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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강해](6).순종, 그 거룩한 낭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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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강해](6).순종, 그 거룩한 낭비

빌립보서 2:12-18 / 장경진 전도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4-04-10

말씀내용
1. 바울의 관심(12)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을 것을 요청하며 바울은 성경 전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에 대해서 짧지만 매우 강력하게 전했습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를 살리고자 했던 그리스도의 마음의 아름다움을 바울은 강력하게 드러냈었다면 이제는 그 결과가 되는 빌립보 교인들의 삶의 이야기로 다시금 눈을 돌립니다. 하늘의 영광을 보는것에서 멈추지 않고, 이 복음은 결국 삶의 이야기로 연결되어야 하는 것임을 바울은 명확하게 지적하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12절을 시작하며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를 사용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마음에 마땅한 반응이 무엇이며, 그 마음을 품은 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하는 겁니다. 바울의 관심은 복음에 대한 신학적 지식 전달이 아닌, 그 지식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삶을 요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구원을 이루라(12-13, 렘 32:40-41; 고전 2:3;)
그렇다면 바울이 요청하는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삶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자신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 두렵고 떨림으로 순종할 것을 요청합니다. 원문의 의미를 조금 더 살려서 전달하기 위해 12절과 13절을 제가 의역한 것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의미상 두 문장으로 구분을 하였지만, 사실상 12-13절은 한 문장으로 구성된 긴 글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여러분이 항상 내게 순종하였던 것 처럼 내가 있을 때 뿐 아니라, 내가 없는 지금 더욱 두려움과 떨림으로 여러분의 구원을 성취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 가운데 일하셔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바라게 하시고 그 일을 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바울이 굉장히 빌립보 교회를 신뢰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십니까? 혹여나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고 세상을 떠날지라도 지금까지 자신의 가르침에 순종하였던 것처럼 계속하여 순종할 것이라는 기대감 말입니다.

2.1 옛언약 백성들과는 다른 빌립보 교인들(빌 1:6, 2:12; 신 31:27;)
어쩌면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출애굽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모세의 평가를 보십시오. 빌립보서 2장 12-13절은 자연스레 신명기 31장 27절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31장에서 모세는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율법책을 언약궤 곁에 두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의 반역함과 목이 곧은 것을 아나니 오늘 내가 살아서 너희와 함께 있어도 너희가 여호와를 거역하였거든 하물며 내가 죽은 후의 일이랴’(신31:27)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땠습니까? 출애굽을 경험했지만 하나님을 원망하고 반역하였습니다.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끝없는 불평과 원망 속에서 하나님께 반역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모세는 자신이 떠난 이후 이스라엘의 타락에 대해 심히 걱정하였습니다.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을 그토록 거역하였는데, 하물며 자신이 떠난 이후 과연 그렇지 않겠느냐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빌립보 교회가 처한 상황은 다를까요? 그들은 지금 교회가 갈라지는 분열의 고통에 처해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투옥으로 인해 심히 불안에 처해 있습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한 바울의 심정은 모세와 다른 것일까요? 모세와 같이 빌립보 교회를 향한 답답함과 걱정이 마땅한 것이지 않을까요?
그러나 바울의 반응은 다릅니다. 바울이 없을 때 더 순종할 것을 기대하며 격려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구원을 이루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앞서 바울은 1장 6절에서도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고 분명히 말했던 것 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알기에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의 불성실함과 달리 빌립보 교회가 끝까지 순종할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겁니다.

