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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106). 주의 인자하심은 영원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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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106). 주의 인자하심은 영원하도다

시편 106:1-48, 창세기 18:19, 디모데후서 2:13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4-03-20

말씀내용
이전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시편 제4권의 마지막에 위치한 105편과 106편은 한 쌍을 이루는 시편입니다. 105편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변함 없는 신실하심을 찬양한다면, 데릭 키드너의 말을 빌리면, ‘106편은 105편의 어두운 버전’입니다. 그는 시편 106편은 “전작의 어두운 버전으로, 빛에 맞서 오랫동안 투쟁해온 인간의 자기 의지가 드리운 그림자”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온, 하나님을 향한 반역과 저항의 어두운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언약 관계로 설명이 됩니다. 105편이 하나님 편에서 그 언약을 얼마나 신실하게 이루시는가를 보여준다면, 106편은 인간 편에서 그 언약을 얼마나 불충하고 불성실하게 범하고 있는지를 증언합니다.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의 만성적 불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신실하게 인자를 베푸셨음을 보여주는 것이 짝을 이루는 105편과 106편입니다.
105편과 같이, 106편도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마치는 찬송시입니다. 제임스 보이스는 이 시편이 찬송시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훌륭하시고 우리도 훌륭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도 우리에게 친절하고 우리가 자비를 받을 자격이 없을 때에도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찬양합니다.” 이것이 106편의 메시지입니다.
106편은 먼저 1-5절에서 찬양하라는 부름으로 시작합니다. 6절은 죄악의 역사를 시작하는 헤드라인이자 전반적인 죄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조상들처럼 범죄하여 사악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6).” 7-46절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애굽 시절부터 가나안 시절까지 회상하면서 반복되어온 죄악을 기록하고 있는 헤드라인의 몸통입니다. 47-48절은 마무리 호소와 찬양입니다.


