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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강해](5).죽음을 즐거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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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강해](5).죽음을 즐거워하라!

빌립보서 2:5-11 / 장경진 전도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4-03-27

말씀내용
1. 마음에 대한 이야기(1:27; 2:2, 3, 5;)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교회가 하나됨을 누리기 위해 끝없는 싸움이 있을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 싸움은 자기 중심성으로 인하여 당짓기와 허영의 하나됨으로부터 벗어나서 서로를 자신보다 더 나은 존재로 여기며 참된 겸손을 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참된 겸손을 요청하던 바울의 관점은 이제 갑자기 그리스도로 향합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회에게 요청하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을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쏟아 놓는 이야기는 모든 성경의 축약적인 가르침입니다. 엄청난 이야기를 쏟아 놓는겁니다. 서로가 하나되기 위해 서로를 향해 겸손하라는 요청을 하더니, 이 모든 이야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이니 그의 마음을 품으라는 엄청난 요청을 던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온전하게 아는 것으로부터 바울의 모든 요청은 실제가 되며 이것이 진짜 복음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는 왜 바울이 ‘마음’에 대해 집중하고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앞선 내용들에서도 ‘마음’에 대해 매우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앞서 1장 27절에서는 빌립보 교회가 한마음으로 설 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장 2절에서 역시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치며 한 마음을 품어’라고 강조합니다. 또한 3절에서는 겸손한 마음을 가질 것을 바울은 요청합니다.
이러한 바울의 요청을 이제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연관시키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한 마음을 갖기 위해 수고하고, 노력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맺어질 수 없는 마음임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마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 바울의 설명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해 계속적으로 요청했던 한 마음을 그리스도와 연관시킵니다.

2. 그리스도의 마음(6-8; 요 13:3-4;)
그렇다면 대체 그리스도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려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그분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모든 성경의 중점이라고 할 수 있는 핵심적인 가르침을 전합니다. 이 핵심적인 가르침을 바울은 짧은 세 절의 이야기로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세 절의 이야기에서 바울은 가장 높으신 분이 어떻게 가장 낮은 자리로 오셨는지, 성육신의 기적을 설명하며 그분의 마음을 들여다보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바울은 6절에서 그분이 하지 않으신 일에 초점을 맞추고, 7-8절에서는 그분이 행하신 일에 초점을 맞추어 대조적으로 이야기를 펼쳐갑니다. 6절에서 그분은 참된 하나님의 본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가지신 지위나 능력을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취할 것으로’라는 표현은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셨기에 그분이 가지신 지위나 능력에 대해서 온전히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으셨고 정당한 권리를 가지신 분이라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다는 점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이어서 7-8절에서 바울은 그분이 하신 일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야기 합니다. 그분은 정당한 권리를 행하지 않으셨다면 대체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첫째는 오히려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고, 둘째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것이 바로 그 분이 행하신 일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여기서 자신을 비웠다는 개념은 자신의 지위와 명성을 벗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를 바울은 ‘종의 형체를 가짐’과 ‘사람들과 같이 되심’으로 자신을 비웠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신성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고 자신을 완전히 낮추셔서 종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셨다는 겁니다. 그분은 가장 높으신 존재였지만 이제는 가장 낮아진 존재가 되셨습니다. 더 이상 그분의 아래에 존재하는 이가 없습니다. 그분이 친히 우리의 발 아래로 낮아지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장은 이런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서 그분이 친히 제자들의 발 아래로 가셔서 그들의 발을 씻기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요한은 그분이 겉옷을 벗으시고 자신의 허리에 둘렀다고 말합니다(요 13:4). 이는 당시 종들이 둘렀던 복장의 모습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보다 낮은 자리로 가셔서 종의 형체로 오셨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단순히 사람의 모습으로 오심을 넘어 우리의 발 아래로 낮아지셨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낮아짐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발 아래로 오심을 넘어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바울은 단순히 그가 죽었다고 강조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신약성경을 진지하고 자세하게 읽어본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점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을 표현하며 성경의 기자들은 신체적인 고통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매우 치욕스럽고 수치스러운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에 들었던 것 처럼 십자가라는 형벌은 이 사람이 이 땅의 쓰레기며, 살 가치가 없으며, 인간이라기보다는 곤충과도 같은 존재라고 선포하는 일종의 광고적인 형벌이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마치 곤충의 표본처럼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이 십자가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에서 높이 들리워서 공개적인 노출을 최대화하는 가장 수치스러운 형벌이었습니다. 이러한 점을 분명하게 알고 있던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이러한 점을 더욱 선명하게 전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점을 매우 명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바울 역시 오늘 본문에서 그의 죽음이 단순한 죽음이 아닌,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점을 매우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수치스럽고 지독한 죽음의 길을 하나님의 아들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셨음을 성경 기자들은 강조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분은 친히 십자가에서 죽기가지 하나님께 순종하셨다는 점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3. 우리의 종교적 마음의 비참함(6-8; 고전 1:22-23;)
그렇다면 빌립보서 2장 6-8절에 나오는 이 성육신에 대한 이야기,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안 믿는 분이 계십니까? 이 이야기를 모르는 분이 계신가요?
