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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강해](7).복음이 빚어낸 성품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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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강해](7).복음이 빚어낸 성품의 아름다움

빌립보서 2:19-30 / 장경진 전도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4-04-17

말씀내용
1. 가장 아름다운 전환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엄청난 신학적 가르침과 이에 합당한 삶의 이야기까지 보여주며 자신의 삶을 낭비하고자 하는 결심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바울은 또 다른 전환을 보여주며 자신의 여행계획과 동역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앞선 2장 초반부 부터 18절까지 이어지는 신학적 논리와 삶의 적용이라고 하는 점의 연결성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왜 자신의 동역자에 대한 이야기로 전환하고 있을까요? 이러한 그의 논지는 대체 무엇일까요? 한편으로는 전혀 연결성이 없어 보이고, 앞선 내용들과는 대조적으로 보여지는 이야기 처럼 느껴집니다. 무한하고 광대한 복음의 이야기에서 갑작스레 여행 계획과 병든 이야기와 같은 지극히 일상적인 삶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기서 나타나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바울이 보여주는 이 전환은 참으로 ‘아름다운 전환’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전까지 바울이 가르치고 전했던 영광스러운 십자가의 이야기가 이제는 실제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이야기로 전환되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아름다운 전환이 세상에 있을까요? 복음의 이야기가 단순히 하늘의 이야기, 신학적 이야기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로 나타나는 것보다 아름다운 이야기는 없을 겁니다. 우리가 믿는 성육신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성경 속의 글자가 아니라, 실제 우리의 삶에서 진짜 열매로 맺혀지며 성경의 이야기가 진짜로 나타나는 이 전환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아름다운 전환을 보여주고자 한 것 입니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전환 속에서 바울은 여전히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의 참됨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겁니다. 본문을 깊이 살펴보며 이 아름다운 전환이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돌아보며, 이 아름다운 전환을 일으키시는 그리스도를 더욱 갈망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2. 복음이 입증한 성품의 디모데(빌 1:14-16, 27, 2:4, 19-24;)
바울은 19절에서 디모데를 소개하며 속히 빌립보 교회에 보내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를 보냄으로 빌립보 교회의 소식을 들음으로 자신도 평안을 누리고자 했습니다. 여기 19절에서 사용된 ‘안위’라는 단어는 ‘좋은 기분이 되다, 즐거운 마음이 되다’라는 뜻 입니다. 이는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로 보냄으로 그들이 기쁨을 누리기를 원했고, 동시에 그들의 평안이 바울 자신의 평안이 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바울은 앞서 2장 4절에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고 말했던 가르침 처럼 서로를 먼저 돌보며 서로가 평안을 누리는 것이 자신의 평안이 되는 아름다운 관계를 말해줍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누리는 아름다운 관계의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자신의 평안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상대의 평안을 위해 헌신하고 수고하며 상대의 평안 가운데 자신의 기쁨을 누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바울 자신의 삶을 빌립보 교회를 향해 낭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던 것 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디모데는 바로 이러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참된 동역자였습니다. 20절에서 바울은 디모데를 표현하기를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앞서 바울이 1장 27절에서 ‘한 마음’, ‘한 뜻’을 품으라고 요청했던 것처럼 자신과 한 마음과 한 뜻을 품어주는 사람이 바로 디모데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가 보여준 한 마음과 한 뜻은 무엇입니까? 이는 21절에서 보여주는 대로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않은 사람들과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오히려 디모데는 22절에서 말하듯이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고, 연단을 받은 존재였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연단’이라는 단어는 ‘시험을 받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시험을 잘 견뎌 낸 상태’를 뜻합니다. 이에 대해서 라이트푸트라는 신학자는 이를 ‘인정된 성품’으로 설명합니다. 즉, 그는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하며 여러 시험들을 견뎌낸 인정된 성품의 사람이라는 겁니다. 즉, 바울이 관심을 갖고 말하는 성품은 단순히 디모데가 본래 가지고 있는 성품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을 위해 함께 수고함 속에서 입증된 성품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해줍니까? 앞서 바울은 자신의 투옥으로 인해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하며 바울을 괴롭히고자 다투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다고 했습니다(1:14-16). 이들은 복음 마저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 전했습니다. 투기와 분쟁과 이기적인 야망으로 그리스도를 전했던 겁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달랐습니다. 그는 자기의 유익과 야망을 위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위해 수고한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이처럼 복음이 입증한 그의 성품은 로마에서 자신을 위해 수고하는 자들과는 전혀 다른 것 입니다. 그들의 모습과는 참으로 대조되는 성품입니다. 또한 빌립보 교회에서 다툼과 허영으로 자기만을 돌보는 모습과는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3. 또 다른 복음의 모델 에바브로디도(25-30;)