2.2 참된 경외심 가운데 구원을 이루라(12; 렘 32:40-41;)
이러한 이해는 12절의 ‘구원을 이루라’에 대해서 어떤 오해도 주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구원을 이루라는 표현으로 인해 우리 스스로가 이 구원의 성취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빌립보서 전체 맥락을 살펴보십시오. 이미 바울은 앞서 1장 6절에서 구원의 주체자가 하나님이 되심을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2장에서는 갑자기 우리 스스로가 구원의 주체자가 되라고 이야기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의 이러한 표현은 이미 하나님께서 이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고 여전히 일하고 계시니, 흔들리지 말고 계속하여 믿음으로 하나님을 따르라는 것 입니다. 지금 잠시 교회가 복음의 은혜를 잊고 분열과 아픔 속에 있지만 다시금 그리스도의 마음을 기억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순종의 삶을 살기를 요청하는 겁니다.
바울이 말하는 이 두려움과 떨림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을 바라볼 때, 즉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 속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참된 백성의 마음에 경외심을 주실 것을 말합니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렘 32:40-41) 참된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경외심이 주어집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가 말한대로 이 경외심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에 오직 참된 그리스도인에게만 주어지는 것 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두렵고 떨림, 즉 경외심은 하나님께 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억지로 순종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하나님을 마치 복수심에 가득찬 재판장으로 여깁니다. 따라서 그분께 순종하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은 결국 하나님을 미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패역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없는 삶으로 인도할 것 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두렵고 떨림이라는 이 경외심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품어지는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아들을 내어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거룩한 아버지이심을 알기에 하나님을 닮아가고 싶은 거룩한 열망 속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기뻐하는 삶으로 살아가는 것 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분명한 경외심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 같은 존재를 위해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셨다는 이 복음의 이야기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마음은 무엇입니까? 이 놀라운 소식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우리 스스로 구원의 주체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참된 복음의 소식은 우리의 마음을 경외심으로 가득차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삼위 하나님의 은혜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경배하게 될 것 입니다. 바울은 그런 경외심 가운데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라고 말하는 것 입니다.

2.3 하나님이 일하시기에 우리도 일한다(13)
더불어 바울은 구원을 이루라는 명령에 대해서 덧붙여서 설명합니다. 12-13절은 한 문장이라고 말씀드렸지요? 이 점을 유의해서 13절까지 함께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13절을 함께 살핀다면 ‘구원을 이루라’는 요청은 더욱 하나님의 주도성을 강조하는 가운데 우리의 역할을 말하고 있음을 살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앞서 ‘구원을 이루라’, ‘구원을 성취하라’고 말하였지만 동시에 13절에서 덧붙이기를 이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복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시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마음을 주시고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뜻을 따라서 행한다는 겁니다. 즉, 마음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그 마음에 순종할 힘을 주시는 분도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바울은 명확하게 밝히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바울은 앞서 빌립보 교회를 향해 요청하였던 한 마음을 품는 것, 하나가 되는 것, 자신을 낮춤으로 서로를 용납하는 것, 서로를 향한 참된 사랑을 품는 것을 순종할 것을 요구하는 것 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선이며, 올바른 하나님의 뜻임과 동시에 하나님은 이를 위해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과 힘을 주시기에 기꺼이 순종할 것을 요청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일하시기에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일하심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게서 이 일을 하시기를 기뻐하시며 이 일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우리는 순종할 수 있습니다.