그럼에도 언제나 여기서 커다란 문제가 생깁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임을 너무나 잘 알지만, 우리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따라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 바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이 수치스러운 죽음의 길을 의도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가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십자가의 죽음이 바로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쓰레기며, 살 가치가 없으며, 곤충과도 같은 존재라고 선포하는 광고적 형벌인 이 처참한 죽음은 우리를 향해 내가 당했어야 하는 죽음이 이토록 비참한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 입니다. 십자가라는 비참한 죽음의 방식으로 죽어야 할 만큼, 십자가는 내가 그런 존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동시에 신이 나를 위해 죽었어야 할 만큼, 하나님이 나를 위해 생명을 버리셨어야 할 만큼 우리의 존재가 그토록 심각한 죄인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십자가의 지적이 싫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정도로 나쁘고 심각한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로 수치스러운 존재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지적보다는 훨씬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방금 말씀드린 것 처럼 내가 그토록 죄인이 아니라고 우리는 스스로 이야기 하거나, 그렇게 믿지 않는다고 주변 사람에게 고백하는 분이 계십니까? 아니오. 저 역시 단 한번도 그렇게 누군가에게 고백하지 않았으며, 실제로 저 역시 저런 방식으로 제 자신을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그러면 제가 여러분에게 저와 여러분이 그 정도로 수치스러운 죄인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단지 설교자로서 설교를 위해 수사적인 문구를 표현한 것 일까요? 그 역시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고 고백하지만, 이는 정확한 우리의 실제입니다.
제가 이러한 모습이 우리의 실제라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이런 겁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복음을 끊임없이 종교적인 것으로 치환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2-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유대인이 표적을 구한다는 의미는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것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세속적인 사람들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적인 것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전혀 종교적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신의 죽음을 즐거워하는 종교가 있을 수 있습니까? 신의 불명예스러움을 자랑하는 종교가 있을 수 있습니까?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 이었습니다. 동시에 헬라인들에게는 당연히 어리석고 모욕적인 것 이었습니다.
이러한 이해 속에서 플레밍 러틀리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 대다수는 일요일 아침에는 유대인이고 그 외의 시간에는 그리스인이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환상적인 경험과 영적 고양을 원한다. 세속적인 사람들은 증거, 논거, 입증, 철학, 과학을 원한다. 놀라운 사실은 이들 중 아무도 십자가에 대해 듣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십자가는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적합한 헌신의 대상이 아니며, 그것에 관한 주장들은 세속적인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극단적이다.’
그의 말은 이런 것 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너무도 거리끼는 것 이기에 교회는 이를 종교적인 것으로 대체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오늘늘 우리는 복음의 이야기를 매우 고상하고 품위 있는 종교적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잘 갖추어진 예배당에 앉아서 멋지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찬양을 하고, 고상하고 품격있는 좋은 설교 한편을 듣고, 잘 다듬어진 기도와 정돈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리고 앞서 바울이 빌립보서 2장 초반부에서 요청했던 것 처럼 교회에서는 좀 겸손한 모습으로 서로를 대하며, 서로에게 양보하고, 서로를 좀 돌보며 수고하는 일이 우리의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즉, 바울이 가장 중요한 이야기로 강조했던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8절의 이야기를 지워버리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마음과 상관 없이 이런 종교적 열심과 행위가 바로 기독교 신앙이라고 여기며 포장하는 겁니다.
