을 주는 동기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모든 경험이 자녀 세대들에게 축복된 교훈이 되고 이야기가 되도록 살겠다는 의지가 발동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20절에서 시인은 자기와 비슷하게 갇힌 자, 죽이기로 정한 자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들이 고난과 죽음에서 풀려나고 벗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20).” 이것은 바벨론 포로로 붙잡혀간 동족을 위한 기도일지도 모릅니다. 결국 시인의 바람은 여호와의 이름이 시온에서 높임을 받으며 나아가 민족들과 나라들 가운데서 높임을 받는 것입니다(21-22). 이 놀라운 기도의 전환이 어디서 일어났습니까? 시인이 덧 없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데서 영원하신 하나님께로 시선을 돌렸을 때 입니다.


4. 확신 (23-28; 왕하 20:2-3; 히 1:10-12; 13:8; 눅 4:18-19)
이제 우리는 이 시편의 마지막 부분을 볼 텐데, 23-28절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신뢰를 다시 새롭게 표명하는데, 자기 인생의 덧없음과 약함 속에서 불평을 반복하면서 다시 결정적으로 하나님 안에 닻을 내립니다. 시인이 다시 자기 처지를 한탄하는 것이 23-24절 상반절입니다. “그가 내 힘을 중도에 쇠약하게 하시며 내 날을 짧게 하셨도다 나의 말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23-24a).” 다시 ‘내 날’이 등장하고 쇠약함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신자들을 약하게 하시고 그들의 삶을 짧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우리 삶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고 우리가 겪는 고난도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임을 인정하면서도, 시인은 히스기야 처럼 자기를 중년에 데려가지 말아 달라고 간청합니다(왕하 20:2-3).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시인의 이 기도를 들으셨는지가 아닙니다. 설령 자신을 중년에 데려가신다고 할지라도, “주의 연대는 대대에 무궁하니이다”라는 이 말에 방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결론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25-27절이 이어집니다.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25-27).” 시인은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태초부터 계셔서 땅과 하늘의 기초를 놓으셨고(25) 창조 질서가 낡은 옷 처럼 사라질지라도 영존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26-27). 피조 세계 전체가 아니라 지구 하나만 보더라도, 과학자들에 의하면 ‘소위’ 45억년이라는 세월 동안 존재해 왔는데, 시인은 옷처럼 낡아지는 것이고 입을 수도 있고 벗을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는 의복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의복처럼 바꾸시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피조 세계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영원하시고 한결 같이 영존하시고 그 연대는 무궁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구절을 히브리서에서 다시 만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신성과 영원하심을 말하기 위해서 25-27절을 인용합니다(히 1:10-12). 시편 102편에서 이 부분은 고난 가운데 있는 시인이 고백한 말인데, 히브리서 기자는 이 말씀이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하신 말씀이라고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삼위일체나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에 대한 암시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서 기자의 이 해석은 옳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히 13:8)’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이야말로, 시온이 회복되고, 이방 민족이 회심하고, 미래 세대의 교회가 세워지고 보존되며, 죄의 노예가 된 사람들을 영적 속박에서 해방시키는 분이시기(눅 4:18-19; 사 61:1-2) 때문입니다. 영원에 닻을 내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닻을 내린다는 뜻입니다. 시인의 소망과 간구는 오직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구절 28절은 놀랍고도 담대한 시인의 신뢰를 표명합니다. “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28).” 이런 확신은 어디서 옵니까? 시인이 겪는 개인적 고난은 여전한데도 말입니다. 시인은 자기 생명을 설령 중년에 데려가실지라도 자손들은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안전하게 거주하고 미래의 세대를 주 앞에 굳게 세우실 것을 압니다. 그리고 스러져가는 자신의 삶은 미래의 세대를 위한 이야기가 되게 해달라고 간구한 것처럼(18) 하나님은 그렇게 자기 인생을 사용하실 것을 기대합니다.


5. 그리스도께 닻을 내린 삶 (고전 15:42-49)
우리는 다 인생의 덧없음과 연약함 속에서 살아가기에 허무와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처음 질문을 다시 드리면, 여기서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까? 어떤 도움이 된단 말입니까? 시인 개인의 고난이 호전되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인의 영혼은 더 이상 눌리지 않고 살아났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영원하심에 닻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로이드존스의 전임목사였던 캠벨 모건(G. Campbell Morgan)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통 속에서 마음을 강하게 하고, 위험하고 어려운 날에 용기를 불어넣는 데 하나님의 영원성에 대한 감각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없다.” 시인은 이것을 알았고 하나님께서는 102편을 통해 유한하고 덧없으며 연약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것을 교훈하시고 가르치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 유한하고 덧없는 육체를 입고 우리의 현재의 순간 속으로 들어오셨고, 그 생명이 십자가에서 끊어지는 절망적 슬픔에 들어가지만,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으리라는 사실에 기뻐합니다. 우리가 장차 하늘에 속한 자이신 예수님의 형상을 입을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5:42-49). 시인의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응답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백성의 죄 때문에, 이 시인처럼 그리고 우리처럼 스러지는 삶의 고통을 마주하고 탄식하며 받으셨던 하나님의 진노로 하나님에게서 끊어짐을 당했기 때문에, 주님은 교회의 영원한 머리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덧없는 인생의 연약함 속에서 영원한 교회의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 안에 닻을 내리고 또 내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성도는 자신의 덧없고 연약한 인생에 소망을 두지 않고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가 내 힘을 중도에 쇠약하게 하시며 내 날을 짧게 하실”지라도 말입니다(23). 이것은 얼마나 영광스럽고 놀라운 부르심입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덧없는 인생의 연약함 속에서 영원하고 영존하시는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믿음의 닻을 내린 삶을 살아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