다시금 바울은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그는 바울에게 빌립보 교회의 소식을 전하고, 바울의 투옥생활을 돕기 위해 빌립보 교회가 파송한 에바브로디도 입니다(4:18). 그러나 바울은 그런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 교회로 돌려 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부터 로마까지 먼 길을 오며 생명에 위협이 될 만큼 심한 병을 앓았던 듯 합니다. 그러나 그의 깊은 걱정은 자신의 질병이 아니라, 자신의 질병으로 인하여 빌립보 교회가 심히 근심하게 되었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런 에바브로디도를 보며 바울 역시 자신이 투옥중임에도 에바브로디도의 안위를 걱정하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비를 베푸셨음을 보며 자신의 근심을 면하셨다고 말합니다(27).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투옥을 돕기 위해 온 에바브로디도를 다시 빌립보로 보내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에바브로디도와 빌립보 교회의 기쁨일 것이며 자신의 근심을 더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바울은 그를 교회가 기쁨으로 맞아들이고 존귀하게 여겨주기를 부탁합니다. 왜냐하면 30절에서 말하기를 에바브로디도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고, 빌립보 교회를 대표하여 바울을 섬기는 일에 목숨을 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에바브로디도의 모습은 앞서 2장 5-11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종의 형체로 오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며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고 우리를 살리신 그리스도의 이야기 말입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설명하며 그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임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4. 왜 바울은 성품을 전하고 있는가?
디모데의 아름다운 모습과 에바브로디도의 생명을 돌보지 않는 이 헌신을 돌아보며 계속되는 제 질문은 ‘왜 바울은 이처럼 성품에 집중하고 있는가?’ 입니다. 계속하여 말씀 드린 것 처럼 빌립보 교회는 현재 아픔과 불안 속에서 분열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를 돕기 위해서라면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가 가진 좋은 리더십과 그들의 출중한 능력을 강조하며 그들을 안심시키고 기대하도록 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지 않습니까? 빌립보 교회가 처한 문제와 어려움과 디모데의 능력 혹은 에바브로디도가 가진 은사를 결부시키며 그들이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힘을 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실용적이고 합리적이지 않습니까?
이처럼 정말 만약에, 만에 하나 벧샬롬교회가 빌립보 교회와 같이 분열과 아픔 속에 있는 상황 속에서 목회자를 청빙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여러분은 어떤 부분을 점검하고 검증하시길 원하십니까? 당연히 그의 리더십과 사역적 탁월함에 집중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전혀 그런 방식의 소개에 집중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가 지니고 있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며 그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자신보다 복음의 일을 위해 힘 썼으며, 자신을 돌보기 보다 다른 이들의 유익과 기쁨을 위해 수고하는 자인지 말입니다.
물론 그렇다는 것이 결코 앞서 말씀드린 내용들이 필요 없다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보다도 훨씬 중요한 것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마음이 없이도 얼마든지 이런 탁월한 리더십과 탁월한 사역을 이루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코 사역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바울은 지금 빌립보 교회 전체를 향해서 자기보다 남을 돌보는 일의 아름다움, 자기 생명을 넘어 다른 이의 유익을 구하는 일의 아름다움의 모델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전하며 그렇게 살아갈 것을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닌 모델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제시하고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마음은 우리 모두가 반드시 지녀야 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참된 신자에게 반드시 주어지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마음이 없이 우리는 변화될 수 없으며, 자기 중심성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이 없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으십니까? ‘나를 위해 존재하는 당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당신을 위해 존재하는 나’의 마음 말입니다. 바울은 지금 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닌자가 맺는 열매가 바로 그리스도의 성품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해주는 것 입니다.