1. 찬양하라는 부름 (1-5; 창 18:19; 막 12:29-31; 롬 12:1-2)
1절은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시작합니다. 찬양하라는 부름은 이제 보게 될 역사의 반복되는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 그 언약적 사랑이 얼마나 신실한지 기억하고 찬양하라는 부름입니다. 그런데 “누가 능히 여호와의 권능을 다 말하며 주께서 받으실 찬양을 다 선포하겠습니까(2)?”이것은 유한한 인간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충분히 찬양할 수 없고 다 말할 수 없다는 전제를 가진 물음입니다. 여기서 ‘다’라는 부사는 ‘충분히, 온전히’를 의미합니다. 인간의 반복되는 죄악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으시고 선을 베푸시며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우리 인생을 추격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충분하다고 할 만큼 찬양할 수 있고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예배는 본질적으로 여호와의 권능을 말하고 주께서 받으실 찬양을 충분히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예배는 얼마나 보잘 것 없고 제한적인 것이겠습니까? 예배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에 감싸여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부족한 찬양과 설교를 온전하게 하시고 기쁘게 받으시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가 뭔가 대단한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2절은 3절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정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공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3).” 3절은 갑자기 튀어나온 말이 아닙니다. 정의를 지키고 공의를 행하는 자들이 복 있는 자들인데, 이들이 여호와의 권능을 말하고 주께서 받으실 찬양을 선포하는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항상 공의를 행하는 자”라고 할 때 ‘항상’이라는 부사는 2절에서 ‘다’라는 부사와 같은 단어입니다. 누가 온전하게 그리고 충분하게 공의를 행할 수 있겠습니까? 시인은 “예배와 삶, 예배와 윤리는 분리될 수 없다, 오직 공의(옳은 일)를 온전히 행하는 자만이 하나님이 받으실 찬양을 온전히 선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명제는 106편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일찌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그 부르심의 뜻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세기 18:19).” 여기서 ‘의(righteousness)와 공도(justice)’가 본문 3절에서는 순서가 바뀌어 ‘공의(righteousness, צְדָקָה)와 정의(justice, מִשְׁפָּט)’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이 두 단어를 이사일의(二詞一意)적 표현으로도 보지만, 구별한다면 정의는 사법적 판단, 판결로 법적으로 옳게 행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공의는 정의를 지키는 사람들의 성향과 더 깊은 관련이 있는데,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가지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를 행하며 살아가는 열매를 필연적으로 가져옵니다. 주님은 공의와 정의를 한 마디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마가복음 12:29–31).”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소명은 언제나 이 근본 기조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1–2).” 예배와 삶, 예배와 윤리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오직 공의를 온전히 행하는 자만이 하나님이 받으실 찬양을 온전히 선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106편 전체는 이렇게 살지 못한 백성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4-5절에서 자신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룁니다.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돌보사 내가 주의 택하신 자가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을 나누어 가지게 하사 주의 유산을 자랑하게 하소서(4-5).” 이스라엘을 부르신 하나님의 소명 앞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볼 때, 시인은 은혜로 기억하시고 구원으로 돌보아 달라고 간청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소원은 ‘주의 택하신 자가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을 나누어 가지게 하사 주의 유산을 자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의 유산’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을 가리키므로, 이것은 교회를 위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가 부끄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자랑거리가 되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2. 애굽에서: 태만의 죄 (6-12; 출 14:11-12; 시 23:3; )
이제 시인은 죄악의 역사를 회고하는데, 6절은 헤드라인이고 7-46절은 몸통입니다. 6절을 보지요. “우리가 우리의 조상들처럼 범죄하여 사악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6).” 여기에 죄를 의미하는 세 단어를 반복함으로써(범죄, 사악, 악) 시인은 “우리의 존재는 죄로 부패하여 온갖 본질적 죄악으로 가득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은 6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조상들처럼 우리도 범죄하였고 빗나가고 거역하였습니다.” 시인은 7-46절에서는 ‘그들의’ 죄를 기소하듯 말하지만, 사실 이것은 ‘우리’의 죄라는 자백입니다(6).
먼저 7-12절은 애굽과 출애굽 과정에서의 죄악을 말합니다. 출애굽 세대의 죄는 ‘주의 기이한 일들을 깨닫지 못하며 주의 크신 인자를 기억하지 아니’ 한 것입니다(7). ‘주의 기이한 일들’은 애굽에서 주께서 행하신 모든 이적들이 아닙니까? 그들은 여기서 아무 것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돌발적, 우발적으로 하나님과 그 말씀을 무시한 태만의 죄(sin of omission)입니다. 롤프 제이콥슨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기이한 일들과 인자하신 행적들을 기억하지 못한 것은 공격적인 죄, 즉 하나님을 믿지 않고 믿기를 거부한 죄”라고 지적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홍해 앞에서 섰고 뒤로는 바로의 군대가 추격하고 있었을 때 심히 두려워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출 14:11-12).” 이 말씀에 의하면, 태만의 죄는 결코 소극적인 죄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행하신 하나님의 기이한 일들과 우리가 듣고 배우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8).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는 다윗도 사용한 표현이지만(시 23:3) 여호와의 언약적 사랑인 인자하심을 잘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로써 당신의 큰 권능을 만인이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내용이 9-11절에 기록되었고, 12절은 “이에 그들이 그의 말씀을 믿고 그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도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홍해를 건넌 백성이 즐거이 하나님을 찬송한 것을 언급하는(출 15:1-21) 이 말은 “잘 했다”는 칭찬이 아닙니다. 스펄전은 말합니다. “이것은 그들의 공로가 아니라 그들의 부끄러움 때문에 언급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실행되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전혀 신자가 아닙니다.... 그들의 노래는 매우 훌륭했지만 ... 달콤하기는 했지만 매우 짧았고, 끝났을 때 그들은 (바로) 원망에 빠졌습니다.” 실제로 그들의 찬송은 마라 앞에서 바로 원망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출 15:22-24). 홍해를 가르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믿지 않았다가 그 장엄한 이적을 보고서 믿는 이런 믿음으로는 결코 그들의 인생 여정에 놓인 시험을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3. 광야에서 (13-33)
13-33절은 광야에서의 죄악들을 회고합니다.