더불어 우리는 놀라운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믿으며,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나셨음을 믿으며, 우리의 죄를 위해 그분이 십자가를 지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만에 부활하셨음을 온전히 믿습니다.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을 믿으며, 그분이 온전한 통치자가 된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하지만 이 놀라운 신앙고백을 하나의 종교적 교리로만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이를 믿는것이 기독교 신앙이라고 여기며 포장하는 겁니다. 저는 이러한 우리의 행위를 ‘종교적 마음’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사라진 결과는 우리의 종교적 마음만이 남을 뿐입니다.
이 종교적 마음이 가져오는 비참함은 무엇일까요? 이런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이 땅에 몸을 입고 오심을 믿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온전히 믿는 일은 너무도 쉽고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당장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너무도 힘겨운 일이지 않습니까?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상에서 찾아오는 짜증과 불평의 마음들, 조금이라도 손해를 본 것 같아 괴로운 마음들, 누군가가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 것 같은 고통들, 조금만 불편함이 생겨도 견딜수 없는 마음들을 견디는 것에 비하면 성육신과 부활을 믿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처럼 여겨지지 않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위협하는 무언가가 찾아오는 순간에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 삶에 무슨 의미를 줍니까? 그런것은 일상의 순간 속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처럼 여겨지고 지금 당장의 내 마음이 느끼는 것들이 가장 중요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지점에서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종교적 마음은 결국 종교의 현장을 떠나면 자연스레 헬라인이 되도록 우리를 인도합니다. 교회당을 떠나면 더 이상 복음은 우리의 일상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 안에서 만난 우리는 누가 봐도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를 떠나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순간 십자가의 이야기는 결코 우리의 헌신의 대상이 되지도 않으며,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 바로 이 종교적 마음의 비참함 입니다.

4. 종교적 마음의 핵심- 교만(5; 마 10:38; 16:24)
그렇다면 왜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 종교적 마음으로 살아가게 될까요? 결국 오늘 바울이 말한대로라면 우리가 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빌립보 교회가 지금 마주한 분열과 다툼과 허영의 문제에 대해서 바울이 말하기를 ‘믿음이 없다! 너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이기 때문에 바울은 5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요청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그토록 믿지만 그리스도의 마음을 버리고 종교적 마음에 이끌리는 것 일까요? 앞서 나누었던 것 처럼 그리스도의 마음은 바로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이며, 그 결과는 죽음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따라 자기를 부인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종의 형체로 낮아지셨던 것 처럼, 사람의 모양으로 자기를 낮추셨던 것 처럼, 죽기까지 복종하시며 수치스러운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 처럼 우리가 함께 죽을것을 요구하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10장 38절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예수님은 다시 한번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반드시 져야 할 자기 십자가가 있음을 말해주는 겁니다. 그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죽음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는 것을 주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 죽음의 길에 들어서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나는 참으로 인정받을 만한 사람이며, 괜찮은 사람인데 이런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이 결코 반갑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잘못된 자기 이해, 왜곡된 자기 이해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의 길로 들어서기를 거부하게 만듭니다. 이런 자기 이해는 결국 교만이 빚어낸 거짓된 이해이기 때문입니다. c.s 루이스는 이러한 교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교만은 단순히 무언가를 가지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옆사람보다 더 가져야만 만족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돈 많고 똑똑하고 잘생긴 것을 뽐낸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남보다 더 돈 많고 더 똑똑하고 더 잘생긴 것을 뽐내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고 돈 많고 똑똑하고 잘생겼다면 교만할 거리가 없습니다.
즉, 자기 부인의 죽음을 마주하기 싫은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더 낫다는 인식입니다. 내가 비교하고 있는 다른 누군가보다 훨씬 더 괜찮고 나은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낮아져서 다른 누군가를 섬긴다는 것은 합당해 보이지 않습니다. 내 감정을 요동치게 하는 상대의 잘못으로 인해 내가 피해받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십자가를 지는 것은 합당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제가 참 부족한 사람이라는 고백의 종교적인 겸손의 모양을 취할수는 있지만 상대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내가 먼저 용서의 마음을 구하는 것은 결코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나라고 하는 존재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보다 더 돋보이고 괜찮은 사람으로 평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내가 낮아지는 것은 지는 것 같고, 억울합니다. 그래서 견딜수가 없기에 우리는 공허한 우리 자신을 가득 채우기 위해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존재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애를 써야 하기에 결코 나는 죽을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논리입니다.