5. 공동체와 연결된 그리스도의 성품(22, 29; 요 10:27; 엡 5:25;)
동시에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요소는 이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성품은 단순히 성품이 좋은 한 사람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 연결된다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단순히 개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소속된다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0장 27절에서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양은 주께로 속하였음을 보여주며 동시에 함께 무리를 형성합니다. 따라서 그 음성을 듣고 따르게 된다면 자연스레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 ‘그들’이 되어 서로를 향해 나아가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자신이 저와 여러분 한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에베소서 5장 25절에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목자의 음성을 듣는 참된 양은 그리스도에게 나아가 그리스도에게 속하며 동시에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는 다른 양들과 함께 주님이 아는 ‘그들’이 됩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교회된 자들을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성품은 단순히 개인으로써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 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홀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잘 속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저 나 혼자 예수를 잘 믿고, 매주 예배에 참석해서 말씀을 듣고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것은 교회됨을 누리는 것이 아닌, 그저 하나의 종교생활을 잘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더 나아가 바울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의 삶은 결코 자기 홀로 예수를 믿고 홀로 거룩한 사람이 되고 홀로 자기의 문제만을 돌아보며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그리스도의 성품은 오히려 정반대의 것이지 않습니까? 자기 일을 구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21). 자기가 병들어 죽게 되었지만, 자신을 걱정하는 교회를 생각하며 근심하는 것이었습니다(26). 고향이 너무 그립고 돌아가고 싶지만, 교회의 뜻을 전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다른 이를 섬기는 삶이었습니다(30). 그리스도의 마음이 맺는 그리스도의 성품은 결코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여 자기 신앙의 성장에만 열심을 내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자기를 넘어 공동체를 돌아보며 그 속에서 맺어지는 열매라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22절에서 디모데의 연단을 설명하며 ‘인정된 성품’이라는 뜻을 담아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그가 받은 연단은 단순히 개인의 신앙적 성장과 열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받은 연단이었고 이를 모두가 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로마에서 바울을 괴롭게하고자 했던 많은 무리의 열심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디모데의 연단에는 결코 자기를 위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29절에서 에바브로디도를 맞는 교회를 향해 ‘존귀히 여기라’고 말합니다. 이는 단순히 그를 존중해주고 격려해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에바브로디도가 깊은 향수병과 죽음의 질병 가운데서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고 교회의 뜻을 따라 바울을 섬기고자 했던 것 처럼 교회도 그의 고통을 돌아보며 그를 진정으로 돌봄으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품은 교회가 되라는 것 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는것은 결코 나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고, 신앙이 깊어지고, 더 기도하고, 더 말씀을 잘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에 대해서 저명한 신학자인 데이비드 폴리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화되어 가는 과정은 이런 것이다. 단순히 더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하고, 그들의 고통과 어려움에 진심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삶을 더 깊이 이해하고, 그들을 돕고자 하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다’
데이비드 폴리슨이 하고 싶은 말은 무엇입니까? 결국 참된 성화, 그리스도의 성품은 결코 우리 자신에게만 갇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는 반드시 공동체와 연결되며 서로를 위해 자기를 내어주는 관계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6. 공동체 안의 개인주의
그러나 우리에게는 서로를 위해 나를 희생할만한 실력이 없습니다. 공동체의 중요성을 알고 그 속에 속하기를 원하며 나를 내어주는 삶을 열망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이 삶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없다는 것 입니다.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와 같이 자기 자신을 서로를 위해 온전히 내어주는 삶이기 보다는 서로를 소비하며 나의 필요를 채우는 공동체가 필요할 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죄된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이 죄된 본성은 결국 공동체 안에서도 나 자신을 추구하고 갈망하게 만들며, 나를 위한 공동체를 정의합니다. 왜냐하면 죄는 언제나 이 방향을 뒤집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위한 내가 아니라, 나를 위한 당신으로 바꾸며, 공동체를 위한 내가 아니라 나를 위한 공동체로 바꾸는 것이 바로 죄의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특성 아래서 우리는 헌신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단순히 교회를 위한 열심과 헌신이 아니라 서로를 위해 헌신하기를 두려워하게 된다는 것 입니다. 오늘날 사회에서 왜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기피합니까? 사랑이라는 아름다움은 누리고 싶지만, 서로를 구속하며 서로에게 요구되는 헌신은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혼이 점점 보편화됨을 넘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게 된 것에는 이런 헌신을 꺼리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지 않습니까? 오늘날 우리가 찾고 구하는 관계의 모습이 바로 이런 관계로 형성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서로에게 요구하는 자기 이익이 유지될 때에만 비로소 관계는 유지가 가능합니다. 조금이라도 자기의 이익을 빼앗거나 불편함을 주게 되면 그 관계는 곧 깨어지게 됩니다.