3. 다른 세대로 부름 받은 빌립보 교회(14-16; 출17:3; 민 11:5, 16:41, 21:5; 신 32:5; 단 12:2-3)
이어서 바울은 이러한 순종에 있어서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요구합니다. 다시금 바울은 우리를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로 인도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원망’이라는 단어는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 8번이 사용되는 단어인데, 그 중 7번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후에 보인 반응을 설명하는데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원망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이야기로 바울은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출애굽이라는 놀라운 은혜를 잊고 애굽에서 값없이 생선과 부추와 마늘을 먹은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민11:5). 하나님께서 만나를 날마다 베풀어주셨지만 끝없이 하나님을 원망함으로 심판을 받았던 겁니다. 므리바에서는 물이 없음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며 자신들을 애굽에서 죽게 하기 위해 인도한 것이냐며 모세와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지 않았습니까?(출 17:3, 민 21:5) 이뿐만이 아니지요. 고라의 반역으로 그들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았을 때도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달려들지 않았습니까?(민 16:41)
이들과 같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름에 있어서 원망과 시비로 하지 말것을 바울은 명령하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들은 이스라엘과 전혀 다른 세대라는 겁니다. 15절 말씀은 다시금 빌립보 교회를 신명기 32장 5절의 말씀으로 인도합니다. 신명기 32장 5절에서 모세는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로다’라고 앞선 광야 1세대를 평가합니다. 그들은 흠이 있는 존재, 즉 죄악된 성향을 따라 하나님께 거역했으며 그로 인해 뒤틀리고 구부러진 세대로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회는 다라다는 겁니다. 15절에서 빌립보 교회는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겁니다. 신명기의 평가를 완전히 뒤집어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서 바울은 그들을 ‘세상의 빛’으로 정의합니다. 여기서 표현된 세상의 빛은 다니엘서 12장의 성취를 가리키기에 매우 특별합니다. 함께 다니엘서 12장 2-3절을 찾아 봅시다.’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2-3) 이는 마지막 날에 대해서 다니엘이 기록한 것입니다. 그날에 어떤 사랑은 주를 따름으로 영생을 얻을 것이며, 어떤 사람은 영원한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를 따라 영생을 얻은 자들은 12장 3절에서 별처럼 영원토록 빛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이 사건은 마지막 날 부활과 함께 하늘의 처소에서 일어날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사건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 가운데 이미 나타난 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미 그들은 흠 없는 자녀로 빛을 드러내는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바울은 그들에게 말씀을 붙잡을 것을 요청합니다. 16절에서 ‘생명의 말씀을 밝혀’라는 표현은 ‘생명의 말씀을 붙잡아’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 이중적인 의미입니다. 앞서 밝은 빛이 되었기에 말씀을 밝히 보이는 자로 살아갈 것으로도 표현할 수 있음과 동시에 스스로가 말씀을 붙잡는 자로 살아가야 됨을 이중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들이 그렇게 살아감은 바울이 마지막 날 얻게 될 자신의 자랑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의 빌립보의 상황은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분열과 용납없음과 서로를 향한 원망과 시비가 어떻게 자랑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의 시선은 오직 그리스도의 날에 붙잡혀 있는 겁니다. 따라서 자신이 떠날지라도 하나님께서 친히 빌립보 성도들의 삶을 인도하고 그들 안에서 시작한 일을 완성하실 것이라는 분명한 확신이 있는 겁니다. 지금 당장 자신의 눈에 보이는 빌립보 교회는 처량하고 초라해보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일하시기에 빌립보 성도들도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것임을 신뢰하는 겁니다. 아직 부활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날의 시점으로 빌립보 교회를 바라보고 있기에 그는 이들이 이 세대의 빛으로 나타내실 것으로 보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행하실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기에 현재의 부족함을 넘어 빌립보 교회를 자랑거리로 여기고 있음을 고백하는 겁니다.

4. 감정 vs 지식의 싸움(엡 4:32, 5:22-25;)
그러나 문제는 또 다시 일어납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도 머리로는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됨을 위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상대를 생각하면 너무 화가 나고 속상해서 지금은 잠시 그렇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빌립보 교회에게 요청한 대로 한 마음을 품고 연합하는 것, 서로를 사랑하는 것, 다른 이들을 나보다 더 낫게 여기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수많은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일은 제 마음을 너무 상하게 하며, 순종할지라도 전혀 기쁨이 아닌, 율법적으로 순종하는 것이기에 지금은 그렇게 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즉, 지식으로는 순종이 옳음을 알지만 제 감정은 전혀 그렇게 따르지 않는데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 과연 옳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제가 어떤 답을 하기보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답변을 듣는 것이 훨씬 유익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라면 아마 이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답을 했을 겁니다. ‘머리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옳다고 알고 있지만, 감정은 그 지식을 따를 힘이 없다고 말한다면 사실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옳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즉 이는 단순히 성경이 가르치는 인포메이션을 아는 지식일 뿐 참된 지식이 아리나는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불신자들도 인포메이션이라고 할 수 있는 정보로써의 지식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하는 존재이며, 연합하는 삶이며, 기꺼이 자기희생과 자기부인의 삶으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이 결코 참된 지식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정보에 불과할 뿐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하나님의 뜻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아는 것은 결코 참된 지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거지요. 부부싸움이 일어날 때 우리는 지식적으로는 서로를 용서하고 용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에서처럼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가르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듯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그리스도께서 아내를 사랑하듯 사랑해야 한다고 지식은 가르칩니다.(엡 5:22-25) 그러나 우리의 감정은 절대 그렇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상대가 잘못한 것을 더 부풀리고 명확하게 지적해서 내가 이렇게 반응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사실을 상대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상대가 틀렸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꼬집어내고 상대가 인정하게 만들고 반성하게 해야 이 싸움이 끝날 것이라고 우리의 감정은 말합니다. 이런 지식과 감정의 싸움에 성경의 지식들은 우리에게 어떤 힘을 줍니까? 그저 종이에 적힌 하얀 글자 정도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오히려 그 지식들을 알기에 더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지 않습니까? 에드워즈는 그렇다면 그것은 결코 참된 지식이 아니라는 겁니다.