5. 내가 죽어서 너를 살려야 한다(9-11; 롬 8:18; 사 45:23)
그러나 그리스도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정반대라는 겁니다. 그리스도는 참 생명이셨고, 자기의 나음과 충만함을 입증하실 필요가 없이 하나님의 본체셨습니다. 온전히 충만한 그 분께서 친히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자기를 낮춤을 넘어 수치스러운 십자가의 길을 스스로 걸어가셨습니다. 그분이 그 길을 가셔야 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끊임없이 자기 부인을 외면하고 상대의 죽음을 강요하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서로를 향해 ‘네가 죽어서 나를 살려야해!’라고 강요하는 우리의 인생을 위해 그리스도는 ‘내가 죽어서 너를 살려야 한다. 나의 생명을 너희를 위해 쏟을 것이며, 너희를 위해 수치를 당하는 것은 결코 절망이 아니다. 내가 너희를 섬길 것이다’고 말씀하시며 친히 수치의 길을 걸어가셨다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끝까지 나의 수치를 포장하고, 덮고, 가리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았던 우리의 진짜 수치를 그분이 모두 짊어지신 겁니다. 내가 당해야 할 수치스러운 죽음을 대신 짊어지시고 그 길을 걸어가신 겁니다. 아무런 죄도 없으시고, 흠도 없으신 당신이 내가 있어야 할 그 자리를 향해 대신 가셨습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를 살리고자 하신 겁니다.
우리는 이 죽음에서 수치가 아닌 희생적 사랑의 아름다움을 보게 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랑하기에 내가 죽어서 당신이 살아야 해’ 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기 죽음과 희생을 버린 사랑은 무엇을 요구합니까? ‘나에게는 더 나은 목표와 꿈이 있다! 그러니 내 꿈과 목표를 위해서 당신이 희생해! 나의 꿈과 목표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나를 잘 섬기고 내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나를 도와!’입니다. 진짜 사랑에는 언제나 자기 희생, 자기 부인, 죽음이 동반됩니다. 죽음 없는 진짜 사랑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그 죽음의 길을 기꺼이 걸어가셨다는 겁니다.
그러나 거북하고 수치스러운 십자가의 길을 가신 그분의 죽음은 수치스럽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9절에서 이어지는 바울의 접속사를 잘 보십시오. 그는 ‘이러므로’라는 접속사를 사용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으로 연결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죽어서 너를 살리기 위해 친히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리스도의 마음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를 온전히 높이셨다는 겁니다. 가장 낮고 천하고 수치스러운 존재로 죽임을 당하셨지만 그를 모든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으로 높이셨습니다. 그 이름은 무엇입니까? 구약에서 하나님께만 칭송되던 그 이름 바로 ‘여호와’라는 이름입니다.
이는 이사야서 45장 23절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인용한 구절입니다.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내 입에서 공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세하리라 하였노라’ 이사야서 45장에서 모든 무릎이 예수 이름 앞에 꿇고, 모든 혀가 맹세하겠다던 그 선언이 이제는 그리스도께 적용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수치스러운 끝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스러운 통치자로 승리하게 되심을 선포하는 것 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의 결론입니다. 그가 겪으셔야 했던 수치와 고통은 영원히 누리게 될 영광스러움에 비하면 아주 잠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장 18절에서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고 말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높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6. 부활의 즐거운 소망(9-11)
그럼에도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를 내어주는 것, 나를 포기하는 것, 자기를 희생하며 상대를 살리는 것은 결국 내가 먼저 죽어야 하는 것인데 이미 내가 그런 수치를 경험하고 죽음을 경험한 뒤에 얻는 영광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라고 질문할 수 있을 겁니다. 결국 이러한 질문은 결국 ‘지금 당장 내가 죽는 희생 없이 그저 영광만을 구할수는 없겠냐’는 질문과도 같습니다.