더불어 이러한 관계는 오늘 교회 안에서도 헌신 없는 사랑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사랑이라는 개념에서 서로를 향한 헌신의 관계가 사라질 때 겉으로는 공동체로 존재하지만, 그 안은 개인주의의 비극적인 현실로 머물게 되기 때문입니다. 헌신 없는 사랑이 요구하는 관계는 그저 아무도 내 삶을 책임지지 않을 뿐더러, 나 역시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나만의 유익을 위해 예배에 참여하고 코이노니아에서 좋은 이야기를 나누고 내 마음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에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른 지체에 대한 깊은 책임감을 갖지 않습니다. 혹여나 교회 안에서 조금이라도 내 안전을 위협하는 관계가 생길 때 자연스레 교회를 떠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깊이 결속된 것이 없기에 언제든 마음 편하게 떠날 수 있는 겁니다. 마치 물건을 반품 하듯이 교회를 반품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결코 인격적인 행위가 아니며 성경이 가르치는 공동체의 모습이 아닙니다. 서로에게 요구하는 것도 없기에 서로에게 주는 것도 없는 그저 자기의 필요에 따른 공동체가 될 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정말 위험한 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너무도 성숙한 그리스도인처럼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좋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지닌 사람처럼 우리를 포장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다른 형제 자매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을 뿐더러, 성실하게 늘 모임 가운데 있으며, 어느 누구에게도 싫은 모습으로 기억되지 않습니다. 깊은 용납과 관용과 사랑의 사람처럼 보이도록 포장될 수 있다는 겁니다. 적절한 영적 거리두기가 이루어질 때 교회가 안전하게 보입니다. 아니, 교회가 안전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래야 내가 적당히 속해서 살아갈 수 있고, 헌신 없이 적당한 종교생활의 유지가 가능한 것이지요.