5. 바울이 보여주는 거룩한 낭비(17-18; )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이야기는 우리 안의 이 지식과 감정을 하나로 통합하는 힘을 가져옵니다. 머리로만 알고 있는 정보가 아니라, 우리 안의 감정이 그 지식을 따르고 싶은 열망과 함께 하나가 되며 기꺼이 그 뜻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정말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복음의 이야기에 우리의 마음이 끌리고 그 마음에 기꺼이 순종하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끊임없이 복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겁니다. 더불어 이 복음이 어떻게 자신을 변화시켰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들려줍니다.
17절에서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해 전하는 메세지는 무엇인지를 잘 보십시오. 바울의 빌립보 교회를 향한 그의 사역과 관점은 원망과 시비가 아닙니다. 복음을 믿는 너희가 어찌 그토록 분열되고 서로를 원망하냐며 그들을 원망과 시비로 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믿음의 제물 위에 자신을 전제로 드릴지라도 기뻐할 것을 말합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삶에 대해 바울은 믿음의 제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과 순종이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라는 겁니다. 그들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과 순종이 예배이며, 이 예배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기를 기뻐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여기서 사용된 ‘전제’는 구약 시대의 제사의 일종입니다. 이는 본래 짐승 제사를 드릴 때 마지막 순서로 그 제물 위에 포도주를 쏟아 붓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의 생명을 드려서라도, 자신이 사형을 당할지라도 빌립보 교회가 올바른 교회가 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그의 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의 제사를 완성하기 위해 자신이 전제로 드리는 포도주가 될지라도 그는 그들과 함께 기뻐하겠다는 겁니다.
저는 바울의 마음을 보며 ‘이야말로 낭비이지 않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빌립보 교회는 그리스도가 우리가 하나 되기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보로만 알았을 뿐, 하나됨 보다 원망과 시비로 서로를 대하며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로 흠 많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다툼과 허영으로 서로를 대하고 있던 것이 빌립보 교회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들의 순종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어주기를 주저않는 이런 낭비를 기뻐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바울은 자기를 내어줄지라도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의 제사로 하나님께 드려지기를 소망하고 있다는 겁니다. 사도로 자신이 더 많은 사역을 할 수 있을텐데, 이보다 큰 낭비가 있을까요?