A. 불평과 탐욕의 죄(13-15; 민 11:33-34; 눅 15:12; 창 13:10; 벧후 2:7)
먼저 13-15절에서 불평과 탐욕의 죄가 언급되는데, 출애굽기 16장과 민수기 11장(1-3, 31-34)과 관련됩니다. 다시 이스라엘은 ‘그가 행하신 일을 곧 잊어버리며 그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않았다’고 말합니다(13).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특히 ‘가르침’이라고 번역된 말은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그들을 인도하시며, 그 땅에 들어가기까지 그들의 필요를 채우시는 선하신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을 믿지 않았습니다(민 14:26-45). 그들 안에 있는 불안과 두려움의 성향이 믿음을 압도하게 한 것입니다.
욕심과 탐욕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심령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열매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습니다(14).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음식과 물을 바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욕망이 자신들을 삼켜버렸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결국 이 불평과 탐욕의 죄는 기브롯 핫다아와의 비극을 초래했습니다(민 11:33-34). 하나님께서는 메추라기 고기가 그들의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도 전에 그들을 향해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신 것입니다. 기브롯 핫다아와는 탐욕의 무덤입니다. 기브롯 핫다아와를 기억하십시오.
15절은 무서운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15).”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탕자는 자기 몫의 유산을 요구했고 아버지는 그것을 주었습니다(눅 15:12). 롯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아’ 보이는 소돔과 고모라를 구했고 아브라함은 그것을 허락했습니다(창 13:10). 그들은 요구한 것은 얻었지만 탕자는 곧 궁핍과 피폐함을 경험했고, 롯은 그 심령이 고통을 당했습니다(벧후 2:7). 백성은 고기를 달라고 불평했고 하나님은 그들이 원하는 고기를 주셨지만, 그들의 영혼은 쇠약해지고 말았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선물입니까?


B. 질투의 죄(16-18; 민 16:3,49)
두번째로 우리가 보게 되는 죄악은 질투의 죄입니다(16-18). 민수기 16장에서 보게 되는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 그리고 250명의 지도자들의 대규모 반역의 사건을 회고하는 것입니다. 그 지도자들은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민 16:3)”고 질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이 그들을 삼키게 하셨고, 불로 250명을 사르심으로써 심판을 행하셨습니다. 이 일로 죽은 사람들은 이 질투의 반역에 동참한 백성들을 포함하여 14,700명이나 되었습니다(민 16:49).


C. 우상 숭배의 죄(19-23; 출 32:32)
세번째 죄악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긴 우상숭배의 죄입니다(19-23). 출애굽기 32장이 그 배경입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신비한 임재 대신 자신들이 만든 하나님의 형상을 예배하려고 했습니다. ‘풀 먹는 소’라는 표현에는 헛됨에 대한 경멸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20). 그들이 이렇게 행하는 이유는 “애굽에서 큰 일을 행하신 그의 구원자 하나님을 그들이 잊었기” 때문입니다(21). 이 우상숭배로 인하여 이 백성을 멸하리라고 하신 하나님은 모세의 중재로 그 노를 거두셨습니다(23). 이 이야기의 의도는 진노하시는 하나님과 자비한 모세를 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택하신 모세’라는 표현에서,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인자하심을 거두지 않으시려고 중재자를 예비하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중재자 모세는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애굽기 32:32).”라고 기도했지만, 그 자신이 죄인이기에 이 기도에 합당한 제물, 합당한 중보자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D. 불신앙의 죄(24-27; 민 13-14)
네번째 죄악은 불신앙의 죄였습니다(24-27). 그 유명한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불신앙 사건을 회고하는 것입니다(민 13-14). 그들이 ‘그 기쁨의 땅을 멸시하며’라고 했지만, 그들이 멸시한 것은 사실상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2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민수기 14:11).”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 불신앙의 세대를 광야에서 엎드러지게 하셨습니다.


E. 배도의 죄(28-31; 민 25)
다섯번째 죄악은 배도의 죄였습니다(28-31). 민수기 25장에 기록된 바, 모압 평지에서 있었던 바알 브올 사건을 회고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알을 섬기고 모압 여인들과 성적 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때에도 하나님은 중재자를 일으키셨는데, 그는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였습니다. 비느하스의 중재는 기도가 아니라 물리적 심판의 형태를 띠는 것이었습니다.