여기에 대한 성경의 분명한 답은 ‘그럴수 없다’ 입니다. 바울은 9절에서 높이시는 주체, 영광을 주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이 높이시는 방법이 아닌 우리 스스로가 높아지는 방법은 결국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아무리 높아지려 애를 쓸지라도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영광 없는 죽음’ 뿐입니다. 앞서 나눈 것 처럼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닌 종교적 마음이 맺어내는 열매는 오직 ‘영광 없는 죽음’ 뿐 입니다. 그토록 얻고자 했던 자기의 영광은 구할 수 없고,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죽음만이 주어질 것이라는 겁니다.
지난 역사를 보십시오. 십자가의 수치스러움을 지우고, 죽음의 이야기를 지운 복음의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십자가의 수치스러움을 붙들고 영광을 향해가던 이야기에서 콘스탄틴에 의해 로마의 국교로 정해진 이후 십자가의 수치를 지우고 영광만을 붙들었던 결과는 무엇입니까? 지난 140년의 한국 교회사에서 십자가의 수치를 지우고 영광만을 구했던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역사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여러분의 삶에서 십자가가 여러분을 자기 부인이 아닌 이 땅에서의 만족과 풍요로움을 향해 인도했던 지난 자리들의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습니다. 자기 부인 없는 영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기 부인, 죽음을 즐거이 맞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께로 오십시오. 당신이 죽으심으로 나를 살리겠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십시오. 무한한 하나님께서 친히 십자가의 수치를 걸어가셨던 그 이야기를 보십시오. 내가 받아야 할 수치스러운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당신이 있어야 할 하나님과의 교제의 자리에 나를 초청해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십시오. 나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이 나타난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자기 부인의 삶을 향해 기꺼이 발을 딛을 수 있을 겁니다.
동시에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즐거운 소망을 약속하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이 땅에서 맞는 죽음의 문제는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으로 인해 죽음의 길을 가지 못하게 합니다. 다시 젊어질 수 없으며, 다시 평판을 쌓을 수 없으며, 그 순간의 패배감으로 인해 모든 것이 끝날 것 같다는 거짓말이 항상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그러나 9-11절을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히 이전것으로 돌이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부활이 단순히 잃어버린 것을 다시 되찾는 정도의 것이라면 어떻게 그것이 우리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위로가 아니라 그저 손해배상 그 이상도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활은 그것을 넘어선 약속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지 다시 살아남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죽음 너머의 즐거움을 보십시오. 그것은 다시 살아남을 넘어서는 훨씬 영광스러운 것들입니다. 더 나은 소망의 향연입니다. 더 나은 영광입니다. 결국 부활이 약속하는 것은 이 땅에서 잃은 죽음 이상의 것들을 회복하고 돌려주는 더 나은 잔치입니다. 우리는 죽음 너머에서 지금의 몸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더 나은 몸을 받게 될 것 입니다. 이 땅에서는 결코 누릴 수 없던 훨씬 더 영광스러운 생명을 얻게 될 겁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보장해 줄 수 없는 훨씬 더 나은 진짜 미래의 소망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자기 부인은 이 놀라운 영광의 부활을 이 땅에서 맛보는 기회입니다. 우리는 자기 부인이라는 죽음 너머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을 맛보고 그분의 선하심을 맛보게 될 겁니다.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터져나온 하나님의 무한한 영광과 그 선하심을 맛보지 않았습니까? 그 십자가의 넘치는 아름다움을 경험하고 누렸지 않습니까? 이 놀라운 십자가의 영광을 붙잡으십시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때 우리에게 주어질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 너머의 영광스러운 즐거움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7. 적용과 교훈
여러분이 아는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모든 수치를 제거한 고상하고 품위있는 종교적인 이야기 입니까? 애써 복음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고난과 불명예를 제거하고 영광스러운 이야기로 채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이 종교적 이야기는 우리에게 아무런 변화도 줄 수 없을 겁니다. 다시금 돌아가게 될 우리의 일상의 자리에서 죽음 없는 영광만을 갈구하며 그토록 원하던 영광은 없이 공허한 죽음만이 기다릴 것 입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분명하게 기억하십시오. 나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시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그리스도!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심으로 온전히 자기 생명을 내어주신 그리스도! 자신을 죽임으로 나를 살리려 하셨던 그분의 무한한 사랑! 죽음 너머의 더 낫고 영광스러운 소망의 실체를 붙잡으셨던 그리스도! 그분을 온전하게 안다면 우리도 그분과 함께 자기 부인의 즐거움, 죽음의 즐거움을 향해 걷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기억합시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