6. 거룩한 낭비자 그리스도!(마 26:39;)
그러나 본문에서 바울보다 더 큰 낭비를 보이신 분이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 아십니까? 바울이 이런 낭비를 기꺼이 할 수 있도록 인도하고 계시는 그분의 이야기를 발견하셨습니까? 바울 안에서도 분명히 지식과 감정의 싸움이 일어났을 겁니다. 교회의 하나됨이라는 분명한 지식을 알지만, 동시에 이런 교회를 위해서 내 생명을 내어주고 싶지 않다는 지식과 감정의 싸움이 바울 안에서 일어나지 않을까요?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보여주는 낭비보다 더 큰 낭비를 경험한 겁니다. 그 엄청난 낭비가 바울의 순종을 이끌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의 삶에서 날마다 이루어지는 원망과 시비의 삶은 흠 있고 어그러진 세대의 삶과 다르지 않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우리를 건져내셨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어그러지지 않고 거스르지 않기에 그들로부터 우리를 건지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참으로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의 삶이며, 날마다 원망과 시비로 가득한 삶이지 않습니까?
심지어는 이런 건짐을 받았지만 끊임없이 성경의 가르침을 따른 지식을 따라 살기 보다는 내 마음이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너무도 쉽게 방종의 자리를 향해 가지 않습니까? 교회의 하나 됨, 연합, 순종해야 하는 이유, 사랑해야 하는 삶 등 우리는 분명한 지식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대로 순종하기 위해 애쓰지 않습니다. 내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는 이유, 내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마음을 따라 그 지식을 따르기를 거부합니다. 말씀과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그저 지루하고 따분할 뿐이기에 마음으로 움직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시비 속에서 일상을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의 제물과 섬김을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서 기꺼이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그분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셔서 주님은 죽음이라는 절망과 고통의 자리 앞에서 고통스러워 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하시며 친히 가셔야 할 순종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 앞에서 참된 지식을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짊어진 십자가의 순종은 이 세상 가장 거룩한 낭비였습니다. 창조주께서 피조물을 위해 죽으셨으며, 망가진 하나님의 형상을 위해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이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끊임없이 날마다 패역하게 살아갈 우리의 삶을 아심에도 가장 거룩하고 존귀하신 그분이 죽으셨던 것입니다. 친히 자신을 제사의 완성으로 드리시며 이를 기쁨으로 가셨다는 겁니다.
이 거룩한 낭비의 이야기 앞에서 바울은 자신의 삶을 드리는 것이 결코 낭비가 아님을 깨달았던 겁니다. 그의 안에서 지식과 감정의 통합이라는 참된 지식으로 자신의 삶을 기꺼이 빌립보 교회의 순종을 위해 내어주기를 기뻐할 수 있던 겁니다. 거룩한 낭비의 본이신 그리스도의 이야기 앞에서 바울 자신도 거룩한 낭비라는 순종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기뻐할 수 있던 겁니다. 그리고 이 기쁨의 자리로 함께 나와서 자신과 함께 기뻐하기를 빌립보 교회를 향해 요청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빌립보서는 외치는 겁니다.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오십시오. 날마다 여러분의 마음을 향해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복음의 이야기를 외치십시오. 그저 벧샬롬교회에 머물며 복음에 대한 지식들만을 아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참된 순종으로 인도하는 그리스도께로 나아오십시오!’ 이 거룩한 낭비, 그리스도의 참된 순종을 기억할 때 우리는 지식에서 머물지 않고 참된 순종의 자리로 인도하는 참된 지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거룩한 낭비 앞에서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7. 아름다운 낭비(라이언 일병 구하기)
마지막으로 한 영화의 이야기를 나누며 설교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1998년에 개봉했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1944년에 있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배경으로 영화사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켰던 명작입니다. 주인공 밀러 대위는 몇차례의 죽음의 위기를 넘기며 임무를 완수하는 군인입니다. 2차 대전이 종전을 향해 가던 중 미 행정부는 라이언의 집안에서 4형제가 전쟁에 참여했고, 3명이 차례로 죽었으며 막내 라이언이 프랑스 전선에 생존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미 세 아들을 잃은 라이언의 어머니를 위해 군은 밀러 대위에게 라이언 일병을 구출할 것을 명령합니다. 그렇게 밀러대위는 8명의 팀을 꾸려 라이언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라이언은 알고 보니 독일군 사이에 고립되어 그를 구하기 위해 여덟명이 목숨을 감수할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과 군의 명령에 밀러 대위와 팀원들은 혼란스러워 합니다. 결국 라이언을 구하기 위해 2명의 병사가 죽고, 그를 찾았지만 라이언은 고구마 백개를 먹은 듯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독일군으로부터 다리를 사수하기 위해 돌아갈 수 없다는 것 이었습니다. 결국 독일군과의 전투에 함께 참여하여 다리를 사수합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주인공 밀러 대위는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그는 라이언에게 잘 살아야 할 것을 당부하며 죽음을 맞이 합니다.
영화는 우리에게 전쟁에 대해서, 그리고 생명의 무게와 가치에 대해서 여러 질문들을 남겨주는 영화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어리석어 보이는 작전의 아름다움과 감동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밀러 대위보다 훨씬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밀러 대위 였기때문입니다. 이 세상 가장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삶이며 라이언보다 훨씬 더 답답하고 비참한 저와 여러분을 구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기꺼이 자신을 제물로 진정한 전제로 자신을 드리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낭비와 같은 일을 하시고 우리에게도 이 낭비와 같은 삶을 함께 살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 하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이보다 아름다운 낭비가 있습니까? 이 놀라운 낭비의 이야기를 날마다 우리 자신에게 들려주십시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의 삶을 이 거룩한 낭비로 드리기를 기뻐합시다. 우리의 하나됨을 위해 내 생명을 포기하며 우리를 전제로 드리는 기쁨의 순종으로 나아갑시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이유들을 수 없이 찾아내고 그 마음들이 우리를 설득한다면 이 거룩한 낭비의 이야기를 여러분 자신에게 계속하여 들려주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의 거룩한 낭비를 기억할 때 하나님의 뜻을 향한 우리의 순종은 결코 낭비가 아닌 가장 큰 기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함께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