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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108). 용사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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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강해 - (108). 용사의 노래

시편 108:1-13, 시편 127:1-2, 이사야 63:1-4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4-04-24

말씀내용
시편 108편은 요즘 같으면 시비거리가 될 소지가 많은 시편입니다. 왜냐하면 1-5절은 시편 57:7-11에서, 6-13절은 시편 60:5-12에서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현대의 표절의 잣대로 재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시편 57편과 60편은 모두 다윗의 시라고 되어 있고, 두 시편이 모두 다윗의 인생에서 특별한 시간에 쓰여진 시들입니다. 57편은 사울에게 쫓겨 굴로 피신하여 쓴 시이고, 60편은 전쟁 중에 쓴 시입니다. 60편이 비록 전쟁 중에서 상당한 승리를 거두면서 쓴 시라고 할지라도, 두 상황은 모두 스트레스를 크게 받는 상황에서 쓴 시입니다. 108편의 표제에는 [다윗의 찬송 시]라고 되어 있지만, 이 두 시편을 하나로 결합한 사람은 다윗은 아닐 것입니다. 108편은 아마도 이스라엘의 후대 역사의 위기 속에서 누군가가 이 새로운 상황에 맞게 두 시편을 해석하고 하나로 묶어 찬송하고 기도하고자 했던 시도로 보입니다. 이렇게 108편은 하나의 새로운 시편으로 탄생했습니다. 이 시편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모든 시대, 모든 상황에 적합하게 하나님의 백성에게 공동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새롭게 들려집니다.
이 시편을 결합하여 사용한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57편과 60편이 쓰여졌던 상황과 완전히 무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57편과 60편이 둘 다 상당한 스트레스의 상황에서 시작하지만, 모두 믿음의 힘찬 고백으로 마친다는 점을 생각하면, 108편이 사용된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짐작됩니다. 분명한 것은 이 시편은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무찌르시고 자기 백성을 향한 신실한 사랑으로 승리를 주실 것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108편은 전반부(1-6절)에서 대적들이 멸망당하고 하나님이 높이 들리실 것을 기대하면서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과 진실에 대한 승리의 노래를 부르기로 작정한 시인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7-9절에서 하나님께서 주실 승리에 대한 약속을 상기하고, 끝으로 10-13절은 그 약속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1. 찬송하기로 결심하다 (1-6; 57:7-11; 60:5-12)
먼저 1-6절을 먼저 살펴보지요. 1절은 시인의 결심으로 시작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찬양하겠다는 결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걸 결심까지 해야 하나?” 물을 수 있습니다. “네, 결심해야 합니다!” 이것이 시인의 대답이고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거나 마음이 동할 때만 하나님을 찬송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모든 상황에서 우리의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이 말은 힘있는 자의 억지이고 강압으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그렇게 크신 분이시고 우리 지혜로 측량할 수 없는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마음을 정했다는 것은 그의 믿음의 확고함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단지 의지적 결심이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의 의지를 이렇게 움직입니다. 이 결심은 믿음이 없이도 쉽게 할 수 있는 결심이 아닙니다. 시인의 결심은 어떤 상황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뢰를 방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의 마음은 갈피를 잡을 수 없이 흔들리곤 합니다. 그러나 시인이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라고 할 때, 그 마음이 더 이상 전과 같이 흔들리거나 떨리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안정됨(stability)은 성숙한 믿음의 증거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말을 듣고, “내 마음은 안정됨 보다는 흔들림이 더 많은데”라고 생각하며 낙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일생 흔들림을 경험하지만 그렇게 조금씩 성장해 갑니다. 흔들림이 없다면, ‘마음을 정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시인이 마음을 정한다고 하는 것은 그의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이고, 하지만 마음 가는 대로 허용하지 않고 마음을 정하여 하나님을 찬송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시편 57:8에는 “내 영광아 깰지어다”라는 말이 있는데 2절에서는 그것을 생략하고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만 인용했습니다. 단지 악기만 동원한다고 해서 찬송이 되는 것이 아니기에, 다윗은 자신의 존재, 가장 깊은 근원을 향해 “내 영광아 깰지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새벽을 깨우리로다”라는 말은 새벽이 오기까지 밤을 지새우며 하나님을 찬송하려는 시인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시인의 의지는 자신의 경계를 넘어섭니다.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3).” 우리의 예배와 찬양에 만족하는 경향이 있는 우리가 시편의 이런 표현들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열광적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현장에서도, “아, 우리가 정말 찬양의 예배를 열정적으로 잘 드렸다”고 만족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이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온 세상의 모든 민족, 모든 사람으로부터 경배를 받으시기 합당하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크심을 아는 만큼,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그 하나님을 이웃들과 만민들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시인이 노래하는 초점은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입니다. 