F. 반역의 죄(32-33; 민 20:1-13)
여섯번째 죄악은 므리바 물에서의 반역입니다(32-33; 민 20:1-13). 광야 생활 마지막 해인 40년째 정월에 일어난 일입니다. 언제나처럼 백성들은 물이 없다고 모세와 아론과 더불어 다투며 불평했고, 모세는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는 일에서 실패하고 맙니다. 이 일로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게 됩니다. 스펄전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또한 복음의 사역자들을 대할 때 매우 조심해야 하며, 그들의 심령을 자극하여 주님의 징계를 받게 될 어떤 보기 흉한 행동으로 그들을 몰아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원망하고 다투는 사람들은 자신의 부적절한 행동으로 인해 목회자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을 거의 꿈에도 생각하지 못합니다.”


4. 가나안에서: 세상에 순응하는 죄(34-46)
이제 34-46절은 약속의 땅, 기쁨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의 범죄를 말합니다. 그 죄는 가나안 민족을 멸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세상에 순응한 죄였습니다. 그들은 자녀들을 우상에게 바치는 인신제사를 할 정도로 그 땅의 종교와 문화에 순응하여 갔습니다. 제임스 보이스는 이런 일이 현대에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자녀를 귀신에게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한 일입니다. 그것은 가장 타락한 종류의 이교도 종교에 순응한 죄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은 절대로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까요? 오늘날 자녀를 이교도 환경에 밀어 넣을 정도로 세상적인 성공을 원하거나 출세를 위해 세상과 같이 살도록 부추기며 그 도덕성을 수용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부, 명예, 섹스, 권력 등 이 세상의 어떤 신이라도 숭배한다면 그것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에게 올무가 될 것입니다.” 무서운 경고가 아닙니까? 결국 이런 죄악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방 나라에게 넘기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41-44절은 사사 시대에 반복되었던 타락과 압제와 구원의 반복되는 패턴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범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언약이었습니다(45-46). “그들을 위하여 그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크신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사 그들을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45-46).” 처음으로 언약이라는 단어가 언급됩니다.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랑은 그 언약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5. 중보자가 필요하다(47-48)
이스라엘은 반복되는 범죄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수도 없이 파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의 언약에 근거하여 인자하심을 거두지 않으시려면, 중보자가 필요하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모세나 비느하스는 그들 자신이 죄인이고 유한한 존재였으니 우리는 온전한 중보자가 필요합니다. 47절은 중보자를 요청하는 기도입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 나라로부터 모으시고 우리가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47).” 이렇게 106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기에,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48).”로 마칩니다.


6. 교훈과 적용(신 8:18; 딤후 2:13)
이제 이 긴 시편을 통해서 우리가 얻는 교훈을 적용적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롤프 제이콥슨은 106편은 첫째 계명을 어긴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긴 시적 묵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십계명의 두 부분(하나님에 대한 계명들과 사람에 대한 계명들)은 나뉠 수 없다고 말합니다. 106편은 이스라엘이 다른 신을 섬길 때, 그들의 예배가 무너질 때, 언제나 이웃들이 대가를 지불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대표적인 것이 자녀들을 희생제물로 드리는 인신제사였습니다(37-38). 가령, 우리가 부의 우상을 섬긴다면 이웃의 필요를 볼 수 없게 될 것이고, 권력을 숭배한다면 이웃을 희생시키며 도구화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와 삶, 예배와 윤리는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의 예배는 삶과 윤리로 이어지고, 그것은 세상을 향한 우리의 증거가 될 것입니다. 106편은 무너진 예배를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시급하고도 절박한 필요라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두번째로 우리는 계명을 지키는 삶은 여호와를 기억하는 것임을 배웁니다.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게 될 백성에게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신명기 8:18).” 여기서 기억하라는 말은 지적인 일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마음과 육체, 생각과 행동의 전인적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야기를 알고, 그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야기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하는 방법은 ‘교묘하게 거역한(43)’ 자들의 이야기 속에 자신을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그치지 않는 인자하심을 의존하는 삶에 우리를 머물게 합니다. 시편 106편은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가 반드시 승리의 영광스러운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역사는 항상 “우리가 우리 조상들처럼 범죄하였다(6)”고 인정하는 역사입니다. 우리는 이 반복되는 실패들 속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심, ‘그의 수많은 헤세드(45, 그 크신 인자하심)’를, 하나님의 비상한 오래 참으심(God’s extraordinary long-suffering)을 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울과 함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디모데후서 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