7. 하나님과의 거리두기로 인한 결과-개인주의(막 10:17-22)
이런 종교생활의 열매는 바로 하나님과의 거리두기로 인해 생긴 결과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와 적당한 거리 가운데 나를 지키며 살아가고 싶은 이 열망, 적당한 헌신 속에서 내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고 싶은 열망은 결국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희미해졌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마음이 맺은 열매는 결코 그런 자기 중심성 가운데 살아가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기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서로를 돌보는 사랑으로 이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이런 공동체 속에 속한 개인주의적인 모습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희미해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따라 살기보다 우리 자신의 마음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거기에는 어떤 희생도 헌신도 수고도 없이 맺어지는 거짓된 아름다움으로 우리 자신을 꾸미는 자기 포장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그렇지 않습니까? 그는 예수님께 나아와서 자신이 모든 계명을 지켰다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시며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를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부자 청년은 슬픈 기색으로 돌아갔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자기 자신의 희생도 헌신도 수고도 없이 그저 좋은 종교적 아름다움으로 포장하고 싶었던 마음이 드러날 뿐이었습니다. 스스로가 계명을 다 지켰다고 말했지만 정작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종교적인 열심으로만 채워졌던 삶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옆의 형제들을 향해 내 삶을 내어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하나님과의 거리두기로 인한 결과라는 겁니다. 우리가 형제들의 삶을 향해 나를 내어줄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닌 우리의 마음을 따라 살아간다는 증거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동시에 바울은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의 결과는 자기의 유익을 넘어, 자기의 목숨을 돌보기를 넘어 형제를 위해 내어주는 수고와 헌신과 희생적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빌립보 교회가 품어야 할 그리스도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8.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 만들어낸 성품(요 17:23; 골 3:10; 고후 3:18;)
다시금 첫 질문으로 돌아와 본문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왜 바울은 갑자기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묘사를 꺼내며 신학적 지식과 자기 고백을 넘어 자신의 계획을 말하는 것 일까요? 그리고 왜 바울은 이 두사람을 묘사하며 그들의 능력이 아닌 성품에 집중하고 있는 것 일까요? 이는 단순히 그들의 타고난 성품이 좋았다거나, 성숙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겁니다.
바울은 이 두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었던 겁니다. 그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두 사람의 아름다운 성품을 빚어낸 그리스도는 대체 얼마나 아름답고 경이로운 분이신지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 아름다움을 볼 때 참으로 변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열심과 결단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진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경험할 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도록 변화되기 때문에 바울은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는 겁니다.
디모데가 자기 일을 구하지 않고,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했던 모습. 바울이 옥에 갇혀 절망 속에 있음에도 그의 곁에서 함께 그를 돌봐주고 있는 모습.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의 필요를 돕기 위해 향수병에도 불구하고 바울에게 나아온 모습. 죽을 병에 걸려 죽을 뻔 했음에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고 바울을 섬기고자 했던 그 모습. 이 모든 이야기의 근원지는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지배 아래서 나의 유익만을 구하는 비참한 절망의 감옥에 갇힌 삶인 저와 여러분을 위해 그리스도는 자기 일을 구하지 않고 우리와 같이 되심으로 우리를 돌보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자기 목숨을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하셨습니다. 삼위 하나님과의 무한한 관계 속에서 누리는 즐거움, 에바브로디도가 느꼈던 깊은 향수병보다도 훨씬 깊은 갈망 가운데 그분은 십자가에서 하나님께로 완전히 버림을 받는 자리까지 가셔야 했습니다. 이 놀라운 복음의 이야기가 바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라는 아름다운 존재를 빚어냈으며, 이 복음은 실제로 우리의 삶을 그렇게 바꿀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바울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입증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이 복음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여러분 자신이 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자가 되어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을 입증하는 자로 살아갈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에게는 이 아름다운 전환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머리로 아는 복음의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 여러분의 성품을 빚어내는 복음의 아름다운 전환이 일어나고 계십니까? 그리스도께로 오십시오. 그리스도의 무한한 그 아름다움을 마음 깊이 누리십시오. 우리를 창조하신자의 아름다운 형상을 십자가에서 볼 때 우리는 그 형상을 좇아 새롭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골 3:10).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무한한 영광을 보는 것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고후 3:18). 이 무한한 영광을 바라볼 때 우리는 나 자신의 희생과 수고와 헌신 가운데 형제를 위해 나를 내어주는 거룩한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 마음을 깊이 누림으로 여러분의 형제들의 삶을 향하여 한걸음씩 함께 나아가십시오. 오직 복음이 이끄는 형제 사랑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마십시오. 그 자리는 우리의 생명을 잃는 자리가 아니라, 여러분에게 진짜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참으로 자기를 돌보지 않고 서로를 위해 희생과 수고와 헌신할 수 있는 복음 중심적 공동체가 되어질 때 세상은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의 수준이 바로 세상이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주된 통로가 될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요17:23). 함께 그런 꿈을 꾸며 우리 자신이, 그리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시다. 함께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