인자하심(헤세드 חֶ֫סֶד)과 진실(에메트 אֱמֶת)은 종종 짝을 이루어 나타나는 하나님의 대표적 속성입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성육신을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표현했는데(요 1:17b) 인자하심과 진실과 같은 말입니다. 처음에 다윗이 이 시로 찬양을 했을 때, 그가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보다 높으심과 진실이 궁창에 이를 만큼, 경험하고 느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일 그가 1절에서 마음에 정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좀 더 쉽게 그랬다고 말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충분히 느끼지 못했더라도 이 찬송은 거짓이나 위선이 아닙니다. 전인적으로 하나님을 높이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습니까? 찬송가 304장 가사를 생각해보지요.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 한 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 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여러분은 언제나 이 가사를 느끼고 감격하면서 부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위선적인 찬송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주님의 사랑은 이런 것입니다. 맞습니다!”라고 하면서 우리는 찬송을 부릅니다. 그리고 그런 감격을 주시기를 구합니다. 저는 이 시편이 우리에게 이점을 가르친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따라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5절은 온 땅 위에서 하나님이 높임을 받으시기를 바라는 갈망을 더 많이 드러냅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땅에서 높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5).” 사실, 5절에서 시편 57:7-11에 대한 인용이 마치고 6절부터는 60:5-12의 인용이 시작되지만, 108편을 편집한 사람은 절묘하게 5절과 6절을 연결하면서 두 시편을 결합합니다. 6절을 보지요.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6).” 이것은 간구인데, 하나님의 약속을 담은 간구입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건지신다”는 약속입니다. 여기서 ‘사랑하시는 자’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8번 등장하는데, 반드시 남녀의 성적 관계는 아닐지라도 대단히 친밀한 동반자적 사랑의 관계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위험에 처한 아내를 돌보지 않을 정상적 남편이 없듯이, 그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은 이 시편에 의하면, 구원에 대해 감사하고 노래와 찬양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들입니다. 시인은 이런 하나님을 찬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2. 승리의 약속 (7-9)
이어지는 7-9절은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의 선언과 약속을 상기하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6절의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이 선언은 하나님은 세겜, 숙곳, 길르앗, 므낫세, 에브라임, 유다, 에돔, 블레셋 위에 계시는 크고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확실한 약속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7절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소에서 직접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기뻐하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측량하리라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투구요 유다는 나의 규이며 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내 신발을 벗어 던질지며 블레셋 위에서 내가 외치리라(7b-9).” 모든 땅을 발 아래 정복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세겜과 숙곳은 요단강을 중심으로 서편과 동편에 있는 이스라엘의 영토이고 하나님이 주신 기업입니다. 요단 강 서편과 동편의 하나님의 소유된 기업을 아무도 건드릴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나누고..측량하리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당신의 주권대로 땅을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길르앗은 요단 동편 땅이고 므낫세 지파의 절반과 갓과 므낫세 지차가 얻은 지역입니다. 므낫세 반 지파와 나머지 지파들은 요단 서편에서 기업을 받았습니다. 길르앗과 므낫세도 세겜과 숙곳 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주신 기업, 요단 동편과 서편을 포함하는 모든 땅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에브라임은 훗날 북왕국 이스라엘의 우두머리가 된 지파입니다. 유다는 남왕국을 대표했고 다윗의 지파이며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약속하신 지파입니다. 에브라임을 머리의 투구라고 하심은 신적 능력으로 북쪽의 공격을 방어하시겠다는 의미이고, 유다를 규라고 하심은 당신의 왕권이 유다를 통해 이어질 것을 확인해주시는 말씀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다윗이 아니라) 온 땅의 주인이시므로 아무도 건드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이 지역을 넘어 모압, 에돔, 블레셋으로 확장됩니다. 이 표현들은, 이들 나라들이 모두 하나님의 발 아래 복종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모압이 목욕통이라는 표현은 발을 씻는 통-대야를 가지고 오는 종으로 모압을 묘사한 것입니다. 에돔에는 내 신발을 벗어 던진다는 표현은 전투에서 돌아온 용사가 종에게 신발을 벗어 던져 씻으라고 하는 그림을 보여줍니다. ‘블레셋 위에서 내가 외치리라’는 표현은 블레셋을 정복한 뒤에 승리를 외친다는 뜻일 겁니다. 결국 7-9절은 하나님께서 주실 승리에 대한 확신을 표명하는 내용입니다.
시인은 지금 당장 그 승리가 완전히 자신에게, 그리고 이스라엘 공동체에 주어지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그 승리의 날을 상상 속에서 그려봅니다. 이것이 신자의 삶에서 왜 중요한지는 마지막에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3.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다 (10-13; 삼상 17:47; 시 127:1-2)
108편의 마지막 부분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간구입니다(10-13). 승리의 약속을 확신하는 시인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10절을 보지요.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읍으로 인도해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으로 인도할꼬(10).” 견고한 성읍은 에돔이 지닌 산악 지형에 만들어 놓은 견고한 요새를 가리킵니다. 상징적으로는 빗장을 걸어 잠근 채 하나님께 저항하는 모든 요새로 확대됩니다. 10절은 전쟁이 여호와께 속한 것을 아는 사람의 질문입니다(삼상 17;47). 11절에서 시인은 과거 역사 속에서의 패배를 기억합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의 군대들과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11).” 그것은 바벨론에게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성전이 파괴된 사건일지도 모릅니다. 그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셨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군대와 함께 싸워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12절은 하나님만이 참된 도움이 된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외에 어떤 사람의 힘도 그들에게는 참된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12).”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이 직설적 기도는 하나님 없이 승리를 얻을 수 없으며, 사람을 의지하는 일이 얼마나 헛된지를 말합니다.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는 “대적을 치는 돕는 자로 우리에게 오소서”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돕는 자(에즈라 עֶזְרָה)’라는 말은 ‘돕다, 자유롭게 하다, 도우러 오다’를 의미하는 동사 ‘아자르’에서 온 말입니다. 이 단어는 창세기 2:18에서 ‘돕는 (자) 배필’이라고 할 때 ‘돕는 자(에제르 עֵ֫זֶר)’와 기본형이 같습니다. 에제르는 구약에 65회 등장하고, 대부분 군사적 상황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웅장한 도움을 가리킵니다(출 18:4; 신 33:26; 시 33:20). 돕는 자(에제르)는 강한 존재이고, 이 도움이 없으면 사람은 보호받을 수 없고 모든 불안한 상황 속에서 취약함을 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시편 127편에서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편 127:1-2).”
끝으로 13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 여기에는 하나님과 사람의 최상의 협력이 묘사됩니다. 백성(우리)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향해 찬양을 부르고 음악을 만들어 감사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일이 포함됩니다(1,3,5).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돕는 자로 오셔서 우리를 압제하는 대적들을 밟으시고 그들 위에서 기뻐하면서 측량하며 외치실 것입니다(7,9).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시간에 당신의 자리에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4. 교훈과 적용 (엡 6:12; 사 63:1-4)
구약성경에서 전쟁을 배경으로 본문을 읽을 때, 우리는 우선적으로 우리의 영적 전쟁에 적용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대는 모든 상황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은 하나님을 높이고 찬송하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로 결심하고 예배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노래하고 마음을 다해 찬양하기로 마음을 정하는 일입니다. 마음이 산란해질 때 하나님을 예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예배와 기도를 포함한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포기하고 싶어 집니다. 그러나 이 때 마음을 정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하기로 결심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흔들리는 주관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이 처한 모든 상황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또렷하게 보기 시작하는 일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리셨다고 생각할 만한 일들을 겪었습니다. 그중 가장 충격적인 일은 유다의 멸망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입니다. 그로부터 약 50년이 지나, 주전 538년 바벨론으로 잡혀간 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그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헤세드(인자하심)에 기인한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귀환이 분수에 넘치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선물이었습니다. 그들이 노력해서 얻은 결과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같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버린 것 같은 경험을 하지만, 결국 우리는 그 비통한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의식을 하든지 하지 못하든지, 신자로서 날마다 영적 전투 속에서 살아갑니다. 신자에게 순전히 육적이기만 한 전투는 없습니다. 우리의 전투는 혈과 육을 상대하는 싸움이 아니고, 악의 영을 상대하는 싸움입니다(엡 6:12). 여기서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나 사람의 도움은 헛된 일일 뿐입니다. 유효한 도움은 오직 하나님 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피투성이가 된 한 거룩한 용사가 에돔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행진하는 모습을 환상 속에서 보았습니다. “에돔에서 오는 이 누구며 붉은 옷을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이 누구냐 그의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이가 누구냐 그는 나이니 공의를 말하는 이요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이니라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틀을 밟는 자 같으냐 만민 가운데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무리를 밟았고 분함으로 말미암아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가 구속할 해가 왔으나(이사야 63:1-4).” 이사야는 악한 세상의 적대적 민족을 정복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시는 거룩한 용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 것입니다. 비록 그 최후 승리의 날은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았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삶의 여정에는 고난과 패배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사야가 승리하고 돌아오시는 그 거룩한 용사를 주목했듯이, 그리고 밧모 섬의 요한이 최후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바라보았듯이, 그리고 시인이 7-9절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대적을 굴복시키시고 기뻐하시고 땅을 분배해주시는 모습을 그려보았듯이, 그날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살아가는 고난과 패배만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에 주어질 영광과 승리와 기쁨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를 위해 싸우시고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거룩한 용사,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영광의 날, 기쁨으로 찬송할 날을 기다릴 때, 지금 패배와 고난 속에서도 우리의 마음은 뜨거워지고 입술은 열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을 바라보고 그 날의 영광과 기쁨을 생각하십시오. 우리를 위해 싸워 주시는 우리를 돕는 자가 되신 그 용사, 그리스도께서 기뻐 외치며 부르시는 노래를 들으십시오.